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 할머니와 희상궁의 한센병잔인하다, 하지만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은 인간에겐 늘 있는 일로 아무리 잔인하다고 해도 결국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받아들이고 내려 놓는 것이다.문이는 자신이 가지고 온 편지와 선물로 어느정도 원경릉 집안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문이가 돌아가겠다고 인사할 때 원교수가 그녀에게 돈을 주었으나 문이는 비행기표 값만 가져갔다. 그녀는 상당히 긴축재정인 상태로 동생이 퇴원한 뒤 재활치료를 받아야 해서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었다.원교수는 문이의 휴대전화 번호를 저장하고 만약 또 기회가 돼서 그쪽으로 가게 될 때 반드시 알려 달라고 했다.문의가 알았다고 답했으나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인생의 기묘한 기회는 일생에 어쩌면 딱 그 한번 뿐이었을지도 모른다.원교수는 아내를 달래고 병원으로 갔다.원교수의 어머니 소옥의(蘇玉義)는 광원시 한의대 부속 병원 종양내과 노교수로 퇴직 후에 다시 원직에 복직했는데 원경릉 사건이후 상심이 커서 병이 생기는 바람에 사직했다.여러차례 발병하는 바람에 병원 요양재활과에 입원해 있으며 가족이 마주하면 눈물만 나니 본인도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 주된 이유다.노인이 젊은 사람을 먼저 보내는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어쩌다가 생각이 나면 가슴을 칼로 저미 듯 아프니 소교수 나이에 어떻게 견딜 수가 있을까?며느리가 투신 자살을 기도했다는 일이 인터넷으로 거의 라이브에 가깝게 올라와서 광원시 SNS권역의 사람들은 다 퍼 날랐고, 소교수 본인만 모르고 병원안의 의사와 간호사는 모두 알고 개인적으로 이 일에 대해 얘기했다.소교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의 눈빛을 받자 의심이 들기 시작해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간호사가 SNS의 라이브방송을 보여주었다. 소교수는 영상을 보다가 돌발적으로 심근경색을 일으켰다.원교수가 도착했을 때 소교수는 이미 응급처치 중이었다.북당, 초왕부탕양과 구사가 연합해서 한차례 조사해 보니 궁중엔 한센병이 들어온
희상궁 보기 작전원경릉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해보더니, “그럴 리 없다는 말씀이시죠, 결국 재상께서 최근 희상궁의 심기를 건드린 일도 없으니 재상에게 화를 낼 리 없다.”“말하자면 초왕부 사람들 중 누가 희야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모르겠지만.” 주재상이 진지하게 말했다.원경릉이 웃으며, “그건 더 불가능 합니다. 초왕부에서 심지어 저도 희상궁의 말을 듣는데 누가 감히 희상궁에게 잘못할 수 있겠어요?”주재상이 이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걸 것이, 곰곰 생각하더니 미심쩍어 하며, “아픈 거 아닙니까? 감기에 걸렸었는데 나았나요?”원경릉이, “벌써 좋아졌어요, 나은 뒤에 저와 같이 국공부에도 갔었는 걸요.”“국공부에?” 주재상이 생각해보더니 더는 말하지 않고 뒷짐을 지고 나갔다.주재상은 국공부에 가서 주국공과 이것저것 되는 대로 주워섬기다가 비로소 본론에 들어가 그날 태자비가 희상궁을 데리고 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주국공은 주재상이 올때부터 그의 심중을 꿰뚫고 있었지만 와서 부인의 병세를 묻는데 감동해서 주재상이 묻는 말에 솔직하게, “태자비가 처음 왔을 때는 아내에게 진통제를 줬으나 당시 나와 가족들이 태자비를 믿지 않아 쫓아 보냈지.”주재상이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쫓아냈다고? 가시라고 배웅한 건가 아니면 나가라고 쫓아낸 건가? 불쾌해 하진 않고?”주국공이 웃으며, “당연히 좀 불쾌해 했지.”주재상이 순간 얼굴이 싹 변하며 탁자를 내리치며 이를 갈더니, “원인을 찾아냈어, 이 늙은이 때문이군!”주국공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뭐 늙은이라고?”주재상이 눈을 부릅뜨고, “늙은이를 늙은이라고 부르는 게 뭐, 이 사리에 어두운 늙다리야, 내가 널 가만 둘 것 같으냐?”주재상이 저녁때 다시 초왕부에 왔는데 원경릉이 보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고 눈가에 검게 멍이 들었는 게 누군가에게 쥐어 터진 것 같다. 걸어가는 폼도 다리를 절름거리는 것이 예전에 구사와 싸웠을 때 우문호와 똑같다.얼굴엔 멍이 들었고 이를 갈고 있는 모습
희상궁은 창문만 빼꼼 열었다. 마스크를 쓴 희상궁이 창문 밖에서 달려오는 주수보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주수보는 창문이 닫히기 전에 재빠르게 손을 뻗어 희상궁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는 생각보다 많이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눈 밑이 시커멓고 달려오는 자세도 이상했다. 희상궁은 그런 주수보를 보고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재상! 나이가 하나 둘도 아닌데, 싸우긴 뭘 싸우고 그래요?” 희상궁이 말했다.주수보는 희상궁을 바라보며 “누구든 당신을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라고 말했다.“세상에 이 상처들 좀 봐!” 희상궁은 눈을 질끈 감으며 탄식했다.“걱정 마. 그 어린놈이 나보다 더 크게 다쳤어.”희상궁은 자랑스럽다는 듯 웃는 주수보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이렇게 얻어맞았으니 앞으로는 절대 그 사람을 찾아가지 마세요!”