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비는 가서 상궁에게 소빈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덕상궁(德尚宫)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소빈은 궁 안에 무릎을 꿇은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덕비는 그녀를 보고 화가 치밀었다. ‘평소에 영리하고 사리분별이 빠른 소빈이 어떻게 이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었단 말인가.’덕비는 가까스로 화를 참았다. “그 사람은 누구야?”소빈은 고집 있는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마마님 그냥 죽여주십시오.”“네가 죽으면 다 해결이 되느냐! 이 일 때문에 우리 가문까지 위험해졌어! 네 부형들도 2년만 있으면 귀경할 텐데 네가 그 앞길을 막는 것이야?” 덕비가 분노했다.“소첩이 자백한다고 어쩔 수 없습니다. 부형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그냥 죽여 주십시오.”“후회하기는 늦었다! 너는 황상께 부형들을 위해서라도 이 사건을 바른대로 실토하거라!”“황상께 용서를 빌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마 소첩께서 여태까지 가르침을 주고 사랑해 주셨는데 소첩이 죄를 지었습니다.” 소빈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덕비는 화가 나면서도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 둘은 오래 알고 지냈고, 오랜 기간 한집에서 살았다. 덕비도 소빈이 신경 쓰이고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덕비는 소빈이 아무리 무릎을 꿇고 빌어도 이미 운명은 결정되었다고 생각했다.“너의 죄로 궁중을 혼란에 빠뜨렸으니 네 죽음을 달게 받아라. 너의 내연남도 어서 불거라! 그렇게 하면 네 가족과 친척들에게는 살길이 있을 것이야! 스스로 잘 생각해 보거라.” 덕비가 소빈에게 충고했다.소빈 주변의 남자들의 수는 제한적이기에 조금만 공을 들이면 반드시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덕비는 그녀가 자백하여 벌을 조금이라도 적게 받기를 바랐다.그 순간 덕상궁의 집사궁녀가 들어와 덕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전한 궁녀는 밖으로 나왔다.소빈은 당황한 표정으로 덕비를 쳐다보았다.“사실은 언제나 드러날
“자네가 연기를 이렇게 잘하는지는 몰랐네.” 덕비는 눈에 불꽃이 일었다.“마마,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초왕이 아니라면 왜 구사가 나서서 죄를 뒤집어쓰려고 하겠습니까?”소빈은 울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소빈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덕비는 소빈을 믿지 않았다. 덕비는 소빈이 한 말이 밖으로 퍼지게 해서는 안 되며, 만약 이 소식이 밖으로 퍼진다면 다섯째에게 큰 누를 끼칠 것을 알았다.잠시 후 덕비는 차가운 목소리로 하인을 불렀다.“밖에 아무도 없느냐!”그러자 문이 열리며 상궁이 들어왔다.“마마님 분부하시지요.”“소빈을 궁전으로 데려가 입을 틀어막아라! 한 마디 말도 하게 해서는 안 돼!”상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머니에서 천 조각을 꺼내 소빈의 입속에 집어넣었다.“소빈마마 이리 오세요.”소빈은 황급히 끌려나갔다.덕비는 이 모습을 보며 한시라도 빨리 다섯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여보게! 본궁이 태아에게 좋은 약을 몇 알 가지고 있다고 초왕을 이리로 부르게.”“예!” 하인이 명을 받고 나갔다.우문호는 당일에 근무했던 금군의 명단을 조사하던 중 덕비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덕상궁으로 찾아갔다.우문호가 덕상궁에 도착하자 덕비는 그에게 문을 닫으라고 했다.“덕모비, 어떠십니까? 그녀가 자백을 했습니까?”덕비는 그를 빤히 보았다. 우문호는 그녀가 어릴 적부터 키웠던 아이로 결코 이런 불미스러운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앉아서 본궁의 말을 잘 들어라.” 덕비가 말했다.우문호는 엄숙한 그녀의 표정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소빈이 자백을 했다. 그 계집이 내연남이 초왕이라고 했어.”“예상대로군요.”우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덕비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소빈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느냐?”“덕모비, 소인은 당일에 어서방에서 나온 후 모비의 몸이 편찮다는 말을 이태감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명화전 쪽으로 향하던 와중에 우연히 구사가 소빈의 내연남을 보게 됐고 옆모습
덕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팔황자가 그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이냐?”“제 예상은 그렇습니다.” 우문호는 고개를 저으며 “현재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부황께서는 이 사건을 빨리 해결하라고 하셨고 만약 소인이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또는 여덟째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소빈이 거짓을 고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덕비가 물었다.“음…… 방법이 있긴 한데…… 좀 더 조사를 해봐야 합니다.”“그럼 빨리 가보거라 본궁은 그놈이 누구인지 주시하겠다. 그리고 소빈은 걱정 마라.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할 테니.”우문호는 고개를 저었다. “덕모비, 시간을 지체할 필요 없습니다. 