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역 안 할 거예요.”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배건후는 그녀가 영화나 드라마 대역을 말하는 줄 알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안 한다면서 촬영장에는 왜 가서 난리를 친 거야.”“그 루비 목걸이 말이에요.”도아린은 말끝을 흐리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배건후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루비 목걸이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여러 곳을 수소문했지만 아무런 소식도 얻지 못했다.배건후가 해명하려는 찰나, 도아린이 말을 이었다.“손보미에게 그 목걸이를 줬으면, 이 원단도 그쪽 주는 게 좋겠네요.”배건후가 정색하며 물었다.“무슨 뜻이야?”도아린은 휴대폰을 꺼내 전자 잡지를 찾았다.표지에는 80% 정도 유사한 루비 목걸이가 있었고 함께 있는 사진 속에는 빨간색 한복이 있었다.“나 손보미의 차에서 이 잡지를 봤거든요. 그 루비 목걸이, 손보미한테 준 거 맞죠?”도아린은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차분하게 말했다.“결국, 돌고 돌아 그 여자 손에 들어갔네요. 그러니 한복도 그냥 그쪽 주세요.”배건후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누가 그 목걸이를 보미에게 줬대?”“고객이 마음에 안 들어 해서 나한테 주는 거라 했잖아요. 당신한테 감히 싫다는 소리를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다만 목걸이만 주고 한복은 안 주니까 누군가가 삐쳐서 싫다고 했겠죠. 그래서 나한테 던져준 거고요.”“아린아, 내가 그 루비를 찾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배건후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됐어. 멍청하기는. 마음대로 생각해.”그는 돌아서서 나가버렸다.도아린은 어이없다는 듯 목을 쓸어 만졌다.‘손보미의 마음도 제대로 모르면서 나를 멍청하다고 하는 거야. 갱년기라도 왔나?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가는 거야?’배건후가 담배 피우러 간 사이, 도아린은 남자 옷감을 고르기 시작했다.“이거, 그리고 이거. 포장해 주세요.”“난 한복 안 입어.”배건후가 갑자기 도아린의 뒤에서 나타났다.도아린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배건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방 매장에서 도아린의 모습을 찾았다.그녀가 자신에게 선물을 사준다고 해서 아까 거리낌 없이 말했던 것을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다.그가 매장으로 들어서자 점원이 맞이했다. 그는 도아린을 가리키며 일행이라고 했다.도아린이 지갑을 고르는 모습을 보자 배건후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답답했던 마음도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도아린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참 고민하다가 그에게 물었다.“어떤 게 좋아요?”배건후는 태연한 척하며 담담하게 말했다.“장지갑이 나아.”도아린은 장지갑을 꺼내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무 고급스러워서 당신이 쓰면 괜찮겠지만, 그 사람이 쓰기에는 너무 눈에 띄어요.”배건후는 움찔하더니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 사람이 누군데?”도아린은 다시 반지갑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남자의 차가운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하경 씨요. 오늘 우릴 많이 도와줬으니 고맙다는 뜻으로 지갑을 선물하려고요.”그는 보육원의 비밀을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소유정을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도아린은 인과응보를 믿는 편이었다. 일단 원인에 개입했으니, 마땅한 결과로 균형을 맞춰야 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지갑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다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반짝였다. “건후 씨는 하경 씨랑 친하니까 그 사람이 전에 어떤 지갑을 썼는지 알죠?”배건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몰라.”“그럼 지갑이 필요할까요, 벨트가 필요할까요, 아니면...”“내가 걔 속을 어떻게 알아.”도아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남자는 다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이라면 뭘 받고 싶어요?”“사람마다 다 달라.”배건후는 비꼬듯 말했다.“진짜 나한테 선물할 때 물어봐. 괜히 나 머리 쓰게 하지 말고.”그는 홱 돌아서서 매장을 나가버렸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잠시라도 더 그 자리에 있었다간 도아린에게 폭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배지유가 보여준 영상은 흔들려서 그들이 다정하게