주수보는 창문의 양쪽을 잡고 올라가려는 자세를 취했다. “근데 왜 여기 숨어있는 거야? 그리고 얼굴에 그건 뭐야? 결핵에 걸린 사람들이 쓰는 걸 왜 네가 하고 있어?”“그…… 제가 몸이 안 좋아서 그렇습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희상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디가 안 좋아? 무슨 병에라도 걸린 것이야?” 주수보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전과 달라진 희상궁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는 희상궁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 그녀의 얼굴에 쓴 마스크를 잡아당기려고 했다.“이제 그만 가세요! 지금 제 흉악한 몰골을 당신께 보여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희상궁이 고개를 돌렸다.주수보는 얼굴이 붉어진 희상궁을 보고 웃었다. “바보같이 굴지 마. 지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얼굴에 신경을 쓰는 거야? 나는 네 얼굴이 어떻든 신경 안 쓴다. 걱정 말고 이 문 좀 열어보거라. 네가 지금 태자비도 보려고 하지 않는 걸 보니 보통 아픈 게 아니야. 내가 네 상태를 좀 봐야겠다.”희상궁은 코맹맹이 소리로 주수보에게 “그나저나 주국공을 찾아가 싸운 겁니까?”라고 물었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빙빙 돌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원경릉이 말했다. 우문호는 밖으로 나가는 원경릉의 뒤를 쫓았다. “무슨 소리야. 난 그저…… 저녁만 되면 내가 그렇게 애원하는데 너는 항상 이런저런 핑계를 대잖아.”“내가 언제 핑계를 댔어? 핑계가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거절을 했지.” 원경릉이 말했다.“그럼 넌 네 행동이 잘 했다는 거야?” 원경릉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우문호를 노려보았다. “너는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인 거야?”“내가 뭐 거창한 거 바랬어?” 우문호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살다 살다 너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 나도 밤에 잠 좀 편하게 자자고!”“뭐? 생각해 봐. 이 혈기왕성한 나이에 너만 보면 벌떡벌떡 일어나는 게 정상이지. 늙은이처럼 밤마다 골골대는 게 정상이야? 나같은 남자가 어딨어? 너 복받은 거야! 다른 여자들은 다 부러워할걸?”“어휴, 됐거든!” 원경릉은 우문호의 말을 듣고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이고, 아무리 네가 이래도 네 마음 다 안다. 그럼 이 얘기는 그만하고, 내일 네 부친을 배웅해 드리자.” 우문호가 원경릉의 손을 잡고는 그녀를 달랬다. “그래. 근데, 정후 혼자 갈까? 아니면 누군가를 데리고 떠날까?”“장모께서 기어코 따라가려 하시고, 첩 주씨는 경중에 남아 노부인을 모시겠다며 장인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더라고. 아마 오지에 가서 고생하는 것보다 여기에 남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선 모양이야.”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경릉의 어머니인 황씨는 지아비를 섬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여성으로 남자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그를 어르고 달래는 그런 여성이었다. 그녀는 정후가 밖에서 불미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정후가 그간 힘들어서 참지 못하고 분출한 것이라며 불쌍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정후를 원망하지 않고 그를 용서했다. 원경릉의 모친인 황씨는 대외적으로 정후가 피해자임을 강조했다. 여인들이 정후를 이용한 것이고 정후는 강요
우문호는 즉시 탕양을 혜민서로 보내 다섯 달 내 문둥병 환자의 기록을 찾아보라고 했다. “문둥병 환자가 길거리를 마음대로 다니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데……” 주수보가 말했다.“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병에 걸렸지만 가난해서 병원에 가지 못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환자가 자신이 문둥병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심한 두드러기 정도로 여겼을 겁니다.” 원경릉이 말했다.“아니 그럴 가능성은 적어. 문둥병은 혜민서에서 엄격하게 관리를 하기에 일 년에 적어도 세 번은 각 가구를 돌며 문둥병 환자가 있는지 순찰을 하거든 그때 발각되면 즉시 격리시켜 전염을 예방해.” 우문호가 말했다. ‘그 부인은 손에 문둥병이 번질 정도로 심각했는데 혜민서 순찰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병세가 심각했으니 한눈에 문둥병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원경릉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북당의 혜민서에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어? 매년 문둥병 때문에 세 번의 순찰을 하려면 인력 낭비가 심할 텐데? 이렇게 인력낭비가 심한 국가사업을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혹시 경중에는 문둥병 발병률이 높아?” “5년 전 한번 크게 문둥병이 돌았어. 