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허리를 곧게 펴고 이마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보았다.배건후의 어두운 시선이 도아린에게서 대시보드 위의 휴대전화로 향했다.영상통화를 켜고 있었는데 화면에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펜을 잡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장수현과 태연한 모습의 남궁유민이었다.도아린이 시작해도 된다는 소리에 장수현은 다급하게 원고지를 들었고 휴대전화에 남궁유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건후 씨, 도아린 씨와 이혼 및 4천억에 관한 부속 합의서를 작성하실 의향 있으십니까?”배건후는 대답하지 않고 도아린을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지난번에 내 뜻대로 해주겠다고 하더니 약속 지키지 않아서 믿음이 안 가서요.”도아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서 이번에는 양측 변호사가 보는 앞에서 하려고요. 모건 그룹의 대표인데 설마 약속을 어기진 않겠죠?”배건후의 시선이 다시 휴대전화로 향했다.“의향 있어요.”도아린이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차에 타기 전 그녀는 두 변호사에게 상황을 알려줬다. 남궁유민이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말했다.“도아린 씨는 잠시 이혼을 꺼내지 않고 배건후 씨와 주현정 여사의 앞에서 사랑하는 부부인 척 연기를 한다. 주현정 여사가 두 사람의 이혼을 받아들이거나 배건후 씨가 먼저 이혼을 요구할 경우 도아린 씨는 900억 원의 빚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배건후 씨는 도아린 씨에게 보상으로 현금 4천억 원을 준다.”배건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핸들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등의 핏줄이 다 튀어나왔다.차 안이 하도 조용해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장수현은 화면만 봐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져 테이블 밑의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속으로는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회의 쓴맛을 본 후에는 권력 앞에 허리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도아린의 변호사가 되는 건 엄청난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소송에서 지면 고객에게 미안하고 이기면 배건후가 절대 그를
“도아린!”배건후는 그녀의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꽉 잡았다. 도아린은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못하겠어요? 그럼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네요?”도아린은 그의 분노한 두 눈을 대담하게 쳐다보았다. 배건후가 속으로 생각했다.‘너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잘생긴 얼굴에 냉기가 한층 씌워진 듯했고 눈빛도 칼처럼 날카로워 도아린의 몸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두 변호사가 보는 앞이라 배건후가 함부로 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도아린은 허리를 곧게 펴고 아래턱을 든 채 도발했다.1초, 2초...“그래.”배건후가 이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도아린이 남궁유민을 쳐다보았다. 줄곧 차분하던 그의 표정이 드디어 살짝 다급해지기 시작했다.남궁유민은 목을 어루만지다가 건반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때 도아린은 남궁유민의 셔츠 옷깃 부분에 진한 흔적이 있는 걸 발견했다.배건후가 먼저 문자를 받았고 곧이어 도아린도 받았다. 그녀는 남궁유민의 사생활에 딱히 관심 없었기에 통쾌하게 사인을 마친 후 보냈다. 혹시라도 배건후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공증 비용은 더치페이로 하죠. 건후 씨가 남궁 변호사님한테, 난 장 변호사님한테 주고.”그러고는 영상통화를 끊어버렸다.남궁유민의 비용이 여간 비싼 게 아니었다.주현정이 예약한 식당은 커플 레스토랑이었다. 불빛이 어두워서 분위기가 더 있어 보였고 구석에서는 따뜻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테이블마다 병풍으로 가리고 있어 프라이버시도 지켜주었다.도아린 앞에 들어간 커플은 서로 깍지를 끼고 있었고 자리를 기다릴 때도 아무도 없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키스하곤 했다.“...”도아린은 민망한 나머지 다급히 고개를 숙여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배건후는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아니면 눈이 먼 건지 줄곧 도도하고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어 전혀 데이트하러 온 것 같지 않았고 되레 상대 회사를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를 내뿜었다.“키스까지 안 해도 돼. 찍으라는 말이 없었어.”괘씸한 목소리가 도아린
