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배건후는 그녀의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꽉 잡았다. 도아린은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못하겠어요? 그럼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네요?”도아린은 그의 분노한 두 눈을 대담하게 쳐다보았다. 배건후가 속으로 생각했다.‘너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잘생긴 얼굴에 냉기가 한층 씌워진 듯했고 눈빛도 칼처럼 날카로워 도아린의 몸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두 변호사가 보는 앞이라 배건후가 함부로 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도아린은 허리를 곧게 펴고 아래턱을 든 채 도발했다.1초, 2초...“그래.”배건후가 이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도아린이 남궁유민을 쳐다보았다. 줄곧 차분하던 그의 표정이 드디어 살짝 다급해지기 시작했다.남궁유민은 목을 어루만지다가 건반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때 도아린은 남궁유민의 셔츠 옷깃 부분에 진한 흔적이 있는 걸 발견했다.배건후가 먼저 문자를 받았고 곧이어 도아린도 받았다. 그녀는 남궁유민의 사생활에 딱히 관심 없었기에 통쾌하게 사인을 마친 후 보냈다. 혹시라도 배건후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공증 비용은 더치페이로 하죠. 건후 씨가 남궁 변호사님한테, 난 장 변호사님한테 주고.”그러고는 영상통화를 끊어버렸다.남궁유민의 비용이 여간 비싼 게 아니었다.주현정이 예약한 식당은 커플 레스토랑이었다. 불빛이 어두워서 분위기가 더 있어 보였고 구석에서는 따뜻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테이블마다 병풍으로 가리고 있어 프라이버시도 지켜주었다.도아린 앞에 들어간 커플은 서로 깍지를 끼고 있었고 자리를 기다릴 때도 아무도 없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키스하곤 했다.“...”도아린은 민망한 나머지 다급히 고개를 숙여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배건후는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아니면 눈이 먼 건지 줄곧 도도하고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어 전혀 데이트하러 온 것 같지 않았고 되레 상대 회사를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를 내뿜었다.“키스까지 안 해도 돼. 찍으라는 말이 없었어.”괘씸한 목소리가 도아린
그의 이상한 두뇌 회전에 도아린은 분노가 갑자기 끓어올랐다.“누군 이 집 사모님이 되고 싶어서 된 줄 알아요?”결혼해서 지금까지 배건후는 그녀를 사모님이라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곧 이혼하게 생긴 지금 가끔 부르곤 했다.마치 날카로운 무언가로 유리를 긁는 것처럼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배건후는 라이터를 꺼내 손가락으로 돌렸다. 맨 밑바닥의 글씨가 닳아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우리 집 사모님이 싫으면... 육씨 가문 사모님은 좋아?”‘이게 육민재랑 무슨 상관이야?’도아린은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때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배건후 씨, 쓸데없는 소리 자꾸 하지 말고 중점만 말해요.”“넌 보미 얘기 꺼내도 되고 난 민재 얘기 꺼내면 안 돼?”“같은 일이에요, 그게?”도아린이 싸늘하게 웃었다. 배건후는 라이터를 내려다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결국 화를 참지 못한 도아린이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확 내려놓았다.“손보미 씨한테 돈을 쓸 땐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고 사달라는 거 다 사줬잖아요. 게다가 카드까지 줬고. 건후 씨가 보미 씨 먹여 살리고 보미 씨는 또 다른 사람 먹여 살리고. 정말 대박이에요.”배건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무슨 헛소리야, 그게?”“아이가 태어난 다음에 유전자검사 해서 누구 아이인지 확인하는 게 좋을 겁니다.”배건후는 도아린의 어깨를 잡고 붉으락푸르락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비웃었다.“이 머리로는 재벌 사모님이 될 자격이 없긴 해.”“나쁜...”놈이라는 말을 채 하기 전에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도아린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준비한 메뉴들이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동안 도아린은 항상 배건후의 입맛만 신경 쓰느라 자극적인 맛들이 어떤 맛이었는지조차 거의 까먹은 것 같았다.‘맛있는 음식을 봐서 일단 따지지 않겠어.’도아린이 젓가락을 들자마자 배건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몸을 돌려서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손보미의 전화일 거란 생각에 코
“나랑 같이 둘러볼래?”육민재의 목소리에 친화력이 있는지 이상하게도 거절하기 어려웠다.배건후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라디오에서 몇 시간 내로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얘기가 나왔다.도아린이 반팔 원피스만 입었다는 생각에 배건후는 다시 시동을 껐다. 지금 도우미더러 옷을 가져오라고 하면 도아린이 홧김에 가버릴 수 있으니까 늦을 것 같았다.마침 트렁크에 그가 금방 드라이를 맡긴 겉옷이 있었다.도아린은 육민재와 함께 지사 인테리어를 둘러보았고 설계 이념도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아이디어를 부탁하기도 했다.육민재가 그녀를 두 번이나 불러서야 도아린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어젯밤 일이 신경 쓰여?”어제 배건후는 그녀를 탓하지도, 도와주지도 않았다.나영옥이 도아린을 감싸주긴 했지만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이 무조건 있을 것이다.도아린이 살짝 멈칫했다. 그 일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게 아니라 손보미가 그 일로 배건후에게 하소연할 거란 생각에 짜증이 났던 것이었다.“괜찮아요, 난.”도아린이 히죽 웃어 보였다.그동안 그녀는 성격을 죽이고 다정하고 고분고분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그 변화는 배건후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되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말았다.