소빈이 발설한 마당에 부황이 이 일을 아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우문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눈빛이 바뀌더니 덕비를 보고 말했다.“만약에 누군가가 부황에게 이 일을 고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명화전 부근에서 순찰을 하고 있었던 금군이어야 논리에 맞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실제로 본 사람은 그 남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습니다."덕비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빤히 보았다. “네 말은 그 간부(奸夫)가 이 일을 황상에게 고할 것이라는 게냐?”“예, 분명 그가 직접 고할 것입니다. 그날 간부는 소빈과 함께 명화전에서 나를 해치기 위해 계획을 세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구사가 나타나면서 계획이 틀어졌고 그들의 계획이 혼란에 빠진 겁니다. 심지어 이 사건을 조사하는 책임자도 저이기에 범인을 저로 몰아가려면 분명 누군가가 부황에게 범인이 초왕이라고 고해야 합니다. 아마 사건이 벌어진 후 소빈은 이 연극을 하기 위해 분명 그 간부와 만나서 얘기를 했을 겁니다. 덕모비, 즉시 사람을 시켜서 사건 후에 소빈이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보게 하십시오. 여기 당일에 당직을 했던 금군 명단을 가져왔습니다.”우문호는 옷소매에서 둘둘 말린 명단을 덕비에게 꺼내주었다.덕비마마는 명단을 넘겨받아 자세히 보았다. ‘오숙화(吳叔化)……?’그녀는 이 이름을 보고
“덕모비, 이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소빈이 아무리 어리석더라도 한 남자를 위해서 자신의 가족들을 희생하지는 않을 겁니다. 덕모비께서는 제 통지를 기다리십시오. 만약 오숙화가 황제께 가서 이를 고한다면 그때 덕모비께서 소빈에게 자결하라고 하십시오. 당신이 내린 명령이라고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됩니다. 덕모비는 이후에 소빈이 범행을 자백했고, 수치심에 자살했다고 하십시오. 그녀를 절대 부황에게 보내시면 안 됩니다.”덕비는 인상을 쓰며 “다섯째, 만약 내가 네가 말한 대로 한다면 오히려 너는 오숙화와 함께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이야.”라고 말했다.“덕모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아마 부황께서는 오숙화의 말을 듣고 구사를 부를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구사가 자신이 본 그대로를 얘기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입니다. 그때 구사가 오숙화가 범인인 것을 말하면 됩니다. 부황께서 구사에게 왜 사건의 진실을 지금에서야 말하냐고 물으신다면 황제의 첩인 소빈과 다른 사내가 밀회를 했으니 이는 곧 황제의 명예가 손실되고 체면을 깎는 일이니 신중했다고 하면 됩니다.”“약간 억지스러움이 있구나. 본궁 생각엔 그렇게 한다고 너와 구사가 혐의를 완전히 벗을 수는 없을 듯싶다.”우문호는 그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했다. 우문호는 사람을 시켜 이태감이 왜 그를 명화전으로 안내했는지, 이태감이 오숙화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 혐의가 있는지 냉정언을 시켜 조사하라고 했다. 냉정언은 부황의 심복으로서 부황은 그를 신뢰하고 있었고, 냉정언은 사건 판단이 빠르고 증거를 잘 찾는 것으로 유명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덟째의 회복이다. 그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이 사건은 바로 해결될 것이다.하지만 우문호는 부황이 사건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기에 오숙화가 부황을 찾아가 사건을 고하고 부황이 분노하여 우문호의 설명조차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덕모비는 제가 당부드린 대로만 하십시오.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오숙화 쪽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을 시켜 덕모비께
소빈은 얼굴이 굳고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덕비마마를 바라보았다.“능지처참이요?”덕비는 그녀를 바라보며 온화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본궁도 여자다.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본궁은 너를 데리고 황상을 만나야겠다. 황상을 뵙고 사실을 고하거라 황상에게 용서를 구하고 죄를 달게 받거라.”이 말을 들은 소빈은 바닥에 엎으린 채 심장을 부여잡았다.“소빈을 일으켜 어서방으로 데리고 가거라!” 덕비가 명령했다.어서방에는 명원제가 바닥에 꿇어앉은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가 난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그게 사실이냐?” 명원제는 목소리는 음침하고 차가웠다.“소인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지금 황상께 이렇게 죄를 고합니다. 소인이 황상의 명예에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줄곧 고민했습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오숙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말을 들은 목여태감이 너무 놀라 벌벌떨며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네가 본 사람이 초왕이 확실한가?” 명원제가 물었다.“소인이 직접 보았습니다. 