그때 백성 수천 명이 걸렸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 그 이후로 북당은 문둥산을 만들어 환자를 격리하기 시작했고, 매년 세 번의 순찰을 하기로 했지. 문둥병은 너도 알다시피 걸리자마자 바로 발병하는 병이 아니라 잠복기가 있으니 추적 조사가 필요해.” 우문호가 대답했다.원경릉은 우문호의 말을 듣고 왜 순찰을 세 번씩 하는지 이해가 됐다.“그럼 문둥병 환자들은 지금 모두 문둥산에 있는 거야?”“응. 아마 삼백 명 정도가 문둥산에 있을 거야.” 우문호가 말했다. 본래는 수천 명의 환자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죽고 삼백여 명이 남아있다. 문둥병은 걸리자마자 바로 죽는 병이 아니기에 병을 안고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원경릉은 문둥산에서 죽을 날만 기다릴 환자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두 사람의
“희상궁을 내가 치료해도 된다는 거야?” 원경릉의 눈빛이 반짝였다. 우문호는 원경릉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반대를 해도 그렇게 할 거잖아. 나는 가끔 네가 다른 사람보다 너 자신을 먼저 돌보고 아꼈으면 좋겠어. 내 기억 속의 문둥병은 정말 끔찍한 병이거든. 내가 이렇게 허락을 해도 아마 부황을 포함해 조정의 문무백관들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너는 그냥 왕비가 아니라 태자비니까. 다들 이 병이 불치병이라고 여기고 있고, 병에 걸린 사람은 무조건 격리해야 한다고 믿고 있어. 지금의 편견과 맞서 싸우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원경릉은 그 말을 듣고 화를 버럭 냈다. “환자들이 병에 걸리고 싶어서 걸렸겠어? 환자들을 가엽게 여겨도 모자랄 판에 격리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니! 환자들과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봐. 하루아침에 몹쓸 병에 걸렸다고 핍박을 받고 격리까지 당해. 그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겠어?”우문호는 그녀를 잡아당겨 의자에 앉혔다. “네 말 뜻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지금 시대가 그래. 사람들이 문둥병이라고 하면 얼마나 칠색 팔색 하는데! 사람들은 5년 전에 겪은 대규모의 감염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너는 이 많은 사람들의 편견을 깰 자신이 있어? 그리고 부황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을 치료하러 간다는 건 반역이고 대역 죄야.”“첫 번째, 지금 시대가 어떻든 사람들의 편견이 뭐든. 문둥병은 고칠 수 있는 병이야. 치료가 가능한 환자를 그냥 두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너는 희상궁이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어?”그가 아무리 그녀를 설득하려고 해도 설득이 되지 않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가끔은 말이야. 나도 날 모르겠어. 머리로는 네 고집을 꺾어야 한다는 걸 아는데, 네 당찬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너를 지지하게 돼.”“참나, 뭐라는 거야 갑자기.” 원경릉이 웃었다. 우문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그래 나도 모르겠다. 뭐…… 부황께 욕 몇 마디 먹겠지.”“부황께 욕을 먹더라도 수백 명의 인명을 구하
“문둥산에 있는 환자들은 이미 그곳에 적응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그들을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태자비께서 약이 있다면 추후에 새로운 환자가 생겼을 때 사용하는 게 어떻습니까? 5년 전에 감염이 됐지만 아직 잠복기인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탕양은 우문호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탕양, 눈앞에 있는 사람도 구하지 않는데 아직 아프지도 않은 사람을 구하겠다니. 참으로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문둥병에 걸렸다고는 하나 그 사람들도 북당의 귀한 백성이네. 본왕도 태자비가 문둥산의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했을 때 탕양과 같은 반응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아. 수백 명의 백성을 구하는 게 그게 맞다.”탕양은 우문호의 말을 듣고 하마터면 설득당할 뻔했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수백의 사람을 구하는 것 좋죠. 하지만 겨우 백관들의 마음을 사셨는데, 이번 일로 또 눈밖에 나실까 전 그게 걱정입니다.”“본왕이 백관들의 마음을 얻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당연히 이후 북당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백관들하고 좋은 관계를 갖는 게 좋죠.”“탕양, 네 생각엔 현 북당의 책임자는 누구냐?”“황상이시죠.”우문호는 웃었다. “그럼 앞으로 그 책임자가 얼마나 더 북당을 다스릴 것 같으냐?”탕양은 우문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전하, 그런 건 함부로 입 밖에 내셔서는 안됩니다!”“말을 해보래도?”“부황께서는 마흔이 좀 넘으셨으니, 아마…… 한참 남으셨습니다.”“그렇지? 부황께서 아직 북당의 책임자를 나에게 물려주실 기미가 없는데, 내가 지금부터 백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뭐 있겠느냐? 나 이 일로 태자 직위를 잃어도 금세 되찾을 자신이 있다. 먼 미래를 걱정하느라 눈앞에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보다 멍청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탕양은 우문호의 말이 일리는 있지만 그래도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우문호가 태자가 아닌 초왕이었다면 그가 무슨 일을 해도 탕양은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이미 결정한 우문