어떻게 하든 다 욕을 먹을 바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나았다.어젯밤 아픈 건 손보미였고 옆에서 도와주는 배지유도 때렸다. 혼자서 둘을 상대하니 너무나도 통쾌했다. 그리고 배건후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녀와는 상관이 없었다.육민재는 속상함이 사라진 도아린의 얼굴을 보고는 휴대전화를 꺼냈다.“어제 그 자리에 CCTV가 진짜 없었어. 근데 한 일꾼이 와이프한테 바람피웠다고 오해받아서 일하는 영상을 찍은 게 있더라고.”육민재는 휴대전화를 도아린에게 건넸다. 영상을 클릭하자마자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봐봐, 일하고 있잖아...”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가짜 산이 나타났다.“여기 봐봐. 저 분수도 내가 만든 거야...”돌리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 마침 손보미가 도아린
“얘가 따라준 차를 마시면 대가 치러야 해.”도아린이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자 배건후의 차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손보미 찾으러 간 거 아니었어?’도아린은 그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배건후가 그 뒷말을 하게 해선 안 되었다.“배건후 씨!”도아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배건후의 팔짱을 잡아당기면서 나가려 했다. 그런데 하도 당황한 바람에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배건후의 품에 와락 안기고 말았다.배건후는 그녀를 잡지 않고 그저 싸늘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도아린은 그의 허리춤을 잡고 올려다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말하지 말아요.”배건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지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민재가 네가 한 짓을 알까 봐? 그 비열한 수단을 알고 네가 역겹다고 생각할까 봐?”도아린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데 배건후는 육민재의 마음속 도아린의 완벽한 이미지가 망가질까 봐 겁을 먹은 거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배건후의 팔을 잡고 화제를 돌렸다.“보미 씨 괜찮아졌어요?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요?”“내가 여기 있어서 거슬려?”배건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걸 보고 도아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육민재만 만나면 배건후는 생각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끼어든 건 나죠. 친구끼리 얘기해요.”도아린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고는 육민재에게 말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 그 일은 고마웠어요. 다음에 밥 한 번 살게요.”육민재가 증거를 찾아줘서 고맙단 뜻이었다. 육민재는 도아린의 말대로 배건후에게 영상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으로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그런데 배건후의 눈에는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것으로 보였다.그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도아린은 배건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배건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이 한마디를 남기고 배건후도 그녀를 따라나섰다.호텔 문 앞, 그는 도아린과 한마디도 섞지 않고 차를 몰고 가버렸다....배지유는 배건후
손보미는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배지유의 등을 토닥였다.“울지 마, 울지 마. 호텔에서 묵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길에서 나쁜 사람 만나면 어쩔 뻔했어.”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방안을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화장실로 향했을 때 배지유는 움찔하면서 손보미의 손을 꽉 잡았다. 정리를 마치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었다.“건후 씨, 나 먼저 화장실 써도 될까? 급하게 오느라 약을 바르지 못했어.”손보미가 심장 쪽에 손을 올려놓았다. 옷을 벗어야만 약을 바를 수 있었다.배건후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옆에 기댔다.“먼저 들어가, 그럼.”아무리 경험이 많은 손보미라도 화장실의 전리품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배지유가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한 게 맞는지 의심마저 들었다.‘어젯밤에 호스트가 한 명만 있었던 거 맞아? 휴지랑 콘돔은 변기로 내려보낸다고 해도 포장 박스는 어떡하지?’거울에도 흔적을 남겼었는지 배지유가 말끔하게 닦았다. 재벌 집 아가씨가 샤워하지도 않고 잠을 잔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거울에 물기가 없어서 오히려 더 이상했다.손보미는 더는 방법이 없어 휴지를 변기에 내려보낸 후 문을 열었다.“으악!”“보미 언니...”배지유가 황급히 달려왔다. 손보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오른쪽 발이 이상한 각도로 틀어져 있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배건후를 쳐다보았다.“건후 씨, 발 너무 아파.”배건후는 담배를 끄고 손보미를 들어 올렸다.“물건 챙겨.”이 말은 배지유에게 한 말이었다. 배지유는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속으로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그녀와 손보미의 가방을 챙기고 문을 닫았다....도아린이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황급하게 나가는 소유정을 만났다.“어디 가?”“잘됐다. 나 좀 데려다줘. 한 친구가 손보미에 관한 흑역사를 찾았대.”도아린이 한숨을 내쉬었다.“손보미 좀 그만 내버려 둬. 그러다가 또 되레 모함당하면 어쩌려고.”소유정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까발리진 않더라고 갖고는 있어야지.
