주수보에게 안겨있는 찰떡이를 보고 다들 삼둥이를 안아보고 싶다고 아우성이었다. 사람들은 삼둥이들을 안기 위해 줄을 섰고, 유모 상궁이 옆에서 사람들에게 아이를 안는 방법을 설명하며 차근차근 한 명씩 안게 해주었다. 사실 찰떡이가 낯선 이의 얼굴만 보면 우는 예민한 성격인데,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지 안기는 사람마다 방긋방긋 웃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르륵 녹였다. 예친왕(睿親王)을 거쳐 안왕도 찰떡이를 품에 안게 됐다. 안왕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찰떡이를 보자 예친왕이 안왕에게 “안기 싫으면 본왕이 좀 더 안아주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안왕에게 시선이 꽂혔다. 안왕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이라도 하듯 찰떡이를 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우문호는 미간을 찌푸리고 안왕을 바라보았다.사람이 많으니 안왕이 찰떡이를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우문호 입장에서는 찰떡이가 안왕의 품에 안기는 게 내키지는 않았다.“으앙!” 안왕의 품에 안기자마자 찰떡이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사람들이 일제히 찰떡이를 보았다. 지금까지 방긋방긋 웃던 찰떡이가 왜 저렇게 우는지 모두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찰떡이가 울다 못해 비명을 지르자 사람들은 안왕이 찰떡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고, 안왕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우문호는 발버둥 치는 찰떡이를 뺏다시피 안았다. 그가 아버지라는 것을 아는 듯 찰떡이는 울음을 멈추고 평정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찰떡이가 아버지의 체면을 살려주는 효자라며 칭찬을 했다. 안왕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안왕을 벌레보듯 보며 아이가 저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우문호는 찰떡이의 머리카락을 쓸다 문득 원경릉의 말이 생각났다. ‘삼둥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특별해.’우문호는 찰떡이가 위험을 감지하고 운 게 아닌가 의심했다.*잠시 후, 초왕부에 목여태감이 왔다. 그는 태자 책봉을
아이들을 보고 긴장이 풀린 원경릉이 우문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원경릉이 걱정할까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는 우문호도 마음이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왕부로 돌아온 것 맞지만, 아이가 밖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우문호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부황께서 안왕을 입궁하라고 했으니 너무 걱정 마.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니까.”우문호는 가볍게 원경릉의 들을 쓰다듬었다. “응……” 원경릉은 천천히 눈물을 닦으며 우문호를 올려다보았다. 찰떡이는 두 주먹을 꼭 쥐어 ‘어어-‘하며 큰 눈을 이리저리 굴려 우문호를 보았다가 원경릉을 보았다가 했다.두 사람을 찰떡이가 지금처럼 건강한 게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찰떡이는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겨 낳을 때부터 고생을 했다. 그 때문에 황달도 심하게 앓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겪다니……원경릉은 찰떡이가 안쓰러워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아이들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깨물었을 때 더 아픈 손가락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우문호가 말했다.원경릉은 그를 노려보며 “안 돼. 우리는 삼둥이를 모두 공평하게 사랑해 줘야 해.”라고 말했다.“알지,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이 그렇다고. 앞으로 주의할게.”원경릉은 찰떡이를 안아 그의 얼굴을 보았다. 찰떡이의 통통한 볼을 만지며 원경릉은 우문호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 그럼 그 아이들은 어쩌지? 원팔룡에게 아이를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 물어서 모두 원래 집으로 돌려보내야 해.” 원경릉이 말했다.“나장군이 말하길, 네가 임신했을 때, 부중의 둘째 노마님이 사람을 구해 은전 두 냥을 주고 샀다고 하던데?”원경릉은 정후의 몹쓸 계략에 고개를 저었다.“원팔룡은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든 거지? 그 사람은 지금 어디 갔어? 궁으로 불려갔대?” “들어갔대.”“어휴. 확 죽었으면 좋겠네”원경릉이 말했다.우문호는 원경릉을 보며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서는 절대 안 돼. 하지만 죽이는 건 좀……” 라고 말했다.“너