배건후의 얼굴은 점점 더 차갑게 굳어갔다.교차로를 지나는 순간, 그가 갑자기 말했다.“회사로 가.”조수현은 황급히 90도로 차를 돌렸다.관성 때문에 도아린은 배건후의 품으로 넘어졌지만, 그는 곧바로 그녀를 밀어냈다.‘미친 거 아냐? 개자식.’마이바흐가 모건 그룹 빌딩 앞에 멈춰 서자 배건후는 차 문을 세게 닫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서류를 나눠주고 있던 우정윤은 배건후가 굳은 얼굴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그는 얼른 차를 타서 사무실로 가져갔다.“대표님, 지시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배건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하마터면 우정윤의 얼굴에 뿜을 뻔했다.그는 차를 탁 내려놓으며 물었다.“천사 보육원 자료는 다 알아봤어?”“네, 알아봤습니다.”우정윤은 재빨리 파일을 가져와 공손하게 배건후에게 건넸다. 굳은 얼굴로 자료를 한 장씩 넘기는 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천사 보육원은 이름을 여섯 번이나 바꿨는데 매번 비리가 적발되어 시정 명령을 받고서야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그들은 이중장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시설도 이중으로 꾸몄다.사람들에게는 허름한 시설을 보여주고 후원금을 받은 후에는 다른 시설을 보여주며 후원금을 횡령했다.마지막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3년 전이었다. 그 후로는 운영자가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크게 돈을 모으지는 않고 조용히 자선 활동을 하는 것 같았다.배건후의 예리한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자료가 너무 깨끗할수록 더 수상한 법이다.“후원은 일단 보류하고 더 자세히 조사해 봐.”배건후는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지고 차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우정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어제 세인트존스 호텔에서 천사 보육원 리모델링 비용을 전액 부담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배건후는 위험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도아린은 차 안에서 기다리다 거의 잠들 뻔했다. 이때 차가 흔들리더니 배건후가 타고 들어왔다.그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도아린 역시 침묵을 지켰다
배건후는 도아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피부가 너무 건조해.”도아린: “...”그녀가 만져보니 촉촉하기만 했다.도아린은 웃는 얼굴로 몰래 배건후의 팔을 꼬집었다.그녀가 세게 꼬집을수록 배건후는 더 장난을 쳤다.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에 주현정과 윤명희는 웃음을 터뜨렸다.“남자는 결혼해야 성공한다는 말이 맞나 봐요. 건후도 아린이와 결혼하고 나서 사업이 승승장구했거든요.”주현정은 아들 자랑에 신이 났다.“하경아, 너도 얼른 좋은 짝 만나야지.”육하경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건후만큼 운이 좋을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똑똑하고 현숙한 아내를 만나기가 쉽지 않죠.”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았다. 도아린은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니에요. 건후 씨가 워낙 능력이 뛰어나서 그래요.”그러고는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았다.‘봐, 누구든 너보다는 눈썰미가 있어. 다들 나의 좋은 점을 알아보는데 꼭 너만 내 흠을 잡고, 난리잖아.’배건후는 도아린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너무 복잡한 감정이라 도아린은 알고 싶지 않았다.“아린은 배짱도 두둑하고 꼼꼼하기까지 해서 우리 집 못난 놈들보다 훨씬 나아요.”윤명희도 딸바보였다.“제가 집에서 쓰러졌을 때, 그 녀석들은 어쩔 줄 몰라 쩔쩔매기만 하더라고요. 아린이가 있었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진범준은 그때 일을 떠올리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아내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윤명희는 그를 올려다보며 애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육하경 또한 도아린을 정의롭고 용감하며, 남들과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자존감이 높다고 칭찬했다.오늘의 화제는 온통 도아린의 칭찬이었다.칭찬 세례에 도아린은 몸 둘 바를 몰라 배건후의 팔에 매달려 그의 팔을 문질렀다.그런데 갑자기 화제가 바뀌었다.“얘들이 손주 얼굴 좀 빨리 보여주면 좋을 텐데.”주현정의 말에 발꿈치를 들고 수줍어하던 도아린은 순간 멈칫했다.아이가 없는 것은 배건후의 문제였기에, 이 화제는 그가 마무리해야 했다.하
