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노을을 감상하다가 고개를 돌리자 온통 울긋불긋 복사꽃이고 그 복사꽃 사이로 언뜻 누군가 그림자가 지나간 듯했다.그리고 조용조용 느긋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복사꽃 무지에 도화암 있고, 도화함 아래에 도화 신선 있네. 도화 신선이 복숭아 나무 심어, 복사꽃 따서 술 만들어 파네. 술이 깨면 꽃 앞에 앉았고 술에 취하면 꽃 아래 잠자네. 취하고 깨는 나날이 반복되고, 꽃은 피고 지고 해마다 반복되네. 화주에 파묻혀 죽을지언정, 권세에 절하며 살지 않으리.….”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이토록 고요한 공기속에서 안풍 친왕의 시를 듣고 있으니 명원제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화주에 파묻혀 죽을지언정, 권세에 절하며 살지 않으리......” 명원제가 되뇌어 보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구절인가!명원제는 어릴 때부터 태자로 정해져 위태부에게 학문을 배우고 나중에 조정 정사에 참여해 조심조심 살얼음을 걷듯이 살았다. 명원제의 일생은 황제가 되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고 다른 것은 쉽사리 좋아할 수 없었다. 좋아했다가는 빠져들기 때문이었다.궁 밖으로 출행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아마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나와보니 달랐다. 그동안 도대체 어떤 나날을 보낸 걸까?“황제!” 안풍 친왕의 얼굴이 복사꽃 가시 사이로 천천히 드러났다. 따사롭고 고상한 모습이 이전과 크게 달랐다. 전에는 늘 살벌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패기가 넘쳤는데 지금은 소탈한 자연인의 모습으로 얼굴에 평온함이 넘쳤다.“큰아버지!” 명원제가 상당히 공손하면서도 외경스러운 모습으로 안풍 친왕을 불렀다.호비는 십 황자를 데리고 와서 예를 취했다.“황제가 어쩐 일로 갑자기 매화원을 찾아왔어?” 안풍 친왕이 물었다.“지나는 길에 오랫동안 큰아버지를 뵙지 못한 게 갑자기 생각나서 문안드리러 왔습니다!” 명원제가 미소를 지었다.“들어와 앉으렴!” 안풍 친왕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안풍 친왕비가 복도의 복사꽃 숲에서 손짓하더니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차 끓였어. 어서 들어와 한잔해!”
“대흥의 운무차는 짐도 여러 번 마셔본 적이 있는데 향이 이렇게 맑지 못한 건 왜였을까요?” 명원제가 의아해하자 안풍 친왕이 웃으며 답했다. “차 들게. 차 맛은 마음에서 나오지. 궁 안에서는 골치 아픈 일에 시달리니, 옥황상제의 샘물을 마셔도 쓸 수밖에. 지금은 한가롭게 절경에 앉아 절세미인과 있으니, 차의 진짜 맛이 우러나는 것이야. 황제, 아무리 바빠도 잘 누리면서 살아야 하네.”“맞아요, 맞아. 큰아버지 말씀대로 입니다!” 명원제는 서글픔이 올라와서 한숨을 쉬었다. “짐은 반평생을 바쁘게 지냈습니다만, 이 나라가 짐의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짐이 이 나라의 것이었어요. 짐은 제 소유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궁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 모두 혼자였지요. 부부의 사랑, 자식과의 천륜도 전부 군신 관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안풍 친왕이 부드럽게 명원제를 바라보며, 차를 한 잔 더 따라주었다. “황제로 사는 고충을 알지, 그때 다들 내가 네 아바마마에게 이 나라를 양보한다고 바보라고 했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네, 황제 노릇이 천하에서 제일 가는 힘든 일이라는 걸. 