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왕은 골목에 서서 눈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는 여자를 좇고 있었다. 그 여자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외모가 몹시 아름다웠다. 마침 살짝 허리를 숙여 맞은 편 아이와 얘기하고 있었는데,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색이 물씬거렸다. 눈썹은 산줄기 같고 코는 오똑하며 분을 바르지 않았지만 맑고 아름다운 자태가 흘렀다. 하지만 눈빛만은 강인하고 신중해 보였다.그 여자를 바라보는 위왕의 눈빛을 보고 주 아가씨는 저 여자가 정화 군주라는 것을 순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주 아가씨는 항상 정화 군주가 어쩌면 아주 뛰어나게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나 단아하고 순결한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치 가슴에 강한 일격을 맞는 것 같았다.고요한 물 같은 정화 군주의 자태는 멀리서 봐도 한 눈에 띌 정도였다. 주 아가씨는 지금까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바로 해 버리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쟁취하려고 노력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녀를 보자 이런 분위기는 절대 자신이 가질 수 없는거라 느껴 자신이 졌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주 아가씨는 위왕과 같이 가만히 정화 군주가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삐를 쥐고 있느라 말이 그 자리에서 뱅뱅 돌았다.위왕이 주 아가씨를 보고 앞으로 다가왔고, 주 아가씨는 위에서 그를 내려다봤는데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이 남자를 얻고 싶지만, 평생 불가능하다.위왕이 주 아가씨에게 말했다. “강북부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나중에 할아버지 말씀대로 네 사람을 데리고 약도성으로 가. 이제 거기는 우리 북당의 영토이다. 넌 늘 자신이 남자와 다를 게 없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으니 어디 약도성으로 가서 모두가 보게 증명해 보던지!”주 아가씨는 차갑고 냉정하게 위왕을 보았다. “저한테 전하 조카를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게 시키시고 싶으신
우문호는 위왕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위왕을 끌고 서재로 들어갔다.위왕은 우문호에게 잡힌 옷 자국을 툭툭 털어 주름을 편 뒤 불만스럽게 얼굴을 찡그리고 말했다. “옷 찢어졌음 네가 물어내!”우문호가 위왕을 보고 한참 있다가 말을 꺼냈다. “변했어요. 형!”위왕이 자리에 앉더니 느긋하게 말했다. “변하긴 뭐가 변해? 예전에 가난했다고 해도 되지만 지금 가난하다고 하면 안 될 뿐인데?”우문호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놀랐다. “그 얘기가 아니라 호명이가 그러는데 형이 주 아가씨한테 사람을 데리고 약도성으로 가라고 했다면서요. 무슨 뜻이죠? 엄청나게 달라붙어서 안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주 아가씨를 약도성으로 뭐 하러 보낸 거예요?”위왕이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두었다. “착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는 집념으로 약도성에 가면 크게 쓰일 데가 있지. 약도성은 계란이가 분봉받은 도시로 앞으로 네가 계란이는 안 보낸다고 해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먼저 진주해서 호 대장군과 합을 맞추거나 서로 감독해야 해. 호 대장군은 주 아가씨의 적수가 못 돼. 왜냐하면 주 아가씨는 호비 마마와 성격이 똑같거든. 호 대장군은 이런 성정을 가진 사람을 안을 수 있어.”우문호는 의외라고 생각이들어 다시금 놀랐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주 아가씨를 믿을 수 있다는 거예요?”위왕이 방긋 웃었다. “주 아가씨는 성격이 솔직하고 고집스러워서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는 집념이 있지. 무언가를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치 않아. 이런 성격은 주 아가씨의 외할아버지를 닮았어. 내가 주 아가씨와 알고 지내면서 성격을 관찰한 결과야. 난 주 아가씨를 믿을 수 있어.”“주 아가씨 외할아버지가 누구신데요?” 우문호가 물었다.“오위진, 주 아가씨는 오위진의 막내 외손녀이면서 가장 사랑받은 사람이지.”“아, 그 사람이었어요?” 우문호는 오위진을 알고 있었다. 오위진은 이전에 대리시에 있다가 나중에 병부로 옮겨 안풍 친왕을 따랐던 사람으로, 나중에 태상황 폐하가 보위를 잇자 강북