초왕이 태감을 참수할 때 소인이 바로 통천각(通天阁)을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명화전의 상황은 초왕이 소태감을 죽이고 팔황제도 공격했습니다. 팔황자가 정면에서 들어오는 칼을 손으로 막았습니다. 그러자 초왕이 담벼락을 넘어 도망쳤고, 소빈마마의 소매가 벽에 걸려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구사가 사건 현장에 왔고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고 도망가려고 할 때 금군들이 달려왔습니다. 곧바로 초왕이 다시 돌아와 팔황자를 안아들었고 금군은 이 상황을 보고 범인이 구사라고 오해한 겁니다. 구사는 초왕을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쓴 겁니다.”같은 시각 어서방 문 앞.오숙화가 명원제를 만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문호는 밖에서 부황의 부름을 기다렸다.우문호는 덕비가 자신이 당부한 대로 소빈을 자결시켰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오매불망 소빈의 사망 소식을 기다렸다. “왕야, 황상께서 들어오시라고 합니
우문호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오숙화를 힐끗 보았다. 오숙화는 바닥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오숙화의 눈알은 재빠르게 굴러갔다.덕비가 소빈을 데리고 들어오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었다.“폐하! 신첩이 관리 부족으로 소빈을 이지경까지 만들었습니다. 신첩이 죄를 지었습니다!”소빈은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오숙화를 보고 자신도 무릎을 꿇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폐하, 신첩이 몸 관리를 잘 못하여…… 더럽혀졌습니다. 이 죄는 신첩이 죽어서도 속죄하겠습니다.”덕비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소빈을 쳐다보았다.오숙화는 소빈의 말을 가로챘다.“황상! 소빈 마마가 초왕에게 모욕을 당했는지는 소인이 잘 보지 못했습니다. 소빈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응한 것인지, 초왕의 강요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땅에 엎으려 있던 소빈이 오숙화의 말을 듣고 심장을 부여잡고 비통하게 말했다.“폐하! 소첩은 원치 않았습니다. 초왕의 강요로 일어난 것입니다! 소첩은 초왕의 힘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십시오!”덕비는 두 사람의 뻔뻔한 연극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폐하! 이 둘의 말을 모두 거짓입니다! 소빈이 간통을 저지른 간부(奸夫)는 바로 저 오숙화입니다! 둘이 짜고 초왕을 모함하고 있습니다!”덕비와 소빈 그리고 오숙화의 총체적 난국의 상황을 보고 있자 우문호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명원제는 격노하여 탁자를 내리쳤다.“다 입 다물어!”소빈과 덕비가 명원제의 호통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명원제는 우문호를 보며 “저 둘의 말이 사실인가?” 라고 물었다.우문호는 자신이 어떠한 말을 해도 황제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사실이 아닙니다. 소자는 그날 소빈을 본 적이 없나이다.”명원제는 그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 덕비를 쳐다보았다.“너는 무슨 증거로 저 여자의 간부가 오숙화라고 단정하는 것이지?”덕비는 입이 열 개라도 그 사실을 우문호에게 들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그녀는 소빈
명원제가 소빈을 쳐다보았다.“사실을 말해라.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소빈은 울먹거리며 벌벌 떨었다.“왜 우는 것이야? 사실대로 말하라고!”겁에 질린 소빈이 입을 열었다.“그날 소첩이…… 홀로 산책을 하다 보니 명화전에 다다랐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저를 끌고 명화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소첩은 너무 놀라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첩의 옷이 벗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다섯째 형님!’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됐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눈앞에는 초왕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란 초왕은 칼을 꺼내 소태감을 살해했고 연이어 팔황자에게도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소첩을 끌어 담장 밖으로 갔습니다.”“만약 네 말대로 내가 너를 강제로 탐했다면 본왕이 너까지 죽여야 하지 않겠어?”우문호가 그녀의 말에 냉정하게 받아졌다.이 말을 듣고 소빈은 넋이 나간 듯 무의식적으로 오숙화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명원제도 반사적으로 소빈과 오숙화를 번갈아 보았다.명원제는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내막을 파헤쳐야겠다고 생각했다.‘다섯째가 아무리 간이 크다고 해도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은 못된다.’명원제는 한참 생각에 빠졌다.“소빈을 덕상궁으로 데리고 가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하고 초왕을 암실로 데려가 조사하거라! 그리 오숙화도 함께 데리고 가거라!” 명원제가 소리쳤다.우문호는 부황의 명령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부황이 이렇게 냉정하게 명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부황의 마음속에도 소빈과 오숙화를 향한 의심이 생겼다는 것이다.소빈은 마음속으로 ‘살았다’를 외쳤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사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그 생각뿐이었다.‘이제 모든 것은 여덟째에게 달렸네.’현장의 목격자들이 모두 초왕을 보았다고 말했고 심지어 구사도 소빈의 간부를 초왕이라고 오해해 죄를 뒤집어썼다. 여덟
