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직조처 사람이 디자인을 정하고 명원제에게 시안을 올렸다. 길복은 곤복, 곤룡포, 예복을 포함한 것으로 전부 바로 준비해야 했다. 편복은 길복과 달리 천천히 준비해도 되지만 강녕직조부는 서둘러 황제가 쓸 채색 비단, 능라, 망사, 비단실을 경성으로 보내기 위해 수백 명의 직조사가 밤낮없이 일하게 하며 반드시 길일 전에 새 황제와 황후의 길복을 만들어내도록 했다.이 일에는 내무부의 공이 제일 컸다. 회왕은 본래 마음만 있고 행동으로 안 움직이는 사람으로, 부임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큰 행사를 치른 경험이 없었지만 다행히 뒤에 미색이란 늑대파 이인자가 있었기에 잘 마루리 할 수 있었다. 미색이 막후에서 모든 일을 기획하고 늑대파가 빈번하게 출동해 미색을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채색 비단과 비단실을 신속하게 경성으로 운송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들 덕분이었다.우문호와 원경릉의 의상 외에 황태손, 황손, 군주의 옷도 새로 짓기 시작했다. 황제가 보위에 오르면 먼저 태상황과 황태후를 책봉한 다음, 아이들 차례가 오기 때문이다.제왕의 경조부는 경성의 치안을 담당해 야간 통행금지를 필두로 순찰을 강화했고, 위왕도 가세해경성 각처의 객잔은 인명 조사를 실시해 수상한 사람은 일률적으로 경성에서 쫓아내며 제왕의 부담을 일부 덜어주었다.손왕의 홍려시도 바쁘게 귀빈 접대를 준비했다.순왕과 만아는 성 밖 일대를 순찰하며 의심스러운 자가 있는지 살폈고, 안왕까지 가만 있지 않고 집안 병사들을 데리고 각 마을을 조사하며 다녔다.그들과 반대로 우문호는 한가했다. 다행히 요 며칠은 나라에 별반 큰 일이 발생하지 않았고, 냉 재상과 홍엽이 죽이 잘 맞아서 조정의 업무 8~9할을 다 처리했으므로 우문호는 상소를 보며 비준이나 했다.귀빈 중에서 가장 먼저 당도한 것은 대주의 사자로 진정정 부부가 아들을 데리고 왔다.우문호 진정정 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홍려시의 손왕과 같이 나가 기쁘게 맞이하고는 그들을 바로 객잔에 묵게 하지 않고 서재로 불렀다. 우문호와 손왕은
한편, 밖에서는 원경릉과 근영 군주가 아이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호두는 여동생이 태어난 걸 들은 뒤라, 뛸 듯이 기뻐하며 떡들과 쌍둥이와 어울려 여동생 주위를 맴돌며 놀았다.근영 군주는 아이들이 사이가 좋은 것을 보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호두가 오는 길에 여동생이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근영 군주 부부께서 호두 하나만 낳아서 좀 외로울 수도 있으니 이번에 온 김에 좀 오래 있다가 가요. 형제들과 떠들썩하게 지내게요.”근영 군주가 말했다. “호두는 하나도 안 외로울 거예요, 집에 놀게 한 무더기가 있는걸요! 하나뿐인 여동생인 만큼 소중할 수 밖에요.”원경릉이 호두를 보았는데, 동그란 눈이 아주 귀여운데다가 큰오빠다운 듬직한 느낌도 풍겼다. “계란이가 이렇게 많은 오빠의 사랑을 받으니 진짜 행복하겠네요.”근영 군주가 미소를 지었다. “오빠 말고도 여기 대모도 있잖아요. 태자비께서 동의하는 여부와 상관없이 계란이는 저와 정정의 딸인걸요.”근영이 말하며 계란이를 안아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사랑스러운 눈빛을 하며 말이다. 방금 들어올 때 근영 군주가 계란이를 안아 들었는데, 바로 근영 군주에게 방긋 웃는 모습에 근영 군주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사랑이 샘솟았다.원경릉이 방긋 웃었다. “그야 당연하죠. 전에 근영 군주가 호두를 가지고, 제가 우리 떡들을 가졌을 때 아들과 딸을 낳으면 부부로 맺어주자고 약속했잖아요. 딸이면 서로 자매가 되고, 아들이면 서로 형제가 되기로. 호두랑 우리 떡들은 형제고 계란이는 그들의 여동생이니 근영 군주가 대모인 건 도리상으로나 마음 상으로나 딱 맞네요!”근영 군주가 손가락으로 계란이의 볼을 살짝 만지자 계란이가 근영 군주의 손가락을 따라 손발을 꼼지락거리며 옷는데 분홍빛 잇몸이 다 드러나 정말 귀여웠다. 이 모습은 근영 군주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게 만들었다. “이번에 황제 대관식 때문에 온 거지만 난 우리 수양딸 때문에 왔나 봐요. 오길 잘했네,
이리 나리는 묻고 나서 우문호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이리 나리는 우문호가 얼마나 낯짝이 두꺼운지 과소평가했다. 우문호는 오히려 이리 나리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이를 드러내고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가족같은 사람들끼리 이런 얘기 해서 뭐 합니까? 자, 술이나 한잔하시죠. 정성을 푸대접하지 마시고.”이리 나리 저택과 달리 초왕부는 무척 떠들썩해서 원경릉은 여러 왕비와 원경병을 집으로 불렀다. 여자들은 각자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아이들 또한 왁자지껄 떠들며 즐겁게 놀 수 있었다.보배는 늘 만두를 찾았는데 수아도 그랬다. 