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혼인해서 자식을 낳으라는 겁니다.” 냉정언이 말했다.홍엽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분간은 생각 없습니다. 전 딸이 있으니까요.”“태자 전하께서 인정하지 않아요!” 냉정언이 말했다.홍엽이 껄껄 웃었다. “전하는 결정권자가 아니시죠.”하지만 냉정언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군주를 좋아하십니까? 전에 황태손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시더니.”“황태손들…. 도 좋긴 하지만.. 막 태어났을 때 기억 나시나요? 제가 처음 군주를 직접 봤을 때 그렇게 똘망똘망하게 저를 볼 수가 없었어요. 눈도 감지 않고 군주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어요. 그 순수하고 깨끗하면서 티끌 하나 없는 모습이라니.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도 군주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원숭이도 비교할 수 없나요?”“달라요, 달라.” 홍엽의 눈에 어색한 눈빛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제가 내려놔야 하는 거죠. 원숭이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데 계속 제가 억지를 부리고 있을 뿐입니다.”냉정언이 홍엽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사람은 하상 가슴에 희망 하나는 꼭 품는 법이지요!”냉정언은 일어나 나가더니 산더미 같은 국사에 다시 파묻혔다.홍엽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기 어깨를 보고 피식 웃더니 검을 차고 나갔다.명원제는 남순하는 길에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갔다. 보위에 오른 뒤로 경성을 떠나본 적이 없어 아름다운 금수강산은 그저 상소문 속에나 있고 세상 시인 묵객들의 작품 속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결과적으로 상상에 불과했지만, 이제 직접 나가게 되니 세상이 크고 넓다는 게 실감이 났다. 궁이란 한쪽 구석에 있던 거에 비하면 세상은 아주 널찍해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회왕을 따라 내려가는 때가 마침 모내기가 한창이라 눈에 보이는 건 전부 파릇파릇한 못자리였다. 이곳은 부요한 남방이고 역시 북당의 곡창지대라 할만했다. 전에 상소문에서 보던 것이 이렇게 눈앞에 직접 펼쳐지자 명 원제는 심호흡하며 가마에서 내려 호비와 같
태상황이 전에 혼례를 치를 거면 너무 초라하게 하지 말고 반드시 성대하게 하라고 했지만, 원 교수 집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혼례에 돈 쓰는 게 아까워서가 아닌 다른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모두가 알다시피 원 교수가 시집을 보내는 건 수양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청첩장을 보낸다고 해도 결혼식장에 얼굴을 비추는 건 아마 병원 관계자 정도로 집안 친지들이 올 거란 보장이 없었다.그리고 두 번째는 신랑 쪽 친척이나 친구가 없는데 헛돈 쓰면서 피로연을 성대하게 하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 교수와 그의 아내는 상의 끝에 태상황에게 다시 한번 고려해 보라고 하기로 했다. 피로연은 예약하지 않으면 좋은 호텔을 찾기 어렵다.하지만 태상황은 삼 선생님 저택에서 놀고 있는 모양으로, 삼 선생님은 세 사람을 각별히 생각했다. 골동품을 하는 사람 눈은 어떻게 된 건지 사람까지 골동품이면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살아있는 세 골동품이라!원 교수가 태상황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번 알림이 울리자 받기는 했는데 전화 너머에서는 소음만 들리고 서로 소리치고 난리였다. 소요공은 태상황에게 전화기에 손가락을 대고 동쪽으로 밀라고 하고, 주 재상은 동쪽은 오른쪽이라고 했다. ‘아니 뜬금없이 동쪽은 뭔데?’ 태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성질을 부렸다. “과인은 손가락 살이 벗겨져서 못 민다고. 어라, 됐네.”“여보세요!” 마침내 태상황이 전화기에 대고 말할 수 있었다.원 교수가 얼른 말했다. “여보세요, 여섯째 어르신이십니까? 어르신. 애들 혼사 문제로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그…. 전에 성대하게 치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와 아내가 상의 한 결과 성대하게 치를 경우 손님이 많지 않을 수 있어서 말이죠. 어쨌든 사위 쪽에서 오는 사람도 많지 않고 어르신들 몇 분이 다인 데다가, 저희 쪽도….”“기다려 봐, 과인이 물어볼 사람이 있으니까.” 태상황이 전화기에 대고 큰소리로 소리치자, 옆에서 소요공이 얼른 말했다. “다 들리니깐 그렇게 큰소리칠 필요 없