맨 앞에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가녀린 여자를 안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목을 감싸 안고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발을 삐끗했는지 이상한 각도로 휘어있었다.소유정은 도아린이 화들짝 놀라자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나쁜 X끼, 가서 저 자식 머리라도 쥐어뜯어야겠어!”유진혁은 재빨리 휴대전화를 들고 찍기 시작했다.“대박, 엊저녁에 뜨밤 보낸 거로도 부족해서 대낮에도? 어찌나 많이 했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해?”두 사람이 양쪽으로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혹시라도 소유정이 괴롭힘당할까 봐 유진혁은 다 찍을 생각이었다.지난번에 일이 생겨서 오지 못한 바람에 소유정이 다쳐서 병원에 갔었던 것만 생각하면 너무도 미안했다.딸깍.차 문이 잠겼다. 소유정이 아무리 차 문을 열어도 열리지 않자 다급하게 말했다.“아린아, 배건후가 손보미 저년이랑 저러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3대 3이에요. 싸우면 누가 이길지 몰라요.”유진혁이 당장이라도 달려들려고 하자 소유정이 눈을 희번덕거렸다.“배건후 혼자서도 우리 셋을 해결할 수 있어.”“누구? 누구라고?”유진혁은 하마터면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배건후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하지 않아도 말로 충분히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도아린은 점점 다가오는 세 사람을 보며 눈빛이 싸늘해졌다. 세 사람이 차 쪽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다른 차 뒤로 사라졌다.잠시 후 은색 마이바흐가 도아린의 차 앞으로 휙 지나갔다.“내가 알아서 할게.”소유정이 또다시 그녀 때문에 경찰서에 가게 해선 안 되었다....병원.의사는 아주 능숙하게 탈골된 손보미의 발목을 맞추었다.“선생님, 보미 언니 미끄러져 넘어졌을 뿐인데 탈골됐다는 건 어젯밤에 누가 언니를 밀어서 넘어진 것과 연관이 있나요?”배지유는 기회만 잡으면 도아린에게 덮어씌우려 했다. 의사는 어젯밤에 어느 정도 다쳤는지 알 수가 없어 이렇게 말했다.“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어요.”“오빠,
그런데 이 고질병이 배지유의 동정을 바꿨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호텔을 나올 때도 배건후에게 안겨 나왔고 병원에 온 후에도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녀와 관계라도 끊으려는 듯 문 앞에만 서 있었다.손보미가 일어서려 하자 배건후가 휠체어를 옆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를 보면서 안아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못 알아챈 건지 아니면 알고 싶지도 않은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한쪽 발만 탈골된 거라 다른 한쪽 발은 멀쩡했다. 손보미는 하는 수 없이 한 발로 서서 휠체어에 앉았다.“사실 그 디자이너...”따르릉...손보미가 언짢은 얼굴로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여보세요?”“손보미 씨, 알려드릴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맡긴 드레스 망가진 부분이 많고 같은 바다 진주도 찾기 매우 어려워요.”문나연이 차분하게 설명했다.“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안 돼요!”손보미는 다짜고짜 호통쳤다가 배건후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다시 다정한 말투로 부탁했다.“그 드레스 이미 예약한 거라 그쪽 촬영에 영향 주면 안 돼요.”“그럼 더 잘하는 수선 대가님한테 맡기실래요?”문나연이 가볍게 웃었다.“아현 씨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선한다고 해도 불가능해요. 보미 씨가 같은 품질의 바다 진주를 찾으면 모를까.”그러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손보미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무슨 일이야?”배건후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생일날에 빌린 드레스 입고 영상을 찍었는데 불꽃이 갑자기 터진 거야. 다행히 제때 피해서 다치진 않았는데 드레스가 여러 군데 구멍 났어.”그가 시선을 늘어뜨렸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망가졌으면 사면 되지.”손보미가 울면서 고개를 내저었다.“그 드레스는 어떤 미스터리한 사람의 사유품이라 얼마를 줘도 안 판대. 거금을 들여서 업계 최고 수선 대가님한테 맡겼는데 같은 재료를 찾기 어렵대.”배건후는 계속하여 라이터를 돌렸다. 손보미는 그의 표정을
배건후는 금속 라이터를 쥔 채 차갑게 물었다.“무슨 재료인데?”손보미는 가슴이 쿵쾅거렸다.‘연락하지 않겠다는 건 그냥 한 말인데 건후 씨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겠지? 우리 관계에 날 모른 척할 리가 없어.’“최고 품질의 바다 진주.”배지유는 문득 뭔가 생각했다.“그 드레스 가게에 있어요!”블랙 벨벳 드레스를 봤을 때 소매 부분에 크고 둥근 최고 품질의 바다 진주가 박혀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원래는 손보미에게 사달라고 할 생각이었으나 도아린과 불쾌한 일이 생긴 바람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손보미가 물었다.“확실해?”배지유가 대답했다.“확실해요!”손보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그 드레스 가게 디자이너가 건후 씨한테 잘 보이려고 했으니까 건후 씨 전화 한 통이면 바로 갖다 바칠 거야. 도아린, 내 앞길을 막아? 건후 씨가 내 편인 이상 아무도 날 못 건드려.’“건후 씨...”손보미가 빤히 쳐다보자 배건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처리할게.”배건후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손보미는 한시름을 놓았다.“가서 일 봐. 지유가 잠깐 있어 주면 돼. 지민이 오는 길이라고 했어.”배건후가 다시 돌아섰다.“자르지 않았어?”손보미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멋쩍게 웃었다.