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는 땅에 엎드리더니 큰 절을 하였다.“일개 초민이 왕야를 뵙습니다!”우문호는 그에게 절을 하라고 시킨 자가 포도대장임을 확신하고 포도대장을 노려보았다. 우문호와 눈이 마주친 포도대장은 고개를 숙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우문호는 바보에게 최대한 온화한 표정으로 물었다.“네 이름이 무엇이냐?”“석(石)이!” 바보는 입을 헤 벌리고 웃으며 우문호를 쳐다보았다.우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권(宗卷)을 펼치더니“우자양(牛子陽)의 집을 아느냐?” 라고 물었다.석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혀를 끌끌 찼다.“알아. 죽어 다 죽어. 많아 피가 많아.”라고 말했다.“그 날 무엇을 보았느냐?” 우문호가 되물었다.석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봤지. 아주 긴 보검(寶劍)을 가지고 들어가는 걸 봤지, 엄청 무서워! 내가 그 사람을 한 번 쓱 봤더니 그 사람도 나를 쓱 봤지.”라고 말했다.“그래서 네가 그 사람을 따라갔느냐?” 우문호가 물었다.“무서워 안 가. 왜 따라가! 그 사람 칼이 엄청 길어.” 석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얼마나 길어?”석이는 양팔을 쭉 펴더니 “이만큼!”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칼이 일장(一丈) 정도 된다는 건데, 그만큼 긴 칼은 있을 수가 없었다.“헛소리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긴 칼이 어디 있어?” 포도대장은 화가 나서 말했다.“진짜!”석이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치며“정말 길어! 나만 본 게 아니야 걔도 봤어.”라고 말했다.“걔? 걔가 누구냐? 그자는 어디에 있어?” 우문호의 눈이 반짝였다.“개는 이부귀(李福貴)네 집 개야.”석이가 말했다.우문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걔가 아니라 개라고…….”“근데 그 개는 봤어! 칼이 그렇게 길었는데 개는 안 무섭나 봐! 쫓아갔어!” 석이는 개가 쫓아가는 모습을 흉내 냈다. “또 뭘 봤어? 그 사람이 나가는 모습도 봤어?” 보좌관이 석이에게 물었다.석이는 고개를 저으며 “못 봤어, 그리고 그림자만 쓱 지나갔어.”라고 말했다.보좌관은 한숨을 내쉬며 “왕야 이
사건을 통해 죽은 두 가족 모두 평범한 집안이었으며,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만약 집안에서 사람을 죽였는데 그 근처 이웃들이 비명소리 하나 듣지 못했다면, 그들이 모두 동시에 죽었거나,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해둔 뒤 살해했을 것이다.그러나 시체 부검 결과 그들은 날카로운 칼이 아닌 무딘 칼에 찔려 죽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이 칼을 맞은 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소리를 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을을 살펴보니 집이 다닥다닥 붙어 이웃들이 비명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다. 담 하나 넘으면 바로 보이는 집에서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목격자가 없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석이가 말하길 범인이 칼을 썼다고 했는데, 부검 결과 모두 칼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고하니 석이의 말은 쓸모가 없었다.우문호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땅 꺼지겠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원경릉이 두 손으로 그의 미간을 쓰다듬었다.우문호는 그녀를 꽉 안으며 “아무 일도 아냐. 그냥 사건이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거짓말!” 졸린 눈을 비비며 그녀가 두 발을 들어 상처가 바닥에 닿지 않는 편안한 자세를 하고는“뭐 걱정되는 거 있지? 사건 관련된 일이야?”라고 물었다. 우문호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다친 다리를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렸다.“넌 어떻게 그렇게 똑똑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를 꿰뚫어보는 것 같아.”“그러니까 나 속이려고 하지 마.”원경릉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해 봐. 혹시 알아 내가 도울 수 있을지?”라고 말했다.우문호는 그녀의 입술을 만지며“이 두 사건 모두 단서가 남아 있지 않아. 그래서 범인이 어떤 무기를 썼는지도 모르겠어. 마치 눈에 보이는 대로 흉기를 들어 사람을 찍은 것 같아.”라고 말했다.“미친놈이 그런 건가?”원경릉이 물었다.“미친놈 같긴 한데, 꼭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어.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고, 흉기도 목격자도 찾지 못했으니까…… 목격자
