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황이 응했다. “좋아요, 오세요. 우리 얘기 좀 합시다!”원 교수는 전화를 끊고 아픈듯 귀 안을 만지작거렸다. 만 년 묵은 귀지도 전화 소리에 울려서 떨어져 나올 판이었다.그리고 원 교수는 태상황이 이번에 논의하자고 한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양가 가장이 아이들의 혼사를 놓고 결정을 내리는 자리란 것을 깨달았기에 상당히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원경릉은 엄마와 자신의 아들에게 전화해서 가급적 이쪽 덩치를 키우기로 했다. 무조건 오늘 결판을 내리겠다는 생각이였다. 원경주가 차를 몰고 부모님을 태웠는데, 대저택으로 가는 길에 원경릉 엄마가 물었다. “벌써 계산 다 해봤는데 우리 쪽은 많아 봤자 병원 동료들이랑 친구 일부뿐이에요. 집안 친척들에게 전화해 봤는데 딸이 결혼한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친딸도 아니고 오가다가 알게 된 수양딸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진짜 피붙이도 아닌데 크게 할 필요 없다며. 아무래도 집안에서는 별로 안 올 거 같아요.”“지금 태상황이 그러시는데 그쪽은 올 사람이 있다는군.” 원 교수가 말했다.원경주가 웃음을 터트리며, “북당 사람을 전부 데리고 오시려는 건 아니겠죠. 설마? 경호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뛰어내리면 금방이라도 올 수 있다고.”“아니냐?” 원 교수가 당황하며 묻자 원경릉이 답했다.“당연히 아니죠. 주진에게 물어보니 경호를 통한다고 해도 정확하게 오는 건 그렇게 쉽지 않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이 시공간을 잘못 들어가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지 못해요. 제가 한번 거기 들어갔을 때는 아직 법칙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성이 분명하지 않았어요. 오락가락했다가는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기 쉽죠.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가는 광원의 길을 잘못 봐서 실수하게 되는 거죠. 어쨌든 그렇게 쉬운 곳이 아니에요.”“시공간 터널로 대규모로 사람이 올 수는 없을 거야. 아니면 이 세계가 엉망이 되지 않겠어?” 원 교수가 말했다.“누가 아니래요?” 원경주가 자기 입으로 이유를 얘기할 수는 없지만 주진이 쉽
저택에 도착해 전에 왔던 본관으로 들어가자, 태상황이 한마디 했다. “어쨌든 혼례는 성대해야 합니다, 초라해서는 안 돼요. 피로연을 하는데 사람이 별로 없으면 전문 바람잡이 꾼들이라도 불러다 먹으라고 합시다. 백성과 기쁨을 나누는 거죠!”원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친척이나 친구 관계로 청첩장을 받지 않으면 누가 와서 밥을 먹겠습니까?”태상황은 고집이 상당한 사람으로 젊을 때 싸움 좀 해본 사람이었다.삼 선생님이 원 교수에게 말했다. “하객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피로연은 두 집안이 한데 어울리는 자리니 반드시 성대하게 치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나요? 날짜가 정해졌으면 호텔을 정하면 되겠군요. 저는 리젠트 호텔을 통째로 빌렸으면 합니다!”주 재상이 물었다. “리젠트 호텔은 식탁이 몇 개죠?”“리젠트 한식당이 3층으로 돼 있고, 한 층에 테이블이 80개는 너끈하니까 전부 합쳐서 대략 200개 정도 되겠군.” 삼 선생님이 말했다.주 재상이 놀라며 물었다. “탁자 200개요? 그렇게나 올 사람이 많습니까?”‘어째 오늘 삼 선생님께서 이렇게나 배포가 크시지? 낯설다 낯설어.’“사람 수는 문제가 안 됩니다. 지금까지 국내외를 망라한 정·재계 인사들과 적지 않은 사귐이 있어서 부르기만 하면 달려와 자리를 채울 사람은 차고 넘칩니다. 결혼식에 필요한 돈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내겠습니다.” 삼 선생님이 호기롭게 기꺼이 거액을 투척하기로 했다.원 교수가 당황해서 제안을 거절했다. “그건 안됩니다. 어떻게 제가 선생님께서 다 내시게 할 수가 있습니까?”“왜 제가 낼 수 없죠? 제가 신랑 쪽 가장이니 제가 내는 게 마땅하죠!” 삼 선생님이 말했다.원 교수 가족은 이해가 안가 서로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봤다. ‘삼 선생님께서 어떻게 우문호 집안의 가장이 되는 겁니까?’ 원 교수 가족이 의문의 눈길로 태상황을 바라봤는데, 태상황은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기에 대충 주워 삼켰다. “삼 선생님은
