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은 정자에 앉아 아이들과 여유롭게 햇볕을 쬐고 있었고 설랑들도 그들의 옆을 지키듯 엎드린 자세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아이들 그리고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낙엽,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원경릉은 마음이 편안해졌다.잠시 후, 사식이가 찾아와 원경릉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원에는 기상궁의 명을 받은 시녀들이 시든 꽃들을 정리하기 바빴고, 만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라와 함께 수를 놓고 있었다.“원누이, 날씨도 좋고, 시간도 이른데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사식아 네가 젊긴 젊구나.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쉬고 싶은데…… 생각해 보니 나도 네 나이 때는 가만히 못 있었던 것 같아.”원경릉이 사식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사식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기지개를 켰다. *서일이 돌아와 우문호가 아침 일찍 입궁했다가 지금은 관아로 들어갔다고 보고했다. “서일,전하의 기분은 어떠신 것 같으냐?”“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궁을 나오자마자 한 마디를 하셨는데……”“뭐라고요?” 사식이가 물었다. “태자비께 자신의 행적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네. 그럼 가보게.”라고 말했다. ‘우문호의 성격상 사실 그대로를 명원제에게 전했을 것이다. 명원제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초왕부에서 막 점심을 준비하려던 차에 궁 내시감(内侍監)이 원경릉을 데리러 왔다. 원경릉은 궁에서 자신을 부른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분명 자신을 부른 이유가 현비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근데…… 황상은 왜 이 일에 나를 부르시는 거지?’홀로 입궁한 원경릉은 내시감이 그녀를 동난각(冬暖閣)으로 안내하자 원경릉이 깜짝 놀랐다.“안에 황상께서 계십니까?”내시감이 대답을 하지 않자 목여 태감이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태자비, 마침 잘 오셨습니다. 황상께서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원경릉은 불편한 사람과 식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태자비 어서 들어
잠시 후, 세 사람 앞에 요리가 연달아 차려졌다. 세 가지는 야채 요리였고, 나머지 하나는 고기볶음이었다. 호비는 입맛을 다시며 수저를 들었다. 말없이 밥만 먹던 명원제가 원경릉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너희들 초왕부 음식이 짐의 수채보다 더 푸짐하지 않느냐?”그 말을 들은 원경릉은 깜짝 놀랐다. ‘설마 황제가 현비가 횡령한 은화가 모두 초왕부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건가?’원경릉은 그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부황, 초왕부 식사는 아주 간단합니다. 저와 다섯째 둘이 먹을 때는 항상 반찬 두 가지 이상은 두지 않습니다.”“그래?”명원제는 담담했다.“초왕부는 조금도 사치스럽지 않습니다. 지금 입추인데 저와 다섯째 그리고 삼둥이들의 새 옷도 만들지 않았습니다.”“왜 옷을 만들지 않느냐? 설마 초왕부의 은화가 부족한가?”그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가득했다.“은화야……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에 입던 옷들도 충분히 입을만합니다. 은화를 낭비하면 못 쓰지요.”“그래? 보아 하니 태자비는 살림을 잘 아는구나. 집안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이니 초왕부에서 은화를 얼마나 쓰는지 잘 알겠군. 금년 초왕부에 남은 은화가 얼마인지도 말해 보시오.”명원제는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사실대로 말해야 할 뿐아니라, 초왕부에 있는 은화가 어떤 경로로 들어오는지 똑똑히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명원제는 현비가 횡령한 은화가 모두 초왕부에 있을 것이라고 오해할 것이다.원경릉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명원제를 보고 말했다.“밭과 집, 그리고 차용증을 제외하고 지금 수중에 있는 은화 이백만 냥 정도 됩니다.”“……”명원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마 그럴 겁니다.”원경릉이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차용증? 차용증이 있는가?”원경은 머리를 숙이고 천천히 말했다.“예, 부황께서 저에게 주신 차용증 말입니다.”그러자 원나라 황제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그 차용증은
