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왕은 가끔 넷째를 들쑤셨지만 집요하게 그런 것도 아니라 다들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우문호는 또 의견 분열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어 인사말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바마마 병문안을 갔었는데 매화장 일로 괴로워하시고 영 불쾌해하시다가 쓰러지신 게 확실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몇십만 냥을 모아 아바마마께 드리고 마음의 병을 없애 드리는 건 어떨까요?”손왕이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그건 물론 아무 문제 없어. 얼마를 모아야 하든지 우리 형제들이 나누면 되니까.”회왕도 문제없고, 제왕도 어렵지 않다고 했다. 아홉째도 좀 힘들지만 알았다고 했고 위왕은 자세를 바로 하고 앉더니 응했다. “내가 지금 탈탈 털어서 50냥밖에 없지만 전부 내긴 할게.”위왕은 정말 전 재산을 정화 군주에게 주었다. 일곱째 쪽에서 제대로 했는지는 아직 확답이 없지만 위왕은 이미 빈털터리로, 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넷째 너는?” 손왕이 안왕에게 물었다.안왕은 마음속으로 주판을 굴리더니, 은자를 줘서 아바마마께서 좋아지시면 반드시 퇴위하지 않으실지도 모른다. 안왕이 얼른 대답했다. “전 당연히 문제없습니다. 아바마마께서 나으시길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까요.”우문호는 한시름 놨다. 원래는 상당히 어려울 줄 알았는데 다들 이렇게 호탕했다니 오히려 자신이 소심해서 다들 와서 상의하자고 불렀구나 싶었다.하지만 방금 둘째 형 말을 떠올리고, 넷째가 아마도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아 위로했다. “앞으로 우리 형제가 좀 자주 모여서 이렇게 같이 얘기도 하고 해야겠어요. 감정이 너무 소원하지 않게. 제가 어떤 사람인지 다들 잘 아시겠지만, 한 마음으로 북당을 위한다면 절대로 적이 될 리 없습니다. 평생 말이죠.”이 말은 분명 안왕을 상대로 한 것으로 안왕도 알아듣고 순간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가 태자였으면 절대로 저렇게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안왕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째가 어질다는 명성은 만들어낸 게 아니라 떳떳한 평가라는 사실을
원경릉마저 상당히 감동했다. 이 힘든 길을 걸어온 본인들이 참 뿌듯해졌다. 80만 냥 지폐를 명원제 수중에 전하자 명원제가 30만 냥만 꺼내고 나머지는 전부 우문호에게 돌려줬다. “가져가, 보위에 오를 때 혼사를 치를 테니 체면을 살려야지. 국고나 내탕고의 은자 쓰지 말고.”황제의 황후 책봉례이므로 국고에서 은자를 지출해도 되지만 명원제는 황실 일은 국고의 은자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았고, 우문호도 그러길 바랐다.우문호는 50만 냥 지폐를 들고 엉거주춤하게 말했다. “이건 모두의 효심을 아바마마께 표현한 것으로 소자는 받을 수 없습니다.”명원제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져가서 아내에게 좀 좋은 걸 사줘. 그동안 솔직히 너무 홀대했어. 태자비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원래 내가 자식들에게 50만 냥을 모아오라고 시킨 건 그중 일부를 네 혼사에 쓰고 싶어서였어. 전에 너한테 준 돈은 쓸 수 없으니까. 알겠느냐?”우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소자 받을 수 없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이 은자가 필요 없으시면 소자가 형제들에게 돌려주겠습니다.”명원제가 기각 막혀 냅다 화를 냈다. “넌 머리에 두부만 들었냐? 저들은 은자가 안 부족해. 은자가 없는 건 너라고. 이건 내가 널 위해 하는 마지막 일이야. 넌 그냥 가져가면 돼. 네가 필요 없으면 짐도 며느리에게 내리도록 하지. 태자비를 더는 초라하게 하지 마라. 황실의 왕비가 누려야 할 부귀영화를 태자비는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어. 오히려 매일 걱정 근심에 종종거리며 집안일과 나랏일을 생각해 왔지. 근데 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우문호는 눈가가 뜨거워져서 꿇어앉아 감사 인사를 올렸다. “아바마마, 손자 원 선생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명원제 얼굴이 그제서야 화색이 돌며 우문호를 일으켰다. “그럴 필요 없다네. 우리 우문씨 집안이 태자비에게 빚을 졌지. 태자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 주거라. 태상황 폐하를 구한 것을 시작으로 우리 우문씨 집안의 역량이 비로소 하나도 응집되기 시작했어. 짐도 태자비 영향을 받았
