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호가 떠난 후 왕씨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현비를 보았다.“현비 마마, 태자가 정말로 이 일을 조정에 폭로할까요?”현비는 우문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그렇지는 못할걸? 태자가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내가 태자의 모친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내가 죄인이 되면 분명 그의 명성도 나빠질 것이야.”“어휴, 문둥산은 소씨 가문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였는데…… 태자는 왜 갑자기 문둥산에 관심이 생긴 겁니까?”“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소답화하고는 얘기를 해보았느냐?”현비가 화를 내자 왕씨는 우물쭈물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조사는 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이 문둥산에 갔다면 분명 서주를 통해 갔을 텐데…… 그때 태자비도 같이 갔을 겁니다.”현비는 왕씨의 말을 듣고 기함을 토했다.“이 일에 또 원경릉이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야? 그 계집이 얼마나 신통방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불치병인 문둥병까지도 관여하려고 한단 말인가? 이래서 옛말 틀린 거 하나 없어!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했는데 말이야! 원경릉 이 몹쓸 계집이 내 아들을 망치고 있어!”“현비 마마 고정하시옵소서……”“그래서 그 두 사람이 문둥산에 갔다 온 게 확실한 것이냐?”“예, 거의 확실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 쪽에서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무슨 방법?” “태자비는 사사건건이 소씨 집안의 트집을 잡고 있습니다. 심지어 태자비는 기왕비하고도 왕래가 잦다고 합니다! 태자비는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를 사람입니다. 현비 마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빠른 시일 내 태자비를 처리하지 못하면 조만간에 소씨 집안이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본궁이 그걸 모르겠느냐? 하지만 태상황과 황제가 모두 그녀를 아끼니 본궁이 어떻게 손을 쓸 수 있겠어!”근심스러운 현비의 표정과는 다르게 왕씨의 눈에는 독기가 스쳤다.“현비 마마, 전과는 다르게 저돌적으로 나가야 합니다.”“무슨 좋은 수라도 있느냐?
초왕부의 소월각.삼둥이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서로 앞다투어 울었고, 우문호와 원경릉은 어쩔 수 없이 세 아이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왔다. 우문호는 경단이와 만두를 원경릉은 찰떡이를 안아 달랬다. 시간이 흐르고 세 아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삼둥이를 나한 침상에 살포시 올려두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누웠다. 그것도 잠시 삼둥이들은 또 울음을 터뜨렸다. “애들이 왜 저렇게 울지? 전에는 저렇게 소란스럽지 않았는데 오늘 어디 아픈 것 아니야?” 우문호는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원경릉에게 물었다.“그럴 리 없는데…… 아프면 이것보다 더 심할걸? 어쩌면 환절기라 그런가?”“그럼 계절이 바뀔 때까지 매일 이런다고? 손 타면 힘든데!”우문호는 아이를 돌보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이 하나도 무거운데 둘을 안아 재우려니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우문호의 불평을 듣고, 원경릉은 웃으면서 말했다“부모가 되는 게 그렇게 쉬울 줄 알아? 아이를 낳기 전에는 건강한 아이가 아니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낳고 나면 잘 커야 할 텐데 걱정하고, 좀 크면 공부는 잘 하나 걱정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매일매일이 걱정의 연속이야.”이 말을 들은 우문호는 예쁜 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걱정 자체가 아이에게 기대를 하기에 생기는 것이야. 그건 걱정이 아니라 욕심이지. 우리 삼둥이는 나비가 되든 그냥 벌레가 되든 상관없어. 난 삼둥이가 행복하게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우문호의 말을 듣던 원경릉은 문득 문둥산 일이 생각났다.“참, 일은 아직 안 끝났어? 꽤 어려운 일인가 봐.”우문호는 만두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담담하게 말했다.“어렵다고 하기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어렵지 않아도 하기에도 좀 그래……”“어? 그게 무슨 말이야?”원경릉이 이불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우문호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한참을 망설였다.“사실 모비가 문둥