“지민이가 무릎 꿇고 꼭 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용서해줬어.”‘건후 씨를 빨리 보내야 해. 지민이를 만났다간 들킬지도 몰라.’“회사 일이 더 중요하지. 난 내가 알아서 잘 챙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배건후는 다른 사람이 프로젝트를 노리고 있다는 생각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럼 먼저 갈게.”배건후가 나간 후 손보미가 휴대전화를 꺼냈다.“병원비 얼마 나왔어? 이체해줄게.”“괜찮아요...”배지유의 시선이 멍하기만 했다.“그럼 200만 원 줄게. 용돈으로 써.”윙윙하는 진동에 배지유가 움찔했다.“왜 그래?”손보미가 배지유의 손을 잡았다.“손이 왜 이렇게 차?”배지유는 계좌 이체 알림인 걸 보고서야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아무것도 아니에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건 분명히 도아린과 관련이 있었고 아버지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상 도아린을 달래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재민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하지만 막 1층에 도착하자 머리 위에서 강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했을 때 넌 바로 달려가지 않았어. 이미 기회를 놓친 거야. 지금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참인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 주얼리 매장에 심각한 타격을 줄 거라고.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생각이야?”강재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는 순간적으로 욕지거리가 나갔지만 결국 방향을 바꿔 다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강재희를 지나칠 때, 차갑게 말했다.“누나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아? 내 사람한테 그럴 생각은 접어.”강재희가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정말 여자를 모르네!’한편, 도아린이 장수현을 찾아갔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드디어 절 찾아왔군요!”두 사람이 악수할 때 심지어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그가 유자차를 한 잔 내밀었지만 도아린은 차를 바라보며 손을 대지 않았다.“배 대표님이 알려주신 거예요. 아린 씨가 오면 유자차를 타 드리라고 하셨죠.”장수현은 배건후의 말을 떠올리며 덧붙였다.“따뜻한 물로 우려내고 레몬즙 두 방울 추가했어요. 한 번 맛보세요.”도아린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작은 컵이었지만 그녀는 손이 떨려 쉽게 들지 못했고 장수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손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나요?”“그런게 아니라...”말을 마친 후 도아린이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분명 그녀가 좋아하는 맛이었지만 갑자기 코끝이 시큰했다.“배 대표의 사건은요?”“그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가진 증거만으로도 배 대표님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어요.”장수현은 서랍에서 두 개의 서류봉투를 꺼냈다.“이 두 개의 문서는 도아린 씨의 협조가 필요합니다.”“저요?”도아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찻잔
다음 날, 배지유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경호원은 그녀를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의사를 이용할 방법을 생각했다.“아이고!”의사가 병실에서 나오자 그녀는 일부러 다리를 움켜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 다리가 너무 아파요! 다시 감염된 거 아닐까요? 유 쌤,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유승호가 다가가려 하자 경호원이 막아섰다.“저희 대표님 돌보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가씨는 저희가 병원에 모셔가겠습니다.”“유 쌤! 제발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배지유가 손을 뻗어 유승호의 가운을 붙잡으려 했지만 유승호는 경호원과 함께 그녀를 지나쳐 가버렸고 더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말했다.“아가씨, 저희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배지유는 악에 받쳐 어금니를 꽉 물었다.“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경호원은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로 주현정에게 보고했다.주현정이 비웃으며 말했다.“이제 그놈들도 슬슬 초조해지는군. 조급하면 조급할수록 약점을 드러내기 마련이지.”“어디 나갈 거야?”진경수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도아린을 보고 급히 다가갔다.“지우 씨의 촬영이 거의 끝나가요. 가서 봐야겠어요.”“일남이 하고 일북이 보호하고 있으니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 너도...”진경수가 그녀의 가방을 잡으며 말렸지만 도아린이 피했다.“오빠, 이렇게 날 집에 가둬놓는 건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들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는 거야.”“가둬놓다니...”진경수가 눈을 피하며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인간성이 없어! 위험한 일은 우리가 할 테니, 너는 그냥 부모님 곁에서 안전하게 있어 주면 안 되겠어?”“오빠, 솔직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진씨 가문의 사업에는 영향이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오빠나 큰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예요.”도아린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배 대표가 사