우문호가 이 일을 형제들에게 얘기하자 다들 은자는 이미 내놓은 것이니 아바마마께서 누구에게 주시든 자신들은 다시 가져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명원제 말대로 안왕은 오히려 안색이 상당히 밝아진 것이 전에 근심하던 얼굴은 거의 없어졌다.그리고 우문호와 원경릉은 장모님 일행을 어떻게 데리고 올지 상의했다. 사실 경호로 편지를 보내 물어보면 되지만 우문호는 역시 직접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는 이 일에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서일은 믿음이 안 가서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걱정됐다. 그래서 탕양에게 만두를 데리고 다녀오라고 했는데, 만두가 경호를 통해 현대로 간 뒤 원경릉 가족 일행을 모시고 같이 오면 된다. 대관식까지는 아직 보름 남짓이나 남았지만, 휴가를 낼 수 있으면 좀 일찍 오고 만약 안 되면 만두가 거기서 며칠 더 머무루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집을 정리하고, 가구와 이불을 새것으로 바꾸고, 옷도 몇 벌 맞춰야 했기에 우문호는 요 며칠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다. 다행히 원경릉이 가족들의 치수를 대략 알아서 미리 사람을 시켜 만들도록 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원경릉은 직접 숙왕부에 찾아가 태상황 일행에게 알렸는데, 태상황이 특히나 기뻐했다.전부터 그들이 혼례에 참석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곧 다가오니 상당히 기대되는 모양이었다.태상황이 소요공과 주 재상에게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에 우리도 주인의 도리를 다 해야지. 잘 먹고 마시고 우리 북당의 자연과 인정, 신선한 문화에 견문을 좀 넓혀 드려야겠어.”원경릉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잘 준비할게요.”그러자 태상황이 고개를 연신 저었다. “네가 할 필요 없다. 이 일은 우리 셋이 하도록 하지. 어쨌든 너도 혼자 낯선 곳에 떨어져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을까. 너희들은 나중에 바쁠 테니 그분들과 동행하는 일은 우리에게 맡기거라.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말이다.”원경릉이 방긋 웃었다. “제
“당연히 좋죠, 먹고 마시고 노는 거 전부 평남왕 은자로 쓰는 거니까요.” 주 재상이 웃으며 말했다.주 재상의 말에 이해하는 사람들 모두 듣자마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샥!바로 그때 제왕이 초왕부로 들어서며 큰 소리로 위왕을 찾았다. “셋째 형, 동생 술 한잔 사셔야겠어요!”제왕의 목소리를 듣고 위왕이 복도에서 머리를 내밀더니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답했다. “잘 됐느냐? 정화가 뭐라 하였느냐?”“정화 군주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지만, 처리 수속에 협조해 주셨습니다. 이제 정화 군주는 경성에서 제법 돈 많은 부인이 되실 겁니다. 하하하!” 제왕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위왕이 살짝 안도하더니 이내 안색이 환해졌다. “그거 잘됐네, 잘된 일이야!”위왕은 순간 눈물을 글썽일 뻔했다. 정화가 받아줬으니 이제 마음이 좀 편해진 듯 했다.“다섯째 형!” 제왕이 뒤를 돌아 우문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뻐서 소리쳤다. “셋째 형이 우리 술 사준데요. 어디로 갈까요?”우문호가 눈을 치켜뜨더니 퉁명스럽게 답했다. “안 가!”“안 간다고요?” 제왕이 팔꿈치로 우문호를 쓱 치며 유혹했다. “셋째 형이 사주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인데, 너무 체면을 무시하시는 거 아녜요?”우문호가 웃는 둥 마는 둥 하고 제왕에게 말했다. “그날 못 들었어? 탈탈 털어서 이제 50냥밖에 없다고 했잖아, 술값을 누가 계산할지 모른다고!”그러자 위왕이 화를 냈다. “이 쩨쩨하고 인색한 놈아, 공으로 몇십만 냥이나 벌었으면서 우리 술 한 잔도 못 사주는 것이냐?!”우문호는 쩨쩨하고 인색한 본색을 발휘했다. “그건 아바마마께서 제게 황후 책봉례 하는 데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전 못 써요.”“어디 그렇게 궁상떨어 봐라, 책봉례를 할 때 대체 누가 너한테 축의금을 주겠느냐!” 위왕이 씩씩거렸다.제왕이 대범하게 상황을 중단 시켰다. “제가 살 테니 싸우지들 마세요. 한동안 같이 술 마신 적 없으니깐 둘째 형들도 부르고, 냉 대인이랑 홍엽, 구사도 부르지요.”안에서 원경릉이 이 말을 듣