원경릉은 만두가 이렇게 여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만두가 늘 사람을 잘 혼내고 통제하려 들어서 다들 만두와 노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다.비록 만두는 없었지만, 다른 오빠들이 있어서 신나게 놀 수 있었다. 아이들은 밥을 먹은 뒤, 또 마당에서 뛰어 놀았는데, 눈 늑대와 호랑이도 따라서 신이 나서 온 초왕부의 열기가 들끓다시피 뜨거워졌다. 미색도 밤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데, 아들과 딸 모두 아름답고 예쁘게 생겼다.이렇게 다시 이틀이 지나고, 궁에서 전문적으로 궁중 법도와 예의를 지도하는 사람들이 초왕부로 찾아왔다.원래 일찍부터 배우려고 했으나 명원제가 후궁에 그다지 복잡한 일이 없다고 생각해 조상의 유훈만 준수하며 과정을 진행하는 것으로 대충 구색만 맞추기로 했다.그렇게 온 북당이 경성을 주시하며 신구의 교대를 기다렸다.태자의 인자함과 현명함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로 태자가 이끄는 조직도 아주 인기가 있어 항간에 적지 않은 이름난 선비들이 앞으로의 북당이 대월국, 대주국에 필적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명원제가 대외적으로 갈수록 병이 깊어졌다고 해서 노신들이 명원제를 찾아 왔는데,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피곤한 척 내보내니 정말 중병에 든 사람 같았다.노신이 몰래 어의에게 태산 붕어할 위험이 있는지 물었으나 어의가 솔직히 말해 그럴 일은 없으나 황제는 이미 조정의 정사를 돌보실
명원제가 듣고는 별 생각이 없는 듯 대충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지?”황후는 몹시 억울한 사람처럼 눈물을 흘렸다. “신첩이 폐하와 백년가약을 맺은 후로 전에 잘못을저질렀으나 신첩 이미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첩은 후궁의 주인인데, 만약 신첩이 황태후로 책봉되지 않으면 천하에 어떻게 낯을 들고 살아간단 말입니까? 그리고 황귀비는 비록 태자의 어마마마라고 해도 결국 중도에 거둔 아들이 아닙니까. 태자를 거뒀기로 덕비의 지위에서 황귀비로 책봉 받았으니 신첩 생각에 황귀비는 황귀태비로 봉하셔도 성은이 망극할 것입니다!”황후가 말을 마치고 명원제의 불쾌한 표정을 보자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 “조상의 법도에 따르면 신첩이 황태후가 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 생각하옵니다.”명원제가 답했다. “조상의 법도가 그러하면 자네는 당연히 황태후인데 왜 굳이 와서 묻는 것이냐? 그냥 책봉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더냐?”황후가 우물쭈물거리며 답했다. “신첩이 꼭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아니고 예전에 태자 부부에게 약간…. 약간 엄했기로 혹시 마음에 품고 있을까 싶어서요.”황후는 말을 계속 이어가며 또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는 신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신첩은 계략 같은 거 모르고 사고를 친 건 전부 마지못해 나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신첩도 잘못한 걸 알았으니 태자 앞에서 신첩을 위해 몇 마디 해 주세요. 설령 신첩의 부귀영화를 빼앗더라도 황태후의 지위는 지켜야만 해요. 안 그러면 정말 신첩은 열조를 뵐 낯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첩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덟째를 위해서예요. 여덟째는 앞으로 저를 따라야 하는데 신첩이 태비에 봉해지면 앞으로 여덟째가 궁에서 얼마나 구박을 받겠어요, 안 그렇습니까?”그러자 명원제는 이해할 수 없는 듯 심하게 화를 냈다. “자네는 다섯째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여덟째를 괴롭혀? 다섯째는 여덟째를 챙기지 못해 안달인데, 자네는 온통 원망으로 가득해서 종일토록 누가 날 해칠까 누가 날 싫어하나
명원제는 주 재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북당 강산을 위해 분골쇄신하며 평생을 바쳤던 그를 바라보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군신간에 수많은 말을 무언중에 대신한 것 같았다.주 재상이 출궁한 뒤 명원제는 성지를 내려 황후와 적 귀비를 황실 동원으로 옮기게 했고, 팔 황자를 가끔 가서 만날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곁에 데리고 키우지는 못하게 했다.황후와 여덟째 모자를 갈라놓는 상당히 잔혹한 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명원제가 팔 황자를 위해 직접 생각해 낸 것으로 팔 황자는 일곱째 부부를 따라야 안심하고 평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지, 황후를 따라 동원으로 갔다가는 나쁜 짓에 이용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정말 모자를 갈라놓는 것도 아닌 게 황후가 아들을 보고 싶어하면 며칠 같이 지낼 수 있게 했다. 