며칠 전 직조처 사람이 디자인을 정하고 명원제에게 시안을 올렸다. 길복은 곤복, 곤룡포, 예복을 포함한 것으로 전부 바로 준비해야 했다. 편복은 길복과 달리 천천히 준비해도 되지만 강녕직조부는 서둘러 황제가 쓸 채색 비단, 능라, 망사, 비단실을 경성으로 보내기 위해 수백 명의 직조사가 밤낮없이 일하게 하며 반드시 길일 전에 새 황제와 황후의 길복을 만들어내도록 했다.이 일에는 내무부의 공이 제일 컸다. 회왕은 본래 마음만 있고 행동으로 안 움직이는 사람으로, 부임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큰 행사를 치른 경험이 없었지만 다행히 뒤에 미색이란 늑대파 이인자가 있었기에 잘 마루리 할 수 있었다. 미색이 막후에서 모든 일을 기획하고 늑대파가 빈번하게 출동해 미색을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채색 비단과 비단실을 신속하게 경성으로 운송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들 덕분이었다.우문호와 원경릉의 의상 외에 황태손, 황손, 군주의 옷도 새로 짓기 시작했다. 황제가 보위에 오르면 먼저 태상황과 황태후를 책봉한 다음, 아이들 차례가 오기 때문이다.제왕의 경조부는 경성의 치안을 담당해 야간 통행금지를 필두로 순찰을 강화했고, 위왕도 가세해경성 각처의 객잔은 인명 조사를 실시해 수상한 사람은 일률적으로 경성에서 쫓아내며 제왕의 부담을 일부 덜어주었다.손왕의 홍려시도 바쁘게 귀빈 접대를 준비했다.순왕과 만아는 성 밖 일대를 순찰하며 의심스러운 자가 있는지 살폈고, 안왕까지 가만 있지 않고 집안 병사들을 데리고 각 마을을 조사하며 다녔다.그들과 반대로 우문호는 한가했다. 다행히 요 며칠은 나라에 별반 큰 일이 발생하지 않았고, 냉 재상과 홍엽이 죽이 잘 맞아서 조정의 업무 8~9할을 다 처리했으므로 우문호는 상소를 보며 비준이나 했다.귀빈 중에서 가장 먼저 당도한 것은 대주의 사자로 진정정 부부가 아들을 데리고 왔다.우문호 진정정 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홍려시의 손왕과 같이 나가 기쁘게 맞이하고는 그들을 바로 객잔에 묵게 하지 않고 서재로 불렀다. 우문호와 손왕은
한편, 밖에서는 원경릉과 근영 군주가 아이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호두는 여동생이 태어난 걸 들은 뒤라, 뛸 듯이 기뻐하며 떡들과 쌍둥이와 어울려 여동생 주위를 맴돌며 놀았다.근영 군주는 아이들이 사이가 좋은 것을 보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호두가 오는 길에 여동생이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근영 군주 부부께서 호두 하나만 낳아서 좀 외로울 수도 있으니 이번에 온 김에 좀 오래 있다가 가요. 형제들과 떠들썩하게 지내게요.”근영 군주가 말했다. “호두는 하나도 안 외로울 거예요, 집에 놀게 한 무더기가 있는걸요! 하나뿐인 여동생인 만큼 소중할 수 밖에요.”원경릉이 호두를 보았는데, 동그란 눈이 아주 귀여운데다가 큰오빠다운 듬직한 느낌도 풍겼다. “계란이가 이렇게 많은 오빠의 사랑을 받으니 진짜 행복하겠네요.”근영 군주가 미소를 지었다. “오빠 말고도 여기 대모도 있잖아요. 태자비께서 동의하는 여부와 상관없이 계란이는 저와 정정의 딸인걸요.”근영이 말하며 계란이를 안아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사랑스러운 눈빛을 하며 말이다. 방금 들어올 때 근영 군주가 계란이를 안아 들었는데, 바로 근영 군주에게 방긋 웃는 모습에 근영 군주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사랑이 샘솟았다.원경릉이 방긋 웃었다. “그야 당연하죠. 전에 근영 군주가 호두를 가지고, 제가 우리 떡들을 가졌을 때 아들과 딸을 낳으면 부부로 맺어주자고 약속했잖아요. 딸이면 서로 자매가 되고, 아들이면 서로 형제가 되기로. 호두랑 우리 떡들은 형제고 계란이는 그들의 여동생이니 근영 군주가 대모인 건 도리상으로나 마음 상으로나 딱 맞네요!”근영 군주가 손가락으로 계란이의 볼을 살짝 만지자 계란이가 근영 군주의 손가락을 따라 손발을 꼼지락거리며 옷는데 분홍빛 잇몸이 다 드러나 정말 귀여웠다. 이 모습은 근영 군주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게 만들었다. “이번에 황제 대관식 때문에 온 거지만 난 우리 수양딸 때문에 왔나 봐요. 오길 잘했네,
