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장한 남자는 소유정을 매섭게 노려보았다.소유정은 더듬거리며 말했다.“저, 저는 방금 왔는데 여기 환경이 너무 안 좋아서 그만두려고요.”“보육원은 복지 기관이니 현재 조건이 다소 열악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제 육 대표님이 리모델링하고 나면 많이 좋아질 거예요.”도아린은 일부러 설득하듯 말했다.“천사 보육원은 현재 많은 네티즌의 관심을 받고 있으니 여기서 계속 있으면 미녀 선생님으로 유명해질 수도 있어요.”“하지만 난...”“돌아가서 잘 생각해보세요.”도아린은 건장한 남자를 보며 말했다.“이분을 보내주세요. 제가 보기엔 남을 것 같아요.”건장한 남자는 당연히 쉽게 풀어주고 싶지 않았다.육하경은 도아린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말했다.“아린 씨가 이분을 집에 모셔다드리면서 길에서 잘 설득해주세요. 젊은이라면 멀리 내다봐야죠.”도아린은 그의 의도를 알았지만, 유진혁을 보며 말했다.“두 분 사귀는 사이죠? 그럼 남자친구분이 집에 데려다주는 게 좋겠네요. 이분은 남자친구 의견을 더욱 신경 쓰는 것 같은데.”건장한 남자가 반응하지 않자 육하경의 표정이 굳어졌다.“왜요? 내 말도 안 통하는 건가요?”남자는 마지못해 손을 놓으며 소유정의 귓가에 속삭였다.“네가 가수라는 걸 알고 있어. 찾으러 갈게.”소유정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비틀거렸다. 그러자 유진혁은 이내 그녀를 부축했다.두 사람은 도아린의 시선 아래 보육원을 떠났고 경비는 차량 번호를 적어두었다.도아린이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배지유가 미친 듯이 뛰어왔다.“도아린! 너 이 뻔뻔한 년! 감히 하경 오빠한테 꼬리 쳐...”배지유가 그녀의 어깨에 걸친 옷을 잡자 도아린은 반대로 배지유의 머리채를 잡았다.“하경 씨는 너를 쳐다보지도 않는데 무슨 자격으로 나랑 싸우겠다는 거야.”“나쁜 년! 오빠한테 다 말해서 혼쭐내 줄 거야!”“어디 한번 해보라지, 오빠가 네 말을 들을지 아니면 내 말을 들을지!”건장한 남자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오늘 한꺼번에 미녀가 셋이나
배건후는 바람을 가르며 다가와 조수석 문을 열더니 도아린을 확 끌어냈다.도아린은 중심을 잃고 배건후의 품에 휘청거리며 쓰러졌다.‘이 남자는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손보미가 병원에서 또 무슨 꼼수라도 부린 건가?’그녀가 잠시 생각할 틈도 없이 뒤에서 배지유의 거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아린, 방금 했던 말 다시 해보시지 그래?”‘얘는 제정신이야?? 내가 아까 농담한 거 몰라? 어떻게 이걸 배건후에게 일러바치겠다는 거지? 그가 아무리 나한테 관심 없다 해도 자기 체면은 중요할 텐데 이렇게 친구 앞에서 망신을 준다면 배지유, 너 오늘 진짜 끝장인 거야.’“오빠! 도아린이 오빠랑 이혼하고 하경 오빠랑 결혼할 거래!”배건후가 머리를 홱 돌렸다.그의 눈빛은 마치 얼어붙은 비수처럼 곧게 날아왔다.배지유는 그 살기에 움츠러들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차 안에 있던 육하경도 그의 위압감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핸들을 꽉 움켜잡았다.아까 도아린은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그런 말을 내뱉었지만, 그는 그녀의 눈에서 작은 희망이라도 찾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머리를 눌린 채 차 안에 들어가고 있었고 그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도아린은 차 문에 팔꿈치를 부딪쳤다. 배건후는 뒤이어 차에 올라타더니 문을 쾅 닫았다.“출발해.”조수현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지시에 따랐다.소유정의 전화가 걸려오자 도아린은 서둘러 받았다.“아린아, 무사한 거야?”소유정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나 괜찮아.”도아린은 스피커를 가리며 작게 말했다.“너 먼저 친구 집에 가 있어. 내가 연락할게.”“그 보육원이 뭔가 이상해. 그들은...”“알고 있어.”도아린이 대화하기 어려운 걸 알아챈 소유정은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건후 씨, 그 보육원 있잖아...”“너 하경이랑 결혼할 거라고?”“그냥 농담이었어.”“농담?”배건후는 코웃음 쳤다.“생각도 참 야무져.”배건후는 그녀가 인터넷에 떠도는 자신과 손보미의 스캔들을