“부황께서도 큰형님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고 계실 거야. 그러니 큰형님도 좀 더 기다리면 옥에서 풀려나시겠지.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조정에서 큰형님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어. 지금 큰형님에게 남은 인맥도 별로 없는데, 남아있는 사람마저도 다 기왕비와 연관이 되어있으니 이제 큰형님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우문호의 말을 듣던 원경릉은 순간 주명양이 떠올랐다.“주명양도 괜히 기왕에게 시집가서 기도 못 펴고 살겠네.” 원경릉이 말했다.기왕은 야망은 크지만 머리가 좋지 않았다. 그는 시커먼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인물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유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불쌍하다거나 안쓰럽다는 것은 아니다. 원경릉은 그가 지금까지 한 일만 생각하면 속에서 천 불이 끓었다.기왕은 가장 나이가 많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볼일 없는 친왕이다. 그는 마치 나이가 어린 정후 같았다.그는 지금까지 모든 일을 기왕비와 주명양을 통해 처리했다. 여자를 통해 태자가 되려고 한 기왕과 정후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처음엔 기왕비를 이용하다가 기왕비가 병에 걸려 힘이 약해지자 주명양을 들여 다시 한번 세력을 뒤집으려고 했다. 하지만 멍청하게도 기왕은 안왕의 덫에 걸려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사람들이 어느 정도 탕병을 먹자, 하인들은 분주하게 술상을 준비했다. 안왕이 떠나고 난 후, 초왕부의 연회가 정식으로 시작됐다. 원경릉은 황족들과 그의 부인들에 둘러싸였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원경릉이 대단하다고 칭찬했으며, 새삼 그녀는 삼둥이를 낳은 것이 대단한 일이었구나 생각했다. 다섯째는 사람들과 술을 주고받으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우문호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속도를 봐가며 천천히 술을 마셨다. 탕양은 황실의 귀한 술인 여아홍을 꺼냈고 사람들은 눈을 번뜩이며 흥이 나는 듯 노래도 부르고 덩실덩실 춤도 췄다. 소로(蘇老)는 우문호의 연회에 흥을 돋기 위해 소씨 집안의 젊은 사내들을 모두 데리고 왔다
원경릉은 원용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원경릉은 술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손왕비와 문영 공주의 부추김에 그녀도 어쩔 수없이 술잔을 들었다. “건배!”모두가 술을 입에 털어 넣었고 원경릉도 마지못해 술잔을 비웠다. 근데 이게 웬걸?‘술이 아니고 물이잖아?’그녀는 고개를 돌려 술을 따라준 희상궁을 보았다. 희상궁은 조용히 눈짓을 하며 그녀에 귀에 대고 “제가 술을 따라드리겠습니다. 태자비께서는 분위기만 맞추세요.”라고 말했다.“조금은 괜찮아요.” 원경릉이 웃었다.“아뇨. 태자비 술은 멀리하시는 게 좋습니다.” 희상궁이 고개를 저었다. 원경릉은 자신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흥을 깨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어서방.안왕은 명원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는 부황의 화난 얼굴이 무서워 어서방에 들어온 후 한 번도 부황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안왕은 목여태감이 초왕부로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부터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을지 예상했고, 그에 대한 대처 방법도 머리에 짜놓았다.안왕은 혜선생이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쓸 거라고 예상했기에 안왕은 그저 모르쇠로 나가기로 했다.만약 정후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안왕이 이 일에 관여됐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명원제는 안왕을 한참 보았다.“무슨 할 말 없느냐?” 명원제가 물었다. 안왕은 고개를 들었다.“부황, 소자가 가신을 잘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정말 면목없습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안왕은 명원제의 수를 내다보고 있었다.혜선생은 모든 죄명을 죄다 뒤집어썼으며, 정후도 모든 일이 혜선생이 저질렀다고 말했다. 정후는 혜선생이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자신이 안왕을 설득해 관직에도 복직시켜주겠다고 했다고 했다. 정후는 혜선생의 말을 듣고 바로 태자에게 전했고, 혜선생을 잡을 기회를 줬다고 말했다.이것에 명원제가 알고 있는 정후와 혜선생의 자백이다. 당시 나장군이 찰떡이를 안고 궁으로 들어오는데, 찰떡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는 것을 본 명원제는 마음이
“억울하다고? 네가 관련이 없다고 아무리 우겨도 안왕부 사람이 벌인 일이니 너도 책임이 있어! 짐은 네가 억울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다! 네 아랫사람이 독단적으로 이런 일을 벌인다고? 웃기는 소리!”명원제는 성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부황의 말씀이 맞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소자는 정말 몰랐습니다. 부황께서 철저한 조사로 이 일의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안왕이 말했다.“믿기 힘들다는 것은 아느냐?”안왕은 흐르는 피를 닦으며 명원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부황,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후가 혜선생이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다섯째에게 알려줬는데, 다섯째는 왜 그 사실을 바로 부황께 알리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태손에게 갔겠습니까? 