“좋으신 분들도 계시잖아. 예를 들어 조모님과 태상황님 말이야.”“두 분이라도 계셔서 다행이지.”“그나저나 현비께서는 얼마나 횡령을 하신 거야?”“칠팔십만 냥 정도 될 것 같아.”“세상에! 그렇게 많은 은화를 횡령하셨단 말이야? 그럼 조정에서 원칙적으로 중간에서 횡령한 탐관오리들이나 관리, 후비(后妃)들은 어떻게 벌했어?” “관리의 경우에는 파직시키고 은화를 뱉어내게 했지. 그리고 형벌을 내리거나 더 심하게는 죽이기도 했지. 후비 같은 경우엔……”“후비는 어떻게 벌했는데?”우문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후비들은 선례가 없어.”원경릉은 수심이 가득 찬 우문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현비께서 횡령한 금액이면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거야?”“십만 냥이 이상은 무조건 사형이야.”우문호의 목소리를 슬프고 처량했다.원경릉은 그런 우문호의 두 손을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황은 현비를 사형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섯째 때문이겠지…… 만약 태자의 생모가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린다면 조정의 하이에나들이 태자를 물고 뜯을 것이니까. 하지만 태후께서 현비가 중병에 걸렸다고 궁안에 소문을 내놨으니…… 어쩌면 조용히 처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원경릉은 골치가 아팠다. 현비가 문둥병 환자들에게 못된 짓을 한 것은 맞지만, 다섯째의 하나뿐인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만약 현비가 사형을 당한다면 가장 슬퍼할 사람은 다섯째이다.“내일 부황께 이 일을 말씀드리려고 해.” 우문호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원경릉은 삼둥이들을 사이에 두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들은 심란한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근새근 잠을 잤고, 우문호와 원경릉은 한밤중이 되어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유모 상궁이 와서 새벽 수유를 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우문호는 뒤척이다가 유모 상궁이 아이들을 다시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들었다.전 같았으면 유모 상궁이 들어옴과 동시에 우문호는 잠에서 깼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원경릉은 정자에 앉아 아이들과 여유롭게 햇볕을 쬐고 있었고 설랑들도 그들의 옆을 지키듯 엎드린 자세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아이들 그리고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낙엽,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원경릉은 마음이 편안해졌다.잠시 후, 사식이가 찾아와 원경릉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원에는 기상궁의 명을 받은 시녀들이 시든 꽃들을 정리하기 바빴고, 만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라와 함께 수를 놓고 있었다.“원누이, 날씨도 좋고, 시간도 이른데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사식아 네가 젊긴 젊구나.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쉬고 싶은데…… 생각해 보니 나도 네 나이 때는 가만히 못 있었던 것 같아.”원경릉이 사식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사식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기지개를 켰다. *서일이 돌아와 우문호가 아침 일찍 입궁했다가 지금은 관아로 들어갔다고 보고했다. “서일,전하의 기분은 어떠신 것 같으냐?”“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궁을 나오자마자 한 마디를 하셨는데……”“뭐라고요?” 사식이가 물었다. “태자비께 자신의 행적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네. 그럼 가보게.”라고 말했다. ‘우문호의 성격상 사실 그대로를 명원제에게 전했을 것이다. 명원제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초왕부에서 막 점심을 준비하려던 차에 궁 내시감(内侍監)이 원경릉을 데리러 왔다. 원경릉은 궁에서 자신을 부른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분명 자신을 부른 이유가 현비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근데…… 황상은 왜 이 일에 나를 부르시는 거지?’홀로 입궁한 원경릉은 내시감이 그녀를 동난각(冬暖閣)으로 안내하자 원경릉이 깜짝 놀랐다.“안에 황상께서 계십니까?”내시감이 대답을 하지 않자 목여 태감이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태자비, 마침 잘 오셨습니다. 황상께서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원경릉은 불편한 사람과 식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태자비 어서 들어
