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눈이 싸늘해지더니 바로 배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배지유는 휴대전화를 내팽개친 채 한 남자와 침대 위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배건후와 함께 호텔을 나왔을 때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도아린에게 맞아서 화가 난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았다. 경험이 많은 그녀는 배건후에게서 바로 벗어났다.“오빠, 뭐 좀 두고 나왔어. 먼저 보미 언니 병원에 데려다줘. 난 알아서 집에 갈게.”그러고는 바로 도망쳤다. 온몸의 열이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마침 위층에 술집이 있었고 안에 호스트도 있다는 걸 배지유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카운터에 돈을 꺼냈을 때 이미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한 남자가 나른해진 배지유의 몸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룸 들어가요.”술집 사장이 호스트를 데리고 왔을 때 배지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그냥 주는 돈이야?’배건후가 전화를 끊자마자 우정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손보미가 검사를 마치고 배건후를 만나겠다면서 울며 집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가 손보미의 집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나서야 손보미는 집으로 향했다.그녀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눈물을 계속 뚝뚝 흘렸다.“건후 씨, 아린 씨를 계속 그렇게 내버려 두면 언젠가는 큰일 나...”손보미는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의사가 가슴에 결절이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고 했었다. 가뜩이나 작은 가슴에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도아린이 밀었어?”손보미가 화들짝 놀랐다.‘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전에는 내가 뭐라 하든 다 믿었었는데. 도아린이 민 게 아니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나한테 돌을 던진 건 사실이잖아. 날 먼저 위로해야 하는 거 아니야?’손보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얼굴이 하도 말라서 웃지 않을 때면 더 속상해 보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귀국한 다음에 송 감독님의 작품을 하기로 했어. 관심도 많이 끌고 팬
담배가 아직 3분의 1이 남았는데도 배건후는 재떨이에 비벼껐다. 끓어오른 분노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손보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화제를 돌렸다.“건후 씨, 만약 아린 씨가 여전히 민재 씨와 함께하겠다고 하면 두 사람 축복해줄 거야?”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데는 참으로 선수였다.‘여전히’라는 단어로 도아린이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육민재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뜻을 표현했다.3년 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젠 버텨냈고 육민재도 귀국했다. 모든 게 도아린의 뜻대로 되었으니 이젠 함께할 때도 됐다.그 한마디는 배건후의 분노를 제대로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밀었는지 여부의 대답도 손쉽게 피해버렸다.배건후는 손보미의 휴대전화를 들고 사진을 자기 휴대전화에 전송한 후 돌려주었다.“만약이라는 건 없어.”“...”손보미의 표정이 확 굳어졌고 들은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이혼하는 거 아니었어? 왜 만약이 없다고 하는 거야? 도아린이 후회해서 이혼을 번복한 거야, 아니면 건후 씨가 이혼을 거절한 거야?’손보미의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떠오르면서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자신이 생각하는 게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그녀가 나긋하게 말했다.“나영옥 어르신이 아린 씨를 엄청 좋아하더라고. 마치 아린 씨가 손주며느리인 것처럼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셨어.”손보미는 배건후가 듣기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 했다. 배건후가 점점 더 싸늘한 기운을 내뿜었지만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이 일이 그냥 이렇게 넘어가나 싶던 그때 배건후가 갑자기 말했다.“아린이한테 사과해.”손보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뭐... 뭐라고?”휴대전화를 어찌나 꽉 쥐었는지 뼈마디가 다 하얗게 됐다.‘내가 왜 도아린한테 사과해야 해? 피해자는 난데!’배건후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네가 먼저 사과하면 도아린더러 사과하라고 할게.”손보미더러 사과하라고 한 건 사람들이 도아린을 의심하게 만들어서였고 도아린더러 사과하라고 한 건 손보미를 때려서였