원 교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아까는 바빴다고? 방금 폰을 켰는데 여섯째 어르신 전화가 왔단 말이지? 맞아, 바로 네 결혼식 때문에. 응, 아빠가 어르신 생각에 동의할지 걱정돼서 묻는 거야? 너만 좋다면 그렇게 하지 뭐!”원 교수는 전화를 끊고 거만한 눈빛으로 태상황에게 답했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죠, 전부 경릉이 뜻대로 합시다!”태상황의 생각이란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원 교수는 굳이 원경릉의 생각이라며 단지 나는 딸의 의사를 존중하고 따라주는 것이라고 둘러 말했다.태상황이 담담하게 말했다. “동의하셨으니 됐고, 다음으로 논의할 것은 예물과 혼수 등인데...”원경릉이 실험실에서 전화를 끊은 후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정식 상견례는 아니겠지만 삼 선생저택의 불꽃 튀는 분위기는 안 봐도 눈에 훤했다.“왜 그래요?” 주진이 물었다.“별거 아냐. 신랑 측과 신부 측 어른들이 모여서 결혼 얘기를 하면 무의식으로 적의가 생기는 게 아닐까?”“그럴 것 같은데요!” 주진이 하하 웃었다. “전쟁이자 게임이죠, 과연 누가 지휘봉을 잡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구나!”“태상황 폐하께서는 성대하게 하고 싶어 하셔. 삼 선생님 손님께서 오시니까. 난 상관없으니, 저분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으시라고 하자.” 원경릉은 신부가 되는 것만으로 기뻐서 우문호와 아이들이 오는 날만 꼽고 있었다.“맞아요,” 양여혜가 안에서 나오며 원경릉에게 말했다. “시간 터널 상황이 호전돼서 어쩌면 보름 정도 후면 기본적으로 원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단, 그때가 되면 경호의 소용돌이가 사라지거나 아주 흐려져 잔잔한 물결 같은 상태가 될거에요. 소용돌이란 게 원래 시공간 터널의 진동이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우린 그때가 되면 방향만 잘 기억하면 돼요.”원경릉이 탄성을 질렀다. 어쩐지, 전에 소용돌이를 별로 못 봤는데 나중에는 많이 있더라니.”“전에도 일정한 주기로 있었던 적이 있어요. 소용돌이가 생겼다고 반드시 시공간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호수 수면의 움직임은
보름, 보름, 갈 기한이 정해지자, 보름은 고사하고 반나절, 아니 반 시진도 견디기 힘들었다.하지만 우문호는 지금 감국태자(황제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는 태자)로 어쨌든 일은 잘 진행해야 했기에 우선 아바마마께 서신을 보냈다. 보름 후에 자신이 긴급한 용무로 경성을 떠나야 하는데, 아바마마께서 순시가 끝나시면 바로 경성으로 복귀에 주시기를 청했다.우문호는 편지를 보내고 따져보기 시작했다. 뭘 가지고 갈까, 장인어른 집이 좀 살기 어려워 보이던데, 가져갈 수 있는 대로 좀 많이 가져다드렸으면 좋겠다.아이들은 반드시 데려가야 했다. 엄마 아빠의 혼례에 아이들이 빠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은 데려갈 수 없는 것이 서일처럼 입이 가벼운 사람이 현대에 갔다가는 온 북당이 다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할머니는 모시고 돌아야지. 혼례에 할머니께서 빠질 수 있나? 그래서 우문호는 바로 할머니께 가서 시간 약속을 했다. 혜민서 일 중 먼저 처리할 수 있는 일은 미리 처리해 두고 충분히 쉬신 후에 시공간 터널의 세례를 받도록 말이다.우문호는 이것저것 사들이고 집안 창고를 뒤져서 처가에 가져다줄 좋은 물건들을 찾았다.태자가 정사엔 관심이 없자 냉정언이 불평불만을 터트리려고 집으로 찾아왔다. 태자가 일정 기간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얼마나 오래 있을지는 몰라 더욱 불만스러웠다.우문호가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 내가 왜 널 재상으로 천거했다고 생각해? 바로 네가 일당백이라서야. 조정 일은 지금 문제도 별로 없고 나중에 아바마마께서 오셔서 좌정해 계실 텐데 내가 가는 게 대체 무슨 문제야?”“가는 건 괜찮지만, 적어도 얼마나 걸리는지는 얘기해 줘야 할 거 아냐?” 냉정언이 물었다.“확실히 말할 수가 없어.” 우문호가 이번에 결심한 게 있다. 혼례를 치르고 신혼여행을 가야 하는데 놀 곳은 전부 돌아다니며 놀고 오기로 말이다. 나중에 가도 되겠지만 인생에 휴가가 몇 번이나 있을까?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닌 결혼 휴가가 아닌가. 우문호는 이건 북당이