성지를 내리자마자 황후는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는데, 단지 궁에서 쫓겨날 뿐만 아니라 태비에도 봉해지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이틀을 그렇게 난리를 쳤다. 벽에 머리를 박고 죽겠다는 둥, 목을 매고 죽겠다는 둥.. 누가 말려도 듣지를 않아 적 귀비가 직접 명원제에게 와서 알렸지만 명원제는 상대하지 않았다. 황후의 성격을 주 재상이 아는데 명원제라고 모를 리가 있을까? 정말 자살하고 싶으면 난리를 칠 게 아니라 바로 목을 매면 그만인데 뭘 저렇게 소동을 부리겠어?황후가 이렇게 난리치는 바람에 명원제는 동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한 것이 아주 잘한 결정이라고 확신했다.명원제가 계속 황후를 무시하자, 황후는 결국 궁에서 제일 귀중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싹 챙겨서 나갔다. 성지에 따라 적 귀비가 그녀와 함께 갔는데 오히려 싫은 기색 없이 기꺼운 마음이었다. 적 귀비는 후궁의 주인이 바뀐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신은 평생 남에게 얹혀서 살아가야 하니 역시 동원으로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왕 부부가 황후를 배웅했고, 원용의가 황후에게 말했다. “사실 태자비 마마께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하시면 지난날의 은원은 전부 깨끗하게
황후 일을 처리하니 명원제는 이제 오로지 퇴임 후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그리고 귀빈들도 연이어 도착해 객잔에 묵으며 우문호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홍려시 사람과 같이 귀빈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대월국, 대흥국, 선비 단씨, 대량이 줄지어 사자를 파견해 왔고, 주변의 작은 부족 국가들도 사자를 파견했다. 바다 건너에 있는 일부 국가들은 아마도 길이 멀어서 대관식 전에는 올 수 없을 것이지만 축하 예물은 늦더라도 보낼 것이 틀림없었다.한편, 현대에서는 만두와 원 교수 일행이 최선을 다해 1달의 휴가를 얻어 이틀 동안 고대에 없는 것들을 사기 위해 대대적인 쇼핑을 했다.딸을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혼수를 준비할 생각이였는데, 사실 뭘 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금은보석은 그쪽에도 충분하고, 집과 차는 쓸데없다고 생각해 유일하게 산 게 편의용품으로 책, 만년필 등이었다.주진은 처음엔 원경주가 처음이라 길을 안내하는 입장에서 원경주를 데리고 다녀왔지만, 지금은 길이 편리하게 개통돼서 주진이 꼭 가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따라가지 않았다.그래서 주진은 일행을 입구까지 데려다주는 길에 돌아오는 일정을 체크해 다시 마중 나오기로 했다.원경릉 엄마는 처음 사위 집에 간다는 생각에 상당히 흥분해서 기대에 엄청 차 있었다. 딸을 시집보낸 다른 사람은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었지만 원경릉 엄마는 몇 년 만에 처음이였다.그녀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눈가에 기쁨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운전하는 동안 계속 ‘어떤 브랜드 술을 사는 걸 잊어버렸다, 태상황에게 가을 바지를 몇 벌 사 가는 걸 잊었다, 잘 나온 사진을 인화해 오는 걸 잊었다’라며 아쉬워했다.그러자 만두가 웃으며 말했다. “아쉬워하지 마요. 다음에 또 올 수 있잖아요! 휴가 낼때마다 오세요.”“아빠는 매달 가고 싶어할걸.” 원경주가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럼 너무 좋죠! 매달 저희한테 맛있는거 사주시는 거잖아요.” 만두가 아름다운 꿈에 부풀었다.원 교수가 웃으며 원경주에게 호통을 쳤다. “무슨
우문호는 출발하기 전에 태상황 폐하한테도 가족이 온다는 걸 원경릉에게 알리도록 했다.마침, 할머니가 와서 삼대 거두 진맥을 해주고 있었기에 원경릉이 할머니께도 세 분께 소식을 전해달라고 했다.초왕부 또한 최근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해서 원경릉은 대외적으로 자신의 대모와 대부가 오실 거라고 전했다. 그러자 사식이가 상당히 의아해하며 원경릉에게 물었다. “원 언니도 대부와 대모가 계셨어요?”원경릉은 사식이가 이렇게 묻는 것을 듣고 이상하다고 느꼈다. ‘서일 이 녀석이 사식이한테는 현대의 일을 얘기 안 했나 보네? 하여간 녀석, 이럴땐 진짜 입이 무겁다니까.’원경릉이 속으로 생각하며 모른척 웃으며 답했다. “응, 내가 어릴 때 맺은 대부 대모셔. 비교적 먼데 사셔서 평소에는 거의 경성에 안 오시는데 나랑은 정이 아주 깊어서 나도 그냥 그분들을 아빠 엄마라고 불러.”