이 말은 그녀를 알아본 게 아니라, 배건후를 알아본 것이었다.게다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육하경도 매우 놀라며 말했다.“이 말, 경주마인가 보네. 상도 많이 탔을 것 같은데?”도아린은 문득 그때 부잣집 사모님들과 경마했던 일이 생각났다.그녀가 마지막에 역전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말 덕분이었는데, 이름이 번개'였던 것 같다.당시 그녀는 번개가 예쁘긴 했지만 어리고 경험이 부족할 거라 생각해서 번개보다 덩치가 큰 다른 말을 고르려고 했었다.하지만 그때 배건후는 그녀에게 자신의 눈을 믿으라고 했고 그래서야 겨우 국면을 전환할 수 있었다.그러니까 배건후는 그냥 아무렇게나 조언한 게 아니라, 말의 습성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연성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승마를 배우며 경쟁이 치열했다. 그러니 재벌가 도련님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혈통 좋은 말 몇 필씩은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그중에서도 큰 대회에 나갈 수 있는 말은 극소수였다.“만져봐도 돼요?”도아린은 배건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배건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번개는 움직이지 않고 큰 눈으로 배건후를 빤히 쳐다보며 마치 거절하는 듯했다.“번개야.”남자는 나지막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번개는 발을 몇 번 구르더니 천천히 걸어와서 도아린의 손에 머리를 살짝 스치듯 댔다가 물러섰다.도아린: “얘 암컷인가 봐요.”“왜 그렇게 생각해요?”육하경이 가볍게 웃었다.“건후 씨는 암컷한테 인기가 많잖아요.”배건후: “...”남자는 선천적으로 승부욕이 있는 법이다.“오랜만에 말이나 탈까? 두 바퀴 돌지?”육하경은 배건후처럼 전문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티베트 지역을 누비고 다녀서 승마 실력만큼은 수준급이었다.도아린은 원래 같이 가서 말을 고르려고 했지만, 도정국의 전화가 재촉하듯이 들어왔다.그녀가 돌아서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남자는 외투를 그녀에게 던져주며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하경이가 나한테 질까 봐 걱정돼?
“아린아, 제발, 제발 내 아들을 살려줘!”강홍련은 휴대폰을 빼앗아 흐느끼며 울부짖었다.“유준은 이미 재산 상속 포기 각서를 썼어. 처음부터 도씨 가문의 재산은 한 푼도 원하지 않았지만. 하지만 이번에 다친 건 정말 너 때문인데 네가 모른 척하면 안 되잖아!”도아린은 엠파이어 빌딩에서 도유준을 봤던 일을 떠올렸다.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라 도유준은 정말 거기서 간판을 달고 있었다.다만, 도유준이 어떻게 가게를 얻었는지가 의문이었다.“어떻게 나 때문이라고 확신하는 거죠?”“도울 디저트 때문에...”이때 도정국은 전화를 빼앗아 강홍련의 입을 막으며 다급하게 말했다.“아린아, 전화로는 설명하기 힘들어. 당장 병원으로 와.”“일 끝나면 갈게요.”도아린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보니 진범준 부부가 울타리 옆에서 꽃을 감상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얼굴을 맞대고 속삭이며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윤명희는 진범준의 손을 뿌리치고 얼굴을 닦았고 진범준은 그녀를 껴안으려고 했지만 거부당했다. 뭔가 이상했다. 두 사람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이에 도아린은 상황을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우연히 뒤돌아본 윤명희는 그녀를 발견하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아린아, 이리 와.”“어머니.”윤명희는 눈물을 머금고 도아린에게 손을 뻗어 안았다.그녀는 진범준과 함께 병원에 왔는데 오늘은 감정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그녀는 이 좋은 소식을 도아린에게 가장 먼저 전하고 싶었지만 방금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윤명희는 도아린이 자신의 친딸이라고 확신했지만, 감정 결과는 또다시 그녀를 깊은 절망에 빠뜨렸다.도아린은 그녀의 딸이 아니었고 혈액형마저 부부와 달랐다. 윤명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진범준이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그녀는 병원이 실수했다고 확신하며 해남으로 돌아가 다시 검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진범준은 그녀를 거역할 수 없었고 감정을 자극할 용기가 없어 눈빛으로만 타협을 표시했다.도아린은 윤명희의 슬픔을 느끼며
“네 오빠가 하늘의 별을 따다 준다고 해도 아까울 것 없지. 아린이는 네 새언니니까.”주현정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물었다.“첫 출근인데 어땠어?”배지유는 육하경이 도아린을 감싸는 모습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었다.“엄마, 주소 좀 보내줘요. 기회가 되면 나도 그 경주마 보러 갈래요.”“보는 건 괜찮지만, 뺏지는 마.”주현정은 위치를 보내줬다.모두 바쁜 탓에 도아린은 혼자 밖으로 산책하러 나갔다.경마는 이미 끝났다. 그녀는 승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대충 배건후가 이겼을 거라고 짐작했다.그는 탁월한 승마 실력뿐만 아니라 상황 분석 능력도 뛰어나 지금까지 패배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주현정은 그 경주마가 배건후가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지만 그건 말이 안 되었다.아마 윤명희에게 둘이 사이가 좋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연출일 것이다.최고급 경주마는 단순히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배씨 가문이 진 씨 가문과 협력하려는 프로젝트가 작은 규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도아린은 울타리를 따라 무작정 걷다가 우연히 육하경이 울타리에 기대어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에 육하경이 고개를 돌렸다.“왜 혼자에요?”“하경 씨도 마찬가지잖아요.”