하지만 황후의 상황에서 보면 걱정할 만했다. 이제 주 재상도 물러났고 주씨 집안은 조정에서 거의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데다가 자기 아들 하나는 바보고 하나는 멍청해서 차마 기댈 수도 없었다.법도에 따라서는 황후가 당연히 황태후가 되는 게 맞지만 문제는 태자에게는 죽은 생모 외에도 황귀비라는 어마마마가 있는 것이다. 황태후를 봉할 때 낳은 어미 하나, 자신을 길러준 어미가 또 하나 있는데 황후가 여기서 뭐가 될 수 있을까?더불어 이전에 원한 관계를 맺었던 일도 마음속에 남아 있었기에 황후는 원용의가 입궐해 병수발을 들 때 하소연을 했다. 만약 자신이 황태후로 책봉 받지 못하면 죽느니만 못하다며 말이다.원용의는 황후의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황후는 태자비에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황후가 하소연을 마치자 원용의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며느리가 함부로 나설 수는 없지만 그리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황후가 원용의의 손을 잡았는데, 눈이 빨개져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전에 그들을 홀대했던 것을 잘 안다. 허나 이제 전부 과거 아니느냐. 태자비는 절도 있고 뒤끝이 없는 자라고 해서 만 번은 두렵지 않다가도 또 이내 두려워지는구나. 너는 안 그러느냐?”원용의가 황후에게 말했다. “어마마마, 과거에 그들을 홀대하셨다는 것을 깨달으셨으니 지금 고치셔도 늦지 않았습니다.”황후가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고친단 말이야? 내가 아랫사람에게 사과할 수는 없지 않은가.”원용의의 얼굴엔 미소가 있었지만 말투는 쌀쌀했다. “불안하시다니 사과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겁니다. 강산의 주인이 바뀌어 앞으로 이 북당 천하는 태자의 수중에 들어갑니다. 마마께서는 새 임금에게 사과하는 것이니 신분에 욕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과하시면 태자도 과거 일을 다시 들추지 않을 것입니다. 안 그러면 소인배 불효자가 될 테니까요.”황후는 가만히 듣고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체면을 구기기는 싫었다. 또한, 엄격하게 따져보면 그
위왕은 골목에 서서 눈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는 여자를 좇고 있었다. 그 여자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외모가 몹시 아름다웠다. 마침 살짝 허리를 숙여 맞은 편 아이와 얘기하고 있었는데,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색이 물씬거렸다. 눈썹은 산줄기 같고 코는 오똑하며 분을 바르지 않았지만 맑고 아름다운 자태가 흘렀다. 하지만 눈빛만은 강인하고 신중해 보였다.그 여자를 바라보는 위왕의 눈빛을 보고 주 아가씨는 저 여자가 정화 군주라는 것을 순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주 아가씨는 항상 정화 군주가 어쩌면 아주 뛰어나게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나 단아하고 순결한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치 가슴에 강한 일격을 맞는 것 같았다.고요한 물 같은 정화 군주의 자태는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띌 정도였다. 주 아가씨는 지금까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바로 해 버리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쟁취하려고 노력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녀를 보자 이런 분위기는 절대 자신이 가질 수 없는거라 느껴 자신이 졌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주 아가씨는 위왕과 같이 가만히 정화 군주가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삐를 쥐고 있느라 말이 그 자리에서 뱅뱅 돌았다.위왕이 주 아가씨를 보고 앞으로 다가왔고, 주 아가씨는 위에서 그를 내려다봤는데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이 남자를 얻고 싶지만, 평생 불가능하다.위왕이 주 아가씨에게 말했다. “강북부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나중에 할아버지 말씀대로 네 사람을 데리고 약도성으로 가. 이제 거기는 우리 북당의 영토이다. 넌 늘 자신이 남자와 다를 게 없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으니 어디 약도성으로 가서 모두가 보게 증명해 보던지!”주 아가씨는 차갑고 냉정하게 위왕을 보았다. “저한테 전하 조카를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게 시키시고 싶으신