소빈의 생각소빈은 덕상궁으로 돌아와 바로 꿇어앉았다.덕비는 지쳤는지 의자에 앉아 소빈을 보며 실망과 통한에 가득 차서, “왜 그랬지? 초왕이 너랑 무슨 철천지원수를 졌다고?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초왕을 음해하는 것이야?”소빈은 딱딱하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마마, 저는 분명 왕야에게 능욕을 당했습니다.”덕비가 증오에 찬 목소리로: “그래? 얼마 전에 너는 여기 무릎을 꿇고 나한테 초왕과 간통을 했다고 했지, 네가 능욕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어.”소빈이: “소첩의 그 말은 소첩이 능욕을 당했다는 말이었습니다.”덕비가 따귀를 때리는데 열이 뻗쳐서 따귀를 때리다가 자기가 도리어 실신할 뻔 했다.소빈이 따귀를 맞은 뺨을 만지며, “마마, 그래요. 전 가족을 연루 시킬 수 없었요. 못 합니다.”“넌 이제서야 가족이 연루 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았느냐? 그러길래 당초에 왜 초왕과 사통을 했느냐?” 덕비가 분노하며 말했다.소빈이 쓴웃음을 지으며, “왜요? 왜 그랬겠습니까?”소빈은 고개를 들어 덕비를 보고 가시 돋친 말투로, “마마는 매일 거울을 보세요? 눈가에 주름이 보이시나요? 귀밑머리에 흰 머리카락 보이세요? 마마는 늙었어요. 그런데 황제 폐하는 왜 여전히 그렇게 총애하실 까요? 한 달 중에 무려 닷새는 마마를 불러 시침을 들게 하시죠. 만약 마마께 아들이 있었으면 황제 폐하의 총애도 끝일 텐데, 당신은 아무도 없어요. 황제 폐하가 왜 시침들 사람을 제가 아닌 마마를 택했는지 아세요? 전 젊고, 예쁘고, 매력적이기까지 한데. 초왕이 제가 이 궁에서 제일 예쁜 여인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왜 유독 황제 폐하만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죠? 벌써 일년이라고요, 황제 폐하는 제 이름을 일년이나 뒤집은 적이 없어요.”덕비는 이 말을 듣고 차갑게: “만약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니라면, 당초에 여관(女官)을 뽑는 첫해에 넌 낙방이었어. 왜 둘째 해에 또 왔지? 여관을 뽑는 수녀 선발은 첫 해에 왔으면 다음해엔 오지 않는 법인데, 만약 네가 오지 않았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
풍도성 안은 술잔을 주고받고 건배하며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안지여는 오늘 황금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에 거대한 이무기를 수놓았으며, 황실의 밝은 황색과는 약간 구별되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곤룡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과 매우 흡사했다.안지여는 자신의 야심을 이미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당연히 안지여는 오늘도 야심을 감출 생각 없이 손님들에게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인근 지역 조정 관리들이 손님으로 왔어도 안지여는 전부터 맺어온 관계였기에,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두터워 산 넘고 물 건너 저 멀리 있는 황제가 그들을 시시콜콜 관리할 수 없었다.그 자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황실에서 파견한 일행이 온다는 것을 알고, 연회석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듣자하니 안풍 친왕 전하와 이리 부마께서 오늘 오신다던데 어째서 안 보입니까?”안지여가 잔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면 결국 오겠지요.”“여정을 듣기론 오늘 분명 풍도성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밤이 되도록 아직 안 보입니까? 설마 성주님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성주님이 가서 맞이하셔야 한다고? 아주 허세가 대단한데? 퉤!”“누가 아니랍니까?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하는 거였으면 며칠 전에 풍도성에 도착해 성의를 보여야지, 오늘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늦게서야 와서, 아직도 잔치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성주님의 체면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행태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들어오게 막고 돌려보내시지요, 마음만 받은 셈 치고요. ”“맞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풍도성에서 받은 공물이 적지 않았으니, 만족한 줄도 알아야죠.”“풍도성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 없어요. 뭐 때문에 그럽니까? 수백 년 전에 풍도성은 원래 북당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선을 긋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모두 안지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몇 잔 들어가자, 비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