지금처럼 자유롭게 다니며 나날을 즐기는 게 가당키나 한가? 이 멋진 산천 어디든지 어느 날 갑자기 가고 싶다 싶으면 그냥 나서면 그만이거든, 황제는 말이야, 순시를 한 번 나가려면 몇백 명을 끌고 위세를 갖춰야 하니 거기 자유가 어디 있나?”당시 얘기를 꺼내니 명원제도 솔직히 호기심이 생겼다. 안풍 친왕이 왜 기꺼이 황제의 지위를 포기했나 했는데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 그렇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유와 뭘 맞바꿀 수 있을까?명원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얘기를 궁중에서 들었으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자유자재? 어디 천자의 부귀영화와 비교가 되나?’하지만 지금 밖으로 나와 직접 보니 부럽지 않을 수가 없기에 자연스레 믿어졌다.명원제가 의기소침하게 물었다. “짐은 언제 큰아버지처럼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요?”안풍 친왕이 눈을 빛내더니 얼른 다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지금
날이 이미 어둑어둑해지자 명원제는 오늘 안에 경성에 들어갈 수 없는 게 확실하다고 생각해 매화장에서 묵어가기로 했다.라만 왕비는 명원제 일행에게 새 침대와 이불을 준비해 주었는데 깨끗하게 빤 이불에 방도 깨끗하고 환한 것이 마침 복사꽃을 마주하고 있으니 명원제는 귀로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그리고 침실의 뒤창이 살짝 열려 있었다. 듬성듬성 심어놓은 큼직한 천사의나팔꽃이 활짝 피어 복사꽃 향기와 섞여 사람을 편안하고 포근하게 잠들게 했다.명원제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 마자 잠에 들어 일찍 잠들었는데도 아침에 해가 높이 뜰 때까지 계속 잤다.원래는 오늘 경성으로 들어갈 여정에 오르기로 했으나 명원제가 고집을 부려 하루 더 묵기로 했다.안풍 친왕은 계속 명원제 곁에서 차를 끓이고 음미하고 나랏일에 대한 담론을 나눴다.저녁이 되어 다시 차를 끓이며 얘기를 나누는데 명원제가 충동적으로 한마디 했다. “큰아버지, 제가 할 말이 있는데, 듣고 화내시면 안 됩니다.”안풍 친왕이 찻잔을 든 손을 살짝 떨며 눈을 치켜떴다. “말해!”명원제가 좌우를 물리고 본관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짐은 퇴위할 생각이 있습니다!”안풍 친왕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직접 결정한 건가, 아니면 누군가가 압박한 건가?”명원제의 얼굴이 굳더니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짐의 진심입니다. 큰아버지 실망하셨을까요?”안풍 친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명원제가 중얼거렸다. “그.... 제가 이기적인거 알아요. 이렇게 내팽개치면 다섯째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도요.”안풍 친왕은 눈을 부릅떴다가 다시 부드럽게 했다. “내가 실망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마, 그저 네 마음을 따르면 돼. 다섯째를 곤란하게 하는 것에 관해서는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야지. 다섯째는 분명 지치겠지. 하지만 우문씨 집안 사람 중에 지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어? 지치는 건 중요하지 않아. 제일 중요한 건 다섯째가 마침내 하고 싶은 일을 대담하게 해 낼 수 있다는 거야.