우문호는 위왕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위왕을 끌고 서재로 들어갔다.위왕은 우문호에게 잡힌 옷 자국을 툭툭 털어 주름을 편 뒤 불만스럽게 얼굴을 찡그리고 말했다. “옷 찢어졌음 네가 물어내!”우문호가 위왕을 보고 한참 있다가 말을 꺼냈다. “변했어요. 형!”위왕이 자리에 앉더니 느긋하게 말했다. “변하긴 뭐가 변해? 예전에 가난했다고 해도 되지만 지금 가난하다고 하면 안 될 뿐인데?”우문호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놀랐다. “그 얘기가 아니라 호명이가 그러는데 형이 주 아가씨한테 사람을 데리고 약도성으로 가라고 했다면서요. 무슨 뜻이죠? 엄청나게 달라붙어서 안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주 아가씨를 약도성으로 뭐 하러 보낸 거예요?”위왕이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두었다. “착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는 집념으로 약도성에 가면 크게 쓰일 데가 있지. 약도성은 계란이가 분봉받은 도시로 앞으로 네가 계란이는 안 보낸다고 해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먼저 진주해서 호 대장군과 합을 맞추거나 서로 감독해야 해. 호 대장군은 주 아가씨의 적수가 못 돼. 왜냐하면 주 아가씨는 호비 마마와 성격이 똑같거든. 호 대장군은 이런 성정을 가진 사람을 안을 수 있어.”우문호는 의외라고 생각이들어 다시금 놀랐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주 아가씨를 믿을 수 있다는 거예요?”위왕이 방긋 웃었다. “주 아가씨는 성격이 솔직하고 고집스러워서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는 집념이 있지. 무언가를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치 않아. 이런 성격은 주 아가씨의 외할아버지를 닮았어. 내가 주 아가씨와 알고 지내면서 성격을 관찰한 결과야. 난 주 아가씨를 믿을 수 있어.”“주 아가씨 외할아버지가 누구신데요?” 우문호가 물었다.“오위진, 주 아가씨는 오위진의 막내 외손녀이면서 가장 사랑받은 사람이지.”“아, 그 사람이었어요?” 우문호는 오위진을 알고 있었다. 오위진은 이전에 대리시에 있다가 나중에 병부로 옮겨 안풍 친왕을 따랐던 사람으로, 나중에 태상황 폐하가 보위를 잇자 강북
며칠 전 직조처 사람이 디자인을 정하고 명원제에게 시안을 올렸다. 길복은 곤복, 곤룡포, 예복을 포함한 것으로 전부 바로 준비해야 했다. 편복은 길복과 달리 천천히 준비해도 되지만 강녕직조부는 서둘러 황제가 쓸 채색 비단, 능라, 망사, 비단실을 경성으로 보내기 위해 수백 명의 직조사가 밤낮없이 일하게 하며 반드시 길일 전에 새 황제와 황후의 길복을 만들어내도록 했다.이 일에는 내무부의 공이 제일 컸다. 회왕은 본래 마음만 있고 행동으로 안 움직이는 사람으로, 부임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큰 행사를 치른 경험이 없었지만 다행히 뒤에 미색이란 늑대파 이인자가 있었기에 잘 마루리 할 수 있었다. 미색이 막후에서 모든 일을 기획하고 늑대파가 빈번하게 출동해 미색을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채색 비단과 비단실을 신속하게 경성으로 운송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들 덕분이었다.우문호와 원경릉의 의상 외에 황태손, 황손, 군주의 옷도 새로 짓기 시작했다. 황제가 보위에 오르면 먼저 태상황과 황태후를 책봉한 다음, 아이들 차례가 오기 때문이다.제왕의 경조부는 경성의 치안을 담당해 야간 통행금지를 필두로 순찰을 강화했고, 위왕도 가세해경성 각처의 객잔은 인명 조사를 실시해 수상한 사람은 일률적으로 경성에서 쫓아내며 제왕의 부담을 일부 덜어주었다.손왕의 홍려시도 바쁘게 귀빈 접대를 준비했다.순왕과 만아는 성 밖 일대를 순찰하며 의심스러운 자가 있는지 살폈고, 안왕까지 가만 있지 않고 집안 병사들을 데리고 각 마을을 조사하며 다녔다.그들과 반대로 우문호는 한가했다. 다행히 요 며칠은 나라에 별반 큰 일이 발생하지 않았고, 냉 재상과 홍엽이 죽이 잘 맞아서 조정의 업무 8~9할을 다 처리했으므로 우문호는 상소를 보며 비준이나 했다.귀빈 중에서 가장 먼저 당도한 것은 대주의 사자로 진정정 부부가 아들을 데리고 왔다.우문호 진정정 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홍려시의 손왕과 같이 나가 기쁘게 맞이하고는 그들을 바로 객잔에 묵게 하지 않고 서재로 불렀다. 우문호와 손왕은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
풍도성 안은 술잔을 주고받고 건배하며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안지여는 오늘 황금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에 거대한 이무기를 수놓았으며, 황실의 밝은 황색과는 약간 구별되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곤룡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과 매우 흡사했다.안지여는 자신의 야심을 이미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당연히 안지여는 오늘도 야심을 감출 생각 없이 손님들에게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인근 지역 조정 관리들이 손님으로 왔어도 안지여는 전부터 맺어온 관계였기에,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두터워 산 넘고 물 건너 저 멀리 있는 황제가 그들을 시시콜콜 관리할 수 없었다.