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산에 있는 환자들은 이미 그곳에 적응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그들을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태자비께서 약이 있다면 추후에 새로운 환자가 생겼을 때 사용하는 게 어떻습니까? 5년 전에 감염이 됐지만 아직 잠복기인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탕양은 우문호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탕양, 눈앞에 있는 사람도 구하지 않는데 아직 아프지도 않은 사람을 구하겠다니. 참으로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문둥병에 걸렸다고는 하나 그 사람들도 북당의 귀한 백성이네. 본왕도 태자비가 문둥산의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했을 때 탕양과 같은 반응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아. 수백 명의 백성을 구하는 게 그게 맞다.”탕양은 우문호의 말을 듣고 하마터면 설득당할 뻔했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수백의 사람을 구하는 것 좋죠. 하지만 겨우 백관들의 마음을 사셨는데, 이번 일로 또 눈밖에 나실까 전 그게 걱정입니다.”“본왕이 백관들의 마음을 얻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당연히 이후 북당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백관들하고 좋은 관계를 갖는 게 좋죠.”“탕양, 네 생각엔 현 북당의 책임자는 누구냐?”“황상이시죠.”우문호는 웃었다. “그럼 앞으로 그 책임자가 얼마나 더 북당을 다스릴 것 같으냐?”탕양은 우문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전하, 그런 건 함부로 입 밖에 내셔서는 안됩니다!”“말을 해보래도?”“부황께서는 마흔이 좀 넘으셨으니, 아마…… 한참 남으셨습니다.”“그렇지? 부황께서 아직 북당의 책임자를 나에게 물려주실 기미가 없는데, 내가 지금부터 백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뭐 있겠느냐? 나 이 일로 태자 직위를 잃어도 금세 되찾을 자신이 있다. 먼 미래를 걱정하느라 눈앞에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보다 멍청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탕양은 우문호의 말이 일리는 있지만 그래도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우문호가 태자가 아닌 초왕이었다면 그가 무슨 일을 해도 탕양은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이미 결정한 우문
정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억울하다 억울해! 너희들이 여기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동안 나는 타향에서 비렁뱅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겠네……”원경릉은 그의 말을 딱 잘랐다.“부친, 진짜 비렁뱅이처럼 살게 해줘요? 원한다면 지금 당장 내가 탕양에게 말해서 준비된 거처를 팔아버리라고 할 테니 모친하고 둘이 비렁뱅이처럼 살아보세요. 구걸하기 편하게 바가지 하나씩은 제가 마련해 드릴 테니!” 그제야 정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원경릉은 그를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 조모를 보았다. 그녀는 손씨 아주머니에게 밖에 나갔다 오라고 한 후 조모의 옆에 앉았다. 조모는 검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새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였다. 조모는 원경릉을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이 늙은이는 신경 쓸 것 없다.” 노부인이 원경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금까지 정후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원경릉도 조모의 말에 금방 숙연해졌다. 원경릉은 문득 정후가 멀리 떠난 후 조모가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삼둥이를 낳은 후로부터는 가끔 생사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원경릉은 슬퍼하는 조모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조모, 나중에 제가 삼둥이들을 데리고 찾아오겠습니다.”’원경릉은 고개를 들어 조모를 보았다. “데리고 오면 너무 소란스러울까요? 아니면 조모께서 왕부로 오셔서 지내시는 것도 좋습니다.”노부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들어 원경릉을 보았다. “그래, 이참에 왕부로 가자.” 원경릉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있는 손씨 아주머니에게 짐을 싸라고 했다.노부인은 정후 내외가 보기 싫은 듯 대문이 아닌 뒷마당에 딸린 작은 문으로 나왔다. 마차에 올라탄 노부인은 원경릉의 손을 잡고 왕부로 향했다. 왕부로 가는 내내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후는 자신의 모친이 원경릉을 따라 왕부로 갔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며 황씨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초왕부에 도착한 노부인은 방금까지의 근심은 어디 갔는지 삼둥이에게 돌진했다. 삼둥이들은 마치 할머니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방긋방긋 웃으며 그녀와 즐겁게 놀았다. 조그마한 손과 발로 침상의 이불을 힘껏 차는 모습을 보니 노부인은 잠시나마 정후를 잊을 수 있었다.노부인의 진심 어린 미소를 보자 원경릉은 안심이 되었다. ‘삼둥이가 복덩이야 복덩이!’희상궁의 감염 경로는 아직까지도 파악되지 않았다. 당시 너무 경황도 없었을뿐더러 만아의 증언만 듣고 여성을 특정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탕양은 답답한 마음에 문둥산을 지키는 수위를 사적으로 연락해 만나 술을 마셨다. 탕양은 수위가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자 조용히 본심을 드러냈다.“어이 형씨, 혹시 전에 문둥병 환자가 실종되거나 도망을 갔던 적이 있었나?”“음…… 있었지요! 몇 달 전에 병자가 실종됐는데, 시체도 못 찾았어요.”