잠시 후, 세 사람 앞에 요리가 연달아 차려졌다. 세 가지는 야채 요리였고, 나머지 하나는 고기볶음이었다. 호비는 입맛을 다시며 수저를 들었다. 말없이 밥만 먹던 명원제가 원경릉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너희들 초왕부 음식이 짐의 수채보다 더 푸짐하지 않느냐?”그 말을 들은 원경릉은 깜짝 놀랐다. ‘설마 황제가 현비가 횡령한 은화가 모두 초왕부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건가?’원경릉은 그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부황, 초왕부 식사는 아주 간단합니다. 저와 다섯째 둘이 먹을 때는 항상 반찬 두 가지 이상은 두지 않습니다.”“그래?”명원제는 담담했다.“초왕부는 조금도 사치스럽지 않습니다. 지금 입추인데 저와 다섯째 그리고 삼둥이들의 새 옷도 만들지 않았습니다.”“왜 옷을 만들지 않느냐? 설마 초왕부의 은화가 부족한가?”그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가득했다.“은화야……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에 입던 옷들도 충분히 입을만합니다. 은화를 낭비하면 못 쓰지요.”“그래? 보아 하니 태자비는 살림을 잘 아는구나. 집안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이니 초왕부에서 은화를 얼마나 쓰는지 잘 알겠군. 금년 초왕부에 남은 은화가 얼마인지도 말해 보시오.”명원제는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사실대로 말해야 할 뿐아니라, 초왕부에 있는 은화가 어떤 경로로 들어오는지 똑똑히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명원제는 현비가 횡령한 은화가 모두 초왕부에 있을 것이라고 오해할 것이다.원경릉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명원제를 보고 말했다.“밭과 집, 그리고 차용증을 제외하고 지금 수중에 있는 은화 이백만 냥 정도 됩니다.”“……”명원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마 그럴 겁니다.”원경릉이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차용증? 차용증이 있는가?”원경은 머리를 숙이고 천천히 말했다.“예, 부황께서 저에게 주신 차용증 말입니다.”그러자 원나라 황제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그 차용증은
명원제의 물음에 원경릉이 즉답하지 않았다.“아, 며느리 현비 마마의 일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고…… 얼추 알고 있습니다.”명원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럼 이건 알았느냐 몰랐느냐? 이 일의 진실이 밝혀지면 현비는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야.”원경릉은 명원제의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 몰라 고개만 떨구었다. “태자비, 네 생각은 어떻느냐? 짐이 현비의 횡령을 낱낱이 조사해 그녀를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느냐?”원경릉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부황, 모르옵니다. 며느리가 어찌 조정의 일에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명원제는 담담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짐이 네 의견을 묻는 것이니, 눈치 보지 말고 솔직하게 답하거라.”원경릉은 명원제가 일부러 그녀를 난처하게 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됐다. ‘현비가 사형을 당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어쨌든 다섯째의 생모니까…… 도대체 부황이 원하는 대답이 도대체 뭐지? 현비의 잘못을 눈감고 넘어가자고 하기엔 북당의 백성들을 볼 면목이 없는데.’원경릉은 두 눈을 꼭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부황, 너무 어려운 질문이십니다. 며느리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일은 부녀자가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짐이 지금까지 태자비를 과대평가했구나. 항상 대담하고 솔직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어.”원경릉은 그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만약 현비에게 사형을 내린다면, 다섯째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야. 오점이 있는 모비를 가진 태자를 누가 환영하겠느냐? 그 말 즉슨 앞으로 다섯째의 미래에 훼방꾼이 많아질 것이라는 거다. 하지만 현비의 죄가 가볍지 않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일단 복잡한 일이니 시간을 두고 더 생각을 해야겠다.”원경릉은 그의 말을 듣고 어떠한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명원제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 그의 의견에 따를 생각이었다.“짐이 생각할 시