배건후가 아무 말이 없자 손보미는 자신이 없었다. 더 완벽한 거짓말을 위해 바로 김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떻게 이렇게 덤벙거릴 수 있어? 다른 영수증을 나영옥 어르신의 생신 선물에 떨어뜨리면 어떡해? 선물은 성의가 있어야 하는 거 몰라? 선물이랑 영수증이 맞지 않아서 하마터면 망신당할 뻔했다고.”손보미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김지민이 변명하려는데 손보미가 계속하여 말했다.“건후 씨가 날 데리고 생신 연회에 갔어. 이러면 배씨 가문의 체면도 깎인다고. 알아? 그동안 널 믿고 다 맡겼더니 보답을 이런 식으로 해? 변명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내일 알아서 사직서 제출해!”그녀는 전화를 끊고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김지민이 다시 전화를 걸어올까 봐 꺼버렸다.“건후 씨, 오늘 일은 다 내 탓이야. 내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손보미가 화제를 돌렸다.“오늘 술 많이 마셨지? 내가 가서 해장국 끓여줄게.”“괜찮아.”배건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일찍 쉬어.”그의 단호한 뒷모습을 보며 손보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잠시 후, 손보미가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는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주현정은 그 기사를 보고는 아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설명하기 귀찮았던 배건후는 전화를 끊고 계속 서류를 처리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현정이 문자를 보냈다. 식당을 예약했으니 배건후더러 도아린과 함께 밥 먹으러 가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사진도 찍어 보내라고 했다.도아린은 옷을 수선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젯밤 일 때문에 너무도 화가 나 꿈에서도 배건후와 싸우고 있었다. 그러니 상냥하게 전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전화가 연결된 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아린... 도아린?”배건후는 신호가 좋지 않은 줄 알고 끊은 후 다시 걸어왔다. 그 모습에 도아린이 코웃음을 쳤다.‘처음으로 이렇게 끈질기게 전화하네? 전에는 내 전화를 그렇게 잘 끊더니.’배건후가 세 번을 걸어서야 도아린의 싸늘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말해요.”“내 목
도아린은 허리를 곧게 펴고 이마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보았다.배건후의 어두운 시선이 도아린에게서 대시보드 위의 휴대전화로 향했다.영상통화를 켜고 있었는데 화면에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펜을 잡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장수현과 태연한 모습의 남궁유민이었다.도아린이 시작해도 된다는 소리에 장수현은 다급하게 원고지를 들었고 휴대전화에 남궁유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건후 씨, 도아린 씨와 이혼 및 4천억에 관한 부속 합의서를 작성하실 의향 있으십니까?”배건후는 대답하지 않고 도아린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지난번에 내 뜻대로 해주겠다고 하더니 약속 지키지 않아서 믿음이 안 가서요.”도아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서 이번에는 양측 변호사가 보는 앞에서 하려고요. 모건 그룹의 대표인데 설마 약속을 어기진 않겠죠?”배건후의 시선이 다시 휴대전화로 향했다.“의향 있어요.”도아린이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차에 타기 전 그녀는 두 변호사에게 상황을 알려줬다. 남궁유민이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말했다.“도아린 씨는 잠시 이혼을 꺼내지 않고 배건후 씨와 주현정 여사의 앞에서 사랑하는 부부인 척 연기를 한다. 주현정 여사가 두 사람의 이혼을 받아들이거나 배건후 씨가 먼저 이혼을 요구할 경우 도아린 씨는 900억 원의 빚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배건후 씨는 도아린 씨에게 보상으로 현금 4천억 원을 준다.”배건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핸들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등의 핏줄이 다 튀어나왔다.차 안이 하도 조용해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장수현은 화면만 봐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져 테이블 밑의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속으로는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회의 쓴맛을 본 후에는 권력 앞에 허리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도아린의 변호사가 되는 건 엄청난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소송에서 지면 고객에게 미안하고 이기면 배건후가 절대 그를