“그래? 생긴 거나 체구는 어떤가?”“여자였는데 그냥 보통 체격이었던 것 같은데…… 딸국!”탕양은 그에게 꼬치꼬치 캐물었고 수위는 곧잘 대답했다. ‘실종됐다는 그 여자가 만아가 말한 여자의 특징과 부합한데?’“근데 탕대인, 그 여자는 왜요?”“아닐세.”“그 제가 듣자 하니 북쪽 절벽에서 뛰어내렸다고 하더라고요. 하긴 가족들도 못 보고 맨날 병자들끼리 모여있지…… 나 같아도 살아있는 게 죽는 것만 못할 것 같아 정말!” 수위가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계략을 실행한 후에는 여자가 필요 없어지니 절벽으로 던진 건가?’ 탕양은 술을 마시면서도 수위의 말을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희상궁은 주수보의 끈질긴 설득 끝에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기로 했다. 원경릉은 희상궁을 치료한 후 곧장 나와 샤워를 하고 옷도 뜨거운 물에 삶았다. 9월 중순이 되자, 궁에 좋은 소식이 들렸다. “호비(扈妃)가 임신을 했답니다!”호비는 임신 소식을 알자마자 궁 전체에 이를 알리고 그 후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진북후는 딸의 임신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사
원경릉은 호비에게 본래 신체 조건도 좋고 젊고 건강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리고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만졌다. “태자비는 임신 사실을 알고 기분이 어땠습니까? 저는 말입니다. 너무 기뻐서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몰라 잠도 몇 날을 설쳤다고요!”“음…… 전 사실을 알고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몸도 마음도 준비가 하나도 안 된 상태에서 애가 생겼으니까요. 하지만 나중엔 받아들였습니다.”“그래요? 아무튼 전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호비는 자신의 배를 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이 어찌나 따듯한지 마치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근데 태자비 당시에 내가 혼인 때문에 궁에 들어왔을 때 말입니다. 태자비께서는 많이 긴장을 하셨지요?”“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에이, 태자비는 처음에 내가 초왕에게 시집을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호비가 원경릉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일이라면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태자비.” 호비가 원경릉의 손을 잡으며 “태자비, 비록 우리 사이에 서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난 황실에 친구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궁중의 다른 왕비님들하고 친해지려고 노력해도 나를 애 취급하며 친해지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말인데…… 나는 태자비가 마음에 듭니다. 나와 친구가 되어 주겠습니까?” 라고 말했다원경릉은 진실한 호비의 표정을 보고 웃으며 “예, 그래요. 적보다는 친구가 많은 게 좋죠!” 라고 말했다.“태자비 걱정 마세요. 나는 절대로 당신과 적이 되지 않을 겁니다!”원경릉은 감정에 솔직하고 당찬 호비를 보고 내심 부러움에 미소를 지었다. 호비는 그런 원경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거리며 웃었다.원경릉은 호비를 떠나 건곤전에 가 태상황의 상태를 살폈다. 태상황은 며칠 내내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그가 며칠 동안 참다가 담배를 꺼내 한 모금을 마시는 순간 원경
“말이라도 못 하면! 넌 아주 여우구나 여우!” 태상황이 말했다. 원경릉은 태상황이 돌계단에 앉는 것을 보고 문득 자신의 조모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렇게 나를 걱정하고 보살펴주는 두 분이 있으니 든든하네. 그나저나 두 분 다 오래오래 사셔야 할 텐데…… 맞다, 현대에 내 진짜 할머니는 어떻게 되셨으려나?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원경릉은 슬픔을 형용할 수도 없었고, 현대의 자신의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만약 하늘이 허락해 그녀가 다시 현대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 자신의 가족들 생각에 원경릉의 눈가가 붉어졌다. 태상황은 줄곧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놀라서 그녀에게 말했다. “됐다! 알겠어! 과인이 담배를 적게 피겠다! 이게 뭐라고 울 것까지 없잖느냐!”원경릉은 눈물을 닦으며 “예! 말씀하신 것 꼭 지키십시오!” 라고 말했다.“남아일언중천금이라고 했다! 남자가 뱉은 말은 꼭 지켜야지!”상선은 태상황의 말을 듣고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젊었을 때보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가끔 눈을 찡그리거나 고개를 계속 갸우뚱갸우뚱하기도 하고, 손을 떨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태상황은 사납게 상선을 노려보았고, 상선은 그제야 바짝 긴장하고 자세를 고쳤다. 원경릉은 두 사람의 관계가 불 보듯 뻔한 사이이기에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티격태격하지만 두 사람은 주종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태상황은 원경릉에게 희상궁의 안부와 의학원 진행이 얼마나 됐는지 물었다.원경릉은 희상궁의 병세를 사실대로 고했다. 태상황은 의외로 놀라는 기색 없이 희상궁을 잘 돌보라고 말하며 그녀가 운이 좋지 않았다며 불쌍히 여겼다. 원경릉도 희상궁이 운이 없었다며 태상황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 길에서 사람을 부축해 주다가 문둥병을 옮는 사람이 있겠냐는 말이다.