그 자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황실에서 파견한 일행이 온다는 것을 알고, 연회석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듣자하니 안풍 친왕 전하와 이리 부마께서 오늘 오신다던데 어째서 안 보입니까?”안지여가 잔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면 결국 오겠지요.”“여정을 듣기론 오늘 분명 풍도성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밤이 되도록 아직 안 보입니까? 설마 성주님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성주님이 가서 맞이하셔야 한다고? 아주 허세가 대단한데? 퉤!”“누가 아니랍니까?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하는 거였으면 며칠 전에 풍도성에 도착해 성의를 보여야지, 오늘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늦게서야 와서, 아직도 잔치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성주님의 체면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행태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들어오게 막고 돌려보내시지요, 마음만 받은 셈 치고요. ”“맞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풍도성에서 받은 공물이 적지 않았으니, 만족한 줄도 알아야죠.”“풍도성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 없어요. 뭐 때문에 그럽니까? 수백 년 전에 풍도성은 원래 북당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선을 긋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모두 안지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몇 잔 들어가자, 비위를
소여쌍의 욕은 거의 반 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도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 무쌍거 사람들은 다 익숙해져 있었다. 성주가 오지 않거나 소여쌍이 아프기 시작해도 이렇게 욕을 해댔다.욕하다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늙은 몸종이 가서 달랬다. “부인 그러실 게 뭐가 있으십니까? 몸이 가장 중하십니다.”소여쌍이 의자에 기대 늘어졌다. 극도로 피곤해 풀린 눈으로 천정을 보며 비참함이 가슴 깊은 곳을 타고 내렸다. “오늘이 초엿새지?”“네!” 늙은 몸종이 대답했다.소여쌍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곧 15일이구나. 또 내 명을 재촉하는 고통이 오겠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그러자 늙은 몸종도 매우 괴로워했다. “부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고통도 며칠이면 그럭저럭 지나가서, 그동안도 그렇게 지내셨잖아요?”“며칠이면 뭐 그럭저럭 지나가나?” 소여쌍이 잔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네가 이 고통을 안 당해봐서 그래. 이게 다 이리봉청 그년 짓이야. 오빠가 그년을 쫓아가서 죽이게 한 걸 정말 후회해. 그년을 잡아 와서 가두고 내가 한 번씩 아플 때마다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나보다 수천 수백 배 고통스럽게 해야 했어.”늙은 몸종이 소여쌍의 손을 쥐었다. “부인 그런 생각 마세요. 벌써 죽은 사람을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성주님과 자꾸 다투지 마세요. 자꾸 다투시다 보면 감정이 사라집니다.”소여쌍이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진작부터 나한테 아무 감정 없어.”“성주님은 이리봉청에게 아무 감정 없으세요. 감정이 있을 리도 없고요. 안 그러면 당시 부인을 위해 이리봉청을 죽이고 천문 세가 사람을 다 죽이셨을 리가 없죠.”소여쌍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전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 몇 년간, 성에 들어온 여자들 생긴 걸 보라고. 전부 이리봉청을 쏙 빼닮았잖아? 오빠는 역시 후회하고 있는 거야. 날 위해 이리봉청을 죽인 걸.”소여쌍은 늙은 몸종의 손을 잡는데 고여서 썩