그의 이상한 두뇌 회전에 도아린은 분노가 갑자기 끓어올랐다.“누군 이 집 사모님이 되고 싶어서 된 줄 알아요?”결혼해서 지금까지 배건후는 그녀를 사모님이라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곧 이혼하게 생긴 지금 가끔 부르곤 했다.마치 날카로운 무언가로 유리를 긁는 것처럼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배건후는 라이터를 꺼내 손가락으로 돌렸다. 맨 밑바닥의 글씨가 닳아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우리 집 사모님이 싫으면... 육씨 가문 사모님은 좋아?”‘이게 육민재랑 무슨 상관이야?’도아린은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때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배건후 씨, 쓸데없는 소리 자꾸 하지 말고 중점만 말해요.”“넌 보미 얘기 꺼내도 되고 난 민재 얘기 꺼내면 안 돼?”“같은 일이에요, 그게?”도아린이 싸늘하게 웃었다. 배건후는 라이터를 내려다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결국 화를 참지 못한 도아린이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확 내려놓았다.“손보미 씨한테 돈을 쓸 땐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고 사달라는 거 다 사줬잖아요. 게다가 카드까지 줬고. 건후 씨가 보미 씨 먹여 살리고 보미 씨는 또 다른 사람 먹여 살리고. 정말 대박이에요.”배건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무슨 헛소리야, 그게?”“아이가 태어난 다음에 유전자검사 해서 누구 아이인지 확인하는 게 좋을 겁니다.”배건후는 도아린의 어깨를 잡고 붉으락푸르락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비웃었다.“이 머리로는 재벌 사모님이 될 자격이 없긴 해.”“나쁜...”놈이라는 말을 채 하기 전에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도아린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준비한 메뉴들이 전부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동안 도아린은 항상 배건후의 입맛만 신경 쓰느라 자극적인 맛들이 어떤 맛이었는지조차 거의 까먹은 것 같았다.‘맛있는 음식을 봐서 일단 따지지 않겠어.’도아린이 젓가락을 들자마자 배건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몸을 돌려서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손보미의 전화일 거란 생각에 코
“나랑 같이 둘러볼래?”육민재의 목소리에 친화력이 있는지 이상하게도 거절하기 어려웠다.배건후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라디오에서 몇 시간 내로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얘기가 나왔다.도아린이 반팔 원피스만 입었다는 생각에 배건후는 다시 시동을 껐다. 지금 도우미더러 옷을 가져오라고 하면 도아린이 홧김에 가버릴 수 있으니까 늦을 것 같았다.마침 트렁크에 그가 금방 드라이를 맡긴 겉옷이 있었다.도아린은 육민재와 함께 지사 인테리어를 둘러보았고 설계 이념도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아이디어를 부탁하기도 했다.육민재가 그녀를 두 번이나 불러서야 도아린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어젯밤 일이 신경 쓰여?”어제 배건후는 그녀를 탓하지도, 도와주지도 않았다.나영옥이 도아린을 감싸주긴 했지만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이 무조건 있을 것이다.도아린이 살짝 멈칫했다. 그 일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게 아니라 손보미가 그 일로 배건후에게 하소연할 거란 생각에 짜증이 났던 것이었다.“괜찮아요, 난.”도아린이 히죽 웃어 보였다.그동안 그녀는 성격을 죽이고 다정하고 고분고분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그 변화는 배건후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되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말았다.어떻게 하든 다 욕을 먹을 바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나았다.어젯밤 아픈 건 손보미였고 옆에서 도와주는 배지유도 때렸다. 혼자서 둘을 상대하니 너무나도 통쾌했다. 그리고 배건후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녀와는 상관이 없었다.육민재는 속상함이 사라진 도아린의 얼굴을 보고는 휴대전화를 꺼냈다.“어제 그 자리에 CCTV가 진짜 없었어. 근데 한 일꾼이 와이프한테 바람피웠다고 오해받아서 일하는 영상을 찍은 게 있더라고.”육민재는 휴대전화를 도아린에게 건넸다. 영상을 클릭하자마자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봐봐, 일하고 있잖아...”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가짜 산이 나타났다.“여기 봐봐. 저 분수도 내가 만든 거야...”돌리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 마침 손보미가 도아린