원경릉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상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돼!”“왜 안됩니까? 이것은 백성들을 위한 일이잖습니까?”원경릉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과인의 나이가 몇인데 내가 그거까지 신경 써야 해? 그리고 세상 어느 어의가 네가 차린 의료관에 선생이 되려고 하겠는가? 게다가 앞으로 의학원 학생들이 나오면 혜민서도 더 많아질 것이고 그럼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어의들이 가만있겠는가? 의학원은 모든 어의들이 반대할 일이야.”“저도 그 문제를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북당에는 환자에 비해 혜민서가 너무 적습니다. 혜민서를 제외한 의원들은 일반 백성들은 꿈도 꾸지 못할 금액을 요구하고 있고요. 어의가 많아지면 백성들이 삶의 질이 올라갈 것입니다. 현재 백성들은 질병에 걸려도 의원에 못 가니 병을 키우고 있습니다. 제가 의학원을 짓겠다는 것은 민생을 위해서입니다.”태상황은 손을 저었다. “민생을 위함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느냐? 민생을 위한다면 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야.”“예, 그러니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죠.” 원경릉이 말했다.“그럼 네가 해!” 태상황이 이 일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원경릉은 태상황에게 이 일을 부탁하면 그가 해결해 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 태상황이 두 손을 들어버렸고, 원경릉은 앞길이 막막했다. 그녀는 문득 지금까지 태상황에게 너무 많이 의지했다고 생각했다.원경릉은 문둥병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은 나중에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궁을 나온 원경릉은 왕부로 가는 마차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왕부가 아닌 기왕부로 가주시게.”그녀는 하인에게 마차를 돌려 기왕부로 가라고 했다. 그냐가 막 기왕부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저 멀리서 주명양이 보였다. 주명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주와 비취로 아주 화려하게 치장을 했다. 입술은 불이 난 듯 빨갛고 높게 쪽 진 머리가 반짝였다. 반면 원경릉은 피곤으로 눈 밑이 시커멓고 피부도 푸석하고 까무잡잡했
원경릉은 주명양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감지했다. ‘예전의 주명양은 있는 그대로 매력이 넘치는 그런 여자였는데 어찌 이리 한순간에 피해 망상과 겉치레에 신경을 쓰는 여자가 되었던가…… 사람이 궁핍한 상황에 놓이면 본성이 드러난다더니 그 말이 맞구나.’원경릉은 주명양을 보며 삶의 이치를 깨달았다. 어떤 때는 자신이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망할 사람은 알아서 망한다.“주후궁, 괜찮나? 정신이 멀쩡한 것 같지 않은데, 본비가 괜찮은 어의를 소개해 줄까?”“자만은 금물이네요. 내가 말한 것을 허투루 듣지 마세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사람일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그래, 오지 않은 미래에 매달려봐.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지금 내 꼴이 우스우면 마음껏 웃어! 겉으로 착한 척 고귀한 척하는 네 모습 꼴 같지도 않으니까! 두고 봐! 내가 네 코를 납작하게 해줄 테니까! 나는 너랑 출신부터가 다르다고!”원경릉은 주명양의 눈빛에서 질투를 느꼈다. “주후궁, 그래.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공짜니까. 마음껏 해.”원경릉이 차를 따라 마시려고 하자 주명양이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네가 감히 나를 비웃어?”원경릉은 깜짝 놀라서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내가 언제 너를 비웃었다고 그래?”“네 눈빛이 나를 비웃고 있어! 내가 모를 것 같아?”원경릉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하고는 상종하지 말자는 표정으로 조용히 일어났다. ‘기왕비는 도대체 어딜 간 거야?’그순간 다행스럽게도 기왕비의 발소리가 들렸다. “주씨 집안에서 사람이 왔으니 주후궁은 거기로 가보게.”주명양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거리며 원경릉을 노려보았다. “기왕이 어찌 됐든 나는 주씨 집안의 사람이야! 네가 태자비가 되었다고 해도 너의 미천한 집안은 영원히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테니!”말을 마친 후 주명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원경릉은 놀란 표정으로 주명양의 뒷모습을 보았다. “주명양 쟤 왜 저럽니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정신이
원경릉은 자리를 고쳐잡고 앉아 기왕비에게 얘기했다. “그…… 이 일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의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정도의 수준이면 꽤나 경험도 많고 유명한 어의일 텐데, 그런 어의가 학교로 오고 싶어 하겠습니까? 자신이 의원을 차리면 훨씬 많은 돈을 받을 텐데요. 게다가 의학원 개설을 어의들이 환영하겠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어렵게 배운 의술인데 그걸 공짜로 배우게 해준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예, 기왕비의 말대로 이 일은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그리고 한 명의 어의를 가르치는데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텐데…… 의학원에서 나온 어의들도 혜민의서에서 경험을 쌓고 자신의 의원을 차릴 텐데. 그럼 지금 있는 어의들이 가만히 두고 보겠습니까? 어의가 많아지면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길 것이라고 생각할 텐데요?”원경릉은 기왕비의 말을 듣고 작게 탄식했다. “어렵다는 거 잘 압니다. 안 그래도 탕양을 시켜서 어의를 알아보라고 했어요. 근데 지금까지도 무소식입니다.”“그럼 태자비는 혹시…… 혼자 수업을 할 생각입니까? 태자비도 어의잖아요.”“전 안 됩니다.” 원경릉은 한의학을 하나도 몰랐다.“그래요. 태자비 신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건 위험하죠.”기왕비가 원경릉의 말을 오해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설명할 기운이 없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의학원이 잘 진행되면 다섯째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가만 보면 다섯째가 복덩이를 얻었어요.”원경릉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저는 다섯째를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불쌍한 환자들을 위해서예요. 지금 북당의 의료는 너무 엉망입니다. 의원도 많이 없고, 의료비도 너무 비쌉니다. 저는 백성들이 돈이 없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태자비, 진심으로 백성을 위해 의학원을 열겠다는 겁니까? 정말…… 정말……”기왕비는 원경릉을 칭찬하고 싶었지만 낯간지러운 말은 부끄러워 말을 멈추었다. “그럼 기왕비께서도 신경을 좀 써