육하경은 항상 부드럽고 젠틀한 옆집 오빠 같은 이미지였는데 갑자기 멍하니 있는 걸 보니 분명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천사 보육원에 관해서...”도아린은 배건후가 그에게 압력을 가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경 씨는 신경 쓰지 말아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육하경은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건후에게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도아린은 입술을 깨물었다.배건후는 당연히 조사할 수 있었다. 단지 손보미를 위해 보육원을 없애버릴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였다.“아린 씨 친구가 영상을 찍었죠?”육하경은 몸을 일으켰다.“나에게 보내주라고 하세요. 증거를 모아서 경찰에 함께 넘겨줄게요.”도아린은 휴대폰을 꺼내
육하경은 손을 울타리에 걸치고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그는 조금 전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다행히 피우지 않았다.비록 남자가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건 일상이고 도아린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육하경은 뒤를 돌아보며 부드럽고 맑은 미소를 지었다.“오늘 유정과 친구를 도와줘서 고마워요. 작은 선물인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봉투가 아까보다 좀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육하경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아주 옅은 실망감이 뒤섞여 있었지만 금세 사라졌다.“그냥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육하경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앞으로도 계속 조사를 이어갈 거죠...”도아린은 쇼핑백을 조금 더 내밀며 말했다“나쁜 놈을 없앤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요. 안 받으면, 다음에 일이 생겨도 말 안 해줄 거예요.”육하경은 그제야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받기에 좀 미안하네요.”“대신,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리죠.”육하경은 이쪽으로 걸어오는 배건후를 보고 목소리를 약간 낮췄다.“하지만 내가 확신을 가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도아린은 보육원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때 강한 팔뚝이 허리를 감쌌다.“엄마가 찾으셔.”배건후는 갑자기 힘을 주며 도아린을 끌어안았다.“네 형수 데리고 갈게.”그렇게 말하고 육하경을 혼자 남겨둔 채 도아린을 데리고 갔다.그녀는 거의 강제로 끌려가는 듯했다.“건후 씨,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엄마가 보고 있어...”배건후는 말하며, 바람에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도아린은 어쩔 수 없이 연기하며 고개를 돌리며 작게 말했다.“건후 씨, 번개 말인데 진짜 샀어요?”“좋아?”“나한테 사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나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진씨 가문과 협력하고 싶은 거지.”배건후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알
도아린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머리에는 수건을 둘러쓴 채,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과 종이쪽지를 찾았다.쪽지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지만 낯선 필체였다.비에 젖어 마지막 숫자가 번져 알아볼 수 없었지만 다행히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그 주소는 한 개인 묘지 근처였다.도아린은 즉시 일북을 불러 함께 묘지로 향했다.묘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고 관리인이 다가와 말했다.“오후 5시 이후에는 방문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내일 다시 오세요.”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발길을 돌렸다.다음 날 아침, 일북이 갑자기 도아린에게 말했다.“휴대폰 좀 주시겠어요?”“왜?”“제가 전에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아가씨 근처에 있는 사람이 도청 장치를 가지고 있다면 기록이 남도록 설정했어요.”도아린은 바로 휴대폰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LY 임원 회의 때 내부 내용을 유출한 흔적이 있는지도 확인해 봐.”도아린이 수저를 내려놓자마자 일북은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말씀하신 회의 시간에는 이상 기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공항을 떠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상 신호가 감지됐어요.”도아린은 그 시간대를 곰곰이 되짚어 봤다.“그때 차 안에 있던 사람은 운전기사, 한 비서, 그리고 신지훈...”만약 한유미가 감청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제 우산을 함께 썼을 때 신호가 감지됐을 것이다.