기라는 미소를 지으며 “왕야 정말 세심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왕야께서 이렇게 세심한 분이셨다니,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기라는 속으로 생각했다.우문호가 이렇게 세심하게 변한 데는 원경릉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녀를 한번 잃을뻔한 이후 우문호는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이 생기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조정에는 문무관원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명원제가 천천히 보좌에 앉자 신하들이 만세 삼창을 했다. 그는 그런 신하들을 위엄 있는 표정으로 훑어보더니 “모두 일어나서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게!”라고 말했다. 명원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수보(周首輔)가 일어나서 말했다.“폐하, 최근 경중에서 발생한 두 번의 멸문 참안(滅門慘案) 때문에 백성들이 말이 많습니다. 하루빨리 범인을 잡아 처벌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불안에 떨 것입니다.”주수보가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이자 주수보의 주변에 있던 신하들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어김없이 이 사건에 대해 말이 많구나.’우문호는 주수보의 말이 신경 쓰였다. 명원제는 우문호를 보고 “사건에 진전이 있는가?”라고 물었다.사건에 진전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렇다고 하며 대답을 얼버무렸겠지만, 진전이 손톱만큼도 없었다.우문호는 고개를 저으며“현재 흉기도 증인도 단서도 하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이 말을 들은 명원제의 얼굴에는 ‘불쾌’라는 두 글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바보 같이 어쩜 그리 솔직한 것이냐……’“왕야께서 경조부에 오신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사건을 처리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으니, 차라리 이 사건을 직접 형부(刑部)로 이관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형부에서 이 사건을 빨리 처리한다면 백성들도 안심할 것 입니다.” 주수보가 말했다. 주수보의 말대로 사건을 경조부에서 형부로 이관한다면, 그야말로 우문호가 무능하고 쓸모없다는 것을 제 손으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뿐 아니라 우문호를 경조부윤으로 임명한 명원제도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명원제는 주수보의 말에 화가 났지만 최대한 덤덤한
우문호는 기왕의 얼굴에서 묘하게 기세등등한 표정을 보았다. 조회(朝會)에서 주수보가 자신을 비판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상했기에 우문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주수보는 국사(國事)를 매우 중시하는 사람으로서 오늘 조회에서 한 말이 틀린 얘기는 아니다. 이 살인 사건은 그의 말대로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그래서 주수보는 가능한 한 빨리 사건을 해결하라고 목소리를 낸 것이다.하지만, 지금까지 찾아낸 단서라고는 목격자라고 하기도 애매한 바보 한 명과 개 한 마리뿐인데……. 과연 이 단서들을 이용해서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퇴조(退朝) 후에 우문호가 초왕부에 돌아왔다. 그는 원경릉이 회왕부에 간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이렇게 가만히 있지를 않는 것이냐.’관아로 돌아온 우문호는 신하들에게 일주일 내에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황제의 뜻을 전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관아에서는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우문호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한숨 쉴 시간에 빨리 단서를 찾아라! 사건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탐문하고 주변을 더 샅샅이 뒤져 흉기라도 찾아오라는 말이다!”‘왕야께서 저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걸 보니 보통 일이 아닌 게 분명해.’우문호의 천둥같은 호령에 관아는 한순간에 조용해졌다.며칠 동안 우문호는 원경릉이 잠에서 깨지 않은 이른 아침에 나가서 그녀가 잠이 든 후에 돌아왔다. 원경릉은 그가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자신이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되도록 사건에 대해 말을 아끼고,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상처도 점차 회복되었다. 예전처럼 행동이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발로 땅을 딛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시간을 내서 정후부에 들르기도 했다. 그녀는 조용히 가서 노마님에게 약을 지어주고는 쥐도 새도 모르게 왕부로 돌아왔다. 회왕부도 태평했다. 노비는 회왕부를 내부를 철저하게 조사해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싹 제거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부중(府中)에서도 한바탕