명원제의 물음에 원경릉이 즉답하지 않았다.“아, 며느리 현비 마마의 일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고…… 얼추 알고 있습니다.”명원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럼 이건 알았느냐 몰랐느냐? 이 일의 진실이 밝혀지면 현비는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야.”원경릉은 명원제의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 몰라 고개만 떨구었다. “태자비, 네 생각은 어떻느냐? 짐이 현비의 횡령을 낱낱이 조사해 그녀를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느냐?”원경릉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부황, 모르옵니다. 며느리가 어찌 조정의 일에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명원제는 담담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짐이 네 의견을 묻는 것이니, 눈치 보지 말고 솔직하게 답하거라.”원경릉은 명원제가 일부러 그녀를 난처하게 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됐다. ‘현비가 사형을 당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어쨌든 다섯째의 생모니까…… 도대체 부황이 원하는 대답이 도대체 뭐지? 현비의 잘못을 눈감고 넘어가자고 하기엔 북당의 백성들을 볼 면목이 없는데.’원경릉은 두 눈을 꼭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부황, 너무 어려운 질문이십니다. 며느리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일은 부녀자가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짐이 지금까지 태자비를 과대평가했구나. 항상 대담하고 솔직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어.”원경릉은 그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만약 현비에게 사형을 내린다면, 다섯째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야. 오점이 있는 모비를 가진 태자를 누가 환영하겠느냐? 그 말 즉슨 앞으로 다섯째의 미래에 훼방꾼이 많아질 것이라는 거다. 하지만 현비의 죄가 가볍지 않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일단 복잡한 일이니 시간을 두고 더 생각을 해야겠다.”원경릉은 그의 말을 듣고 어떠한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명원제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 그의 의견에 따를 생각이었다.“짐이 생각할 시
원경릉은 명원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태자비, 내 생각은 이렇다네. 벌금인 오십만 냥은 소씨 가문에게 물고, 나머지 팔십만 냥은 현비가 물게 할 것이야. 일단 소답화와 현비가 가지고 있는 게 얼마든 모두 몰수를 하고, 만약 그래도 은화가 부족하다면 그 금액은 초왕부에서 가져올 생각이네. 태자와 태자비도 그럴 책임이 있지 않나 싶은데?”원경릉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부황, 그럼 얼마나 초왕부에서 내야 할까요…….”“짐이 어림짐작하건대, 현비에겐 아마 만 냥 정도 남아있지 않을까? 나머지는 초왕부에서 내야 할 것이고.”명원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원경릉의 반응을 살폈다. 원경릉은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묻힌 느낌이 들었다. 빚 생각만으로도 속이 메스껍고 방금 먹은 밥이 다시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태자비, 표정이 안 좋은데? 혹시 짐의 제안에 불만이 있는건가?” 명원제는 인상을 쓰고 원경릉을 보았다.“……”“현비는 다섯째의 어머니야. 그녀가 지금까지 다섯째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한 값이라고 생각하면 팔십만 냥이 전혀 아깝지 않을 걸세.”원경릉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횡령에 왜 연좌제를 지어야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명원제 앞에서 차마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초왕부에 있는 은화로 빚을 갚으면 삼둥이들은 뭘 먹고살라는 말인가?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명원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부황, 초왕부에 있는 은화는 태상황님께서 삼둥이들을 잘 키우라고 주신 은화입니다. 고로 은화의 소유는 삼둥이들에게 있는데 며느리가 어떻게 건드리겠습니까.”“그거야 걱정하지 말거라. 짐도 그건 알고 있다. 태상황께서 초왕부가 거덜 나는 것을 지켜보시겠느냐?”그 말을 들은 원경릉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부황의 말은 결국 빚을 다 갚고 나면, 태상황님께서 거듭 은화를 하사할 거라는 건가?’명원제는 원경릉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셨다. “부황, 혹시 이 일을 다섯째도 알고 있습니까?”“당연히 알고