“얘가 따라준 차를 마시면 대가 치러야 해.”도아린이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자 배건후의 차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손보미 찾으러 간 거 아니었어?’도아린은 그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배건후가 그 뒷말을 하게 해선 안 되었다.“배건후 씨!”도아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배건후의 팔짱을 잡아당기면서 나가려 했다. 그런데 하도 당황한 바람에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배건후의 품에 와락 안기고 말았다.배건후는 그녀를 잡지 않고 그저 싸늘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도아린은 그의 허리춤을 잡고 올려다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말하지 말아요.”배건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지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민재가 네가 한 짓을 알까 봐? 그 비열한 수단을 알고 네가 역겹다고 생각할까 봐?”도아린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데 배건후는 육민재의 마음속 도아린의 완벽한 이미지가 망가질까 봐 겁을 먹은 거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배건후의 팔을 잡고 화제를 돌렸다.“보미 씨 괜찮아졌어요?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요?”“내가 여기 있어서 거슬려?”배건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걸 보고 도아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육민재만 만나면 배건후는 생각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끼어든 건 나죠. 친구끼리 얘기해요.”도아린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고는 육민재에게 말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 그 일은 고마웠어요. 다음에 밥 한 번 살게요.”육민재가 증거를 찾아줘서 고맙단 뜻이었다. 육민재는 도아린의 말대로 배건후에게 영상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으로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그런데 배건후의 눈에는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것으로 보였다.그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도아린은 배건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배건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이 한마디를 남기고 배건후도 그녀를 따라나섰다.호텔 문 앞, 그는 도아린과 한마디도 섞지 않고 차를 몰고 가버렸다....배지유는 배건후
손보미는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배지유의 등을 토닥였다.“울지 마, 울지 마. 호텔에서 묵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길에서 나쁜 사람 만나면 어쩔 뻔했어.”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방안을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화장실로 향했을 때 배지유는 움찔하면서 손보미의 손을 꽉 잡았다. 정리를 마치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었다.“건후 씨, 나 먼저 화장실 써도 될까? 급하게 오느라 약을 바르지 못했어.”손보미가 심장 쪽에 손을 올려놓았다. 옷을 벗어야만 약을 바를 수 있었다.배건후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옆에 기댔다.“먼저 들어가, 그럼.”아무리 경험이 많은 손보미라도 화장실의 전리품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배지유가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한 게 맞는지 의심마저 들었다.‘어젯밤에 호스트가 한 명만 있었던 거 맞아? 휴지랑 콘돔은 변기로 내려보낸다고 해도 포장 박스는 어떡하지?’거울에도 흔적을 남겼었는지 배지유가 말끔하게 닦았다. 재벌 집 아가씨가 샤워하지도 않고 잠을 잔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거울에 물기가 없어서 오히려 더 이상했다.손보미는 더는 방법이 없어 휴지를 변기에 내려보낸 후 문을 열었다.“으악!”“보미 언니...”배지유가 황급히 달려왔다. 손보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오른쪽 발이 이상한 각도로 틀어져 있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배건후를 쳐다보았다.“건후 씨, 발 너무 아파.”배건후는 담배를 끄고 손보미를 들어 올렸다.“물건 챙겨.”이 말은 배지유에게 한 말이었다. 배지유는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속으로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그녀와 손보미의 가방을 챙기고 문을 닫았다....도아린이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황급하게 나가는 소유정을 만났다.“어디 가?”“잘됐다. 나 좀 데려다줘. 한 친구가 손보미에 관한 흑역사를 찾았대.”도아린이 한숨을 내쉬었다.“손보미 좀 그만 내버려 둬. 그러다가 또 되레 모함당하면 어쩌려고.”소유정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까발리진 않더라고 갖고는 있어야지.