풀리지 않는 살인 사건노비는 원경릉을 보고, “만약 기왕비가 너에게 치료해달라고 부탁하면 가서 치료할 거니?”원경릉이 웃으며, “기왕비가 저한테 부탁할 리 없어요.”“그건 모를 일이야, 기왕비는 가늠할 수가 없어.” 노비가 말했다.낙평공주도 호기심을 가지고 원경릉에게, “만약 정말 부탁하면?”원경릉이 잠시 생각하더니, “마음은 하고싶지 않을 게 틀림없어요.”기왕은 전에 우문호에게 손을 썼고 그때의 자상으로 우문호는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뻔 했다.기왕비는 순수한 사람이 아니고, 심지어 기왕보다 모질고 독하다. 그렇지 않고 서야 고의로 회왕을 오인하게 만들어 치료를 포기하도록 했을 리 없다.기왕 부부가 발목을 잡지만 안았어도 원경릉의 인생이 훨씬 평탄했을 텐데.원경릉은 유시(오후5시~7시)가 끝날 즈음 초왕부로 돌아와 우문호가 돌아오길 계속 기다렸다.원경릉은 며칠 밤을 너무 피곤한 나머지 기다리다 잠이 들어버렸는데 오늘은 기필코 우문호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야 말겠다.그런데 우문호는 돌아오지 않았다.이렇게 오래 조사를 거듭했는데 여전히 아무런 진전이 없고, 범인이 도대체 몇명인지 조차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흉기에 대해서도 단서가 전혀 없다.우문호는 심지어 방을 붙여 만약 흉기와 유사한 도끼를 발견해 관아에 가져오면 은 열 냥을 상으로 걸었다.내리 이틀간 식칼은 적지 않게 들어왔지만 상처에 들어맞지 않았다. 백성들이 은 열 냥의 상금에 눈이 멀어 가짜를 진짜라고 속인 것이다.우문호는 가슴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서 초왕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폭발할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원경릉은 자시(밤11시~1시)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녹주가 밤을 새다가 원경릉이 나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달려가, “왕비마마, 어찌 아직 안 주무십니까?”원경릉이: “왕야께서는 아직 안 오셨느냐?”녹주가: ‘방금 서일이 와서 오늘밤 왕야께서는 관아에서 묵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쇤네는 왕비마마께서 주무시는 줄 알고 들어가 고하지
경조사에 온 원경릉포졸 하나가 급히 들어와 예를 취하며: “왕야, 왕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우문호가 고개를 들고, “왕비가?”뭐 하러 왔지? 이 밤중까지 왜 안 잤어?우문호가 나가보니 정말 녹주가 원경릉을 부축해서 들어오고 있다.원경릉은 우문호의 피곤에 절은 창백한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오늘 공주마마께서 얘기해 주셨는데 황제폐하께서 7일의 말미를 줄 테니 사건을 해결하라고 하셨다면서요, 이렇게 큰 일이 있는데 왜 말씀을 안 하셨어요? 우문호가 부드럽게 안심시키며: “걱정하지 마요, 7일의 기한이 아직 다 되지 않았고, 7일 안에 사건을 해결할 자신이 있으니.”원경릉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만약 정말 기한 안에 사건을 해결할 수 있으면 집에도 돌아오지 못 할리 없다. 원경릉은 우문호를 잡아 끌고, “사건해결에 대하선 아는게 없지만 의술은 알아요, 시체 좀 보여주세요. 제가 뭔가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요.”“시체를 본다고? 안돼!” 우문호는 바로 반대하며, “죽은 사람이 뭐가 볼 게 있다고?”사람이 죽은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시체 안치소에 얼음을 층층이 쌓아 뒀지만, 시체가 이미 부패하기 시작했다. 냄새가 심한데 원경릉이 어찌 그 냄새를 견딜 수 있을까?“하지만 당장 경조사도 별다른 진전이 없잖아요, 맞죠? 절 속이려는 생각 마세요.” 원경릉이 말했다.“날 믿어, 잘 될 거야.” 우문호 자신조차 자기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원경릉을 관아 뒤 후원으로 보내 나한상에서 좀 쉬게 한 뒤, 녹주를 불러 왕비가 쉬도록 잘 돌보지 못했다고 꾸지람을 했다. 우문호가 자신을 손바닥 위의 구슬처럼 다뤄주는 것에 감동했지만, 둘은 지금 이미 부부로 무슨 일이 생기면 둘이 함께 분담하는 것이 마땅하다.그래서 우문호의 이런 행동에 원경릉은 무력함을 느꼈다.하지만 억지로 할 일도 아니고 우문호는 정말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다.원경릉은 마치 장소를 바꿔 자려는 것처럼 왔다 갔다 하고 우문호는 여전히 사건때문에 정신이 없다.서일