왕부로 돌아오는 내내 원경릉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난 현비의 덕을 본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빚은 나보고 떠안으라는 거지? 도대체 팔십만 냥을 어떻게 마련하라는 거야…….’왕부로 돌아온 그녀는 회계방으로 들어가 주판을 들고 미친 듯이 계산기를 두들겼다. 잠시 후, 그녀의 계산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목여 태감과 호부상서(戶部尚書)가 초왕부로 들어왔다. 태감은 어명이 적힌 종이를 꺼내어 읽었는데 그 내용이 태자비가 현비를 위해 칠십만 냥을 지불하고, 현비는 가지고 있는 십만 냥을 내라는 것이었다.원경릉은 회계방 안에 있던 금고 하나가 마차에 운반되어 실려나가는 것을 보고 얼굴이 죽상이 되었다. ‘내가 써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은화를 어처구니 없이 빼앗기는구나! 부황께서는 성격도 급하시지 어찌 바로 가져가시나! 우리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러시나?’목여 태감은 원경릉에게 다가와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태자비께서 효심이 참 깊으십니다.”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호부상서는 태자비가 북당을 위해 칠십만 냥의 은화를 기부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호부를 운영할 은화가 부족했는데 이렇게 태자비가 기부를 해주는 호부상서는 입꼬리가 귀까지 걸렸다.원경릉은 실성한 표정으로 떠나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칠십만 냥이 이렇게 증발하는구나!”그녀의 서글픈 외침 또한 하늘로 증발했다.목여 태감은 타고 온 마차에 오르며 원경릉에게 들어가라고 말했다.원경릉은 사식이와 만아의 부축을 받아 겨우 대청에 앉았다. 그녀는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 대청 기둥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식이와 만아는 마음이 몹시 아렸다. 그러나 그녀들 또한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원경릉이 북당을 위해 은화를 기부했다고만 생각했다. 사식이는 원경릉의 대담한 결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칠십만 냥이라는 큰 금액을 기부하시다니! 태자비 정말 대단하십니다!”“지금 몇 시지?”원경릉은 사식이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유시(저녁 6시)가 지났으니 태자
우문호는 원경릉에게 다가가 그녀의 턱을 들고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보았다.“무슨 일이야? 기분 안 좋아? 누가 건드렸지?”원경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미소를 지었다.“기분 나쁜 거 없는데? 저녁을 많이 먹었더니 체했나 봐.”우문호는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거짓말, 너 오늘 저녁밥도 안 먹었다며, 왜 한순간에 돈이 없어지니까 속이 뒤집혔어?”우문호의 말을 들은 원경릉은 하마터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써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칠십만 냥을 그냥 빼앗겼는데 어찌 속이 뒤집히지 않겠는가?“아니라니까. 아까 부황과 호비 마마와 점심을 먹었는데 그때 체한 것 같아.”원경릉이 말했다.“오늘 입궁했었어?”“응. 부황께서 입궁하라고 하셨어.”“부황이 분명 너에게 은화를 달라고 했지? 내가 부황께 말씀 다 드렸는데 왜 또 너를 부르신 거지? 내가 이틀이면 은화를 마련할 수 있다고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말이야. 오늘 저녁에 구사와 냉정언에게 각각 십만 냥의 은화를 빌렸어.”“은화를 빌렸다고?”“응. 두 사람 모두 3년 안에 이자 없이 원금만 갚으라고 했으니 걱정 마. 그나저나 은화가 마련되는 대로 부황께 말씀드린다고 했더니…… 성격도 급하시지. 부황께은 내 마음이 바뀔까 봐 너를 불렀나 봐.”“……”원경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설마 부황께서 은화를 가져가셨어?”“응.” 원경의 낯빛이 이내 어두워졌다.“그럼 내가 내일 이십만 냥을 다시 왕부 금고에 채워둘게.”“근데, 왜 이십만 냥이야?”“나더러 처음엔 오십만 냥을 내라고 하더라고? 내가 그만한 은화가 어딨겠어? 먹고 죽어도 없다고 했지.”“뭐? 오십만 냥?”“그렇다니까! 내가 부황께 현비도 부황의 부인이지 않냐며, 현비가 잘못했으면 부황도 일정 부분 보조를 해야 한다고 했지. 나는 죽어도 이십만 냥 이상은 보조하지 못한다고 했어. 그리고 남은 벌금은 소씨 가문이 부담하게 했지.”“뭐라고? 이십만 냥?”우문호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십만 냥…… 너무 많지?