맨 앞에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가녀린 여자를 안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목을 감싸 안고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발을 삐끗했는지 이상한 각도로 휘어있었다.소유정은 도아린이 화들짝 놀라자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나쁜 X끼, 가서 저 자식 머리라도 쥐어뜯어야겠어!”유진혁은 재빨리 휴대전화를 들고 찍기 시작했다.“대박, 엊저녁에 뜨밤 보낸 거로도 부족해서 대낮에도? 어찌나 많이 했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해?”두 사람이 양쪽으로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혹시라도 소유정이 괴롭힘당할까 봐 유진혁은 다 찍을 생각이었다.지난번에 일이 생겨서 오지 못한 바람에 소유정이 다쳐서 병원에 갔었던 것만 생각하면 너무도 미안했다.딸깍.차 문이 잠겼다. 소유정이 아무리 차 문을 열어도 열리지 않자 다급하게 말했다.“아린아, 배건후가 손보미 저년이랑 저러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3대 3이에요. 싸우면 누가 이길지 몰라요.”유진혁이 당장이라도 달려들려고 하자 소유정이 눈을 희번덕거렸다.“배건후 혼자서도 우리 셋을 해결할 수 있어.”“누구? 누구라고?”유진혁은 하마터면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배건후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하지 않아도 말로 충분히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도아린은 점점 다가오는 세 사람을 보며 눈빛이 싸늘해졌다. 세 사람이 차 쪽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다른 차 뒤로 사라졌다.잠시 후 은색 마이바흐가 도아린의 차 앞으로 휙 지나갔다.“내가 알아서 할게.”소유정이 또다시 그녀 때문에 경찰서에 가게 해선 안 되었다....병원.의사는 아주 능숙하게 탈골된 손보미의 발목을 맞추었다.“선생님, 보미 언니 미끄러져 넘어졌을 뿐인데 탈골됐다는 건 어젯밤에 누가 언니를 밀어서 넘어진 것과 연관이 있나요?”배지유는 기회만 잡으면 도아린에게 덮어씌우려 했다. 의사는 어젯밤에 어느 정도 다쳤는지 알 수가 없어 이렇게 말했다.“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어요.”“오빠,
그런데 이 고질병이 배지유의 동정을 바꿨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호텔을 나올 때도 배건후에게 안겨 나왔고 병원에 온 후에도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녀와 관계라도 끊으려는 듯 문 앞에만 서 있었다.손보미가 일어서려 하자 배건후가 휠체어를 옆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를 보면서 안아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못 알아챈 건지 아니면 알고 싶지도 않은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한쪽 발만 탈골된 거라 다른 한쪽 발은 멀쩡했다. 손보미는 하는 수 없이 한 발로 서서 휠체어에 앉았다.“사실 그 디자이너...”따르릉...손보미가 언짢은 얼굴로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여보세요?”“손보미 씨, 알려드릴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맡긴 드레스 망가진 부분이 많고 같은 바다 진주도 찾기 매우 어려워요.”문나연이 차분하게 설명했다.“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안 돼요!”손보미는 다짜고짜 호통쳤다가 배건후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다시 다정한 말투로 부탁했다.“그 드레스 이미 예약한 거라 그쪽 촬영에 영향 주면 안 돼요.”“그럼 더 잘하는 수선 대가님한테 맡기실래요?”문나연이 가볍게 웃었다.“아현 씨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선한다고 해도 불가능해요. 보미 씨가 같은 품질의 바다 진주를 찾으면 모를까.”그러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손보미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무슨 일이야?”배건후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생일날에 빌린 드레스 입고 영상을 찍었는데 불꽃이 갑자기 터진 거야. 다행히 제때 피해서 다치진 않았는데 드레스가 여러 군데 구멍 났어.”그가 시선을 늘어뜨렸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망가졌으면 사면 되지.”손보미가 울면서 고개를 내저었다.“그 드레스는 어떤 미스터리한 사람의 사유품이라 얼마를 줘도 안 판대. 거금을 들여서 업계 최고 수선 대가님한테 맡겼는데 같은 재료를 찾기 어렵대.”배건후는 계속하여 라이터를 돌렸다. 손보미는 그의 표정을
JS 픽처스의 고위인사는 배석준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배 대표님, 또 해외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현정이의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더 머물다가 가려고 합니다.”배석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평소에 연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연예인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주현정이 JS 픽처스에서 지위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각종 이유를 찾아 함께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를 거부했지만, 약속이나 한 듯 카메라 앞에서는 활짝 웃었다. 