정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억울하다 억울해! 너희들이 여기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동안 나는 타향에서 비렁뱅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겠네……”원경릉은 그의 말을 딱 잘랐다.“부친, 진짜 비렁뱅이처럼 살게 해줘요? 원한다면 지금 당장 내가 탕양에게 말해서 준비된 거처를 팔아버리라고 할 테니 모친하고 둘이 비렁뱅이처럼 살아보세요. 구걸하기 편하게 바가지 하나씩은 제가 마련해 드릴 테니!” 그제야 정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원경릉은 그를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 조모를 보았다. 그녀는 손씨 아주머니에게 밖에 나갔다 오라고 한 후 조모의 옆에 앉았다. 조모는 검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새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였다. 조모는 원경릉을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이 늙은이는 신경 쓸 것 없다.” 노부인이 원경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금까지 정후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원경릉도 조모의 말에 금방 숙연해졌다. 원경릉은 문득 정후가 멀리 떠난 후 조모가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삼둥이를 낳은 후로부터는 가끔 생사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원경릉은 슬퍼하는 조모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조모, 나중에 제가 삼둥이들을 데리고 찾아오겠습니다.”’원경릉은 고개를 들어 조모를 보았다. “데리고 오면 너무 소란스러울까요? 아니면 조모께서 왕부로 오셔서 지내시는 것도 좋습니다.”노부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들어 원경릉을 보았다. “그래, 이참에 왕부로 가자.” 원경릉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있는 손씨 아주머니에게 짐을 싸라고 했다.노부인은 정후 내외가 보기 싫은 듯 대문이 아닌 뒷마당에 딸린 작은 문으로 나왔다. 마차에 올라탄 노부인은 원경릉의 손을 잡고 왕부로 향했다. 왕부로 가는 내내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후는 자신의 모친이 원경릉을 따라 왕부로 갔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며 황씨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원경릉은 피곤한 나머지 말을 하다 그만 잠에 들어 버린 반면, 우문호는 너무 흥분해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는 잠이 안 와 뒤척일 때마다 원경릉을 깨울까 봐 걱정되어, 복도에 나가 앉아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시도했다.그는 두 손으로 큰 돌을 들어 올리며 힘을 주고 외쳤다."일어나, 일어나, 날아오르거라."큰 돌이 움직이지 않자, 그는 그것을 내려놓고 더 작은 돌을 들었다."일어나거라."한참 노려봤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그는 또 다른 돌로 바꾸어 다시 시도했다.더 작은 돌을 쥐다가, 결국 두 손가락으로 모래를 쥐었다. 그러나 모래는 떠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손으로 꽉 쥐어, 몇 알의 모래가 빠져나갔다.그는 어쩔 수 없이 손바닥에 낙엽을 올려놓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나뭇잎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입김을 불어 나뭇잎을 날려 보냈다.그는 손을 두드리며 눈을 굴리고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뭇잎보다 가벼운 것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이 능력을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그는 계란이와 소통해 보려고 했다. 원경릉과 아이들이 쉽게 할 수 있으니, 그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조용한 소월궁 복도에서 그는 조용히 계란이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계란아, 자고 있냐?""계란아...!"정확히 두 번 부른 후, 그는 순간 늦은 시각이라 계란이가 분명 자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이렇게 부르면 오히려 잠든 계란이까지 깨울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일찍 일어난 목여 태감은 황제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준비를 도우려 했다. 돌아서려던 참에 황제가 복도에서 공주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그는 황제가 공주를 그토록 그리워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공주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황제와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았다.그마저도 가끔 공주가 보고 싶을 정도인데, 황제는 오죽하겠는가?그러나 계속 그리워하는 것도 답은 아니었다. 그리움이 병이 되면 안 되니, 그는 이제 황후에