“도아린!”배건후는 그녀의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꽉 잡았다. 도아린은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못하겠어요? 그럼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네요?”도아린은 그의 분노한 두 눈을 대담하게 쳐다보았다. 배건후가 속으로 생각했다.‘너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잘생긴 얼굴에 냉기가 한층 씌워진 듯했고 눈빛도 칼처럼 날카로워 도아린의 몸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두 변호사가 보는 앞이라 배건후가 함부로 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도아린은 허리를 곧게 펴고 아래턱을 든 채 도발했다.1초, 2초...“그래.”배건후가 이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도아린이 남궁유민을 쳐다보았다. 줄곧 차분하던 그의 표정이 드디어 살짝 다급해지기 시작했다.남궁유민은 목을 어루만지다가 건반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때 도아린은 남궁유민의 셔츠 옷깃 부분에 진한 흔적이 있는 걸 발견했다.배건후가 먼저 문자를 받았고 곧이어 도아린도 받았다. 그녀는 남궁유민의 사생활에 딱히 관심 없었기에 통쾌하게 사인을 마친 후 보냈다. 혹시라도 배건후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공증 비용은 더치페이로 하죠. 건후 씨가 남궁 변호사님한테, 난 장 변호사님한테 주고.”그러고는 영상통화를 끊어버렸다.남궁유민의 비용이 여간 비싼 게 아니었다.주현정이 예약한 식당은 커플 레스토랑이었다. 불빛이 어두워서 분위기가 더 있어 보였고 구석에서는 따뜻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테이블마다 병풍으로 가리고 있어 프라이버시도 지켜주었다.도아린 앞에 들어간 커플은 서로 깍지를 끼고 있었고 자리를 기다릴 때도 아무도 없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키스하곤 했다.“...”도아린은 민망한 나머지 다급히 고개를 숙여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배건후는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아니면 눈이 먼 건지 줄곧 도도하고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어 전혀 데이트하러 온 것 같지 않았고 되레 상대 회사를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를 내뿜었다.“키스까지 안 해도 돼. 찍으라는 말이 없었어.”괘씸한 목소리가 도아린
그의 이상한 두뇌 회전에 도아린은 분노가 갑자기 끓어올랐다.“누군 이 집 사모님이 되고 싶어서 된 줄 알아요?”결혼해서 지금까지 배건후는 그녀를 사모님이라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곧 이혼하게 생긴 지금 가끔 부르곤 했다.마치 날카로운 무언가로 유리를 긁는 것처럼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배건후는 라이터를 꺼내 손가락으로 돌렸다. 맨 밑바닥의 글씨가 닳아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우리 집 사모님이 싫으면... 육씨 가문 사모님은 좋아?”‘이게 육민재랑 무슨 상관이야?’도아린은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때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배건후 씨, 쓸데없는 소리 자꾸 하지 말고 중점만 말해요.”“넌 보미 얘기 꺼내도 되고 난 민재 얘기 꺼내면 안 돼?”“같은 일이에요, 그게?”도아린이 싸늘하게 웃었다. 배건후는 라이터를 내려다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결국 화를 참지 못한 도아린이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확 내려놓았다.“손보미 씨한테 돈을 쓸 땐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고 사달라는 거 다 사줬잖아요. 게다가 카드까지 줬고. 건후 씨가 보미 씨 먹여 살리고 보미 씨는 또 다른 사람 먹여 살리고. 정말 대박이에요.”배건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무슨 헛소리야, 그게?”“아이가 태어난 다음에 유전자검사 해서 누구 아이인지 확인하는 게 좋을 겁니다.”배건후는 도아린의 어깨를 잡고 붉으락푸르락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비웃었다.“이 머리로는 재벌 사모님이 될 자격이 없긴 해.”“나쁜...”놈이라는 말을 채 하기 전에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도아린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준비한 메뉴들이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동안 도아린은 항상 배건후의 입맛만 신경 쓰느라 자극적인 맛들이 어떤 맛이었는지조차 거의 까먹은 것 같았다.‘맛있는 음식을 봐서 일단 따지지 않겠어.’도아린이 젓가락을 들자마자 배건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몸을 돌려서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손보미의 전화일 거란 생각에 코