태손에게 가는 것보다 부황께 이 일을 알리고 처리하는 게 훨씬 빨랐을 텐데요. 다섯째가 설마 자신이 벌인 일을 부황에게 들킬까 봐 그런 게 아닐까요?”“……”“게다가 혜선생은 안왕부의 사람은 맞지만 최근 그와 왕래도 적었고, 소자는 그를 신임하지 않아 중요한 일을 맡긴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부황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소자가 언제 혜선생을 통해 일을 처리했습니까? 만약 소자가 이 일을 꾸몄다고 해도, 소자는 절대 혜선생에게 시키지 않았을 겁니다.”“……”“부황, 소자 너무 억울하옵니다!”“그러니까, 네 말은 다섯째가 자작이라도 하는 거라고?”“부황,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소자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섯째가 이런 일을 꾸민 게 한두 번이 아니잖습니까? 전에도 자해를 하지 않았습니까?”“무슨 헛소리야? 짐이 언제 그놈이 자해를 했다고 말했던가?” 명원제가 노하여 탁자를 쳤다.안왕은 고개를 들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명원제를 보았다.“자해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범인이 잡히지 않을 리 없잖아요.”안왕의 말을 듣고 명원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명원제는 순간 기왕이 떠올랐다. 그는 첫째인 기왕을 처벌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암살 사건의 결론을 지금까지 질질 끌고 있었
태상황이 어서방으로 들어오자 명원제는 자리를 비켜 태상황의 옆에 섰다. 태상황은 안왕을 노려보며 “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무슨 할 말 없느냐?”라고 물었다. 안왕은 최근까지 태상황과 교류가 없었다. 안왕은 지금까지 태상황과 관련된 일은 모두 외조부인 적위명(狄魏明)을 통해서 들었다. 안왕은 태상황의 등장에 잔뜩 긴장했다.“황조부, 손자는 정말 억울합니다.” 안왕이 말했다.“뭐가 억울한가?” 태상황이 물었다.“황조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손자가 어떻게 다섯째의 아들을 가지고 모험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정후는 다섯째의 장인이니……”태상황은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표정으로 안왕의 말을 끊었다.“쓸데없는 말은 삼가거라. 네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조사하면 다 나오게 되어있다! 게다가 네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는데 네가 전혀 몰랐을 리가 없지 않아? 어디서 뻔뻔하게 거짓을 말하느냐!”명원제는 태상황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태상황께서도 저렇게 생각하시는구나. 저 몹쓸 넷째에게 하마터면 내가 속을 뻔했어.’안왕은 태상황의 말을 듣고 입술이 벌벌 떨렸다. “그건……”태상황은 앞에 놓인 탁자를 내리치며 분노했다.“지금 네 태도를 보아라! 네 말대로 넌 이 일에 관련이 없고, 네 아랫사람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치자, 그럼 그를 잘 돌보지 못한 너에게는 잘못이 하나도 없느냐?”“손자…… 죄가 있습니다.” 태상황의 무서운 눈빛에 안왕이 고개를 속였다. 태상황은 차갑게 웃으며 “그래, 오늘은 사람을 잘 가르치지 못한 죄를 묻겠다. 과인이 직접 이 일에 대해 조사를 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만약 이 일에 네가 연루되어 있다는 게 확인되면, 과인은 너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안왕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황조부! 왜 손자를 믿지 못하십니까? 태상황께서는 다섯째의 말은 믿으시고 왜 같은 친왕인 제 말을 믿지 않으십니까? 너무 편파적이신 거 아닙니까? 이 일은 정말 제가 꾸민 게 아닙니다! 막말로 다섯
안왕은 태상황의 결정에 반박을 하려고 했으나, 태상황의 엄한 표정을 보고 고개를 푹 숙이고 물러갔다.안왕은 자신의 계획과는 정반대의 결과에 충격을 먹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향했다. 안왕부로 돌아온 그는 사람을 시켜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조사하라고 했다. 잠시 후, 안왕은 조사 결과를 듣고 외조부인 적위명(狄魏明)을 청해 왕부로 모셨다.‘귀영위인 나장군이 개입됐군.’그는 귀영위가 외조부인 적위명의 손아귀에 있다고 착각하고 방심했다. 그는 지금까지 초왕부를 향해 두 번의 화살을 당겼지만 모두 실패했다. 첫 번째 실패는 원경릉 때문이고, 두 번째 실패는 태상황 때문이다. 그는 모든 변수를 계산했고, 혜선생을 앞세워 주도면밀하게 행동했다. 안왕은 혜선생을 위해 판 무덤에 자신이 들어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게 모두 귀영위를 간과하고 방심했기 때문이다. *적위명이 안왕부에 다다르자 안왕의 하인이 그를 서재로 안내했다. 안왕의 말을 전해 들은 적위명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귀영위가 관련 됐다고? 그럴 리 없어. 그랬다면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느냐? 혹시 잘못 알아본 것 아니냐?”“외조부, 귀영위가 맞습니다. 나장군이 직접 사람을 데리고 갔습니다!”“그럴 리가 없어. 나장군의 업무는 태자비를 보호하는 것 외에는 없어. 이는 태상황께서 친히 명령하신 것으로 나장군은 매일 태자비의 관련된 사항만 보고했어. 태자비 관련 일 말고는 모두 나에게 맡기셨는데 말이야……”안왕은 적위명이 믿지 않자 넌지시 “태상황께서 외조부를 의심하시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뭐라고?” 적위명의 표정이 굳었다.적위명은 태상황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한 적 없었다. 이전에 제왕이 원경릉을 암살하려고 했을 때, 그는 몰래 자객들을 보내 나장군이 가지 못하게 방해했다. 하지만 자객들은 귀영위에게 신분이 노출된 적이 없었기에 아무도 그가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적위명은 놀란 표정으로 안왕을 보았다.“태상황께서 나를 의심하신다면…… 그렇