명원제가 당황해서 안풍 친왕에게 말했다. “짐은…. 그런 문제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둘 중에 선택해 본 적도 없고요.”“이제 한번 잘 생각해 봐. 생각을 마치면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 거야.”명원제가 찻주전자를 들자, 마음속 깊은 곳의 돌덩이가 조금 치워진 듯했다.다음날 명원제는 돌아갔다.안풍 친왕과 명원제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을 얘기했다. “며칠 지나면 갈 거고, 이 매화장도 팔 거야. 매화장은 네 큰어머니가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거라 다른 사람에게 팔자니 내키지않아서 말이야. 황제가 마음이 있으면 가격을 불러 보게. 우리 협상하세!”“큰아버지 정말 매화장을 파시려는 겁니까?” 명원제는 의아했다. ‘매화장은 지극히 아름답고 곳곳에 사람의 흔적과 세월이 스며있는데 팔아버리다니 너무 아깝잖아?’“그래, 이미 사겠다는 사람이 몇 있어!”명원제가 주변을 살짝 둘러보고 말했다. “짐이 필요하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마세요. 얼마입니까?”그러자 안풍 친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만 냥, 전체 매화장과 앞뒤 산까지!”“물건마다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 이 매화 숲과 복사꽃 숲은 이미 조성된 지 오래되었고, 지리와 위치도 좋아서 관도를 바로 마주하고 있어 고요하면서도 왕성한 기색이 있으니 구하기 힘든 명당이지. 핵심은 이 산인데 옥 광산으로 내 사유재산이지. 조정도 걷어갈 수 없네.”“정말입니까?”“그럼, 내가 전에 캤거든. 광구를 하나 뚫었는데 너희들이 오면….” 안풍 친왕이 그들을 데리고 집 앞에 작은 길을 통해 뒤쪽으로 향했다. 뒤쪽에는 볏짚으로 덮여 있는 게 있는데 안풍 친왕이 볏짚을 열어젖히니 암청색 돌이 드러났다.“이게 비취인가요?” 호비가 묻자 안풍 친왕이 입을 열었다. “그건 모르지. 돌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말이야.”“짐이 사겠습니다. 당장 사겠어요!” 명원제가 바로 말했다. 비취는 태상황과 태자비가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가치가 만만치 않고 채굴해서 팔면 얼마나 좋은 물건이 나올지 몰랐다.“좋아, 그럼, 백만
명원제가 경성에 도착할 즈음 태자와 대신들이 마중을 나갔다. 태자는 궁으로 돌아와 명원제가 남순 기간 동안가지고 돌아온 문서와 보고서를 정리해 내일 조회 때 상의해야 했다.하지만 격무에 지쳐도 곧 태자비와 만날 수 있다는 기쁨만은 어쩌지 못했다.꼽아보니 아직 사흘이 남았다!물건은 거의 다 샀고 집에도 다 준비해두어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가족을 모두 이끌고 가는 거라 지나치게 서둘러도 안 되고 시간을 너무 정확하게 짜도 안 됐다.유모를 경호까지 데리고 가되 경호에 도착하면 사람을 시켜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쪽으로 가면 분유가 있으므로 유모를 데려갈 필요 없었다.원래 희상궁과 같이 갈 생각은 없었지만, 만두가 현대에 갔다가 희상궁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해서 우문호는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긴장이 되어 시간이 안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다음 날 아침 조회 뒤에 명원제가 우문호에게 어서방에 남아 같이 점심 수라를 들자고 했다.우문호는 원래 점심때 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른과 점심을 같이 먹어야 하니 경성을 나서는 것은 해 질 녘이 될 것이고, 저녁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에 여의찮으니 점심 수라는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바마마께서 수라를 같이 들자고 초대하는 일이 드물어서, 아마도 뭔가 중대한 일이 있을 거라 출행하는 날을 내일로 미루는 한이 있어도 점심 수라는 함께 해야 했다. 내일 가도 하여튼 시간에 맞게 갈 수 있다.점심 수라는 여전히 간단한 두세 가지 반찬으로 우문호는 가끔 아바마마는 평생 힘들게 지내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높디높은 제왕의 위치에 있으나 먹고 마시는 것은 아주 검소하고 부귀영화에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없으셨다.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원 선생을 데리고 오면 원 선생 말대로 아바마마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겠다.점심 수라를 마치고 우문호가 물었다. “아바마마, 소신께 말씀하실 중요한 일이 있는 건 아닌지요?”명원제가 우문호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부자지간에 밥
“태자는 태자비 마중 가야 해.” 명원제가 고개를 들어 목여태감에게 말했다. “목여가 짐을 따른 지 얼마나 됐지?”목여태감이 차 도구를 내려놓고 웃음을 지었다. “폐하, 잠깐 같은데 벌써 30년이나 지났습니다!”“우리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 목여, 짐이 만일 어느 날 궁을 떠나면 태자가 자네 주인이 될 테니 짐에게 하듯이 태자의 시중도 잘 들어줘야 하네. 알겠나?”그러자 목여태감의 안색이 살짝 변하였다. “폐하께서 어떻게 궁에 안 계실 수가 있습니까?”명원제가 아무렇지도 않게 목여태감을 흘끔 보고는 답했다. “만약에 말이야.”“그런 '만약'은 없습니다.”명원제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왜 그런 '만약'이 없느냐? 짐이 가게 될 날이 분명 올 텐데.”목여태감이 얼른 꿇어앉아, “폐하,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소인도 일찌감치 가겠습니다. 소인만 남아서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명원제가 벌컥 성을 냈다. ”됐네, 짐이 이렇게 말하니 넌 이렇게 기억하면 돼.”“소인....” 목여태감이 고개를 들고 당황하며 명원제를 봤다.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저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소인 명을 받들겠습니다..!”우문호는 원래 내일 가려고 했으나 궁을 나서는 길에 쉬더라도 역시 먼저 출발하는 게 좋을듯싶었다.그래서 집으로 돌아가 마차를 서서히 성문으로 출발시켰다.서일과 탕양이 말을 타고 와서 환송을 해주었다. 둘 다 경호에 가는 줄 알고 있고, 태자비가 전에 경호에서 사라진 것도 알아서 굉장히 따라가고 싶었지만, 태자가 그쪽은 이상한 곳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 위험하므로 평생을 그쪽에 머물러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 서일은 분명 못 갈 것이다. 서일에겐 사식이와 키워야 할 사랑스러운 딸이 있기 때문이다.탕양도 갈 수 없는 게 비록 초왕부에 주인은 자리를 비울 수 있어도 안팎으로 할 일은 해야 했기 때문이다.우문호와 같은 심정은 현대의 원경릉과 주 재상도 마찬가지였다.주 재상은 그냥 한 번 해 본 말