태상황이 응했다. “좋아요, 오세요. 우리 얘기 좀 합시다!”원 교수는 전화를 끊고 아픈듯 귀 안을 만지작거렸다. 만 년 묵은 귀지도 전화 소리에 울려서 떨어져 나올 판이었다.그리고 원 교수는 태상황이 이번에 논의하자고 한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양가 가장이 아이들의 혼사를 놓고 결정을 내리는 자리란 것을 깨달았기에 상당히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원경릉은 엄마와 자신의 아들에게 전화해서 가급적 이쪽 덩치를 키우기로 했다. 무조건 오늘 결판을 내리겠다는 생각이였다. 원경주가 차를 몰고 부모님을 태웠는데, 대저택으로 가는 길에 원경릉 엄마가 물었다. “벌써 계산 다 해봤는데 우리 쪽은 많아 봤자 병원 동료들이랑 친구 일부뿐이에요. 집안 친척들에게 전화해 봤는데 딸이 결혼한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친딸도 아니고 오가다가 알게 된 수양딸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진짜 피붙이도 아닌데 크게 할 필요 없다며. 아무래도 집안에서는 별로 안 올 거 같아요.”“지금 태상황이 그러시는데 그쪽은 올 사람이 있다는군.” 원 교수가 말했다.원경주가 웃음을 터트리며, “북당 사람을 전부 데리고 오시려는 건 아니겠죠. 설마? 경호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뛰어내리면 금방이라도 올 수 있다고.”“아니냐?” 원 교수가 당황하며 묻자 원경릉이 답했다.“당연히 아니죠. 주진에게 물어보니 경호를 통한다고 해도 정확하게 오는 건 그렇게 쉽지 않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이 시공간을 잘못 들어가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지 못해요. 제가 한번 거기 들어갔을 때는 아직 법칙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성이 분명하지 않았어요. 오락가락했다가는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기 쉽죠.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가는 광원의 길을 잘못 봐서 실수하게 되는 거죠. 어쨌든 그렇게 쉬운 곳이 아니에요.”“시공간 터널로 대규모로 사람이 올 수는 없을 거야. 아니면 이 세계가 엉망이 되지 않겠어?” 원 교수가 말했다.“누가 아니래요?” 원경주가 자기 입으로 이유를 얘기할 수는 없지만 주진이 쉽
저택에 도착해 전에 왔던 본관으로 들어가자, 태상황이 한마디 했다. “어쨌든 혼례는 성대해야 합니다, 초라해서는 안 돼요. 피로연을 하는데 사람이 별로 없으면 전문 바람잡이 꾼들이라도 불러다 먹으라고 합시다. 백성과 기쁨을 나누는 거죠!”원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친척이나 친구 관계로 청첩장을 받지 않으면 누가 와서 밥을 먹겠습니까?”태상황은 고집이 상당한 사람으로 젊을 때 싸움 좀 해본 사람이었다.삼 선생님이 원 교수에게 말했다. “하객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피로연은 두 집안이 한데 어울리는 자리니 반드시 성대하게 치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나요? 날짜가 정해졌으면 호텔을 정하면 되겠군요. 저는 리젠트 호텔을 통째로 빌렸으면 합니다!”주 재상이 물었다. “리젠트 호텔은 식탁이 몇 개죠?”“리젠트 한식당이 3층으로 돼 있고, 한 층에 테이블이 80개는 너끈하니까 전부 합쳐서 대략 200개 정도 되겠군.” 삼 선생님이 말했다.주 재상이 놀라며 물었다. “탁자 200개요? 그렇게나 올 사람이 많습니까?”‘어째 오늘 삼 선생님께서 이렇게나 배포가 크시지? 낯설다 낯설어.’“사람 수는 문제가 안 됩니다. 지금까지 국내외를 망라한 정·재계 인사들과 적지 않은 사귐이 있어서 부르기만 하면 달려와 자리를 채울 사람은 차고 넘칩니다. 결혼식에 필요한 돈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내겠습니다.” 삼 선생님이 호기롭게 기꺼이 거액을 투척하기로 했다.원 교수가 당황해서 제안을 거절했다. “그건 안됩니다. 어떻게 제가 선생님께서 다 내시게 할 수가 있습니까?”“왜 제가 낼 수 없죠? 제가 신랑 쪽 가장이니 제가 내는 게 마땅하죠!” 삼 선생님이 말했다.원 교수 가족은 이해가 안가 서로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봤다. ‘삼 선생님께서 어떻게 우문호 집안의 가장이 되는 겁니까?’ 원 교수 가족이 의문의 눈길로 태상황을 바라봤는데, 태상황은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기에 대충 주워 삼켰다. “삼 선생님은