안지여는 소야쌍을 놓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이틀 뒤가 내 생일인데, 당신 몸 상태는 어때?”그러자 소여쌍은 시녀의 손을 뿌리치고 얼른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 했는데, 몇 걸음 만에 휘청거리더니 하마터면 안지여 뒤로 넘어질 뻔했다.안지여는 소여쌍을 잡아줄 수 있었지만, 손을 뻗지 않고 그녀를 등지며 보이지 않는 척했다.시녀는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얼른 소여쌍을 부축해 바닥에 넘어지는 것까지 막았다.소여쌍이 숨을 돌리고 살짝 웃었다. “몸이 많이 좋아져서 오빠 곁에 있을 수 있어요. 오빠 생일에 당연히 제가 곁에 있어야죠.”안지여는 그제야 소여쌍을 돌아봤다. “생일엔 손님이 많이 올 거야, 올해는 다른 어떤 해보다 성대하게 하니까 당신도 잘 차려입어. 내가 내일 사람을 시켜 장신구를 보내도록 하지.”“네, 알았어요!” 소여쌍이 기쁜 듯이 말하며 안지여를 한없이 바라봤다.하지만 안지여는 소여쌍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정 설명했고 체면도 차렸으니 됐다 싶어 말했다. “난 아직 일이 있어서. 당신 쉬는 걸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잘 쉬고 있어.”안지여는 말을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려고 했다.이때 소여쌍이 갑자기 닭발 같은 손을 뻗어 안지여의 팔을 붙잡으며 서둘렀다. “오빠, 어렵사리 왔는데 저랑 얘기 좀 더 해요.”안지여가 고개를 숙이고 소여쌍의 마르고 늙은 손을 바라봤다. 손등에 주름이 자글거리는 것이 구겨진 비단 뭉치처럼 너무 흉해서 혐오감이 든 나머지 쓱 손을 뺐다. “말했잖아, 일이 바쁘다고.”소여쌍의 눈빛이 갑자기 매서워지며, 늙고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이 바쁜 거예요, 아니면 그 여우 년을 찾아가는 거예요?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여자를 성에 얼마나 숨겨놨는지.”안지여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소여쌍이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축 처진 눈에서 원한이 쏟아져 나왔다. “제가 늙었다고 싫어하는 거잖아요, 아녜요? 잊지 마세요. 오빠의 동안도 결국 늙는다고요. 이리봉청이 아직 살아있어도 지금 저보다
안지여의 생일잔치에 상인, 인근 주와 현의 관리, 무림 사람들, 강호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안지여는 그동안 사교의 폭이 넓고, 각계각층 인사들과 교분을 맺고 있어 이번에 생일잔치란 이름을 빌려 그들 모두 한자리에 모아 대사를 논의하고자 했다.안지여는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 전에 시기를 놓치고 이제 우문호가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이때가 대사를 치를 적기였다.우문호가 몇 년 더 북당을 다스리고 나면 그에게 더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몰랐다.그래서 조정이 사람을 파견한다는 소식에 그는 기뻤다. 이를 빌미로 조정에 본때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천문 세가의 무덤도 생일잔치 후 태워버릴 계획으로, 물론 완벽한 구실을 붙여 백성들에게 설명할 생각이었다.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온 건, 안지여에게 아주 완벽한 빌미를 제공해 주는 셈이었다. 모든 것을 이리 부마 탓으로 돌리고 백성들에게 조정이 저지른 일이라고 알리면 천문 세가를 그토록 떠받들던 풍도성 백성들은 조정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안지여는 부마 이리율을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그의 내력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부이자 늑대파 문주라고 했으나 그건 전부 민간에 있을 때 신분에 불과했다. 결국 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는 길을 택한 이 사람은 극도로 지위와 재산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을 다루기 어렵지 않은 건, 안지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부마 이리율의 마음 저 밑엔 상인이란 출신을 벗어던지고 상류 계층에 들어 후작 세가가 된 후 2~3세대가 지나면 철저하게 이전 상인의 신분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목표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생일까지 아직 이틀 남았다.안지여는 두번 다시 소여쌍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한번은 가야 했다. 그의 생일잔치에 소여쌍이란 성주 부인이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성주 부부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해서,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허상을 심어주려는 것뿐이었다.소여쌍은 풍도성 동쪽 무쌍거에 살고 있었다. 혼인하던 그해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