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허리를 곧게 펴고 이마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보았다.배건후의 어두운 시선이 도아린에게서 대시보드 위의 휴대전화로 향했다.영상통화를 켜고 있었는데 화면에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펜을 잡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장수현과 태연한 모습의 남궁유민이었다.도아린이 시작해도 된다는 소리에 장수현은 다급하게 원고지를 들었고 휴대전화에 남궁유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건후 씨, 도아린 씨와 이혼 및 4천억에 관한 부속 합의서를 작성하실 의향 있으십니까?”배건후는 대답하지 않고 도아린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지난번에 내 뜻대로 해주겠다고 하더니 약속 지키지 않아서 믿음이 안 가서요.”도아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서 이번에는 양측 변호사가 보는 앞에서 하려고요. 모건 그룹의 대표인데 설마 약속을 어기진 않겠죠?”배건후의 시선이 다시 휴대전화로 향했다.“의향 있어요.”도아린이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차에 타기 전 그녀는 두 변호사에게 상황을 알려줬다. 남궁유민이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말했다.“도아린 씨는 잠시 이혼을 꺼내지 않고 배건후 씨와 주현정 여사의 앞에서 사랑하는 부부인 척 연기를 한다. 주현정 여사가 두 사람의 이혼을 받아들이거나 배건후 씨가 먼저 이혼을 요구할 경우 도아린 씨는 900억 원의 빚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배건후 씨는 도아린 씨에게 보상으로 현금 4천억 원을 준다.”배건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핸들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등의 핏줄이 다 튀어나왔다.차 안이 하도 조용해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장수현은 화면만 봐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져 테이블 밑의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속으로는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회의 쓴맛을 본 후에는 권력 앞에 허리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도아린의 변호사가 되는 건 엄청난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소송에서 지면 고객에게 미안하고 이기면 배건후가 절대 그를
“도아린!”배건후는 그녀의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꽉 잡았다. 도아린은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못하겠어요? 그럼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네요?”도아린은 그의 분노한 두 눈을 대담하게 쳐다보았다. 배건후가 속으로 생각했다.‘너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잘생긴 얼굴에 냉기가 한층 씌워진 듯했고 눈빛도 칼처럼 날카로워 도아린의 몸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두 변호사가 보는 앞이라 배건후가 함부로 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도아린은 허리를 곧게 펴고 아래턱을 든 채 도발했다.1초, 2초...“그래.”배건후가 이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도아린이 남궁유민을 쳐다보았다. 줄곧 차분하던 그의 표정이 드디어 살짝 다급해지기 시작했다.남궁유민은 목을 어루만지다가 건반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때 도아린은 남궁유민의 셔츠 옷깃 부분에 진한 흔적이 있는 걸 발견했다.배건후가 먼저 문자를 받았고 곧이어 도아린도 받았다. 그녀는 남궁유민의 사생활에 딱히 관심 없었기에 통쾌하게 사인을 마친 후 보냈다. 혹시라도 배건후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공증 비용은 더치페이로 하죠. 건후 씨가 남궁 변호사님한테, 난 장 변호사님한테 주고.”그러고는 영상통화를 끊어버렸다.남궁유민의 비용이 여간 비싼 게 아니었다.주현정이 예약한 식당은 커플 레스토랑이었다. 불빛이 어두워서 분위기가 더 있어 보였고 구석에서는 따뜻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테이블마다 병풍으로 가리고 있어 프라이버시도 지켜주었다.도아린 앞에 들어간 커플은 서로 깍지를 끼고 있었고 자리를 기다릴 때도 아무도 없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키스하곤 했다.“...”도아린은 민망한 나머지 다급히 고개를 숙여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배건후는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아니면 눈이 먼 건지 줄곧 도도하고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어 전혀 데이트하러 온 것 같지 않았고 되레 상대 회사를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를 내뿜었다.“키스까지 안 해도 돼. 찍으라는 말이 없었어.”괘씸한 목소리가 도아린