주현정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무표정한 얼굴로 딸의 연기를 지켜보았다.배지유는 몇 번 울먹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을 남궁유민에게 떠넘기려고 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강요한 것이었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오빠가 남궁 변호사한테 내 교통사고 소송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 변호사가, 글쎄, 나한테 오히려 오빠를 모함하라고 했어요.”“나는 오빠가 얼마나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인지 잘 알거든요. 오빠가 절대 회사 자금을 횡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겉으로는 남궁유민의 협박에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오빠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길 바랐어요! 오빠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주현정은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딸이 이렇게 교활하고 악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이렇게 고상한 이유로 정당화하려는 모습에 실망감이 몰려왔다.배지유는 눈물이 나지 않자 점점 더 통곡하며 눈물 연기를 했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눈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내가 처음에 약을 바꾼 것도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거예요. 엄마 목숨을 위협하려던 게 아니라 엄마가 좀 더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다고요!”“게다가 내가 왜 오빠를 해치려 하겠어요? 난 미끼로 자처해서 남궁유민 그 배신자를 까발리려고 그랬던 거예요!”“엄마!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두 분이 이혼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계속 같이 살았을 거고 아빠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나도 남궁유민에게 협박당하지 않았을 거고,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회사 일을 아빠가 처리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내 말이 틀렸어요?”주현정은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딸에게 짜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남궁유민이 널 협박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무슨 수로 널 협박할 수 있겠어?”“그게...”배지유는 급하게 머리를 굴리며 고개를 숙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 몰랐다.잠시 고민하던 배지유는 사실대로 말
“누구...?”“너무 팬이에요! 저 ‘화성의 별빛’이에요!”“아, 안녕하세요!”도지현은 그녀를 바로 기억해 냈다.이 팬은 그가 방송을 시작한 날부터 채팅방에 있었고 팬 단톡방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이었다.도지현의 스태프가 그녀에게 팬카페 관리자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대신, 팬으로 남아 계속 응원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예의상 가볍게 악수를 나눴고 전미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기... 부탁드릴 게 있는데, 저분한테 잘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보험사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수리비는 제가 전액 부담할게요.”도지현은 강재민을 바라보며 말했다.“형...”강재민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그냥 가세요. 괜찮습니다. 너도 얼른 차 타.”“정말 고맙습니다!”전미나는 연신 인사를 하며 빠르게 자신의 차로 돌아갔고 강재민은 명함을 휙 차 안으로 던지고 시동을 걸었다.명함이 미끄러져 내려가 도지현의 발밑에 떨어졌다.“전미나?”‘티파니 주얼리의 수석 디자이너... 거긴 진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보석 브랜드잖아?’도지현은 누나가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를 떠올리며 강재민에게 물었다.“형, 이 명함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저 팬분인데, 팬카페 관리자로 모시고 싶어서요.”“가져가.”강재민은 애초에 전미나에게 차 수리비를 받을 생각이 없었고 단지 티파니 주얼리의 꼬투리를 잡고 싶었을 뿐이였다.그는 도지현을 집 앞에 내려준 후, 바로 차를 수리하러 갔다.도지현은 도아린의 부탁대로 그날 사고 이후 모건 그룹의 동향과 배건후의 근황을 검색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그날 사고 이후, 주현정은 모건 그룹의 고위 부사장을 지명해 그룹 운영을 대리하게 했다.한편, 배건후가 입원한 사립 병원은 철저한 경비 속에 통제되고 있었고 경호원들이 출입을 관리하고 있어 의료진 외에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뿐만 아니라, 그의