우문호가 경호로 간 뒤 명원제는 이미 퇴위 조서를 준비해 우문호가 돌아오면 바로 성지를 대대적으로 반포할 예정이었다.매화장은 이제 명원제의 소유가 되었으며 성문 입구로 경성에서 거리가 가까워, 명원제가 퇴위한 뒤 비빈들을 데리고 거기서 안빈낙도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비빈들이 원하지 않으면 태비의 신분으로 궁에서 살아도 되었다. 명원제는 사실 전에 한 번도 퇴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막상 생각하고 나니 도무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 당장이라도 조정 일을 정리하고 싶었다. 명원제 명의로 태자 사람을 고위직에 선발해 놓아야 했다. 그래야만 나이 든 신하의 반론을 누를 수 있고 그들이 태자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거나 비방하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명원제가 매화장을 사들일 때 상당 기간을 황제로 있어 개인재산이 약간 있었다. 지금 여섯째가 내탕고를 관리해 명원제는 한 몫 챙길 수 있지만 국고는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게 다섯째가 뜻을 펼치게 하도록 남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다.그래서 백만 냥을 모으는데 약간 부족했다. 하지만 다행히 명원제에게는 부유한 사위와 며느리가 있지 않은가. 바로 이리 나리와 미색이었다.두 사람을 궁으로 불러들여 많이도 아니고 한쪽에 20만 냥씩 달라고 하자 미색은 통쾌하게 내주었으나 이리 나리는 명원제가 매화장 사는 것을 반대했다.이리 나리는 느낌이 왔다. 안풍 친왕은 자신을 수십 년 따라온 사람들이 적절히 자리 잡을 수 있는 돈을 남겨둔 채 홀랑 날아버릴 것을 말이다.그래도 안풍 친왕은 어쨌든 가기로 했기에 이리 나리는 달갑지 않았으나 명원제가 이미 결정한 일로, 하는 수 없이 결국 명원제에게 은자를 내놓았다.매화장 매매를 마치고 은자가 손에 들어오자, 안풍 친왕은 은자를 버려두고 검은 옷을 입은 신하들이 나간 틈에 경호로 바로 달려가 우문호와 마주치지 않도록 경호에 숨었다.그리고 우문호 일행이 경성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련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말을 달려 경호로 왔다. 먼지가 뿌옇게 날리며 노기가 충
모두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호수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희상궁 차례가 되었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다리가 떨렸다. 그 모습을 본 서일이 다급하게 외쳤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절 꽉 잡으세요. 던져 드릴게요!”희상궁이 얼른 서일을 잡자 서일이 희상궁을 안고 호수에 던졌는데 희상궁이 서일의 목에 깍지를 낀 채 제대로 손을 놓지 못해 호수에 떨어지는 순간 서일의 경악에 찬 비명소리가 들렸다. “손 놓으시라니까요....”“풍덩!”탕양이 화들짝 놀라 호수를 보는데 서일이 보이지 않았다. 잔잔한 물결 아래는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 온통 고요함 뿐이다. 나무아미타불!“여기 어디야? 나는 어디지? 도련님 어디 계세요?” 칠흑 같은 터널 안에서 들리는 건 서일의 공포에 휩싸인 목소리 뿐이다. 우문씨 집안 여섯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속으로 ‘젠장’하고 생각했다. 서일이 따라온 것이다.“태자 전하, 황태손 저하....” 서일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놀란 나머지 바보처럼 꽥꽥 소리를 질렀다. “어디 계세요? 여긴 어디예요…?”경단이가 서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서일 삼촌 우리 여기 있어요. 시끄럽게 하지 마세요, 형이 시간을 계산할 거고, 조금 있다가 빛을 볼 수 있어요. 앞으로 가세요. 아이고, 좀 빨리 걸으세요. 삼촌때문에 몇 걸음이나 지체했다고요.”“전.... 전 돌아 가야 해요. 헤엄쳐서 돌아가면 될까요?” 몸에 힘이 빠져 비틀거리는데 순간 눈앞에 빛이 나타났으나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저 눈이 침침해진 건가 싶었다.“여기선 다시 못 돌아가니 저희랑 가요!” 경단이가 마음이 급해서 말하자 서일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전 안 가고 싶어요, 가기 싫다고요!”우씨 집안 여섯 남자는 꾹 참고 있다가 일제히 뒤를 돌아 소리쳤다. “우리도 널 데려가기 싫어.”우레같은 한 마디에 서일의 질질 짜는 소리가 쏙 들어갔다. 억울하고 뭐가 뭔지 모르는 가운데 그들을 따라갔다. 계란이 마저 불만인지 ‘잉’하는 소리를 냈다.희상궁은 오히려 서일보다 냉정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란이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우문호는 소월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목여 태감이 계속해서 설득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어리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며, 그저 택란이 다른 어린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여 태감은 혹시라도 황제가 공주를 꾸짖을까 봐 걱정되어 공주를 감쌌다. 그의 약한 마음은 그런 걸 감당하지 못했다.마침내 택란과 원경릉이 도착했다.