그들은 모두 주현정 덕분에 잘 되었기에 체면은 반드시 살려주어야 했다.“크흠.”배지유는 배석준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헛기침을 했다.“아, 우리 딸이 마침 해남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데리고 왔습니다.”배석준을 둘러싼 고위인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주현정은 배지유가 연예계의 나쁜 물을 먹을까 봐 현역일 적에 절대 배지유를 데리고 활동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위인사들도 그저 주현정에게 딸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본 적은 없었다.반응이 빠른 누군가가 술잔을 들며 공손하게 말했다.“따님은 주 대표님과 배 대표님의 우수한 점을 다 닮으셔서 단정하고 청초하십니다. 우리가 올해 새로 영입한 신인보다 예쁘신 것 같습니다.”“맞아요. 해남대학교의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시니 예쁘시고 학식도 많으시네요. 지금 업계에서는 이렇게 완벽한 인재를 제일 좋아합니다!”배지유는 칭찬을 듣고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잡고 살짝 몸을 앞으로 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삐끗해서 일어서서 인사를 올리지 못하겠네요.”“별말씀을요. 발을 삐끗하면 잘 치료해야 해요. 젊고 예쁘신데 후유증을 남기면 안 되죠.”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배지유의 마음속에서는 저주로 들렸다.그녀는 발 한쪽을 다친 게 아니라 다리 하나를 잃었다. 나머지 생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배석준은 배지유의 성격을 알기에 그녀가 난리를 피울까 봐 얼른 다른 곳으로
주현정은 말투가 가라앉았고 표정이 엄숙했다.“남자의 내연녀로 이십몇 년을 있다가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어른이 화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나. 도아린의 양아버지는 양어머니의 혼수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위협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딸의 효도를 받을 자격 없어!”현장에는 여자 연예인들도 많았다.같은 딸의 마음으로 이렇게 심란한 일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도아린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아린이 양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했다고 여겼다.강홍련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도아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방금 자신의 말이 강씨 가문에게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웠다.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도아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강씨 어르신은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복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씨 어르신께서 좋은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주었는데 당신은 밖에서 어르신의 명성이나 흐리고 다니면 안 되죠. 농부와 뱀의 이야기를 재희 씨도 들어봤을 거로 생각해요.”도아린은 강씨 어르신의 편에 섰는데 강재희는 반박할 수 없었다.여론에서 아버지의 대회에 흑막이 있다는 일로 들끓던 것이 금방 사그라들었는데 강홍련 저 멍청이 때문에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주현정은 도아린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제 딸이고 JS 픽처스의 후계자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제 딸을 치욕스럽게 하다니, 저희 협력은 앞으로 계속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재희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는 도아린이 연회에 참가한 것은 단지 주현정과 예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주현정이 도아린을 딸로 삼고 JS 픽처스의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만약 도아린과 모순이 격화된다면 앞으로의 협력에는 장애가 생길 것이다.“강홍련 씨, 사과해요!”강홍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재희는 지금 자신을
도아린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진열대에 있는 다이아몬드의 빛이 꺾이어 그녀의 눈동자를 비춰 유독 눈부셨다.강홍련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섰다.강홍련은 도아린보다 머리 하나쯤 작아서 고개를 들어 도아린을 바라보았는데 도도한 척하는 모습이 광대 같았다.“네가 JS 픽처스에게 ‘봉황의 시대’를 광고하도록 넘겼는데 강씨 가문의 고급 주얼리들은 모두 JS 픽처스의 연예인들이 광고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어. ‘봉황의 시대’와 JS 픽처스의 연예인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봉황의 시대’가 강씨 가문의 것으로 생각하게 될 테지.”이게 바로 연예인을 찾아 광고하는 이유였다.예를 들어 어떤 톱스타가 운동화의 모델이 되었다면 그가 나타났을 때 팬들은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신었는지 알게 된다. 