안왕은 태상황이 이렇게 나올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태상황의 표정이 얼마나 섬뜩했는지 안왕은 그의 잔상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았다. “외조부, 황조부께서 조정 일에 관여하지 않은지 꽤 됐지 않습니까? 혹시 이번 일로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기강을 잡으려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다섯째의 일에 이렇게 노발대발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안왕의 말을 듣고 적위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네 말을 들으니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구나. 비록 태상황께서 몇 년 동안 조정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귀영위를 통해 조정 내외로 모든 일을 꿰뚫고 있었으니 말이다. 경계를 하고 있어야겠어. 방심하다 뒤통수 맞을 수 있으니까.” 적위명이 말했다.안왕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부황은 매일 많은 일을 처리하기에 이깟 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태상황은 천성이 꼼꼼하고 할 일이 없어 시간도 많으니 마음만 먹으면 이 일의 진범을 찾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안왕은 인상을 찌푸리며 “늙은이가 죽지도 않고 명이 참 기네요.” 라고 말했다. 순간 적위명이 눈을 번뜩이며 그를 보았다.“안왕, 방금 그 말 뜻은……?”안왕은 한숨을 내쉬며 외조부를 보았다. “외조부, 잘만 처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적위명은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가 입을 열었다.“그건 마지막 패로 남겨두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해.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너뿐 아니라, 우리 집안까지 모두 다 죽는 거야.” 적위명이 말했다.“예, 알겠습니다. 뭐든 외조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안왕은 고개를 숙였다.*초왕부.시간이 흐르자 시끌벅적했던 분위기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우문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취해서 눈이 반쯤 풀려있었다. 소로는 세 번이나 토를 했으며 전진장군도 몇 번이나 바닥에 고꾸라졌고, 술이라면 환장을 하는 냉정언도 하인 두 명이 그를 부축해 마차에 실었다. 우문호와 탕양은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풍겼지만, 정신력으로 버티며 손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냉정언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 의원을 부르지 않은 것이냐?" 역 일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돈이 없다고 하셔서 해열에 좋은 약초를 조금 달여주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의원을 부르고 진료하고 약을 짓는 데에는 모두 돈이 필요했지만, 역에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예산이 따로 없었다. "오계부의 부승이 상경하여 직무를 보고하러 왔는데, 돈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냐?" 냉정언이 놀라서 물었다. "나리께서 돈이 든 보따리를 도둑맞았다고 하셨습니다." "혼자 온 것이냐?" 냉정언이 물었다. "예. 관속이나 아전도 없이 혼자입니다." 경성과 꽤 멀리 떨어진 오계부의 부승이 그 먼 길을 수행 인원도 없이 홀로 와, 직무를 보고하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원경릉이 말했다. "내가 확인하겠소." "부인께서 의원이십니까?" "그렇다. 길을 안내하거라." 원경릉이 답했다. 역 일꾼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북당에서는 여인이 의술을 익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황후가 의학원을 세운 이후, 해마다 여인들이 입학하여 의술을 배우고 있었다. 우문호가 미색을 돌아보자, 미색이 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원경릉은 약상자를 챙겨 들고, 역 일꾼의 안내를 받아 한 객실로 향했는데, 문이 세게 잠겨져 있었다. 일꾼이 문을 두드렸다. "제 대인, 제 대인. 의원께서 오셨습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하지만 방은 일꾼의 부름에도 여전히 잠잠했다. 이내 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한참 기침을 하다,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마." 말이 끝나자, 침대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솜으로 만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채, 핏발이 선 눈만 드러낸 관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문턱을 잡고 서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른 뒤