원 교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아까는 바빴다고? 방금 폰을 켰는데 여섯째 어르신 전화가 왔단 말이지? 맞아, 바로 네 결혼식 때문에. 응, 아빠가 어르신 생각에 동의할지 걱정돼서 묻는 거야? 너만 좋다면 그렇게 하지 뭐!”원 교수는 전화를 끊고 거만한 눈빛으로 태상황에게 답했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죠, 전부 경릉이 뜻대로 합시다!”태상황의 생각이란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원 교수는 굳이 원경릉의 생각이라며 단지 나는 딸의 의사를 존중하고 따라주는 것이라고 둘러 말했다.태상황이 담담하게 말했다. “동의하셨으니 됐고, 다음으로 논의할 것은 예물과 혼수 등인데...”원경릉이 실험실에서 전화를 끊은 후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정식 상견례는 아니겠지만 삼 선생저택의 불꽃 튀는 분위기는 안 봐도 눈에 훤했다.“왜 그래요?” 주진이 물었다.“별거 아냐. 신랑 측과 신부 측 어른들이 모여서 결혼 얘기를 하면 무의식으로 적의가 생기는 게 아닐까?”“그럴 것 같은데요!” 주진이 하하 웃었다. “전쟁이자 게임이죠, 과연 누가 지휘봉을 잡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구나!”“태상황 폐하께서는 성대하게 하고 싶어 하셔. 삼 선생님 손님께서 오시니까. 난 상관없으니, 저분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으시라고 하자.” 원경릉은 신부가 되는 것만으로 기뻐서 우문호와 아이들이 오는 날만 꼽고 있었다.“맞아요,” 양여혜가 안에서 나오며 원경릉에게 말했다. “시간 터널 상황이 호전돼서 어쩌면 보름 정도 후면 기본적으로 원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단, 그때가 되면 경호의 소용돌이가 사라지거나 아주 흐려져 잔잔한 물결 같은 상태가 될거에요. 소용돌이란 게 원래 시공간 터널의 진동이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우린 그때가 되면 방향만 잘 기억하면 돼요.”원경릉이 탄성을 질렀다. 어쩐지, 전에 소용돌이를 별로 못 봤는데 나중에는 많이 있더라니.”“전에도 일정한 주기로 있었던 적이 있어요. 소용돌이가 생겼다고 반드시 시공간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호수 수면의 움직임은
보름, 보름, 갈 기한이 정해지자, 보름은 고사하고 반나절, 아니 반 시진도 견디기 힘들었다.하지만 우문호는 지금 감국태자(황제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는 태자)로 어쨌든 일은 잘 진행해야 했기에 우선 아바마마께 서신을 보냈다. 보름 후에 자신이 긴급한 용무로 경성을 떠나야 하는데, 아바마마께서 순시가 끝나시면 바로 경성으로 복귀에 주시기를 청했다.우문호는 편지를 보내고 따져보기 시작했다. 뭘 가지고 갈까, 장인어른 집이 좀 살기 어려워 보이던데, 가져갈 수 있는 대로 좀 많이 가져다드렸으면 좋겠다.아이들은 반드시 데려가야 했다. 엄마 아빠의 혼례에 아이들이 빠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은 데려갈 수 없는 것이 서일처럼 입이 가벼운 사람이 현대에 갔다가는 온 북당이 다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할머니는 모시고 돌아야지. 혼례에 할머니께서 빠질 수 있나? 그래서 우문호는 바로 할머니께 가서 시간 약속을 했다. 혜민서 일 중 먼저 처리할 수 있는 일은 미리 처리해 두고 충분히 쉬신 후에 시공간 터널의 세례를 받도록 말이다.우문호는 이것저것 사들이고 집안 창고를 뒤져서 처가에 가져다줄 좋은 물건들을 찾았다.태자가 정사엔 관심이 없자 냉정언이 불평불만을 터트리려고 집으로 찾아왔다. 태자가 일정 기간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얼마나 오래 있을지는 몰라 더욱 불만스러웠다.우문호가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 내가 왜 널 재상으로 천거했다고 생각해? 바로 네가 일당백이라서야. 조정 일은 지금 문제도 별로 없고 나중에 아바마마께서 오셔서 좌정해 계실 텐데 내가 가는 게 대체 무슨 문제야?”“가는 건 괜찮지만, 적어도 얼마나 걸리는지는 얘기해 줘야 할 거 아냐?” 냉정언이 물었다.“확실히 말할 수가 없어.” 우문호가 이번에 결심한 게 있다. 혼례를 치르고 신혼여행을 가야 하는데 놀 곳은 전부 돌아다니며 놀고 오기로 말이다. 나중에 가도 되겠지만 인생에 휴가가 몇 번이나 있을까?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닌 결혼 휴가가 아닌가. 우문호는 이건 북당이