따로 브랜드를 찾아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도아린은 도덕과 재능을 겸비한다는 말로 강씨 가문에게 치욕을 안겨주었지만 결국은 강씨 가문이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강씨 가문에서 이득을 보는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도아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는 강씨 가문의 사촌이야!”강홍련은 불쑥 얘기했다.“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밀어준다면 배건후와 결혼할 수 있어. 강씨 가문에서 안씨 가문을 지지한다면 내 아들은 안씨 가문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거야!”“그래서요.”강홍련은 도아린이 모른 척할 줄 몰랐고 그녀의 코에 대고 얘기했다.“그래서 나한테 잘하라고. 그러면 강씨 가문에서는 네가 해남에서 살아나갈 기회라도 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대회 성적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너를 디자인 업계에서 쫓아내는 것도 일이 아니지. 내 삼촌 강태식은 이 바닥을 꽉 잡고 있어. 내 삼촌이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너의 ‘봉황의 시대’도 잘난 척할 거 없어. 언론에서 만들어준 것뿐이야. 만약 삼촌의 학생들이 다 그게 별로라고 얘기한다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거야!”많은 손님이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강홍련의 지나친 말에 시선을 두
“아빠가 방법을 대서 가볼게. 너는 오지 마.”배석준은 배지유가 걱정되었다. 지난번에 배지유가 밖으로 나갔다 왔을 때도 돌아와서 다리가 아파 잠이 들지 못했다.배지유는 붉어진 눈으로 애원했다.“제 친구들은 제가 아직 안에 갇혀있는 줄 알아요! 아빠랑 제가 함께 엄마의 연회에 간다면 매체에서는 저희 세 식구의 화목한 모습을 찍게 될 것이고 소문들은 자연스레 사그라질 거예요!”배석준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딸의 명성은 도아린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돌이킬 방법을 계속 찾지 않는다면 배지유가 해남대학교로 돌아갔을 때 반드시 동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조롱당할 것이다.“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메이크업과 코디를 해줄게.”배석준이 데리고 온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지민이었다.김지민은 연예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 참석하는 연예인들이 무슨 브랜드를 입었는지 알아냈다. 배지유는 똑같은 옷을 입으면 안 됐고 다리의 흉터를 가릴 수 있으면서 예쁘고 매력적이어야 했다.이 부분에서 김지민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배지유는 만족스럽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그녀의 치마를 들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다리 하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발을 삐끗해서 휠체어를 탔다고 하면 될 것이다.이런 장소에 김지민은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되므로 부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연회장의 중심에는 도아린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고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는 현장에 있는 연예인들의 시선을 끌었다.이 여자의 아름다움이 너무 지나쳤다.연예계의 스타들은 자주 레드카펫을 밟고 시상식에 참가하므로 어떻게 분위기를 휘어잡는지를 잘 알고 자신이 어느 각도에서 가장 예쁘게 찍히는지도 알고 있었다.도아린은 처음 보는 얼굴이고 업계에 대해 영향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다 자신감이 넘쳤다.그녀가 스크린 앞으로 가서 사인할 때 스크린에는 ‘봉황의 시대’의
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은 ‘라윤주’의 이름을 듣고 초점을 잃었다.“뭐라고요?”“...”육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하경이 말을 이었다.“향 주머니로 화를 면한 것은 우연이에요. 정말 저를 도왔던 것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책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죠.”육하경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어르신들을 3일이나 괴롭혀서야 알아냈어요. LY에서 저를 후임자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육하경의 학업은 각 부분에서 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육씨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빽빽이 필요했다.육민재를 예로 들어보면 능력은 가장 뛰어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맏아들의 장손 혈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좋은 자원과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모든 게 알맞게 부합되어야 한다.육하경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었고 육씨 가문의 산업에 기대를 두지 않아 오랜 시간 밖에서 떠돌며 공부를 했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세인트존스 호텔의 관리 권한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쁘기도 놀랍기도 했다.