우문호는 작은딸이 원경릉의 뒤에 숨어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원경릉이 딸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가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택란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문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자기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마마, 저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우문호는 딸의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약도성에 얼마나 있었느냐?”택란은 거짓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지난번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약도성으로 갔어요.”우문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 나만 속였단 말이냐?”택란은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우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이 다가가 말했다.“아이가 자네 선물을 많이 샀소. 한번 보시게.”“필요 없소!”우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을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었다.원경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비밀이 없기로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깨진 것 같아 화가 났다.원경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깨달았다.오는 길 내내 택란만 걱정하며 우문호에게 딸을 변호해 주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속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하며 원경릉을 기쁘게 했다.다섯째는 이전에 다섯 개의 성을 위해 적어도 30년이나 50년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20년이 채 되지 않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국경 방어뿐만 아니라 조정에 세금을 납부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보였다. 아이들이 현대의 경험을 참고하며 지내는 것이 다섯째의 큰 걱정을 해결해 준 것이었다. 약도성은 이번 지진으로 국고의 돈과 주변 주현의 자원을 사용했다. 북당과 약도성의 백성들의 마음이 끈끈히 묶여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중증 환자들이 회복된 후, 원경릉은 택란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갔다.출발하기 전에 비둘기를 통해 다섯째에게 소식을 전하며 심리적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렇게 하면 다섯째가 택란을 보았을 때 마음을 가라앉혀 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택란은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슬퍼할까 봐 사실 마음속으로 몹시 두려웠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녀또한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던 중 택란은 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사자고 제안했다. 원경릉은 딸의 강한 생존 본능에 웃음을 터뜨렸다. 딸이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니, 다섯째가 딸을 그렇게 아끼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느꼈다.“너희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취미가 없으시고, 그저 술 한잔하는 걸 좋아하시니까 좋은 술 몇 병 사 가는건 어떠냐?”그러자 원경릉이 먼저 제안했다.“좋습니다! 사요! 많이 사서 마차에 싣고 가겠습니다!”택란이 급히 대답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섯째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자상한데도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이고 사랑이지만 말이다.경성에서 우문호는 원경릉의 서신을 받자마자 열어보았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는 멍해졌다.“계란이가 약도성에 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그렇게 얌전하던 딸아이가 몰래 약도성에 갔을 리가 없어.”더구나, 셋째와 넷째는
약도성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백성들은 임시로 지은 오두막과 초가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폐허로 변한 도성은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원경릉은 마음속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택란의 뜻으로 중증 환자들은 모두 저택으로 옮겨졌다. 원경릉은 계란이의 결정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다. 중증 환자들은 그녀와 몇몇 의원이 책임지고 돌보았고, 나머지 의원은 경증 치료를 맡았다.택란은 엄마 곁에 머물며 환자를 돌보는 것을 도왔는데, 기본적인 의술을 알고 있어서 소독과 붕대 감는 일을 도왔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통증이 심해 참기 어려웠고, 진통제를 먹이거나 진통 주사를 놓았다. 택란도 주사를 놓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쉬지 않고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환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들은 궁에서 자신들의 생사를 진정으로 걱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황후마저 직접 왔으니, 예전의 대립과 적대감은 유치한 웃음거리로 느껴졌다.