왕비 합방하다북당(北唐), 초왕부(楚王府) 봉의각(鳳儀閣)일렁이는 촛불에 방안 곳곳에 붙여 놓은 낡은 붉은 ‘희(喜, 축 결혼)’종이가 비치고, 금박의 대조가 어슴푸레한 느낌을 떨쳐내는 가운데 벽에 한 쌍의 그림자가 떠오른다.원경릉(元卿淩)은 원하지 않는 것을 참고 또 참는 얼굴이다.결혼한지 어언 1년, 그는 원경릉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제 입궁했을 때 태후(太后)가 원경릉의 밋밋한 배를 보고 실망한 기색으로 후궁(侧妃)을 들이는 것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태후께 하는 수 없이 둘이 결혼한지 1년이 되었지만, 아직 합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원경릉은 울고불고 고자질하는 것이 싫었다. 그러니까 그냥, 내키지 않았을 뿐이다.13살에 처음 그를 본 이래, 마음을 온통 그에게 빼앗겨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결국 그의 정비가 되었다. 제 아무리 차가운 돌덩이라도 뜨겁게 타오르게 하리라 믿었건만, 그건 단단히 착각한 거였다.서로 부부이고, 낭군이 분명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단 한 가닥 연민조차 없이, 오히려 집착에 가까운 증오만 있을 뿐이었다.“윽……”마음 속에 알 수 없는 원망이 솟구치며 그녀는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선혈이 배어 나와 비릿한 피가 입안으로 방울져 들어갔다.그는 낮게 깔린 눈빛으로 훤칠한 몸을 일으켜, 한 손을 그녀의 얼굴 옆에 바짝 댄 채 얼음같이 냉정하게, “원경릉, 네가 바라던 대로 짐이 너와 합방했으니, 이제부터 짐은 너와 일체 타인이다.”원경릉은 절망과 슬픔의 웃음을 띄우며, “당신은 결국 절 미워하는군요.”푸른 옷자락 아래 초왕(楚王)의 건장한 몸매와 늘씬한 다리로 쭉 걷어차니, 탁자고 의자고 우당탕탕 넘어지며 물건이 사방에 떨어지고 깨지는 가운데 그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미워한다고? 당치도 않은 소릴. 짐은 네가 혐오스러워. 짐의 눈에 너는, 더러운 벌레만도 못한 존재야. 사람을 증오심에 불타게 한다고. 아니면 짐이 약의 힘까지 빌려 너와
두 명의 원경릉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약을 스스로에게 주사한 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 보니, 여기였다.그리고 머리 속에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본인의 기억과 서서히 뒤섞이기 시작했다. 정후(靜候)의 적녀(嫡女, 정실부인의 큰 딸) 원경릉은 초왕 우문호(宇文皓)를 사모한지 오래다. 15살에 성인식을 올리고, 공주부 연회에서 치밀한 음모로 초왕이 그녀를 ‘범하도록’ 함정에 빠뜨렸다. 원경릉은 죽네 사네 한바탕 연극 끝에 댓가로 소원하던 왕비의 자리를 얻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왕부에 시집 와서 1년동안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초왕은 원경릉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공대 여자로 연애를 해 본적은 없지만,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몸의 원래 주인 원경릉이 죽기 전에 한 차례 성적 행위를 당했다는 사실을.몸의 원래 주인 원경릉이 뇌에 남긴 기억도 이를 뒷받침했다.현대의 천재 박사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어느 왕조의 초왕비가 된, 그녀의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수중에 있던 연구과제를 계속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영혼이 시공을 초월한다는, 과학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일이 그녀의 몸에 일어난 지금,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기는 커녕, 만약 다시 현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심령학을 연구할 텐데 하는 아쉬움 뿐이다.원경릉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나머지, 사고가 점점 흐릿해져 아예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침대로 돌아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어서, 어서 가서 의원을 불러 오너라!”문밖에 기상궁의 다급하고 혼란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비릿한 피냄새가 대충 닫아 둔 문틈으로 스며 들었다.원경릉은 두 손으로 의자에 기대 덜덜 떨리는 발을 간신히 딛고 서서 밖을 내다 보았다.보이는 건 기상궁과 시녀 하나가 어린 시동 하나를 복도에서 부축하고 있는 것으로, 그 시동의 눈에서 철철 피가 흐르고, 시동의 눈에 뭐가 박혔는지 격한 통증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기상궁은 다급히 시동이 그러쥐고 있는 눈 가에 손을 뻗으려 다가, 예리한