명원제는 우문호의 서신에서 주 재상과 태자비를 마중하러 가야겠다는 말을 읽고 주 재상 일행이 무탈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얼른 돌아오겠다는 말에 안심했다.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돌아보는 것에 아쉬움이 잔뜩 남았지만 역시 어가를 경성으로 되돌렸다.명원제는 돌아오는 길에 가리개를 젖히고 바깥 풍경을 보며 한마디 했다. 비록 판에 박힌 말이지만 명원제의 지금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었다. ‘밖에 나와 보니 세상이 넓은 줄 알겠다.’어가로 며칠을 가 경성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좀 쉬어볼까 하는 찰나에 마침 맞은편 아름다운 산꼭대기에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뒤에 호랑이 한 마리와 늑대 한 마리가 있고 두 사람 모두 흰옷을 입은 것이 신선처럼 하늘하늘 자유롭기 그지없어 보였다.“안풍 친왕 전하와 왕비 마마시죠?” 호비가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호랑이와 늑대는 알아봤다.명원제가 보며 답했다. “그럴 거야!”“두 분 매화장이 바로 이 부근입니다.” 목여 태감이 밖에서 말했다.명원제는 매화장 경치가 아름답다는 얘기를 일찍부터 들어왔다. 마침, 지금 따스한 봄이라 꽃이 만개했을 테니 산과 들이 온통 꽃밭일 것이다. 이 얼마나 장관일까!명원제는 마음이 동해졌다. “기왕 부근까지 왔으니, 매화장을 방문해 큰아버지, 큰어머니께 문안드리는거 어때?”“좋아요!” 호비도 좋다고 얼른 대답했다.명원제가 어가를 매화장 쪽으로 돌리도록 바로 분부를 내리고 사람을 시켜 먼저 매화장에 기별하도록 했다.그리고 산꼭대기에 서 있던 부부 두 사람은 신선 같은 흰옷 안에 실은 진 흙범벅의 베옷을 입고 있었으며, 호랑이와 늑대는 지쳐서 바닥에 엎드려져 있었다.“분명 왔을 텐데. 맞죠?” 안풍 친왕비가 어가 방향을 바라보더니 벅차오르는 기쁨을 감추며 말했다.“왔어, 틀림없어!” 안풍 친왕의 얼굴이 풀어지며 턱을 들고 외쳤다. “매화장으로 왔어!”“그럼, 우리도 갑시다!” 안풍 친왕비가 말했다.“그래, 돌아가지!” 안풍 친왕이 왕비 손은 잡아끌었다.
한동안 노을을 감상하다가 고개를 돌리자 온통 울긋불긋 복사꽃이고 그 복사꽃 사이로 언뜻 누군가 그림자가 지나간 듯했다.그리고 조용조용 느긋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복사꽃 무지에 도화암 있고, 도화함 아래에 도화 신선 있네. 도화 신선이 복숭아 나무 심어, 복사꽃 따서 술 만들어 파네. 술이 깨면 꽃 앞에 앉았고 술에 취하면 꽃 아래 잠자네. 취하고 깨는 나날이 반복되고, 꽃은 피고 지고 해마다 반복되네. 화주에 파묻혀 죽을지언정, 권세에 절하며 살지 않으리.….”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이토록 고요한 공기속에서 안풍 친왕의 시를 듣고 있으니 명원제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화주에 파묻혀 죽을지언정, 권세에 절하며 살지 않으리......” 명원제가 되뇌어 보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인가!명원제는 어릴 때부터 태자로 정해져 위태부에게 학문을 배우고 나중에 조정 정사에 참여해 조심조심 살얼음을 걷듯이 살았다. 명원제의 일생은 황제가 되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고 다른 것은 쉽사리 좋아할 수 없었다. 좋아했다가는 빠져들기 때문이었다.궁 밖으로 출행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아마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나와보니 달랐다. 그동안 도대체 어떤 나날을 보낸 걸까?“황제!” 안풍 친왕의 얼굴이 복사꽃 가시 사이로 천천히 드러났다. 따사롭고 고상한 모습이 이전과 크게 달랐다. 전에는 늘 살벌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패기가 넘쳤는데 지금은 소탈한 자연인의 모습으로 얼굴에 평온함이 넘쳤다.“큰아버지!” 명원제가 상당히 공손하면서도 외경스러운 모습으로 안풍 친왕을 불렀다.호비는 십 황자를 데리고 와서 예를 취했다.“황제가 어쩐 일로 갑자기 매화원을 찾아왔어?” 안풍 친왕이 물었다.“지나는 길에 오랫동안 큰아버지를 뵙지 못한 게 갑자기 생각나서 문안드리러 왔습니다!” 명원제가 미소를 지었다.“들어와 앉으렴!” 안풍 친왕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안풍 친왕비가 복도의 복사꽃 숲에서 손짓하더니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차 끓였어. 어서 들어와 한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