원경릉은 침상에 가부좌 자세로 앉아 복식호흡으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야…… 돈이라는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야. 일단 의학원 규모는 크게 할 필요가 없으니 작게 만들어 학생들의 반응을 살피고 조어의 보고 운영을 해보라고 해야지. 그리고 졸업한 학생들은 혜민의서에서 일할 수 있게 체계를 확립하고 그 후에 규모를 늘리고 학생들을 많이 모으면 돼.’ 원경릉은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자기합리화를 했더니 크게 심호흡을 하고 우문호를 보았다.“이제 자자!”우문호는 아까보다 표정이 나아진 그녀의 손을 잡고 침상에 누웠다. 그 역시도 현비 때문에 지출되는 은화가 아까웠지만, 지금 은화보다 중요한 것은 옆에 누워있는 원경릉이었다. 십만 냥을 더 주었다고 해도 원경릉이 줬다면 충분히 용서가 됐다. 우문호는 머릿속에 잡생각이 많을 땐 운동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원경릉에게 침상 운동을 하자며 허리에 손을 얹으려던 찰나 그녀가 휙 고개를 돌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줘야 해?”“뭘 얼마나 줘?”“됐다. 너랑 나랑 이런 얘기를 해서 뭐해. 네 돈이나 내 돈이나 그게 그건데. 초왕부의 은화를 채우려면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서 꺼내와야 한단 말이지……”“뭐라는 거야?”“다섯째…… 사실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 원경릉은 그와 눈을 맞추고 조용히 말했다.“그게 뭔데?”“부황께서 나를 속였어. 부황은 초왕부에서 칠십만 냥을 가져가셨어.”우문호는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뭐라고?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지? 칠십? 칠십만 냥이라고?”원경릉은 우문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응. 처음엔 팔십만 냥을 요구하셨고, 내가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했더니 칠십만 냥을 가져가셨어.”“세상에…… 내가 미친 듯이 그를 설득해서 이십만 냥으로 떨어뜨려놨는데, 여우 같은 부황이 너를 속이다니. 넌 그걸 믿고 그냥 줘버린 거야? 전에 십 원 한 장에 덜덜 떨던 원경릉은 어디가고 칠십만 냥을 한 번
우문호가 원경릉에게 부황이 칠십만 냥을 초왕부에서 가져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부황과 원경릉 두 사람에게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는 평소 십 원 한 장에도 벌벌 떠는 원경릉이 우문호의 모친인 현비의 죄를 덮기 위해 칠십만 냥을 내준 것을 생각하니 그녀에게 매우 감동했다. 특히 지금같이 의학원을 지어야 하는 시기에 은화도 부족할 텐데, 원경릉은 큰 결심을 하고 은화를 보조했을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이니 생각하지 말자. 나중에 황조부께 은화 좀 보태달라고 하지 뭐.”“황조부께서는 금광을 가지고 계시잖아. 근데 왜 거기서 나오는 자금은 조정에 쓰지 않으시는 거야? 부황께서 오죽하면 자식인 우리의 등골을 빼먹으려 하겠어?”“금광은 만약 일어날 전쟁을 대비해 남겨둔 거야. 현재 금광에서 나온 자금은 군사비용으로 일정 부분 사용되고 있어.”“아, 그렇구나.”“응. 매년 쓰이는 군사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그 비용을 줄이려면 대주와의 동맹이 필요해. 두 나라가 함께 힘을 합쳐 북방과 선비를 방어한다면 군사비용에 쓸 돈을 백성들에게 쓸 수 있지. 지금 북당에 자금이 필요해.”원경릉은 부황이 가져간 칠십만 냥의 은화가 백성들에게 쓰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좀 풀렸다. 하지만 부황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은 여전히 용서되지 않았다.*다음날 경여궁. 명원제는 목여 태감을 시켜 경여궁에 자신의 뜻을 선포했고, 성지를 받은 현비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문호…… 이 일을 정말 황상에게 알렸단 말이야? 정신 나간 놈!’목여 태감은 주저앉은 현비에게 다가가 말했다.“마마, 황상께서는 그래도 마마님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횡령하신 금액에 벌금 오십만 냥만 몰수하고 다른 형벌은 면하신 겁니다. 만약 다른 관리가 횡령을 저질렀다면 바로 사형이 내려졌을 겁니다.”“……”“맞다! 마마님, 태자비께서 칠십만 냥을 마련해 주었으니 이 금액은 제외하고 마마님께서 마련하시면 됩니다.”현비는 태감의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뭐?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