혼담을 꺼낸 당일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하지만 원가는 세속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혼수도 원하는 대로 준비하게 했고, 잔칫상만 제대로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잔칫상은 일곱째 아가씨가 결코 시집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알리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인 상대가 황제가 가장 신임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였다.따라서 잔칫상만큼은 빠질 수 없었다.이 부분은 탕양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름 저축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잔칫상을 준비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하객 문제에 대해서도, 탕양은 아는 사람이 정말 많았기에 문제없었다.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성에만 백 상 이상은 문제없이 마련할 수 있었다.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자로서, 조정의 문무백관 중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이 모든 것을 논의한 후, 탕양은 마침내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노태군, 만약 일곱째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동의할 것이다. 원가는 혼사를 치르거나 상을 치르거나 내릴 결정을 둘 뿐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다른 선택은 없다.”노태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탕양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왠지 일곱째 아가씨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혼사는 본디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돌아가는 길에 탕양이 여전히 불안했해 하자, 원경릉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신랑이 될 마음의 준비만 해두시게. 일곱째 아가씨는 원가 식구들이 설득할 것이오.”“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곤란하게 하거나, 억지로 결혼하게 해서 그녀가 상처받는 건 싫습니다.”“아가씨도 동의할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약도성에서 자네를 뿌리치고 떠났을 것이네. 하지만 곁에 남아 자네를 보살폈잖나? 그것만 봐도 자네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오.”“정말입니까?”탕양이 놀랐는데, 얼굴에 은은하게 빛이 맴돌았
원경릉은 원가에서 이 혼사를 분명히 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노태군이 일곱째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에서 혼담을 꺼내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가의 유일한 문제는 일곱째 아가씨 본인이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이다.역시나, 다음 날 탕양과 함께 원가로 향한 원경릉은 원가에서 심지어 점쟁이까지 청해 두 사람의 사주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의 사주를 본 점쟁이는 한참 확인하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의 사주가 다소 상충합니다.”원 노태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디가 상충하는가?”“한 사람은 닭띠, 한 사람은 개띠입니다. 이는 닭과 개가 편치 않은 사주라, 혼사를 치른 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노태군은 탁자를 쾅 치며 말했다.“그럼 바꾸면 되지! 이제 보니 우리 딸은 말띠다. 방금 헷갈렸었다.”“말띠요? 말띠라면 괜찮습니다. 말띠는 올해 연분이 따르는 해 입니...”노태군은 점쟁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다니 됐다. 이제 길일을 골라주게.”그러자 점쟁이는 다시 손을 펴고 계산하더니 말했다.“올해 좋은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연말쯤이어야...”“좋다. 이번 달 15일로 하지. 보름달이 뜨는 날, 사람도 오붓이 모이는 날이니, 좋지 않겠나?”점쟁이가 책자를 닫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혼사는 원가에서 준비하니, 제시간에만 준비 된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15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원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5일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 되었다. 준비할 시간도 아직 부족했는데, 혼례복을 만드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원가는 이미 일곱째 아가씨를 위해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새로 만들었기에, 지금껏 서랍 속에 쌓여 있는 혼례복만 해도 7~8벌이나 되었다.혼수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혼담을 꺼낼 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