사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인사를 잘 드려야겠네요.”“그럼, 고마워. 사식아!” 원경릉이 웃었다. 기쁨으로 마음이 두근거렸다. 아빠 엄마가 올 수 있다니 정말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행복했다.우문호가 간 다음 날 오후에 문지기와 녹주가 들어와 보고했다. “태자비 마마,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오십니다.”원경릉은 막 계란이 낮잠을 재우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살짝 당황했다. ‘이렇게나 빨리? 아빠 엄마가 산에서 쉬지 않고 오셔도 경성까지 오시려면 적어도 오늘 밤은 돼야 도착하실 텐데.’하지만 기쁨과 설렘이 모든 것을 이기고 서둘러 산만해진 머리를 정리하며 겉옷을 입고 달려 나갔다.흥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해 발걸음마저 날아갈 것만 같았다.복도를 돌아 본관에 가니 하인들이 원경릉의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기쁨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바뀌었다.알고보니 정후와 황 씨로 원래 몸의 주인인 원경릉의 부모였다.그들은 감쪽같이 몸을 감춘 뒤 한동안 나타나지 않아서 원경릉은 두 사람이 외지에서 죽었다고
사고를 치면 숨었다가 잠잠해지자 돌아와서는 국구가 되려 하다니, 정후의 이런 기회주의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황 씨는 그런 정후 곁에 있으면서 정후를 대신해 온갖 풍상을 다 대신 맞았는지 정후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원경릉은 두 사람을 맞아들였는데, 보통은 몇 마디 더 인사를 나누지만 사람을 시켜 정후부로 바로 데리고 가라고 했다. 하지만 정후는 계속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토로하기 바빴다. 여러 지방을 전전하면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조정에서 자신을 찾아 괴롭힐까 봐 농촌을 골라 찾아다니고 제대로 못 먹고 못 입고 집도 너무 누추해서 정말 거지만도 못한 삶이었다고 했다.정후는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멀쩡한 성인 남자가 본관에서 울기 시작하다니 말이 아니였다. 정후가 울자, 황 씨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따라서 우는데,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올 정도로 세상이 곧 무너질 듯이 울었다.원경릉은 그들의 한심한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명목상 부모이니 돌아서지 못하고 옆에서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후가 한 말은 모두 원경릉에게 다짐한 것이었는데 원경릉은 이 또한 따지지 않았다.하지만 정후는 갈수록 심하게 울었고, 황 씨도 한바탕 울더니 눈물을 닦고 수심 어린 표정으로 옆에 앉아 천천히 다시 정신을 차렸다. 모두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정후가 울고 난 뒤 원경릉의 머릿속에는 두 사람이 몇 년간 지내온 장면들이 상당히 현실감 있게 주마등처럼 지나갔다.정후 부부는 이전에 고지의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키우게 하고, 정후는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황씨와 농촌에 숨어서 지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위험이 느껴지지 않자, 전후는 다시 나쁜 버릇이 도져서 농촌의 과부와 가까이 지내고 마을 아낙과 빈번하게 왕래했던 것이다. 얼핏보면 숨어 다니는 것 같지만 갈 때 은자를 한 무더기 가지고 가서 사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정후가 생긴 건 멀쩡해서 도화살이 늘 따라다녔다. 그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
풍도성 안은 술잔을 주고받고 건배하며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안지여는 오늘 황금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에 거대한 이무기를 수놓았으며, 황실의 밝은 황색과는 약간 구별되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곤룡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과 매우 흡사했다.안지여는 자신의 야심을 이미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당연히 안지여는 오늘도 야심을 감출 생각 없이 손님들에게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인근 지역 조정 관리들이 손님으로 왔어도 안지여는 전부터 맺어온 관계였기에,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두터워 산 넘고 물 건너 저 멀리 있는 황제가 그들을 시시콜콜 관리할 수 없었다.