명원제는 우문호의 서신에서 주 재상과 태자비를 마중하러 가야겠다는 말을 읽고 주 재상 일행이 무탈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얼른 돌아오겠다는 말에 안심했다.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돌아보는 것에 아쉬움이 잔뜩 남았지만 역시 어가를 경성으로 되돌렸다.명원제는 돌아오는 길에 가리개를 젖히고 바깥 풍경을 보며 한마디 했다. 비록 판에 박힌 말이지만 명원제의 지금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었다. ‘밖에 나와 보니 세상이 넓은 줄 알겠다.’어가로 며칠을 가 경성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좀 쉬어볼까 하는 찰나에 마침 맞은편 아름다운 산꼭대기에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뒤에 호랑이 한 마리와 늑대 한 마리가 있고 두 사람 모두 흰옷을 입은 것이 신선처럼 하늘하늘 자유롭기 그지없어 보였다.“안풍 친왕 전하와 왕비 마마시죠?” 호비가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호랑이와 늑대는 알아봤다.명원제가 보며 답했다. “그럴 거야!”“두 분 매화장이 바로 이 부근입니다.” 목여 태감이 밖에서 말했다.명원제는 매화장 경치가 아름답다는 얘기를 일찍부터 들어왔다. 마침, 지금 따스한 봄이라 꽃이 만개했을 테니 산과 들이 온통 꽃밭일 것이다. 이 얼마나 장관일까!명원제는 마음이 동해졌다. “기왕 부근까지 왔으니, 매화장을 방문해 큰아버지, 큰어머니께 문안드리는거 어때?”“좋아요!” 호비도 좋다고 얼른 대답했다.명원제가 어가를 매화장 쪽으로 돌리도록 바로 분부를 내리고 사람을 시켜 먼저 매화장에 기별하도록 했다.그리고 산꼭대기에 서 있던 부부 두 사람은 신선 같은 흰옷 안에 실은 진 흙범벅의 베옷을 입고 있었으며, 호랑이와 늑대는 지쳐서 바닥에 엎드려져 있었다.“분명 왔을 텐데. 맞죠?” 안풍 친왕비가 어가 방향을 바라보더니 벅차오르는 기쁨을 감추며 말했다.“왔어, 틀림없어!” 안풍 친왕의 얼굴이 풀어지며 턱을 들고 외쳤다. “매화장으로 왔어!”“그럼, 우리도 갑시다!” 안풍 친왕비가 말했다.“그래, 돌아가지!” 안풍 친왕이 왕비 손은 잡아끌었다.
한동안 노을을 감상하다가 고개를 돌리자 온통 울긋불긋 복사꽃이고 그 복사꽃 사이로 언뜻 누군가 그림자가 지나간 듯했다.그리고 조용조용 느긋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복사꽃 무지에 도화암 있고, 도화함 아래에 도화 신선 있네. 도화 신선이 복숭아 나무 심어, 복사꽃 따서 술 만들어 파네. 술이 깨면 꽃 앞에 앉았고 술에 취하면 꽃 아래 잠자네. 취하고 깨는 나날이 반복되고, 꽃은 피고 지고 해마다 반복되네. 화주에 파묻혀 죽을지언정, 권세에 절하며 살지 않으리.….”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이토록 고요한 공기속에서 안풍 친왕의 시를 듣고 있으니 명원제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화주에 파묻혀 죽을지언정, 권세에 절하며 살지 않으리......” 명원제가 되뇌어 보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인가!명원제는 어릴 때부터 태자로 정해져 위태부에게 학문을 배우고 나중에 조정 정사에 참여해 조심조심 살얼음을 걷듯이 살았다. 명원제의 일생은 황제가 되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고 다른 것은 쉽사리 좋아할 수 없었다. 좋아했다가는 빠져들기 때문이었다.궁 밖으로 출행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아마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나와보니 달랐다. 그동안 도대체 어떤 나날을 보낸 걸까?“황제!” 안풍 친왕의 얼굴이 복사꽃 가시 사이로 천천히 드러났다. 따사롭고 고상한 모습이 이전과 크게 달랐다. 전에는 늘 살벌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패기가 넘쳤는데 지금은 소탈한 자연인의 모습으로 얼굴에 평온함이 넘쳤다.“큰아버지!” 명원제가 상당히 공손하면서도 외경스러운 모습으로 안풍 친왕을 불렀다.호비는 십 황자를 데리고 와서 예를 취했다.“황제가 어쩐 일로 갑자기 매화원을 찾아왔어?” 안풍 친왕이 물었다.“지나는 길에 오랫동안 큰아버지를 뵙지 못한 게 갑자기 생각나서 문안드리러 왔습니다!” 명원제가 미소를 지었다.“들어와 앉으렴!” 안풍 친왕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안풍 친왕비가 복도의 복사꽃 숲에서 손짓하더니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차 끓였어. 어서 들어와 한잔해!”