연구실로 돌아갔다 다시 왕비로원래 주인이 몸이 많이 약했는지, 원경릉은 정신을 잃은 채 깊은 잠에 빠졌다.그런데 꿈에 뜻밖에도 현대 연구실에 돌아와 있었다.회사가 마련해 준 연구실은 극비로, 회장과 그녀의 어시스턴트 외에 연구실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책상, PC, 현미경을 만져보다가 자신의 몸에 주사를 놓던 때 사용한 주사기가 한쪽 시험관에 버려져 있는 것을 봤다.PC는 켜져 있고, 카톡은 온라인 상태로 창이 즐비하게 떠 있는데 전부 가족들이 보낸 것으로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묻는 내용이다.그녀가 키보드를 만지자, 그제서야 마음 저 밑에 있던 죽음에 대한 실감과 슬픔이 밀려왔다. 다시는 부모님과 가족을 볼 수 없다.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책상에 요오드팅크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주사를 놓기 전에 자리에 가져온 것으로, 연구소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연구소 안은 여기저기 할 것없이 온통 약품 투성이다. 약상자를 열어보니 약품은 거의 아무도 손댄 흔적이 없다.만약 이 약품만 있으면, 그 아이는,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영차 하고 문 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녀가 등을 들고 들어왔는데, 손에 찐빵 한 접시를 가져 와 탕하고 탁자에 놓고는 쌀쌀맞게: “왕비님 식사하시지요!”말을 마치고, 등은 탁자 위에 그냥 두고 나가버렸다.원경릉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게 꿈이었다니!원경릉은 배가 고파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그만 발이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는데 바닥에 놓인 약상자를 봤다.순간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이 약상자는, 연구실에 있던 그 약상자와 똑같다.황급히 약상자를 집어 탁자에 올려놓고 열어 젖혔다. 떨리는 손 끝으로 약 상자 안에 약품을 만지는데, 똑같다, 완전 똑같다, 연구실에 있던 바로 그 약 상자다.눈 앞에 펼쳐진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어 원경릉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영혼이 시공을 넘나드는 것도 이미 충분히 상식밖의 판타지인데, 약 상자까
열이를 만나러원경릉이 잠시 멍하니 있자니, 일련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시동이 다치기 하루 전날, 몸의 원래 주인은 시동을 혼내며 때리고는 헛간 나무덮개를 꼭 맞게 잘 덮어 놓으라고 명령했다. 시동이 그렇게 다친 건 헛간에서 굴러 떨어지다 못이 박힌 게 틀림없다.게다가 헛간 수리는 원래 그 아이가 할 일도 아니다.어디 이번 뿐이랴. 자기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종이 팔려 나가자, 초왕이 보내준 시종들에게 화풀이를 해대며 평소 하인을 툭하면 때리고 욕설을 퍼 붓곤 했는데, 기상궁도 그녀가 던진 잔에 맞아 피를 흥건하게 흘린 적이 있다. 몸의 원래 주인 성격이 이렇게 고약하다 보니 사람의 미움을 사는 것도 당연했다.“네가 기상궁에게 좀 물어봐 주면 안될까? 내가 직접 걔를 보러 가도 될지.” 원경릉이 말했다.“왕비님 심사가 진짜 이리 고우셨으면 이 지경까지 떨어질 리도 없었을 텐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집어 치우세요. 기상궁이랑 열이는 왕비님 꼴도 보기 싫으니까요.” 녹주는 말을 마치고 홱 몸을 돌려 나갔다.문이 다시 닫혔다.원경릉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애 상태가 위독한가?시동 열이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이 시대 의원은 어떻게 상처를 치료하는지 모른다. 만약 처치가 적절하지 못할 경우, 각막이 탈락하면서 안구 파열에 감염을 동반하기 십상이다. 사람의 목숨은 그녀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경릉은 도무지 태평하게 앉아 밥을 먹을 수 없어, 약 상자를 열어 항생제 몇 알을 꺼내 밖으로 나갔다.기상궁은 왕부에 팔려온 하인으로 시동 열이는 날때부터 노비라 봉의각 뒤에 있는 담장이 낮은 집에 살았다. 원경릉은 몇 바퀴를 돌아 겨우 찾아냈다.“왜 왔죠?” 기상궁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원경릉을 노려보며 말했다.“열이 좀 보려구요.” “가요, 손자도 나도 구역질 나니까!” 기상궁은 차갑게 말했다.원경릉은 사과를 시도하며, “미안해요, 그 아이에게 헛간 수리를 시킨 게 이렇게 되리라고 전혀…”“전혀? 걔는 아직 9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