그는 파도가 몰려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위풍당당하게 파도 속을 헤치며 지나가면, 계란이가 자신을 더 존경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렇게 생각하자, 귓가에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눈을 번쩍 뜨니, 호수 표면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보였다.갑자기 폭풍이 불어온 듯, 호수의 물이 밀려서 호숫가로 몰려갔다. 파도가 하나하나씩 밀려와, 정자에 앉아 있는 그들이 흔들림을 느낄 정도였다.그는 두 손으로 난간을 잡고,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원 선생, 이 파도를 정말 내가 만들었다는 것이오?!""그렇소!"원경릉이 그의 놀란 얼굴을 보며 방긋 웃으며 말했다."바로 당신이 한 것이오. 놀랍지 않소?"원경릉도 약간 놀랐다. 억제제의 효과가 남아 있어서 그저 소소한 정도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는 될 것이라 상상도 못 했다."너무 놀랍소."우문호는 믿기지 않아서 한참을 바라봤다. 파도는 계속해서 일렁였고, 다시 몇 번 더 일어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자, 파도는 더욱 커졌다."원 선생, 나도 능력이 생겼소. 당신과 아이들처럼 됐소."우문호는 기뻐서 눈빛이 반짝였고,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그는 너무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기에, 흥분한 나머지, 원경릉을 덜썩 끌어안았다."뛰어내리고 싶소. 뛰어내릴 테니,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잠깐만 내려가서 놀다 오겠네."원경릉이 말하기도 전, 그는 원경릉을 놓고 난간을 넘어 풍덩 소리와 함께 호수로 뛰어들었다.어두운 밤, 그는 물고기처럼 호수 속을 헤엄쳤다. 파도가 계속 일렁이자, 호수 속의 물고기들은 놀라서 여기저기 뛰어 올라왔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물속에서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정자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물기로 뒤덮인 얼굴을 내밀고 원경릉을 보며 웃었다."원 선생, 너무 재밌소. 당신도 내려오겠소? 물살을 줄이겠네."원경릉은 호숫가에서 팔꿈치를 받친 채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가지 않고, 그저 당신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겠네. 한 바퀴 더 돌고 자러 가야 하오
원경릉은 어두운 풀숲에서 이 장면을 보고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가 정말 주문이라도 걸고 있는 걸까?능력 조종은 몸과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처음 능력을 얻었으니, 분명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그래서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게다가 억제제도 조금 효과가 있기 때문에, 능력을 사용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었다.그녀는 이 바보가 너무 안타까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믿지 않는 척했지만, 몰래 나와서 시험해 보는 그를 보니 속상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밖으로 걸어갔다."다섯째!"우문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표정은 어쩔 줄 몰라 당황했으며, 손가락을 뒤로 숨기려 했다."아니... 언제 온 것이오?"원경릉이 답했다."호숫가에 서 있기에 온 것이오. 혹시 오늘 밤 내가 말한 걸 시도해 보려고 하는 것이오?"그녀는 뒤에서 따라갔던 것도, 그가 시도하는 것을 보았다고도 말하지 않았다.우문호는 그녀가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보지 않았다는 것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아니네. 그저 잠이 안 왔을 뿐이오. 길주에서 벌어진 부정을 생각하느라 마음이 복잡해서, 바람을 쐬려고 나온 것이오. 당신이 말한 일은 벌써 잊은 지 오래되었네. 그런 농담을 어찌 아직까지도 마음에 담아두겠소?"원경릉은 대답한 후, 그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았다."함께 바람도 쐴 겸 호숫가 정자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소?""피곤하지 않소?"우문호가 물었다."괜찮소. 그냥 당신과 얘기하고 싶네."그녀의 눈빛에는 은은한 미소와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우문호가 그런 그녀에게 입맞춤하고 웃으며 말했다."좋소. 호수 가운데로 가시오."두 사람은 손을 잡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갔다. 호수 가운데에는 작은 정자가 하나 있었고 호수를 관찰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그리고 정자의 처마 아래에는 하나의 풍등이 걸려 있었다. 비록 불빛은 다소 어두웠지만,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두 사람은 자리에 앉지 않고 난간에 기대어 호수에서 반짝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미풍이 불어와,