저녁 무렵,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없이 서로 포옹한 뒤 다시 각자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백성 중 자발적으로 음식을 만들고 약을 끓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택 내 물자는 부족했으나 주변의 도움이 끊이질 않았다. 호명은 사람들을 조직해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의 약도성엔 인간의 이기심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황후가 직접 약도성에 온 덕분에 서북 지역의 신하들도 직접 의원과 물자를 이끌고 약도성에 와서 돕기 시작했다.약도성은 전례 없는 관심을 받았고, 이는 약도성 백성들이 다섯 도시 중 가장 빠르게 조정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재난 이전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재난이 발생한 지 반달이 지나면서 발견된 것은 모두 희생자뿐이었다. 인원을 파악한 후 한곳에 모아 장례를 치렀다.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5만여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매우 끔찍했지만, 택란의 사전
북당의 황후가 의원을 이끌고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믿지 않았다. 약도성의 백성들조차 믿을 수 없었고, 감히 믿을 엄두도 없었다.우문택란이 이미 약도성에 왔지만,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에 불과했다. 다들 그저 그녀가 약도성에 놀러 왔고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녀의 비범한 능력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약도성의 성주로서 약도성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초토화되었고, 재건하려면 조정이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북당의 조정이 약도성을 방치하고 자연적으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약도성 백성들은 줄곧 조정을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조정이 이들을 구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 황후가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약도성은 조정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지진 발생 열흘째 되던 날, 원경릉 황후가 이끄는 의원들이 약도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낮없이 말을 갈아타며 전력으로 달려왔다. 약도성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며 황후께서 약도성에 오신다고 얘기를 전했다.사람들의 생각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지진 이전까지만 해도 조정을 적대시하고 북당을 적국으로 여겼던 약도성 백성들이, 이제는 원경릉을 환영하며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이는 택란이 지진을 미리 알아차린 것과 구조 활동 덕분이었다.원경릉은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을 예상하지 못했다. 말을 타고 앞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고, 그녀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어머니!”군중 속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경릉은 단번에 딸을 찾아내고 말에서 내려 달려갔다. 택란은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어머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너무 많아요!"택란이 흐느끼며 말했다.원경릉은 딸이 이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원경릉은 딸을 품에 꼭 안
택란은 어릴 적부터 화염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는 내면의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을 제어하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스승님을 따른 후, 스승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약점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정의 틈새가 생기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항상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일을 담담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진심 어린 감정을 흔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녀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꼬마 봉황이 날개를 펼쳐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었다.그들은 수년간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성장해 왔고,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잠시 후, 택란은 다시 구조 현장으로 나갔고, 여전히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위왕과 안왕은 어린 조카의 침착함에 깜짝 놀랐다.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이의 천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그들은 택란이 애초에 아이로서의 천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태어난 후, 조금이라도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빠르게 세상을 이해하며, 지혜롭고 노련한 어른처럼 모든 것을 맞서야 했다.