“기사는 운전만 했고 그녀와 대화도 없었다. 그가 감청 장치를 가지고 있다면 과연 누구를 감시하는 걸까?”“그렇다면 신지훈?”도아린은 어제 차 안에서 자신이 그에게 갑자기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가 보였던 이상한 반응을 떠올렸다.그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도아린은 출근 후 곧장 신지훈의 사무실을 찾았다.“도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 서류만 결재 마치겠습니다.”신지훈은 한유미에게 차를 내오라고 지시한 뒤,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도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사무실을 둘러봤다. 화분을 구경하기도 하고 벽에 걸린 그림도 한동안 감상했다.
주머니 속에 한 장의 종이가 더 들어 있었다!도아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공항을 떠날 때, 옷이 뭔가에 스치던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몰래 넣은 것이 분명했다.최근 계속해서 신지훈과 우연히 마주친 일을 떠올리며 그녀는 더욱 경계심을 높였다.신지훈은 굳어 있는 도아린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혹시 제 차가 불편한가요?”“그런 거 아니에요.”도아린은 천천히 손을 주머니에서 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방금 문득 생각났어요. 돌아왔다는 걸 강재민 씨에게 알리지 않았네요. 아마 또 삐치겠죠.”“강재민이라...”신지훈이 이름을 곱씹듯 중얼거렸다.“그 유명한 보석 브랜드 대표도 강 씨인데, 최근 표절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죠. 도 대표님과의 사이도 그리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그건 그분 아버지 사업이고 강재민 씨는 그저 스카이 빌딩을 운영하고 있죠.”도아린이 신지훈의 미묘한 눈빛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못난 배지유 덕분에 스카이 빌딩은 한동안 엠파이어 빌딩의 고객들을 꽤 많이 빼앗아 갔죠. 제 인맥으로 이 상황을 만회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신지훈은 코웃음을 쳤고, 눈빛에는 미세한 경멸이 스쳤다.“강재민 씨 방식이 못마땅한 건가요? 아니면 배지유가 제 가족을 배신한 게 못마땅한 건가요?”“둘 다요.”탁. 탁.신지훈이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장난스럽게 튕겼다.“배지유는 남은 다리까지 못 쓰게 됐다던데요. 이제 남은 인생이 순탄치 않을 거예요. 하늘도 결국 정의를 베푸나 보네요.”신지훈의 시선이 갑자기 도아린을 향했다.도아린은 아무렇지 않게 바짓단을 살짝 걷어 하얀 발목을 드러냈다.그리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정의가 있다면 인신매매범부터 싹 다 처단해야죠. 아무리 그놈들을 언젠가 다 잡아들인다 해도 피해자들의 삶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한유미가 뭔가 말하려다 망설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신지훈의 눈에 잠깐 감탄의 빛이 스쳤고 곧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남자는 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더니 이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창밖의 빗방울이 마치 도아린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녀의 눈에도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그녀는 또다시 배건후를 닮은 실루엣을 본 것이다.“착각일까?”요즘 도아린은 누구를 봐도 배건후처럼 보였다.“아니면 그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가 정말로 죽었는지 나한테서 확인하고 싶은 걸까?”띠링.남자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도아린은 무심히 넘기려 했지만 자신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그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이번에 본 이 남자는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배건후와 닮아 있었다.도아린은 결혼했을 때의 탄탄했던 그의 체격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혼 후, 배건후는 눈에 띄게 말라갔었다...공항 출입구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누군가는 날씨를 원망했고 누군가는 차가 늦게 오는 것에 불평했다.비를 뚫고 나가려던 사람들은 이내 돌아왔고 거센 바람에 공항 내부까지 빗물이 들이쳤다.바닥은 흠뻑 젖었고 사방이 소란스러웠다.그 남자는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감지한 듯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사람이 많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도아린이 젖은 바닥을 밟고 미끄러질 뻔했고 순간적으로 옆 사람을 붙잡았다.“죄송합니다!”“도 대표님?”신지훈이 그녀의 팔꿈치를 받쳐주며 웃었다.“방금 막 도착하셨나요? 설마 우리 같은 비행기 타고 온 건 아니겠죠?”“그럴 리가요.”도아린이 황급히 손을 떼고 주위를 살폈지만 이미 남자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출입구를 둘러보았지만 차가 도착한 흔적도, 비를 맞으며 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누구 찾으세요?”