그의 이상한 두뇌 회전에 도아린은 분노가 갑자기 끓어올랐다.“누군 이 집 사모님이 되고 싶어서 된 줄 알아요?”결혼해서 지금까지 배건후는 그녀를 사모님이라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곧 이혼하게 생긴 지금 가끔 부르곤 했다.마치 날카로운 무언가로 유리를 긁는 것처럼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배건후는 라이터를 꺼내 손가락으로 돌렸다. 맨 밑바닥의 글씨가 닳아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우리 집 사모님이 싫으면... 육씨 가문 사모님은 좋아?”‘이게 육민재랑 무슨 상관이야?’도아린은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때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배건후 씨, 쓸데없는 소리 자꾸 하지 말고 중점만 말해요.”“넌 보미 얘기 꺼내도 되고 난 민재 얘기 꺼내면 안 돼?”“같은 일이에요, 그게?”도아린이 싸늘하게 웃었다. 배건후는 라이터를 내려다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결국 화를 참지 못한 도아린이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확 내려놓았다.“손보미 씨한테 돈을 쓸 땐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고 사달라는 거 다 사줬잖아요. 게다가 카드까지 줬고. 건후 씨가 보미 씨 먹여 살리고 보미 씨는 또 다른 사람 먹여 살리고. 정말 대박이에요.”배건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무슨 헛소리야, 그게?”“아이가 태어난 다음에 유전자검사 해서 누구 아이인지 확인하는 게 좋을 겁니다.”배건후는 도아린의 어깨를 잡고 붉으락푸르락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비웃었다.“이 머리로는 재벌 사모님이 될 자격이 없긴 해.”“나쁜...”놈이라는 말을 채 하기 전에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도아린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준비한 메뉴들이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동안 도아린은 항상 배건후의 입맛만 신경 쓰느라 자극적인 맛들이 어떤 맛이었는지조차 거의 까먹은 것 같았다.‘맛있는 음식을 봐서 일단 따지지 않겠어.’도아린이 젓가락을 들자마자 배건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몸을 돌려서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손보미의 전화일 거란 생각에 코
“나랑 같이 둘러볼래?”육민재의 목소리에 친화력이 있는지 이상하게도 거절하기 어려웠다.배건후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라디오에서 몇 시간 내로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얘기가 나왔다.도아린이 반팔 원피스만 입었다는 생각에 배건후는 다시 시동을 껐다. 지금 도우미더러 옷을 가져오라고 하면 도아린이 홧김에 가버릴 수 있으니까 늦을 것 같았다.마침 트렁크에 그가 금방 드라이를 맡긴 겉옷이 있었다.도아린은 육민재와 함께 지사 인테리어를 둘러보았고 설계 이념도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아이디어를 부탁하기도 했다.육민재가 그녀를 두 번이나 불러서야 도아린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어젯밤 일이 신경 쓰여?”어제 배건후는 그녀를 탓하지도, 도와주지도 않았다.나영옥이 도아린을 감싸주긴 했지만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이 무조건 있을 것이다.도아린이 살짝 멈칫했다. 그 일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게 아니라 손보미가 그 일로 배건후에게 하소연할 거란 생각에 짜증이 났던 것이었다.“괜찮아요, 난.”도아린이 히죽 웃어 보였다.그동안 그녀는 성격을 죽이고 다정하고 고분고분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그 변화는 배건후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되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말았다.어떻게 하든 다 욕을 먹을 바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나았다.어젯밤 아픈 건 손보미였고 옆에서 도와주는 배지유도 때렸다. 혼자서 둘을 상대하니 너무나도 통쾌했다. 그리고 배건후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녀와는 상관이 없었다.육민재는 속상함이 사라진 도아린의 얼굴을 보고는 휴대전화를 꺼냈다.“어제 그 자리에 CCTV가 진짜 없었어. 근데 한 일꾼이 와이프한테 바람피웠다고 오해받아서 일하는 영상을 찍은 게 있더라고.”육민재는 휴대전화를 도아린에게 건넸다. 영상을 클릭하자마자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봐봐, 일하고 있잖아...”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가짜 산이 나타났다.“여기 봐봐. 저 분수도 내가 만든 거야...”돌리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 마침 손보미가 도아린