사식이는 다들 일곱째 고모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의아해하며 물었다.“일곱째 고모께서 편지를 보내신 겁니까?”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편지가 왔단다. 며칠 놀다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구나.”사식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일곱째 고모께서 돌아오고 나서 혼담을 꺼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곱째 고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일이 난감해질 텐데요.”노태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미 모든 일을 저질렀느넫 이제 와서 동의하지 않는다니? 감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목을 매겠다!”노태군은 일곱째 고모가 열여덟 살이 되던 때부터 그녀의 혼사를 기다려 왔다. 계속 기다리다가 이미 머리카락이 다 하얘져 버렸지만, 그녀는 아직 혼인 기약조차 없었다. 이번에도 혼사를 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다.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일곱째 아가씨가 빨리 시집가기를 바라고 이씩 때문에, 이 일은 서둘러 진행하기로 했다.“사식아, 네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거의 죽게 생겼다고 전해라!”노태군이 단호히 명령했다.딸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저주까지 불사하는 그녀는 정말 독한 늙은이었다.서일은 탕양을 데리고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중매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바로 황후를 찾아가야 했다.소월궁에서 우문호 부부는 탕양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우문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짐이 보기엔, 일찍 일곱째 아가씨에게 네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이리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탕양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고,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불안에 휩싸여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폐하,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사람을 보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오래전의 악몽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탕양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녀가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스스로 뺨을 몇 대 때리고는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따라잡으려 죽자고 달려도, 끝내 그녀를 볼 수 없었다.그렇게나 빨리 도망간 건가?그렇게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쉬지도 않고 곧장 원가로 달려갔다.마침 서일과 사식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와 있던 참이었는데, 대문 앞에 도착하니, 탕 대인이 거지처럼 문지기 앞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문지기의 옷깃을 움켜쥔 채 다급히 묻고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너희 일곱째 아가씨는 대체… 어디 있느냐?”그러자 문지기는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나 사나운 탕 대인을 본 적이 없어 더듬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일곱... 일곱째 아가씨께서... 탕 대인과 함께 약도성에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그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탕양이 소리쳤다.“아직... 아직 못 뵈었습니다…!”바로 그때, 서일이 다가와 문지기한테서 탕 대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손부터 놓으십시오. 옷이 다 찢어지겠습니다.”탕 대인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큰일이야… 내가 그녀를 망쳐 버렸네! 죽어도 이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네…!”“무슨 일입니까? 저희 고모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사식이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탕 대인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나는 돌아온 줄 알고 있었네...”바로 그때,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원가의 노태군이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탕양이 고개를 들자, 노태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탕