원경릉은 명원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태자비, 내 생각은 이렇다네. 벌금인 오십만 냥은 소씨 가문에게 물고, 나머지 팔십만 냥은 현비가 물게 할 것이야. 일단 소답화와 현비가 가지고 있는 게 얼마든 모두 몰수를 하고, 만약 그래도 은화가 부족하다면 그 금액은 초왕부에서 가져올 생각이네. 태자와 태자비도 그럴 책임이 있지 않나 싶은데?”원경릉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부황, 그럼 얼마나 초왕부에서 내야 할까요…….”“짐이 어림짐작하건대, 현비에겐 아마 만 냥 정도 남아있지 않을까? 나머지는 초왕부에서 내야 할 것이고.”명원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원경릉의 반응을 살폈다. 원경릉은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묻힌 느낌이 들었다. 빚 생각만으로도 속이 메스껍고 방금 먹은 밥이 다시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태자비, 표정이 안 좋은데? 혹시 짐의 제안에 불만이 있는건가?” 명원제는 인상을 쓰고 원경릉을 보았다.“……”“현비는 다섯째의 어머니야. 그녀가 지금까지 다섯째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한 값이라고 생각하면 팔십만 냥이 전혀 아깝지 않을 걸세.”원경릉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횡령에 왜 연좌제를 지어야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명원제 앞에서 차마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초왕부에 있는 은화로 빚을 갚으면 삼둥이들은 뭘 먹고살라는 말인가?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명원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부황, 초왕부에 있는 은화는 태상황님께서 삼둥이들을 잘 키우라고 주신 은화입니다. 고로 은화의 소유는 삼둥이들에게 있는데 며느리가 어떻게 건드리겠습니까.”“그거야 걱정하지 말거라. 짐도 그건 알고 있다. 태상황께서 초왕부가 거덜 나는 것을 지켜보시겠느냐?”그 말을 들은 원경릉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부황의 말은 결국 빚을 다 갚고 나면, 태상황님께서 거듭 은화를 하사할 거라는 건가?’명원제는 원경릉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셨다. “부황, 혹시 이 일을 다섯째도 알고 있습니까?”“당연히 알고
왕부로 돌아오는 내내 원경릉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난 현비의 덕을 본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빚은 나보고 떠안으라는 거지? 도대체 팔십만 냥을 어떻게 마련하라는 거야…….’왕부로 돌아온 그녀는 회계방으로 들어가 주판을 들고 미친 듯이 계산기를 두들겼다. 잠시 후, 그녀의 계산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목여 태감과 호부상서(戶部尚書)가 초왕부로 들어왔다. 태감은 어명이 적힌 종이를 꺼내어 읽었는데 그 내용이 태자비가 현비를 위해 칠십만 냥을 지불하고, 현비는 가지고 있는 십만 냥을 내라는 것이었다.원경릉은 회계방 안에 있던 금고 하나가 마차에 운반되어 실려나가는 것을 보고 얼굴이 죽상이 되었다. ‘내가 써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은화를 어처구니 없이 빼앗기는구나! 부황께서는 성격도 급하시지 어찌 바로 가져가시나! 우리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러시나?’목여 태감은 원경릉에게 다가와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태자비께서 효심이 참 깊으십니다.”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호부상서는 태자비가 북당을 위해 칠십만 냥의 은화를 기부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호부를 운영할 은화가 부족했는데 이렇게 태자비가 기부를 해주는 호부상서는 입꼬리가 귀까지 걸렸다.원경릉은 실성한 표정으로 떠나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칠십만 냥이 이렇게 증발하는구나!”그녀의 서글픈 외침 또한 하늘로 증발했다.목여 태감은 타고 온 마차에 오르며 원경릉에게 들어가라고 말했다.원경릉은 사식이와 만아의 부축을 받아 겨우 대청에 앉았다. 그녀는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 대청 기둥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식이와 만아는 마음이 몹시 아렸다. 그러나 그녀들 또한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원경릉이 북당을 위해 은화를 기부했다고만 생각했다. 사식이는 원경릉의 대담한 결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칠십만 냥이라는 큰 금액을 기부하시다니! 태자비 정말 대단하십니다!”“지금 몇 시지?”원경릉은 사식이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유시(저녁 6시)가 지났으니 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