“얘가 따라준 차를 마시면 대가 치러야 해.”도아린이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자 배건후의 차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손보미 찾으러 간 거 아니었어?’도아린은 그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배건후가 그 뒷말을 하게 해선 안 되었다.“배건후 씨!”도아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배건후의 팔짱을 잡아당기면서 나가려 했다. 그런데 하도 당황한 바람에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배건후의 품에 와락 안기고 말았다.배건후는 그녀를 잡지 않고 그저 싸늘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도아린은 그의 허리춤을 잡고 올려다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말하지 말아요.”배건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지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민재가 네가 한 짓을 알까 봐? 그 비열한 수단을 알고 네가 역겹다고 생각할까 봐?”도아린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데 배건후는 육민재의 마음속 도아린의 완벽한 이미지가 망가질까 봐 겁을 먹은 거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배건후의 팔을 잡고 화제를 돌렸다.“보미 씨 괜찮아졌어요?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요?”“내가 여기 있어서 거슬려?”배건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걸 보고 도아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육민재만 만나면 배건후는 생각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끼어든 건 나죠. 친구끼리 얘기해요.”도아린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고는 육민재에게 말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 그 일은 고마웠어요. 다음에 밥 한 번 살게요.”육민재가 증거를 찾아줘서 고맙단 뜻이었다. 육민재는 도아린의 말대로 배건후에게 영상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으로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그런데 배건후의 눈에는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것으로 보였다.그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도아린은 배건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배건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이 한마디를 남기고 배건후도 그녀를 따라나섰다.호텔 문 앞, 그는 도아린과 한마디도 섞지 않고 차를 몰고 가버렸다....배지유는 배건후
손보미는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배지유의 등을 토닥였다.“울지 마, 울지 마. 호텔에서 묵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길에서 나쁜 사람 만나면 어쩔 뻔했어.”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방안을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화장실로 향했을 때 배지유는 움찔하면서 손보미의 손을 꽉 잡았다. 정리를 마치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었다.“건후 씨, 나 먼저 화장실 써도 될까? 급하게 오느라 약을 바르지 못했어.”손보미가 심장 쪽에 손을 올려놓았다. 옷을 벗어야만 약을 바를 수 있었다.배건후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옆에 기댔다.“먼저 들어가, 그럼.”아무리 경험이 많은 손보미라도 화장실의 전리품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배지유가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한 게 맞는지 의심마저 들었다.‘어젯밤에 호스트가 한 명만 있었던 거 맞아? 휴지랑 콘돔은 변기로 내려보낸다고 해도 포장 박스는 어떡하지?’거울에도 흔적을 남겼었는지 배지유가 말끔하게 닦았다. 재벌 집 아가씨가 샤워하지도 않고 잠을 잔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거울에 물기가 없어서 오히려 더 이상했다.손보미는 더는 방법이 없어 휴지를 변기에 내려보낸 후 문을 열었다.“으악!”“보미 언니...”배지유가 황급히 달려왔다. 손보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오른쪽 발이 이상한 각도로 틀어져 있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배건후를 쳐다보았다.“건후 씨, 발 너무 아파.”배건후는 담배를 끄고 손보미를 들어 올렸다.“물건 챙겨.”이 말은 배지유에게 한 말이었다. 배지유는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속으로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그녀와 손보미의 가방을 챙기고 문을 닫았다....도아린이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황급하게 나가는 소유정을 만났다.“어디 가?”“잘됐다. 나 좀 데려다줘. 한 친구가 손보미에 관한 흑역사를 찾았대.”도아린이 한숨을 내쉬었다.“손보미 좀 그만 내버려 둬. 그러다가 또 되레 모함당하면 어쩌려고.”소유정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까발리진 않더라고 갖고는 있어야지.