원경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능력과는 차이가 있소."우문호는 웃음을 터뜨렸다."어리석은 말 하지 말고 자시오. 참 피곤하오. 아, 그리고 이번에 서일과 이부 사람들을 길주로 보냈소. 만두도 함께 가서 배웠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좋소."원경릉은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그럼, 다시 물을 조종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우문호는 일어나 또 연신 하품을 하며 말했다."아이고, 정말 힘드오. 그럴 리 없는 일로 그만 이야기하시오. 원 선생, 다들 나한테도 그런 능력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이런 일은 강요할 수 없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그것이 아니라..."원경릉도 벌떡 일어나서 그를 따라갔다."정말 사실이오. 시도를 해보는 것이 어떻소? 궁 안에 호수가 있지 않소?""피곤하니, 이만 자야겠소."우문호는 침대에 뛰어올라 이불을 휘저었다."정말 피곤하오."그러자 원경릉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우문호가 흥분에 휩싸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피할 줄은 몰랐다. 설마 두려운 걸까?"내 말 좀 들어보시오. 이 능력은 무서울 필요가 없네. 다룰 수만 있다면...""원 선생, 그만하시오. 정말 피곤하니, 어서 자시오."우문호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아당겼고, 그녀는 그의 몸에 쓰러졌고, 그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원경릉은 그가 이렇게 거부할 줄은 몰랐다. 강제로 받아들이게 할 수도 없으니, 우문호가 지금 하는 일을 마친 뒤, 다시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며칠간 왔다 갔다 하느라 바빴고, 생각할 일도 많아 그녀는 정말 피곤한 상태였다. 그녀는 이내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렴풋이 우문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가 눈을 뜨기도 전, 우문호가 살짝 그녀의 목 아래에 있던 팔을 빼는 것이 느껴졌다.잠시 후,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떠났다.원경릉은 눈을 뜨자마자 마침 우문호
자시가 다 되어 갈 때, 그녀는 바로 소월궁으로 돌아갔다.궁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다섯째가 돌아왔다. 녹주가 그의 옷을 걸어주고, 목여 태감이 차를 준비한 뒤 물러갔다. 기라는 복도 앞의 불을 하나만 남긴 채 모두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우문호는 원경릉을 안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기다리지 말고 피곤하면 먼저 자지 그랬소.""마침 연구를 확인하려 했소. 일부러 기다린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씻지 말고 바로 쉬시오."하지만 우문호는 고개를 저었다."화가 너무 나서 잠이 오지 않소. 그건 그렇고, 아이들에 대한 얘기 좀 해주시오."그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로 뉘었다.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그보다도 화가 난 것 같았다. 평소 아무리 바빠도 오늘처럼 피곤해 보인 적은 없었다.원경릉은 그의 허리 쪽에 부드러운 베개를 끼워주고, 반쯤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눈썹과 관자놀이를 마사지했다. 우문호는 화를 낼 때면 두통이 자주 생겼다."계란이는 어떤가? 워낙 바쁘다 보니 자세히 듣지도 못했소."그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원경릉을 바라보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마사지하지 못하게 했다.그러고는 팔을 크게 펼쳐 그녀를 품에 안았다."당신도 피곤했을 텐데 그만하시오. 조금 쉬다가, 당신의 어깨를 눌러주겠네."원경릉은 그의 품에 기대며 웃으며 말했다."계란이는 괜찮소.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당신이 좋아하는 자와 하겠다고 했소."다섯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피곤함이 말끔히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정말? 정말 그렇게 말했소?!""물론이네. 당신은 그녀의 우상이오."그러자 우문호는 곧바로 기운을 차린듯 허리를 곧게 폈다."우상이라. 그렇다면 앞으로 무공을 갈고닦는 것 외에도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쌓아야겠군. 우상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 실력이 없으면 아이가 실망할 것 아닌가.""