이번 순행에 서일이 동참하면서 사식이도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러나 고된 여정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원가에서 사식이가 서일과 함께 순행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원가는 서일 부부가 3년이든 5년이든 돌아오지 않더라도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해주었다. 그 역시 아이들과 떠들썩하게 지내고 싶어 했던 터라 기뻤다.탕양도 순행에 참여했으나, 그의 부인은 맡은 직책이 있어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미색 또한 당연히 회왕을 따라갈 예정이었으나, 오랜만의 외출인 만큼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시어머니인 태비도 흔쾌히 아이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이제 아이도 다 컸으니 힘들게 돌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신나게 순행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원경릉은 순행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숙왕부의 노인들이 걱정되었다. 비록 삼대 거두는 여행을 떠난 상황이긴 하지만, 숙왕부에는 아직 흑영 어르신들이 계셨다. 그리고 안정을 찾은 추 할머니마저 지속해서 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온갖 걱정에 흽싸인 원경릉 때문에 오히려 원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성가시다고 느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편히 놀러 가면 되지, 뭘 그렇게 걱정하냐? 내가 있지 않느냐?"그 말에 원경릉은 할머니를 껴안으며 웃었다."맞아요. 제가 몸이 열 개라도 할머니는 못 이길 테니까요!"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원경릉이 비록 황후라고 해도, 숙방부에서의 위세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는 바로 주사기를 꺼낼 때 뿐이지만, 원 할머니는 달랐다. 그녀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빛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을 제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그녀의 성격이 점점 난폭해져서, 틈만 나면 사람을 끌고 가서 주사를 놓았다. 원 할머니가 손수 만든 약이 한가득 담긴, 원경릉의 약상자에는 없는 귀한 약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약들은 수토불복, 고
조사가 끝난 후, 목을 쳐야 할 자는 목을 치고, 옥에 보내야 할 자는 옥에 보냈다. 그리고 오씨가 챙긴 돈은 전부 피해자 가족들에게 배상되었다.우문호는 신하들 앞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그는 탐관오리를 금지하고 청렴을 장려하는 법을 내렸으며, 부정부패 전담 조사 관아를 설립해 전국을 조사하라 명했다. 부정부패를 근절해야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동시에 그는 신하들의 봉급 인상을 제안했다. "예전엔 나라가 가난해 관리들의 봉급이 적었지만, 이제는 나라도 번영하고 산업이 활성화되었으니 함께 잘 살아야 할 때다." 봉급을 높이면 부정부패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조회가 끝난 후 우문호는 수보와 친왕들을 불러 오래 전부터 품어온 생각을 털어놓았다."과인은 순행하고자 하오!"나라가 태평하지만 황제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왕과 태자 시절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았지만, 지금은 점점 백성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직접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보고 싶었고, 공무를 핑계로 원 선생과 북당 전역을 둘러보고 싶었다.냉정언이 적극 찬성하며 말했다."상소문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은폐된 사실, 억울한 사건, 고통받는 백성들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옳은 말이네." 우문호는 최근 냉정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그러나 냉정언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하지만 아직 각지에 위험한 도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안전을 위해 소신이 대신 가는 것이..."그러자 우문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수보의 말도 일리 있지만, 참 뻔뻔하구먼!" 그러고는 어명이 적힌 서찰을 건네며 덧붙였다."함께 순행할 명단이니 반포하시게!"냉정언은 자기가 제외될 줄 알았으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소신도 갈 수 있습니까?""가시게. 국정에 큰일이 없으니 내각에서 처리할 수 있네. 새로 양성한 인재들의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이기도 하고.""상산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