맨 앞에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가녀린 여자를 안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목을 감싸 안고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발을 삐끗했는지 이상한 각도로 휘어있었다.소유정은 도아린이 화들짝 놀라자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나쁜 X끼, 가서 저 자식 머리라도 쥐어뜯어야겠어!”유진혁은 재빨리 휴대전화를 들고 찍기 시작했다.“대박, 엊저녁에 뜨밤 보낸 거로도 부족해서 대낮에도? 어찌나 많이 했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해?”두 사람이 양쪽으로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혹시라도 소유정이 괴롭힘당할까 봐 유진혁은 다 찍을 생각이었다.지난번에 일이 생겨서 오지 못한 바람에 소유정이 다쳐서 병원에 갔었던 것만 생각하면 너무도 미안했다.딸깍.차 문이 잠겼다. 소유정이 아무리 차 문을 열어도 열리지 않자 다급하게 말했다.“아린아, 배건후가 손보미 저년이랑 저러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3대 3이에요. 싸우면 누가 이길지 몰라요.”유진혁이 당장이라도 달려들려고 하자 소유정이 눈을 희번덕거렸다.“배건후 혼자서도 우리 셋을 해결할 수 있어.”“누구? 누구라고?”유진혁은 하마터면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배건후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하지 않아도 말로 충분히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도아린은 점점 다가오는 세 사람을 보며 눈빛이 싸늘해졌다. 세 사람이 차 쪽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다른 차 뒤로 사라졌다.잠시 후 은색 마이바흐가 도아린의 차 앞으로 휙 지나갔다.“내가 알아서 할게.”소유정이 또다시 그녀 때문에 경찰서에 가게 해선 안 되었다....병원.의사는 아주 능숙하게 탈골된 손보미의 발목을 맞추었다.“선생님, 보미 언니 미끄러져 넘어졌을 뿐인데 탈골됐다는 건 어젯밤에 누가 언니를 밀어서 넘어진 것과 연관이 있나요?”배지유는 기회만 잡으면 도아린에게 덮어씌우려 했다. 의사는 어젯밤에 어느 정도 다쳤는지 알 수가 없어 이렇게 말했다.“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어요.”“오빠,
그런데 이 고질병이 배지유의 동정을 바꿨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호텔을 나올 때도 배건후에게 안겨 나왔고 병원에 온 후에도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녀와 관계라도 끊으려는 듯 문 앞에만 서 있었다.손보미가 일어서려 하자 배건후가 휠체어를 옆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를 보면서 안아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못 알아챈 건지 아니면 알고 싶지도 않은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한쪽 발만 탈골된 거라 다른 한쪽 발은 멀쩡했다. 손보미는 하는 수 없이 한 발로 서서 휠체어에 앉았다.“사실 그 디자이너...”따르릉...손보미가 언짢은 얼굴로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여보세요?”“손보미 씨, 알려드릴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맡긴 드레스 망가진 부분이 많고 같은 바다 진주도 찾기 매우 어려워요.”문나연이 차분하게 설명했다.“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안 돼요!”손보미는 다짜고짜 호통쳤다가 배건후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다시 다정한 말투로 부탁했다.“그 드레스 이미 예약한 거라 그쪽 촬영에 영향 주면 안 돼요.”“그럼 더 잘하는 수선 대가님한테 맡기실래요?”문나연이 가볍게 웃었다.“아현 씨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선한다고 해도 불가능해요. 보미 씨가 같은 품질의 바다 진주를 찾으면 모를까.”그러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손보미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무슨 일이야?”배건후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생일날에 빌린 드레스 입고 영상을 찍었는데 불꽃이 갑자기 터진 거야. 다행히 제때 피해서 다치진 않았는데 드레스가 여러 군데 구멍 났어.”그가 시선을 늘어뜨렸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망가졌으면 사면 되지.”손보미가 울면서 고개를 내저었다.“그 드레스는 어떤 미스터리한 사람의 사유품이라 얼마를 줘도 안 판대. 거금을 들여서 업계 최고 수선 대가님한테 맡겼는데 같은 재료를 찾기 어렵대.”배건후는 계속하여 라이터를 돌렸다. 손보미는 그의 표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