신지훈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신 대표님은 마중 나온 사람이 있나요?”“곧 도착할 겁니다. 도 대표님은요? 제가 모셔다드릴까요?”“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신지훈이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서대은의 메시지를 본 순간, 도아린은 온몸이 굳어버렸다.메시지는 단 한 줄이었다.[보스, 다음 생에는 부하로 남을게!]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혹시라도 무모한 짓을 저지를까 봐 도아린은 서둘러 주작 팀원들에게 연락해 서대은을 찾아보라고 했다.진경수가 조깅하러 나왔다가 테라스에 앉아 있는 도아린을 발견했다.그 모습을 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밤새 못 잤어?”놀란 도아린이 뒤돌아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그냥 일찍 일어난 것뿐이에요. 오늘 비가 올 것 같아서 연성 가는 비행기 표를 바꿀까 고민 중이었어요.”“조금 더 쉬었다 가지 그래?”진경수가 도아린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 열은 없었다.그는 쪼그리고 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넌 이미 충분히 애썼어. 너무 무리하지 마.”“어차피 모건 그룹은 배씨 가문의 것이잖아. 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모르지만 팔 수 있으면 파는 게 나아.”물론 배건후가 회사를 자발적으로 넘긴 것이었지만 도아린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사람들은 분명 도아린이 재산을 탐내서 배건후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다고 수군댈 것이었고 겉으로는 선을 긋는 척하면서도 결국 돈 앞에서는 한없이 유약하다고 말할 터였다.진경수는 동생이 결혼을 서두르길 바라지는 않았지만 부당한 오해를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알았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에 살짝 스치는 날 선 눈빛을 진경수는 보지 못했다.아침 식사 후, 윤명희가 그녀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출발하기 전, 윤명희는 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애틋한 눈길을 보냈다.“무슨 일이 있으면 꼭 집에 연락해. 혼자서 다 짊어지지 말고!”“참, 강씨 가문에서 표절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어. 네 디자인을 표절한 제품은 세 배 가격으로 전량 회수하고 회수한 제품은 전부 소각 처리하기로 했대.”“회수되지 않은 것들은 판매가의 두 배를 배상할 거고 경수가 계속 지켜
서대은은 처음엔 아버지의 병 때문에 도아린을 배신했다.하지만 도아린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급해하지 말라며 위로했고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했다.심지어 청룡 쪽의 자원을 동원해 그의 아버지에게 맞는 장기를 찾아주려고까지 했다.하지만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도아린을 배신했다.아니, 이번엔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날카로운 단검을 꽂는 행위나 다름없었다.서대은은 도아린을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자기 두 손으로 배신의 칼끝을 도아린의 심장 깊숙이 찔렀다.“보스, 미안해!”“서대은!”서대은은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어린 얼굴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차가운 어둠이 서려 있었다.그는 무표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육청아가 그를 발견하고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비웃으며 길을 비켜주었다.“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어.”서대은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방 안을 둘러봤다.둘만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지금 하고 있는 이 사업, 현무도 알고 있어요?”서대은의 말에 육청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대답이 없었다.서대은은 거침없이 이어갔다.“나도 끼워줘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 회의에서 라윤주의 선발에 끝까지 반대할 겁니다.”“지금 날 협박하는 거예요? 서대은 씨가 반대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육청아는 비웃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그러나 서대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육청아 씨, 내 손에 있는 증거만으로도 당신을 감옥에 보낼 수 있어요. 누가 다음 라윤주가 되든, 결국 당신은 모든 걸 잃게 될 겁니다.”육청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그러나 이내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서대은! 설마 당신도 도아린 그 여자를 좋아하는 거야?”그녀는 손뼉을 치며 비웃었다.“대체 도아린이 뭐가 그렇게 좋아서 남자들이 하나같이 미쳐 돌아가는 거지? 하지만 서대은 씨, 그 여자는 아버지 일 때문에 당신을 평생 용