그 자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황실에서 파견한 일행이 온다는 것을 알고, 연회석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듣자하니 안풍 친왕 전하와 이리 부마께서 오늘 오신다던데 어째서 안 보입니까?”안지여가 잔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면 결국 오겠지요.”“여정을 듣기론 오늘 분명 풍도성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밤이 되도록 아직 안 보입니까? 설마 성주님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성주님이 가서 맞이하셔야 한다고? 아주 허세가 대단한데? 퉤!”“누가 아니랍니까?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하는 거였으면 며칠 전에 풍도성에 도착해 성의를 보여야지, 오늘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늦게서야 와서, 아직도 잔치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성주님의 체면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행태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들어오게 막고 돌려보내시지요, 마음만 받은 셈 치고요. ”“맞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풍도성에서 받은 공물이 적지 않았으니, 만족한 줄도 알아야죠.”“풍도성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 없어요. 뭐 때문에 그럽니까? 수백 년 전에 풍도성은 원래 북당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선을 긋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모두 안지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몇 잔 들어가자, 비위를
소여쌍의 욕은 거의 반 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도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 무쌍거 사람들은 다 익숙해져 있었다. 성주가 오지 않거나 소여쌍이 아프기 시작해도 이렇게 욕을 해댔다.욕하다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늙은 몸종이 가서 달랬다. “부인 그러실 게 뭐가 있으십니까? 몸이 가장 중하십니다.”소여쌍이 의자에 기대 늘어졌다. 극도로 피곤해 풀린 눈으로 천정을 보며 비참함이 가슴 깊은 곳을 타고 내렸다. “오늘이 초엿새지?”“네!” 늙은 몸종이 대답했다.소여쌍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곧 15일이구나. 또 내 명을 재촉하는 고통이 오겠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그러자 늙은 몸종도 매우 괴로워했다. “부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고통도 며칠이면 그럭저럭 지나가서, 그동안도 그렇게 지내셨잖아요?”“며칠이면 뭐 그럭저럭 지나가나?” 소여쌍이 잔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네가 이 고통을 안 당해봐서 그래. 이게 다 이리봉청 그년 짓이야. 오빠가 그년을 쫓아가서 죽이게 한 걸 정말 후회해. 그년을 잡아 와서 가두고 내가 한 번씩 아플 때마다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나보다 수천 수백 배 고통스럽게 해야 했어.”늙은 몸종이 소여쌍의 손을 쥐었다. “부인 그런 생각 마세요. 벌써 죽은 사람을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성주님과 자꾸 다투지 마세요. 자꾸 다투시다 보면 감정이 사라집니다.”소여쌍이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진작부터 나한테 아무 감정 없어.”“성주님은 이리봉청에게 아무 감정 없으세요. 감정이 있을 리도 없고요. 안 그러면 당시 부인을 위해 이리봉청을 죽이고 천문 세가 사람을 다 죽이셨을 리가 없죠.”소여쌍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전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 몇 년간, 성에 들어온 여자들 생긴 걸 보라고. 전부 이리봉청을 쏙 빼닮았잖아? 오빠는 역시 후회하고 있는 거야. 날 위해 이리봉청을 죽인 걸.”소여쌍은 늙은 몸종의 손을 잡는데 고여서 썩