놀란 마음으로 육하경은 전임자를 찾아갔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야 LY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육씨 가문 뿐만 아니라 많은 명문가가 LY와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인재를 추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하경은 그때 손에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전임자가 이상해하며 무늬를 찍어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경 씨가 말하는 그 이야기에도 관심 없습니다.”도아린은 책을 육하경에게 돌려주고는 차 문을 열었다.“도아린 씨!”육하경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손을 허공에 멈추고 결국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육하경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보게 된 것은 싫증뿐이었다.도아린은 힘을 주어 방심하고 있던 배건후를 밀어냈고 뒤돌아 걸어갔다.배건후는 빠르게 따라가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도아린, 나한테 시간을 줘.”배건후가 잡은 손목의 위치가 마침 도아린이 떨어질 뻔했을 때 배건후에게 잡힌 위치였다. 도아린은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배건후의 손을 때렸다.“이거 놔!”“친구 사귀지 마.”배건후의 목소리가 떨렸다.“서둘러 친구 사귈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시간을 줘.”도아린은 배건후에게 발길질을 했고 배건후는 피하지 않았다. 바지에는 발자국이 하나 생겼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이거 안 놓으면 사람 부를 거예요. 육씨 가문에서는 당신이 함부로 하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배건후의 힘이 조금 빠진 틈을 타서 도아린은 빠르게 손을 빼내고 자리를 떴다.나영옥은 도아린이 손목이 빨갛게 된 채로 한참이 지나 돌아온 것을 보고 묻지 않았고 가정부에게 도아린한테 식사를 올려달라고 했다.배건후가 돌아왔을 때, 육하경이 작은 숟가락으로 게살을 발라서 도아린의 앞에 놓아주는 것을 보았다.“내일 하경 오빠가 아린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간다고 하는데 저희도 함께 가요.”육청아은 갈비를 하나 집어 배건후의 접시에 놓았다.배건후는 가정부를 불러 접시를 바꿔 달라고 했다.“...”식사를 마친 후, 육하경은 도아린을 자신의 차에 태우려고 했다.배건후는 펑 하고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았다.“아린이 지금 사는 곳은 외부인에게 발설하기 불편해.”도아린은 자신의 주소를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 게 맞지만, 배건후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배건후가 미쳐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하경 씨는 외부인이 아니에요.”도아린은 차를 빙 돌아가더니 반대편으로 올랐다.육하경은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고 배건후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운전석에 올랐다.육씨 가문을 떠나 시 중심에 들어서자 도아린이 갑자기 말했다.“앞에
“아!”육청아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는 다 젖었고 찻물이 그녀의 치마를 적셨다.“죄송해요.”배건후는 주전자를 놓고 자신의 냅킨으로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를 닦았다.육청아는 도아린을 흘겨보고는 치마를 정리하러 갔다.작은 소란이 일었어도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나영옥이 잔소리를 했다.“나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저렇게 칠칠치 못한 거야. 단정하지 못해.”도아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웃음을 짓던 두 눈은 어리둥절했다.“천사 보육원이 압류당했는데 세인트존스 호텔의 수선 계획은 계속할 거야?”배건후는 육하경과 도아린의 대회를 끊었다.그는 소매를 말아 올렸고 손목에는 빨간 끈이 드러났다. 그의 행동이 나른하고 관능적이었다. 도아린은 그게 눈에 거슬렸다. 이혼한 마당에 이런 물건으로 그녀를 치욕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가서 손을 씻고 올게요.”도아린은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육하경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며 배건후의 말에 대답했다.“수선 계획은 변하지 않아. 우리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찾아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거야...”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건후도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객실의 화장실은 세면대가 밖에 있었는데 도아린이 수도꼭지를 틀려고 할 때 여자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상대방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도아린은 ‘배건후’와 ‘네티즌을 산다’라는 얘기를 어렴풋하게 듣게 되었다.