시체를 부검하는 원경릉서일이 고개를 저으며 어쩔 줄 몰라: “소인은 그렇지 않습니다.”“나는 너를 도왔는데, 내가 너에게 부탁하는데도 네가 도와주지 않으니, 이런 걸 바로 배은망덕이라고 하는 거야.”서일이 난감한 표정으로 왕비를 보니, 차갑게 화가 있어 일순간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녹주도 앞으로 나와 사정하며, “서일은 왕야의 가장 측근에서 사건에 대해 고민했잖아, 왕비마마께서 흔쾌히 도우시겠다는데 왕비마마를 도와주는 게 어때? 그리고 막상 왕야께 알려진다고 해도 왕비마마의 명령이었다고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고 하면 돼지.”서일은 왕야께서 자기를 잘라버릴 걸 알지만, 사건조사가 지금까지 진전이 없고, 왕비마마는 지금까지 계속 기적을 일으키셨으니 혹시 왕비마마께서 보시고 뭔가 발견해 내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일은 고개를 들어: “좋습니다. 하지만 왕비마마 오래 머무시면 안되고, 시체 안치소는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지만 누군가 그쪽으로 순찰을 하다가 발견되면 반드시 왕야께 알려집니다.”“알았어!” 원경릉이 한마디로 수락하고 녹주에게: “넌 여기를 지키다가 만약 왕야께서 오시면 내가 화장실에 갔다고 얘기해라.”“예, 알겠습니다,” 녹주가 말했다.서일이 등롱을 들고 원경릉을 데리고 나갔다.시체 안치소는 경조부 관아 좌측 뒤쪽에 있는데 대략 50제곱미터 크기로 세워진 건축물이다. 벽은 비교적 얇고 창이 2개있지만 둘 다 닫혀 있다.입구에 두개의 등이 걸려있어 엷은 붉은 등불이 시체 안치소 문을 온통 시뻘겋게 비추니 한밤중엔 특히나 음산하고 공포스럽다.서일이 덜덜 떨며 걸어 들어가다가 원경릉을 흘끔 보고, “왕비마마께서는 안 무서우십니까?”“뭐가 무서운데?”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넌 여기서 기다려, 누가 오면 나한테 알리고.”“소인은 왕비마마를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서일은 원경릉 혼자 안에서 놀라서 실신할 까봐 걱정이 되었다. 입으론 아니라고 하지만 안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어? 안에 그렇게 많은 시체가 있고,
시체의 사인을 밝히는 원경릉어쩌면 해부가 필요할 수도 있다.하지만 이미 시체의 부패상태로 보건대 혼자서 해부하기는 힘들 듯 싶다.잠시 생각하더니 자석을 꺼내 시체의 머리부분부터 아래로 쭉 훑어 나갔다.심장 부근을 훑어가는데 자석에 반응이 생기며 심장 부근도 약하게 움직였다.원경릉이 자석을 내려놓고 심장 위치를 자세히 관찰하자 심장에 바늘구멍 같은 것을 있다. 털처럼 얇고 가늘어 시체가 부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늘구멍이 여전히 눈에 띄지 않는다.보아하니 심장을 해부하는 수밖에 없다.해부는 쉬운 일이 아니다.원경릉은 경험도 부족할 뿐더러 의대를 다닐 때 해부학 수업을 들었을 뿐이다.그나마도 어깨에 상처가 있는 상태로 힘을 쓸 수 없으니 서일이 도와줘야 할 판이다.서일이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자 놀라 자빠지며, “왕…….왕비마마!”“들어와서 나 좀 도와줘.” 원경릉이 말했다.서일은 원경릉의 머리에 묶여 있는 손전등을 보고, “이게 뭡니까?”“쓸데 없는 말은 됐고, 빨리 와서 좀 도와줘, 뭘 발견 했어.”서일은 발견한 게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급히 따라 들어갔다.코를 찌르는 냄새로 서일은 거의 토할 뻔 했지만 원경릉이 잽싸게 마스크를 꺼내 씌워줬다. 그래도 서일은 여전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원경릉은 서일의 호흡이 좀 안정된 것을 보고 매스를 건네며, “날 도와서 망자의 심장을 해부할 거야, 난 안에 바늘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테니까.”“에? 심장을 해부한다고요?” 서일이 손을 덜덜 떨었다. 심지어 시체들이 녹색으로 변해 부풀어 커진 모습을 보고 일순간 아연실색해 버렸다.“뭘 그렇게 무서워 해? 인간은 다 죽어. 만약 네가 그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면 저 사람들은 편안히 눈을 감고 너한테 감사할 거야.” 압박에 못 이겨 서일은 매스라는 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심장을 해부하니 전체 심장이 다 검은색이며 과연 작고 가느다란 바늘이 있었다.원경릉은 겸자를 끼워 검게 변한 심장을 들여다 봤다.“중독된 거죠?”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