실력이라..."원경릉은 그의 품을 떠나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옷가지를 정리하고 궁으로 오시니, 전하는 이미 군영으로 떠나셨지요. 마침 마마께서도 외출하신 터라, 이곳에서 폐하를 보살피고 계신 것입니다.""그래."원경릉은 직접 어서방에 가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로하신 희 상궁에게 밤새도록 지키게 할 수 없었다.어서방에 도착하자, 목여 태감과 희 상궁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다가왔다."마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다섯째가 저녁을 먹었는지 보러 왔네.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이렇게 늦도록 의논을 한다니."단단히 닫혀 있는 어서방의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탕양, 냉 대인, 홍엽, 이리 나리와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목여 태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길주(吉州)에서 과거 시험 부정행위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크게 노하셨습니다."원경릉이 미간이 찌푸렸다. 다섯째는 조정의 인재 등용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고, 재위하는 동안 부정행위에 대해서 엄격하게 처벌해 왔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감히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돈에 눈이 멀어도 정도가 있지!길주에서 이런 일이 터졌으므로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보일 가능성이 컸기에,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불길 번지듯 확산할 것이었다.다섯째는 문인을 매우 중시하며, 늘 무장은 나라를 지키고, 문인은 나라를 다스린다고 말해왔다. 그런 마음 가짐으로 황제의 자리에 앉았으니, 당연히 문인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게다가 그는 백성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방법은 십여 년간의 힘든 공부 끝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라 말했었다. 그런데 부정행위가 만연하면 실력 있는 자들이 탈락할 테고 그렇게 되면 문인을 중시하는 정책이 무너질 것이다.더 나아가, 억울하게 탈락한 자들은 조정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고, 문인이 불만을 가지면 나라의 기운은 쇠퇴할 것이다."식사는
아이들과 밤새 각자 도성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원경릉은 다음 날 아침 서둘러 경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경천의 혈액과 호수 에서 채취한 얼음물에 얼음 벌레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기화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기에, 원경릉은 그를 불러내어 계란에게 그 일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기화는 가슴을 두드리며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하지만 원경릉은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더욱 불안해져, 왠지 모르게 그가 말실수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다시 한번 당부하자, 기화는 슬슬 짜증이 나는 듯했다."정말 저를 못 믿는 것입니까? 분명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원경릉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꼭 비밀로 하십시오.""예. 어서 아이들과 인사나 하시지요."기화는 성가신 듯 손을 휘저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나이도 어린 황후가 어쩜 이렇게 잔소리가 많지?'원경릉은 아이들과 작별을 마친 후, 바로 경성으로 떠났다.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그녀는 황궁으로 돌아왔다.그녀는 돌아오자마자 간단히 다섯째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바로 실험실로 향했다.경천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니, 역시나 얼음 벌레가 있었다. 비록 과거 다섯째의 혈액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긴 했으나, 다섯째의 것보다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이어서 호수에서 가져온 얼음물을 현미경으로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얼음 벌레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호수 근처에서 채취한 물도 마찬가지이므로, 호수에서 감염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얼음 벌레의 감염원을 추적할 수 없게 되자, 원경릉은 꽤 실망스러웠다.하지만 우선 경천의 혈액 속 얼음 벌레를 연구할 수 있기에, 그녀는 벌레를 분리하여 다양한 온도에서 번식력과 생존력을 실험해 보려 했다.이 일을 마무리한 뒤, 원경릉은 드디어 다섯째에게 능력에 대해 알려줄 때가 왔다는 결정을 내렸다.그저 그가 놀라서 기절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소월궁으로