사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대나 요구가 없었으며, 능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그녀의 모든 행동을 걱정하고 감시하지 않았다.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약도성의 일이 안정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번 약도성 방문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놀이가 아닌 실습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의지와 감정을 단련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구조 작업은 계속되었고, 지진이 발
한 마을 주민이 눈물을 닦으며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원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오. 조정은 우리를 모조리 죽이길 바라오. 우리가 죽어야 조정은, 이 약도성을 완전히 삼킬 수 있소.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소.”택란은 화가 나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 왔잖냐! 빨리 계속 파시게!”주민이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웬 꼬마가, 넌 누구냐?”택란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둠 속이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약도성의 성주, 우문택란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산사태가 난 지역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작은 몸집이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작아 보였다.황실의 공주라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공주가 이런 곳에 직접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저택 안에서 잘 보호받고 있어야 할 존재다.그녀는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해 접근한 곳의 흙을 한 겹씩 옮겨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구조 요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 급히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약도성의 지진은 강북부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낡은 집도 무너졌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약도성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위왕과 안왕은 신속히 구조 병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택란이 약도성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 여태껏 택란이 스승과 함께 떠났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네 오빠들은 바로 병사를 데리고 약도성으로 향했다. 지진 발생 12 시진 후 약도성에는 8천 명 이상의 병사가 합류했다.약도성의 백성은 조정이 지원군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정이 약도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과거에도 가뭄, 메뚜기 떼, 산사태 등의 재난이 일어났지만, 북막조정은 몇 포대의 쌀만 보내며 형식적인 구조를 했을 뿐이다.약도성
지진이 발생하기 전, 호명과 주 아가씨는 약도성 중심부에서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새벽녘은 사람들이 가장 피곤할 시간이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백성들은 분노했다. 그중 한 집안은 도축업을 하는 홀아비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새벽 무렵에야 돼지를 잡고 고기를 나눠주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데다 아이까지 깨우니,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옆집 사람은 칼을 들고 나가 저들을 쫓아내면 다시 잘 수 있다고 부추겼다.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상황이라 아들을 방으로 데려다 놓고, 즉시 칼을 들고 나가 주 아가씨와 맞섰다.그가 칼을 휘두르며 집안 식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지진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먼지가 자욱했고, 곁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옆집 역시 무너졌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집 처마 아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깔려 있었다.“아들! 아들아!”홀아비는 그제야 안으로 데려다 놓았던 아들을 떠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 겨우 세 살밖에 안 되는 아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그는 미친 듯이 벽돌과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 아가씨와 호명도 서둘러 도왔다.지진은 단 몇 초 만에 일어났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고, 그 결과 무너진 집에 깔린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약도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방에서 울부짖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 조정과 맞서던 이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홀아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들 함께 벽돌을 치우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구가 없어서 맨손으로 작업해야 했다. 주 아가씨의 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흙벽을 밀어내고 벽돌을 옮겼다.반 시진 후, 주 아가씨가 마침내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다리를 크게 다쳐 엉엉 울고 있었다. 홀아