“누나, 어디 불편한 데 없어?”“손이 아직 불편하고 가끔 머리가 어지러운 것 빼고는 괜찮아.”도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동생이 이렇게 강한데 누나가 이런 일로 무너지면 창피하지 않겠어?”“그래도 상황 봐가면서 해야지! 누나가 다치면 나는 더 이상 의지할 사람도 없다고!”“이번엔 지현이 말이 맞아요.”강재민이 두 사람에게 물을 따라주며 도아린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런 일이 있었으면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요? 만약에...”그는 말을 삼키며 씁쓸하게 웃었다.만약 그녀가 먼저 연락했더라면 그는 최대한 그녀가 그 사람들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고 아마 그 차 사고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한 후, 진씨 가문은 외부인의 병문안을 철저히 차단하며 그녀를 완벽하게 보호했다.강재민은 진수혁과의 친분 덕분에 그가 있을 때 잠깐 들어와 도아린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다.혼수 상태였던 도아린은 계속 배건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배건후가 그녀를 구한 일만으로 그의 모든 잘못이 사라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쉽게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원래부터 미묘하고 어색했던 강재민과 도아린의 관계는 이제 배건후까지 다시 끼어들면서 더욱 복잡해졌다.“지현아, 네 핸드폰 좀 써도 될까?”도아린이 손을 내밀자, 도지현은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누나, 내가 새 핸드폰 사줄까? 이제 방송해서 돈도 버는데!”“누나도 핸드폰은 있어.”도아린은 단지 남동생의 핸드폰도 집에서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진수혁이 새 핸드폰을 사주긴 했지이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사용 시간을 제한해 놓았다.밤중에 몰래 핸드폰을 켜봤지만 항상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았다.반면, 도지현의 핸드폰은 인터넷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사용은 가능했다.이는 집 인터넷의 제한 속도 때문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차단기를 작동시켰을 가능성도 있었다.“계정이 뭐야? 나중에 방송 챙겨볼게.”도아린이
“그리고 나서...”윤명희는 말하다가 진범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하는 걸 허락했다.“그리고 나서 건후는 수술실로 들어갔어.”윤명희는 이런 말을 전하기가 어려운 듯했다.그녀와 도아린은 재회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그녀는 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마음은 분명 요동치고 있을 것이었다.“아린아...”윤명희는 딸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반응을 세심히 살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그럼 아직 중환자실에 있는 거예요? 아직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아니,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어. 현정 씨가 건후를 연성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거든.”윤명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좀 더 회복되면 엄마랑 같이 건후 보러 가자.”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윤명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배건후가 정말 그녀보다 심하게 다쳤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국내 최고 의료 시설을 갖춘 해남 병원을 두고 굳이 그를 연성시에 있는 병원으로 옮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계속 추궁해 봤자 거짓말만 늘어날 뿐이었으니 도아린은 일찍 퇴원 해서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은 계속 번갈아 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겉으로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외부와 연락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도지현이 찾아왔다.그동안의 훈련과 적응 끝에 그는 드디어 의족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도지현은 라이브 방송 계정을 개설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고 팬들에게 자신의 의족을 보여주었다.그러면서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한테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
“오빠, 제 휴대폰 어디갔는지 알아요?”“너 휴대폰 고장 났더라고. 내일 새로 바꿔 줄게.”진수혁은 다시 소파로 돌아가 업무를 이어갔다.도아린은 심심해서 소파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는 세탁된 옷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진수혁은 도아린의 병실에 머물며 그녀 곁만 지키고 있었다.“오빠, 저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쉬어요.”도아린이 말했다.“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저를 건드리진 않을 거니까요.”“그럴 가능성이 작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야.”진수혁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는데 손가락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휴식뿐이야. 몸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사흘 후, 도아린은 바닥에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오빠, 저 건후 씨 보러 가고 싶어요. 과거 일은 제쳐둔다고 해도 이번에는 건후 씨가 절 구해준 거잖아요.”“건후 씨는 이 병원에 없어.”진수혁은 도시락을 열고는 그녀에게 숟가락을 건넸다.도아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제 기억엔 건후 씨도 손과 다리가 골절됐고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기로 교통 사고는 겉으로 보면 얼마 안 다친 것 같지만 심하게 다친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진수혁은 부주의로 숟가락을 바닥에 떨구고 몸을 숙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이거 씻고 올게.”