“대흥의 운무차는 짐도 여러 번 마셔본 적이 있는데 향이 이렇게 맑지 못한 건 왜였을까요?” 명원제가 의아해하자 안풍 친왕이 웃으며 답했다. “차 들게. 차 맛은 마음에서 나오지. 궁 안에서는 골치 아픈 일에 시달리니, 옥황상제의 샘물을 마셔도 쓸 수밖에. 지금은 한가롭게 절경에 앉아 절세미인과 있으니, 차의 진짜 맛이 우러나는 것이야. 황제, 아무리 바빠도 잘 누리면서 살아야 하네.”“맞아요, 맞아. 큰아버지 말씀대로 입니다!” 명원제는 서글픔이 올라와서 한숨을 쉬었다. “짐은 반평생을 바쁘게 지냈습니다만, 이 나라가 짐의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짐이 이 나라의 것이었어요. 짐은 제 소유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궁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 모두 혼자였지요. 부부의 사랑, 자식과의 천륜도 전부 군신 관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안풍 친왕이 부드럽게 명원제를 바라보며, 차를 한 잔 더 따라주었다. “황제로 사는 고충을 알지, 그때 다들 내가 네 아바마마에게 이 나라를 양보한다고 바보라고 했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네, 황제 노릇이 천하에서 제일 가는 힘든 일이라는 걸. 지금처럼 자유롭게 다니며 나날을 즐기는 게 가당키나 한가? 이 멋진 산천 어디든지 어느 날 갑자기 가고 싶다 싶으면 그냥 나서면 그만이거든, 황제는 말이야, 순시를 한 번 나가려면 몇백 명을 끌고 위세를 갖춰야 하니 거기 자유가 어디 있나?”당시 얘기를 꺼내니 명원제도 솔직히 호기심이 생겼다. 안풍 친왕이 왜 기꺼이 황제의 지위를 포기했나 했는데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 그렇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유와 뭘 맞바꿀 수 있을까?명원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얘기를 궁중에서 들었으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자유자재? 어디 천자의 부귀영화와 비교가 되나?’하지만 지금 밖으로 나와 직접 보니 부럽지 않을 수가 없기에 자연스레 믿어졌다.명원제가 의기소침하게 물었다. “짐은 언제 큰아버지처럼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요?”안풍 친왕이 눈을 빛내더니 얼른 다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지금
날이 이미 어둑어둑해지자 명원제는 오늘 안에 경성에 들어갈 수 없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해 매화장에서 묵어가기로 했다.라만 왕비는 명원제 일행에게 새 침대와 이불을 준비해 주었는데 깨끗하게 빤 이불에 방도 깨끗하고 환한 것이 마침 복사꽃을 마주하고 있으니 명원제는 귀로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그리고 침실의 뒤창이 살짝 열려 있었다. 듬성듬성 심어놓은 큼직한 천사의나팔꽃이 활짝 피어 복사꽃 향기와 섞여 사람을 편안하고 포근하게 잠들게 했다.명원제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 마자 잠에 들어 일찍 잠들었는데도 아침에 해가 높이 뜰 때까지 계속 잤다.원래는 오늘 경성으로 들어갈 여정에 오르기로 했으나 명원제가 고집을 부려 하루 더 묵기로 했다.안풍 친왕은 계속 명원제 곁에서 차를 끓이고 음미하고 나랏일에 대한 담론을 나눴다.저녁이 되어 다시 차를 끓이며 얘기를 나누는데 명원제가 충동적으로 한마디 했다. “큰아버지, 제가 할 말이 있는데, 듣고 화내시면 안 됩니다.”안풍 친왕이 찻잔을 든 손을 살짝 떨며 눈을 치켜떴다. “말해!”명원제가 좌우를 물리고 본관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짐은 퇴위할 생각이 있습니다!”안풍 친왕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직접 결정한 건가, 아니면 누군가가 압박한 건가?”명원제의 얼굴이 굳더니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짐의 진심입니다. 큰아버지 실망하셨을까요?”안풍 친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명원제가 중얼거렸다. “그.... 제가 이기적인거 알아요. 이렇게 내팽개치면 다섯째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도요.”안풍 친왕은 눈을 부릅떴다가 다시 부드럽게 했다. “내가 실망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마, 그저 네 마음을 따르면 돼. 다섯째를 곤란하게 하는 것에 관해서는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야지. 다섯째는 분명 지치겠지. 하지만 우문씨 집안 사람 중에 지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어? 지치는 건 중요하지 않아. 제일 중요한 건 다섯째가 마침내 하고 싶은 일을 대담하게 해 낼 수 있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