안지여는 소야쌍을 놓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이틀 뒤가 내 생일인데, 당신 몸 상태는 어때?”그러자 소여쌍은 시녀의 손을 뿌리치고 얼른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 했는데, 몇 걸음 만에 휘청거리더니 하마터면 안지여 뒤로 넘어질 뻔했다.안지여는 소여쌍을 잡아줄 수 있었지만, 손을 뻗지 않고 그녀를 등지며 보이지 않는 척했다.시녀는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얼른 소여쌍을 부축해 바닥에 넘어지는 것까지 막았다.소여쌍이 숨을 돌리고 살짝 웃었다. “몸이 많이 좋아져서 오빠 곁에 있을 수 있어요. 오빠 생일에 당연히 제가 곁에 있어야죠.”안지여는 그제야 소여쌍을 돌아봤다. “생일엔 손님이 많이 올 거야, 올해는 다른 어떤 해보다 성대하게 하니까 당신도 잘 차려입어. 내가 내일 사람을 시켜 장신구를 보내도록 하지.”“네, 알았어요!” 소여쌍이 기쁜 듯이 말하며 안지여를 한없이 바라봤다.하지만 안지여는 소여쌍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정 설명했고 체면도 차렸으니 됐다 싶어 말했다. “난 아직 일이 있어서. 당신 쉬는 걸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잘 쉬고 있어.”안지여는 말을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려고 했다.이때 소여쌍이 갑자기 닭발 같은 손을 뻗어 안지여의 팔을 붙잡으며 서둘렀다. “오빠, 어렵사리 왔는데 저랑 얘기 좀 더 해요.”안지여가 고개를 숙이고 소여쌍의 마르고 늙은 손을 바라봤다. 손등에 주름이 자글거리는 것이 구겨진 비단 뭉치처럼 너무 흉해서 혐오감이 든 나머지 쓱 손을 뺐다. “말했잖아, 일이 바쁘다고.”소여쌍의 눈빛이 갑자기 매서워지며, 늙고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이 바쁜 거예요, 아니면 그 여우 년을 찾아가는 거예요?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여자를 성에 얼마나 숨겨놨는지.”안지여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소여쌍이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축 처진 눈에서 원한이 쏟아져 나왔다. “제가 늙었다고 싫어하는 거잖아요, 아녜요? 잊지 마세요. 오빠의 동안도 결국 늙는다고요. 이리봉청이 아직 살아있어도 지금 저보다
안지여의 생일잔치에 상인, 인근 주와 현의 관리, 무림 사람들, 강호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안지여는 그동안 사교의 폭이 넓고, 각계각층 인사들과 교분을 맺고 있어 이번에 생일잔치란 이름을 빌려 그들 모두 한자리에 모아 대사를 논의하고자 했다.안지여는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 전에 시기를 놓치고 이제 우문호가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이때가 대사를 치를 적기였다.우문호가 몇 년 더 북당을 다스리고 나면 그에게 더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몰랐다.그래서 조정이 사람을 파견한다는 소식에 그는 기뻤다. 이를 빌미로 조정에 본때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천문 세가의 무덤도 생일잔치 후 태워버릴 계획으로, 물론 완벽한 구실을 붙여 백성들에게 설명할 생각이었다.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온 건, 안지여에게 아주 완벽한 빌미를 제공해 주는 셈이었다. 모든 것을 이리 부마 탓으로 돌리고 백성들에게 조정이 저지른 일이라고 알리면 천문 세가를 그토록 떠받들던 풍도성 백성들은 조정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안지여는 부마 이리율을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그의 내력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부이자 늑대파 문주라고 했으나 그건 전부 민간에 있을 때 신분에 불과했다. 결국 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는 길을 택한 이 사람은 극도로 지위와 재산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을 다루기 어렵지 않은 건, 안지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부마 이리율의 마음 저 밑엔 상인이란 출신을 벗어던지고 상류 계층에 들어 후작 세가가 된 후 2~3세대가 지나면 철저하게 이전 상인의 신분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목표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생일까지 아직 이틀 남았다.안지여는 두번 다시 소여쌍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한번은 가야 했다. 그의 생일잔치에 소여쌍이란 성주 부인이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성주 부부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해서,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허상을 심어주려는 것뿐이었다.소여쌍은 풍도성 동쪽 무쌍거에 살고 있었다. 혼인하던 그해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