냉정언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잠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에 정말 큰일을 저지른 것인가?’그는 그저 탕양에게 술을 먹여 일곱째 아가씨에게 진심 어린 말을 꺼낼 용기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탕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황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다들 그를 안타까워했었다.탕양은 다섯째가 초왕이었을 때부터 초왕부와 다섯째,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게 반평생을 북당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평생을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채, 조정을 위해 뛰어난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나 봉록을 거절하며 죄를 속죄하듯 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탕양은 이미 그 누구보다 훌륭히 잘해왔고, 게다가 정과 의리에 발목 잡힌 것은 많은 영웅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였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그 혼자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와 벗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맑은 정신으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을 것이기에, 술에 취하게 하면, 경성이 아닌 변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속마음 정도는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탕 대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던 건지... 만취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대체 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품었던 것일까?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탕 대인 아주 못 쓰겠구먼! 이를 어찌 마무리 짓는단 말이냐…?!’원가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여장군들을 떠올리니, 냉정언은 순간 뒷골이 땡겨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냉명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냉명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지, 탕 대인은 어찌 일곱째 아가씨와 그런 일을 벌인
탕양은 지금까지 살면서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이 단 하나뿐이었다. 비록 그 일도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는 술에 취하면 정말로 이성과 기억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기에 그 후로 술을 마시더라도 되도록이면 취하지 않게 애썼다. 하지만 어젯밤은 예외였다. 그는 이곳 사람 모두를 믿고 있었기에 경계를 풀었던 것이다.남녀 간의 일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가 되어서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의부님! 의부님!"바로 그때, 문밖에서 호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탕양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호통쳤다."일단 들어오지 말거라!"그는 급히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서 옷을 찾아 황급히 입은 후, 이마를 문지르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문밖에서 호명이 물었다."이제 막 일어나신 겁니까? 아직도 취기로 힘드십니까?"탕양은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괜찮다. 무슨 일이더냐?""식사하시라고 부르러 왔습니다. 아! 일곱째 아가씨께서 경성으로 돌아간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같이 가실 줄 알았는데 먼저 떠나셨더군요.""… 돌아갔다고?!"탕양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예!"호명이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의부님… 혹시 어젯밤 누구에게 맞으셨습니까?"탕양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는데, 그제야 얼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동경을 찾아 얼굴을 비춰보았는데, 왼쪽 뺨에 여러 개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것 같았다.그러자 어렴풋이 한 여인이 세게 뺨을 때리며 욕설을 퍼붓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올랐다.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텅 비어 있어 창백해진 안색으로 생각에 잠겼다.‘설마 내가 취기를 빌어... 그래서 떠난 것이었구나...’이번 사건은 목숨을 내놓고 속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말을 준비하거라! 어서!"탕양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
연회는 계속 진행되었고, 냉정언은 술잔을 들고 계속 탕양에게 술을 권했다. 잔을 몇 번이나 주고 받자, 탕양은 머리가 머리가 어지러워져 말조차 똑바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연회가 끝난 후, 냉정언이 일곱째 아가씨에게 말했다."술을 꽤 마셨다 보니, 탕양이 좀 취한 것 같네. 정원에 나가 산책을 조금 하면서 술기운을 가시는 것이 어떻소?"일곱째 아가씨도 약간 취한 상태였기에, 바람을 쐬며 땀을 내면 술이 깰 것 같다며 동의했다."예. 그럼 다들 돌아가서 쉬시지요. 제가 호명과 함께 탕 대인을 돌보겠습니다.""좋소. 수고하시게나!"냉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자, 어서 돌아가시게!"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새가 흩어지는 것 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일곱째 아가씨는 호명과도 함께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탕양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물었다."괜찮습니까? 걸을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탕양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는데, 술에 많이 취한듯 몸을 심하게 휘청거렸다."어찌 못 걷겠습니까? 취하지 않았습니다!""예. 그럼, 몇 걸음 더 걸어보시지요. 정말 못 걸으시겠으면 방으로 돌아가 쉬시고요. 취기를 덜어줄 탕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그러자 탕양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곧게 뻗은 직선을 그리며 터벅터벅 걷고는 뒤돌아 일곱째 아가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보시지요. 얼마나 똑바로 걷는지! 안 취했습니다. 이제 믿을 수 있습니까?"일곱째 아가씨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하하하. 예, 안 취하셨네요. 그럼 이만 나가서 함께 산책하시지요."그녀는 그가 오래 걷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기로 했다.역시나 문을 나서자마자 탕양은 난간을 붙잡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하도 휘청거리는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기에, 일곱째 아가씨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했다.그러자