“아린아, 나 찾았어? 의사랑 지유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거든... 무슨 일이야?”신지훈은 유리 너머로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바로 떠나지 않았다.도아린은 코를 긁는 손짓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물었다.“어머님, 건후 씨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갔어요?”“난 안 갔어...”주현정은 후회와 죄책감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와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을 때 주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배건후의 장례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우정윤은 배건후가 누명을 썼다는 것과 회사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주현정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배건후의 사망 소식을 일단 숨기고 회사를 안정시킨 후에 발표하자고 조언했다.주현정은 아들의 마지막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수술로 다소 복구되었지만 사망 후에는 변형이 심해져서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그래서 대부분 우정윤이 나서서 처리했다.“그 말은...”도아린은 깊은숨을 쉬며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말인즉 주현정도 배건후의 시체가 온전한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우 실장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도아린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현정이 물었다.“아린아, 하고 싶은 말이 뭔데?”그녀는 조금이라도 진정하려고 다리를 움켜잡으며 말투를 조절했다.“제가 확인한 후에 말씀드릴게요.”“아린아,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잘 챙겨야 해...”“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도아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더 이상 전화를 끊지 않으면 더 이상 감정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신지훈은 차기 차 쪽으로 돌아가며 계속해서 돌아보았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쇼핑백을 안쪽으로 던졌다.차를 몰고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누가 그를 부른 것만 같이 발걸음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신지훈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차 안을 둘러
하지만 서대은은 계획한 것대로 말하지 않았다. 청룡과 주작이 반대했기 때문에 현무와 백호의 의견이 일치하더라도 상황을 바꾸기는 어려웠다.그래서 강재민은 그냥 순순히 동의하는 척하면서 더 기다려보자는 선택을 했다.서대은 때문에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서대은은 발밑에 있는 유리컵을 한번 훑어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육청아 씨, 저랑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세요?”육청아는 손에 위스키 한 잔을 들고 의자에서 내려왔다.잔을 흔들릴 때마다 얼음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아린 씨가 대은 씨를 믿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쪽 아버지 병이 갑자기 나았다는 걸 아린 씨가 알면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서대은은 시선을 내리며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었다.“제 아버지의 몸으로 협박할 생각 마세요!”육청아는 혀를 차며 서대은의 모습을 비웃었다.“대은 씨 아버지가 받은 장기가 누구 것인지 알아요? 그쪽은 모르겠지만 제가 살짝 입을 열기만 해도 아린 씨는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뭐라는 거죠?”서대은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고는 펜던트를 티셔츠 안에 숨겼다.서대은은 도청 장치를 끈 것이었다. 도아린은 이어폰을 뺐다.‘대은이 아버지가 퇴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기 이식을 받았기 때문이었어? 청아 씨말에 따르면 나랑 연관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그럴 리 없어!’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려 했지만 손끝이 너무 떨려서 그만 놓쳐버렸고 휴드폰은 미끄러져서 틈새로 떨어졌다.도아린이 몸을 숙여 휴대폰을 주울 때,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면서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정말 세상이 넓어서 그런지 별 사람이 있더라고... 상황만 괜찮다면 내가 본때를 보여줄 텐데!”“신 대표님!”도아린의 목소리에 신지훈이 뒤를 돌아보았다.해남시 쇼핑몰 지하 주차장에서 도아린을 만날 줄 몰랐는지 그는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도아린 대표를 만났어. 다음