“그럼... 호명, 가십시다!”주 아가씨는 왠지 모르게 택란의 말을 믿었다.호명도 주 아가씨의 말을 듣고 동의했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지진이 생기지 않으면 백성들을 귀찮게 한 정도로 끝날 테지만, 정말 지진이 발생한다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게다가 약도성의 백성들은 조정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더 미움을 사도 중요하지 않다.일행은 즉시 돌아가 병사들을 소집해 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백성에게 넓은 곳으로 대피하라고 알렸다.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백성은 역시나 원치 않았다.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병사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성주가 단호하게 명령한 일이었기에, 백성들은 마지못해 끌려 나갔다.그러나 문제는 강제로 밖으로 끌어낸 사람들을 계속 감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떠난 후 많은 백성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게다가 일부 폭도들은 이를 계기로 병사들과 정면으로 맞서며 심각한 충돌을 일으켰다.부분 병사가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는 마을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마을은 거의 조정을 적대시하는 곳이었다. 너무 외진 곳이고 여인도 적은 곳이라, 이곳 남자들은 혼사도 치르지 못하고 가난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루 세 끼를 유지하기조차 힘들었고, 금나라의 선동이 더해져 이 지역의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 이 몇몇 마을에서 15세 이하의 아이들은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병사들이 징과 북을 울리며 백성을 깨우자, 폭도들이 화를 내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몸싸움이 벌어졌고, 20여 명의 병사들이 이들에게 압도당해 심하게 얻어맞았다.결국 병사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약도성에서 대피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약 만 명 정도였다. 대부분 병사가 떠난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조정이 백성을 괴롭힌다고 욕하며 약도성에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이에 주 아가씨가 분노를 참지 못해 말했다.“성주께 말씀드려서 집을 전부 불태워버리자고 해야겠습니다! 정말 너무합니다.”호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녁 무렵, 그들 일행은 출발했다.약도성의 밤은 전혀 활기가 없었다. 해가 지고 나면 거리에서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수년간 치안이 매우 나빴다. 비록 저녁에 병사들이 순찰하고 있지만, 백성들은 이미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덕분에 이번 외출은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약도성이 가난하다 보니, 부유한 이들의 저택만 튼튼할 뿐, 대부분의 집은 돌집이나 흙집, 나무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초가 거의 다져지지 않은 상태여서 지진이 발생한다면, 대부분의 건물이 버틸 수 없을 것이다.택란은 이 점이 걱정되었지만, 아직 지진이라 단언할 수 없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길한 예감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그녀는 꼬마 봉황에게 물어보았고, 꼬마 봉황이 하늘로 날아올라 몇 바퀴를 돌며 주변을 살폈다.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을 본 꼬마 봉황은 택란에게 알렸다. 그녀의 불안감이 점점 더 커졌다.택란은 호명과 주 아가씨에게 자신의 걱정을 털어놓으며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호명과 주 아가씨는 믿지 않았다. 약도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만 지진이 발생하였다.주 아가씨가 말했다.“오늘 밤하늘을 보니 지진운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걱정하신 것 같습니다.”“지진운은 믿을 수 없소. 강가로 한번 가보시게.”이곳에는 바다가 없고, 산을 따라 흐르는 큰 강만 있었다.다들 풍등을 들고 강가로 향했다.강물의 흐름은 빠르지 않았고, 눈에 띄게 가뭄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물 높이는 겨울이나 봄에 비해 많이 낮아졌고, 어떤 곳은 강바닥이 드러나 있었다.택란은 풍등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강물은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아마도 수심이 얕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이곳에 샘물이 있소?”택란이 주 아가씨에게 물었다.“있습니다. 여기서 2리 정도 떨어진 곳에 큰 샘물이 하나 있는데, 근처 주민들이 그곳에서 물을 떠다 마십니다.”“좋소. 가보겠소!”택란이 말했다.일행은 다시 큰 샘물로 향했다. 주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