"탕 대인이 저를 예쁘다고 말해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그러니 일곱째 아가씨께도 예쁘다고 말해 보십시오. 분명히 기뻐하실 것입니다!"하지만 탕 대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다를 겁니다. 일곱째 아가씨는 이제 그런거에 좋아할 나이를 지났습니다. 지금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하면, 그저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어찌 그럴 리 있습니까? 누구나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탕 대인, 대인께서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탕 대인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예? 하하하. 그렇습니까?""예! 모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탕 대인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과찬입니다.""기분 좋으십니까?"택란이 묻자 탕 대인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멈칫하며 말했다."이 녀석!"택란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탕 아저씨도 누군가에게 꼭 사랑받으시길 바랍니다."탕 대인은 이 말에 크게 감동해서 택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 고맙습니다."저녁엔 계약이 성공한 기념으로 연회가 열렸다.소박한 술자리긴 했지만, 커다란 술통들이 준비되어 있어 모두 마음껏 마시며 즐길수 있었다.택란은 술을 마시지 않기에, 주 아가씨가 매실청을 대신 준비해 주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택란의 마음에 쏙 들었다.술잔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모두 패기 있게 약도성을 북당에서 제일가는 도성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일곱째 아가씨는 벌써 독산을 어떻게 개발할지부터 고민하고 있었는데, 독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막막했기에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각자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지만 대부분이 경치를 개발하자는 내용이었다.반면, 택란은 새로운 생각을 제안했다. 독산에 온천이 있으니 오두막을 지어 온천을 끌어들여 돈을 받고 여러 개의 탕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온천수가 몸에 좋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자고 제의하였다.택란의 생각은 이 시절
탕양은 자신이 여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자부했었다. 특히 일곱째 아가씨처럼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더 선호하기에 굳이 자신과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그의 큰 착각이었다.여인의 마음은 늘 갈대처럼 변덕스럽고,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다정함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아가씨는 오랫동안 혼자 외롭게 지내왔는데, 중년에 접어들며 그 외로움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누군가 곁에 있다면, 삶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지만, 물론 잘못된 연으로 나빠질 가능성도 있었다.원가의 가훈은 항상 군주에게 충실하며, 엄청난 용기도 있었다. 심지어는 원가에서 키운 닭조차 남의 집의 닭보다 더욱 용감할 정도였다.하지만 한 번의 좌절로 인해 사랑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과연 용기있는 행동 일까?물론 그녀가 반드시 탕양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볼 수도 있었다.하지만 탕양이 먼저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그녀 역시 그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여태껏 그녀의 마음에 들어온 사람은 오직 탕양뿐이었다.그리고 어쩌면 시도해 봐야만 서로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탕양과 잘 맞는다고 느끼는 건 그녀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착각일지도 모르니 말이다.경성으로 돌아간 후에도 탕양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공개적으로 구혼에 나설 생각이었다. 한편, 택란이 주 아가씨와 함께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탕 대인이 왜 나쁜 사람인 것이오?""여인을 훔쳐봤습니다.""탕 대인이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소? 어찌 못 보는 것이오?"주 아가씨는 택란이 이런 부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공주에게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내가 여인을 사모하면 상대의 시선을 바라보지,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탕 대인은 일곱째 아가씨를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