기화가 말했다."형인 경천보다 크게 부족하지는 않지만, 아직 경천만큼의 패기는 없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경천과 대등해질 것입니다!""성격은 어떻습니까?""괜찮습니다."기화는 대부분의 사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괜찮다"고 했으니, 정말 괜찮은 사람일 것이었다.이후 기화는 원경릉과 함께 다른 도성을 방문했다. 원경릉은 미리 능력으로 소식을 보내 그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 한편 기화는 계란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동행했다. 그도 어쩌다 조금 여유가 생겼다.소년들은 어머니가 오자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그들은 어머니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그녀가 이유 없이 이렇게 먼 곳까지 올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원경릉은 아이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약을 잘못 쓰고, 얼음 벌레에 감염되고 현대에서 사용한 약까지, 모든 것을 알려주었으며, 경천의 저주까지 전부 털어놓았다.경단과 찰떡은 이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아버지의 상황에 대해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환타와 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원경릉은 이 두 아이가 떡들보다 신비로운 일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이 능력은 정말 타고난 것 같았다.잠시 후, 칠성이 입을 열었다."사실, 경천이 감염된 얼음 벌레가 저주의 일종일 가능성이 큽니다. 비록 기화 스승께서 연관 없다고 하셨지만, 저주도 일정한 형태와 매개체를 가지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태나 매개체가 있으니, 분명 저주를 풀 방법도 있지요. 큰 공덕을 지닌 자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어쩌면 어마마마일 수도 있습니다. 어마마마가 얼음 벌레의 저주를 없앨 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내가?"원경릉은 깜짝 놀랐다."아니면 아바마마일 수도 있습니다."옆에서 듣고 있던 환타가 말을 보탰다."아바마마 혈액 속 마커가 사라졌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원경릉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기화가 말한 고차원 문명이 아무리 들어도 이상하게만 느껴졌다.인류는 고차원 문명에 대해 단지 추측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심지어 그 존재 여부조차 검증할 수 없다.누군가 고차원 문명이 신계 문명과 동일하다고 주장했지만, 그녀는 신계 문명을 접할 방법조차 갖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신계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그녀는 점점 자신이 주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원경릉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화제를 경천 황제에게 돌리려 했다."그를 구할 방법이 없습니까? 아직 젊은데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건 너무 아깝잖습니까?"아깝긴. 큰 공덕을 쌓았으니, 그는 죽고 윤회할 것입니다.""윤회라..."원경릉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미간을 문질렀다."아까는 고차원 문명 얘기를 하시더니, 이번엔 윤회라. 사고방식이 너무 빠르게 바뀌시니, 따라가기가 힘듭니다."하지만 기화는 오히려 태연하게 말했다."뭐가 어렵습니까? 과학의 끝엔 결국 신학이라 하지 않습니까? 어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그럼, 고차원 문명의 관점에서 이 저주에 관해 설명해 주시지요."이렇게 특별한 이유를 과연 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기화가 답했다."사실 이해하기엔 쉽습니다. 저주라는 건 하나의 힘이고, 그 가문은 힘을 어지럽혀 반작용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주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지요. 하지만 가문의 기운이 달라지며 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지게 되고, 이 세대에서 거의 끝이 보입니다. 그를 큰 공덕을 쌓은 사람이라고 한 이유는, 나라를 다스리고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고, 나라 발전에도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가 쌓은 덕이 반작용보다 커지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질 것이고, 결국 동화될 것입니다. 그럼, 윤회한다 해도 그는 복이 가득한 사람일 것입니다."원경릉은 그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는데, 그때 기화가 한마디 덧붙였다."누군가는 화를 입으려 태어났고, 누군가는 운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