“나랑 같이 둘러볼래?”육민재의 목소리에 친화력이 있는지 이상하게도 거절하기 어려웠다.배건후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라디오에서 몇 시간 내로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얘기가 나왔다.도아린이 반팔 원피스만 입었다는 생각에 배건후는 다시 시동을 껐다. 지금 도우미더러 옷을 가져오라고 하면 도아린이 홧김에 가버릴 수 있으니까 늦을 것 같았다.마침 트렁크에 그가 금방 드라이를 맡긴 겉옷이 있었다.도아린은 육민재와 함께 지사 인테리어를 둘러보았고 설계 이념도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아이디어를 부탁하기도 했다.육민재가 그녀를 두 번이나 불러서야 도아린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어젯밤 일이 신경 쓰여?”어제 배건후는 그녀를 탓하지도, 도와주지도 않았다.나영옥이 도아린을 감싸주긴 했지만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이 무조건 있을 것이다.도아린이 살짝 멈칫했다. 그 일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게 아니라 손보미가 그 일로 배건후에게 하소연할 거란 생각에 짜증이 났던 것이었다.“괜찮아요, 난.”도아린이 히죽 웃어 보였다.그동안 그녀는 성격을 죽이고 다정하고 고분고분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그 변화는 배건후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되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말았다.어떻게 하든 다 욕을 먹을 바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나았다.어젯밤 아픈 건 손보미였고 옆에서 도와주는 배지유도 때렸다. 혼자서 둘을 상대하니 너무나도 통쾌했다. 그리고 배건후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녀와는 상관이 없었다.육민재는 속상함이 사라진 도아린의 얼굴을 보고는 휴대전화를 꺼냈다.“어제 그 자리에 CCTV가 진짜 없었어. 근데 한 일꾼이 와이프한테 바람피웠다고 오해받아서 일하는 영상을 찍은 게 있더라고.”육민재는 휴대전화를 도아린에게 건넸다. 영상을 클릭하자마자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봐봐, 일하고 있잖아...”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가짜 산이 나타났다.“여기 봐봐. 저 분수도 내가 만든 거야...”돌리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 마침 손보미가 도아린
“얘가 따라준 차를 마시면 대가 치러야 해.”도아린이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자 배건후의 차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손보미 찾으러 간 거 아니었어?’도아린은 그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배건후가 그 뒷말을 하게 해선 안 되었다.“배건후 씨!”도아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배건후의 팔짱을 잡아당기면서 나가려 했다. 그런데 하도 당황한 바람에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배건후의 품에 와락 안기고 말았다.배건후는 그녀를 잡지 않고 그저 싸늘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도아린은 그의 허리춤을 잡고 올려다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말하지 말아요.”배건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지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민재가 네가 한 짓을 알까 봐? 그 비열한 수단을 알고 네가 역겹다고 생각할까 봐?”도아린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데 배건후는 육민재의 마음속 도아린의 완벽한 이미지가 망가질까 봐 겁을 먹은 거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배건후의 팔을 잡고 화제를 돌렸다.“보미 씨 괜찮아졌어요?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요?”“내가 여기 있어서 거슬려?”배건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걸 보고 도아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육민재만 만나면 배건후는 생각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끼어든 건 나죠. 친구끼리 얘기해요.”도아린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고는 육민재에게 말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 그 일은 고마웠어요. 다음에 밥 한 번 살게요.”육민재가 증거를 찾아줘서 고맙단 뜻이었다. 육민재는 도아린의 말대로 배건후에게 영상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으로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그런데 배건후의 눈에는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것으로 보였다.그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도아린은 배건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배건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이 한마디를 남기고 배건후도 그녀를 따라나섰다.호텔 문 앞, 그는 도아린과 한마디도 섞지 않고 차를 몰고 가버렸다....배지유는 배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