병실 안에도 세면대가 있었지만 진수혁은 굳이 숟가락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도아린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설마, 내 말이 맞았던 걸까?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걸까?’그녀는 당시 배건후의 상태를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사고 이후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알 수 없었다.‘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면 혹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건가?’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윤명희와 진범준이 들어왔다.“퇴원 준비 끝냈어. 밥을 다 먹으면 바로 퇴원하자.”윤명희는 남편을 힐끗 본 후 도아린에게 말했다.“아린
“너 쉬어야 해.”역시 진수혁은 도아린이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요.”도아린은 변슬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러자 변슬기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슬기 씨랑 여자끼리 할 얘기가 좀 있어요.”진수혁은 변슬기의 수줍은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힐끗 쳐다봤다.“도 선생님을 오래 방해하지는 않을게요.”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오래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아린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수혁의 반응을 살폈다.“그럼 잠깐만 허락해줄게.”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병실을 나갔다.“도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변슬기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도아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꿈을 꿀 때마다 자신이 더러운 수술대에 눕혀져 있는 장면이 떠올랐고 깨어 있는 상태인데도 장기를 이식하겠다고 날카로운 수술칼을 들이대는 장면도 아주 소름 끼쳤다.그런 꿈을 꿀 때마다 도아린이 하늘에서 내려와 천사처럼 그녀를 구해 주었다.‘빨리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요!’그렇게 매번 변슬기는 도아린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정작 도아린은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변슬기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혹시라도 그 꿈이 현실로 될까 봐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자기를 구해준 대가로 도아린이 나쁜 놈들에게 희생될까 봐 말이다.“울지 마요.”도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변슬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도 선생님,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안민아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도 선생님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텐데...”“피해자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안민아가
진수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수술 때문에 다 잘라 버렸어. 금방 자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면 비서한테 가발이라도 사 오라고 할까?”‘그래서 지금 내가 대머리라고?’손을 들어 가까스로 머리를 만져보자 얇은 망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걸 보면 부상이 꽤 심했던 게 분명했다.후유증만 남지 않는다면 머리카락 정도야 대수롭지 않았다.“건후 씨는... 괜찮아요?”그녀는 배건후가 차에서 굴러떨어지고도 절뚝이며 달려오던 모습으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 도움을 요청하던 것까지, 그리고 구급차 안에서 했던 말마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후로부터는 의식이 흐릿했지만 눈을 뜰 때마다 그가 곁에 있는 걸 볼 수 있었다.배건후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버텨야 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진수혁은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일 끝나면 가발 하나 사 와.”그는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번만 보고 바로 나갈게!”강재민이 진수혁의 제지를 뿌리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도아린이 깨어나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아린 씨, 깨어났어요?”그를 막지 못한 진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린이는 휴식이 필요해. 그러니까 용건만 말해.”“나도 알아.”강재민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도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절... 알아볼 수 있겠어요?”강재민은 순간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당연히 알죠.”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재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 문가에 서 있는 진수혁을 바라보았다.“나 아린 씨랑 단둘이 몇 마디만 하면 안 돼?”“안 돼.”진수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방금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