도아린이 화장실의 문을 열자 육청아은 빠르게 핸드폰을 막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칸막이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밖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도아린은 변기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물을 내렸다.문을 열자마자 역시 육청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도아린 씨.”육청아은 계속 웃는 표정이었지만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 도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당신이 배지유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그녀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눈빛이었다.도아린은 그녀가 배건후한테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육청아가 이상하게 그녀를 경계하는 느낌을 받았다.나영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희들은 다 나가 있어. 아린이랑 할 얘기가 있어.”육청아는 육민재와 함께 문 앞까지 갔다가 뒤돌아 도아린을 한번 보더니 핑계를 대서 육민재와 갈라졌다.나영옥은 도아린에게 어쩔 예정인지 물었다. 요즘 모건 그룹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연성에서의 지위는 쉽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만약 도아린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배씨 가문에서는 도울 수 있지만, 배건후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재벌의 관계는 오래된 나무의 뿌리처럼 가닥이 많고 복잡해서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게 흔들리게 된다.“진씨 가문의 부모님은 너한테 잘해줘?”나영옥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저한테 엄청 잘해주세요. 두 오빠도 잘해줘요.”“그럼 다행이야. 청아의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경솔하게 행동하는 면이 있었어. 기어코 바위에 부딪히려 하거든 가라고 해. 손해를 봐야 정신을 차리지.”도아린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영옥은 또 그녀와 친한 친구를 언급하였는데 해남에 사는 여씨 어르신이었다.“시간이 나면 나 대신에 가서 만나서 안부를 전해줘.”나영옥은 편지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주었고 전해달라고 했다.도아린은 조심스레 편지를 넣어두고 꼭 찾아뵙겠다고 얘기했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밖에서는 말소리가 들렸고 육청아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나영옥의 표정에서는 불쾌한 기색이 보였지만 꾸짖지 않았고 도아린을 배웅하기 위해 가정부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다.도아린이 나영옥을 부축하고 나왔을 때 정자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배건후의 잘생긴 얼굴은 차가웠고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는 살짝 열고 있었다. 꾸민 듯 안 꾸민듯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육청아는 그의 곁에 서서 고개를 들
도아린은 SNS에 새가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잠시 후, 음식을 배달시켜려고 하는데 문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와 과일들로 가득했다. 큰오빠의 배려에 감동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연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돼서 이리 모든 것을 준비해 주다니...진수혁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려는 그때, 육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성에 돌아온 거야?”“네.”“할머니가 아린 씨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잠깐 들렀다 갈래?”“위치 보내줘. 내가 데리러 갈게.”이번에 연성을 떠나면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 아니 아린 씨가 집을 나섰습니다.”그에게 물병을 건네던 유정윤은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가 물병을 건네받으며 약을 입에 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파래졌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따라가.”“네.”고개를 끄덕이던 우정윤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사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사로 끌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모건 그룹의 다음 계획에 대해 대책을 세우라고 그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구청으로 달려갔고 마침 배석준이 도아린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한 탓에 위가 또 말썽인 듯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후, 위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그의 눈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