한편, 안왕과 위왕은 이미 명월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였다.하지만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궁에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혼 연회가 예정보다 앞당겨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그들은 의아해하며 금나라가 막무가내라고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혼례라더니, 이제는 정혼식이라 하고, 심지어 약속했던 날도 지키지 않고 앞당겼으니 말이다.혼사라는 중대사가 이렇게 어린아이 장난처럼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신부가 북당 사람이니, 그들은 신부의 친정과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나라의 일정을 따르며, 금나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 다른 나라 사절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무관의 신분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고 주변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다섯째가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고 말했었다. 장사는 대화로 시작되는 일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결국 성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다섯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뻔뻔하다고 느꼈었지만, 지난 10여년간 나라 경제가 눈에 띄게 번영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었다.다섯째의 말처럼 경제를 앞서게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덕분에, 돈이 끊임없이 북당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들이 다른 나라 신하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안왕과 위왕은 금나라의 황제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젊은 황제는 올해 열여덟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진국왕을 몰락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과 꾀를 가졌을까?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시위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혼례복이 아닌 용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그 중, 택란은 베일을 쓴 채 궁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때마침 불이 하나둘씩 밝혀질 시간이라, 거리는 무척 떠들썩했다. 금나라 수도의 번화함은 약도성이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통행금지가 없어, 백성들이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택란은 마차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장사에 열중하는 상인들, 주루나 주막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이런 활기 넘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러고는 순간 어린 황제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말이다. 키도 훤칠해졌고 이제 얼굴도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한층 성숙하고 침착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도성이 지난 몇 년간 겪어온 일들이 많았기에 당연히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한편, 금나라 황궁에서는 이미 정혼 연회의 준비를 마쳤으나,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안왕과 위왕이었다.북당의 두 친왕이 도착해야만 연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한편, 경천 황제는 내내 택란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녀와 재회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3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들떴지만, 첫 만남은 너무도 중요했다.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생생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조정을 되찾아 그녀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지금 그녀는 아직 어리기에, 혼담을 논하기엔 이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생각이 훨씬 개방적이었고,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행복이라 여겼기에 의식 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래도 아버지의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현대에서 한 번, 즉위 후에 또 한 번 의식을 치렀다.주 아가씨는 객사로 돌아오자마자, 객사 일꾼에게 소식을 물었다.그러자 일꾼은 황제가 곧 혼례를 올린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멈칫했다.“혼례요? 정혼 아니었습니까?”“정혼? 