꽃 모양으로 된 테이블에 네 개 조직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는 ‘라윤주’의 자리였다.도아린은 서대은의 오른쪽에 앉았고 옆에는 현무 조직의 강재민과 육청아가 있었다.육청아는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가끔 그녀를 힐끗히 쳐다봤다. 마스크를 통해서도 그녀의 질투와 혐오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마주 앉은 청룡과 ‘라윤주’는 오랜 친구였다. 온라인에서의 대화를 나눌 때는 익숙한 패턴이었지만 만나게 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아현’이라는 이름으로 비밀조직 LY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네 명의 최고 책임자들을 만났었다. 그때 청룡은 지금과 다른 느낌이었지만 말이다.청룡은 그녀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 듯했다.“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인데 이제 새로운 책임자를 뽑아야 되지 않나요?”백호가 청룡을 보며 말했다.“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청룡은 도아린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제안하고 싶어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유럽식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그는 여전한 옷차림에 여전한 목소리였지만 도아린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3년을 기다렸어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죠?”백호는 주작을 보며 말했다.“그쪽 의견은 어때요?”주작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부드럽게 말했다.“다들 알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당연히 ‘라윤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서대은의 대답은 이전에 육청아와 약속했던 것과 달랐다. 그녀가 살짝 움직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강재민이 책상 아래서 그녀의 발을 차며 입을 다물게 했다.육청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노려보았다.백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튕기며 강재민을 바라봤다.“현무 쪽 의견은 어때요?”강재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바꾸는 건 명분도 없고 순서도 맞지 않으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
그녀는 갑자기 육하경이 차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면 집에도 분명히 설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도아린은 급히 일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빌라 안에 핀홀카메라랑 도청 장치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말이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강재민이 문을 두드렸다.“아린 씨, 쉬고 있어요?”“아직이요.”도아린은 문을 열며 잠옷을 들고 있는 손을 보여주었다. 마치 갈아입으려는 모습이었다.“무슨 일이죠?”“육하경 그 자식이 방에 핀홀카메라를 설치했어요.”강재민은 손에 뜯어낸 장비를 들고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방을 확인해 볼게요!”도아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뭐라고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강재민은 핸드폰에 설치되어 있는 앱으로 벽을 점검하고 콘센트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화장실과 드레스룸도 꼼꼼히 점검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며 말했다.“아린 씨 방에는 없어요.”도아린은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처음 하경 씨를 만났을 때, 하경 씨는 도둑 잡는 걸 도와주고 있었는데 제가 하경 씨를 도둑으로 오해했었어요. 하경 씨는 좋은 일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결론은 하경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그럼 아린 씨는 제가 자작극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강재민은 자신이 육하경에게 속았다고 느꼈다. 일부러 핀홀카메라를 발견하게 내버려두고 도아린에게 고자질하도록 유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도아린에게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냥 재민 씨가 오해한 걸 수도 있다는 거죠.”“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아린 씨와 함께 있었어요. 이런 걸 할 시간이 없었다고요!”강재민의 손에 들린 장비가 증거였다.도아린은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그냥 하경 씨가 한 거라고 칩시다. 별일 없으면 저는 샤워하러 가야겠어요.”‘그냥이라니 무슨 뜻이지? 그래도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운 건가? 분명히 육하경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