정혼이라니? 그럼 이미 혼사를 올릴 나이가 되었는데, 어찌 바로 혼례를 하지 않다는 것이냐?”“그건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정혼한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미래의 황후가 북당 사람이 맞느냐?”일꾼이 말했다.“예. 북당 출신의 아가씨라고 합니다. 게다가 황제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들었습니다.“택란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경천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 은인의 언니라는 말을 믿다니 말이다.설사 그렇다고 해도 굳이 그녀와 혼례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혼사를 어찌 장난처럼 다룰 수 있단 말인가?택란은 경천 황제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저 정치적인 판단에서만큼은 어리석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택란은 원래 이틀 정도만 량주를 둘러본 뒤 바로 궁으로 들어가 알현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혼례 날짜가 다가오지 않았으니 며칠 더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궁으로 들어가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녀가 생명의 은인인 것을 알아차리면, 정혼식을 진행할지 말지 애매해질 것이기에, 택란은 며칠 동안 객사에 머물며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펴보는 한편,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살펴보던 중, 주 아가씨가 정보를 알아보러 나갔다가 안왕과 위왕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칠 동안 다른 나라 사절들은 계속 장관에 묵고 있었는데, 택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삼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무렵 장관으로 갔다.그런데 도착하고 나서야 그들이 이미 황
량주는 금나라의 수도가 된 이후 지난 2년간 크게 발전했다. 또한,금나라와 북당이 우호적인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당 변방 도성의 백성들도 장사를 위해 많이 찾아왔다.이전에 택란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위해 금나라에 왔었다. 하지만 그때의 량주는 지금처럼 북당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택란은 객사에 머문 뒤 주 아가씨와 냉명여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폈다.여기도 어쨌든 금나라의 수도 아닌가!진국왕은 물러나기 전까지 나라를 잘 다스렸고, 특히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야망이 지나친 탓에 늘 약도성을 되찾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그리고 동시에 북막을 두려워하기도 했다.경천이 즉위한 후, 광산 자원 개발 외에도, 그는 농경지와 산지를 개간하려고 노력했다. 금나라의 서북부에는 농사에 적합한 땅이 있었지만,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북당의 다른 도성을 본받아 사람들을 개간지로 보내고 그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었다.나라가 상승세일 때, 그 분위기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백성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택란은 경천이 황제로서 매우 적합하다고 느꼈기에, 그가 이끄는 금나라는 분명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발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에,그가 광산을 함께 개발하자는 제안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았다.택란은 이내 자신감을 얻었다. 궁에 들어가 알현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량주 백성들이 북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과거, 약도성과 량주의 관계는 다소 안 좋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나라가 약도성에 사람을 침투시켜 많은 폭동을 일으켰기에, 약도성 백성들도 그들을 매우 싫어했다.그렇기에 지난 2년간의 교류를 통해, 택란은 그들의 원한이 천천히 사라지기만을 바란 것이었다.이제 북당 쪽은 문제가 없으니, 량주 백성들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택란은 물건을 사면서 점포 주인과 상인들에게 북당 약도성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곤 했다.그 중,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