염치가 없는 사람은 봤지만, 이렇게 염치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도아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배 대표님, 저에 대해 너무 신경 쓰시는 거 아니세요?”남자는 냉소하며 답했다.“내가 너를 배 씨 저택에서 데리고 나왔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는 나한테 책임을 물으실 거잖아. 어떻게 밤새 안 들어오고 전화도 안 받을 수 있어?”“잠들어서 못 들었어요.”이 설명은 꽤 그럴듯했다.하지만 남자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는 더욱 짙어졌고 손에 쥔 담배는 거의 부러질 듯했다.“정말 태평이네.”“그럼요. 안 그러면 어떻게 당신이 상간녀랑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걸 보고만 있겠어요.”“...”배건후는 말이 막혔다.그는 손에 남은 담배를 세게 빨아들인 후, 느긋하게 말했다.“보미의 상처는 꽤 심각해.”하니가 다쳤으니 그의 눈에는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큰일이겠지. 더군다나 어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으니, 엄청 마음이 아플 것이다.도아린은 코웃음 쳤다.“당분간은 안 죽어요.”“아린아, 넌 꼭 가시 돋친 것처럼 말해야겠어?”배건후는 불만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성형외과에 연락했으니 흉터 하나도 안 남을 거잖아요. 내가 고슴도치라도 보미한테는 소용없죠.”차가 엠파이어 빌딩의 상업 거리에 진입하자 도아린은 도유준이 사람들을 지휘하며 간판을 거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그래서 다시 고개를 돌려 뒷좌석 창문으로 바라보았지만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내가 잘못 본 건가?손보미가 점포를 내주지 않으면 도정국은 새 가게를 열 수 없었다.그녀가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배건후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말투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누구의 전화인지 뻔했다.차가 멈추자 도아린은 차에서 내리며 일부러 차 문을 세게 닫았다.배건후는 도아린의 옆으로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푹 쉬어야지.”‘개자식, 아까는 손보미 때문에 나를 몰아세우더니, 이젠 또 저렇게 살갑게 굴어? 그렇게 걱정되면 병원에서 지키던가.’그는 도아린의 어
손보미는 초조한 나머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그녀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기자가 밖에서 몰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고아가 아니라 흡혈귀 같은 부모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내가 율이를 치료하는 데 쓴 돈은 모두 건후 씨가 준 거예요. 내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손보미는 아픔을 참고 일어나며 말했다.“나는 건후 씨한테는 고아라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거짓말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는 더 이상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내가 돈이 없으면 두 분도 편하게 살 수 없잖아요.”손강해는 눈을 부릅뜨고 욕을 하려고 했지만 하춘녀가 말렸다.“보미야, 우리도 너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아. 네 동생이 연성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해서 다음 달에 입학하는데 우리도 지낼 곳은 있어야 하잖니?”손보미는 혐오감을 억누르며 곤란한 척했다.“나도 집 살 돈은 마련해 놨었는데, 도아린 그 년에게 드레스 수선비로 6억이나 사기당했어요.”“도아린은 누구야?”“나랑 건후 씨를 빼앗으려는 년이요. 대놓고는 못 하니까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거예요.”손보미는 어젯밤 도아린의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알려주지 않았던 눈빛을 떠올리며 화가 나서 이를 꽉 물었다.“내가 다친 것도 그 여자 때문이에요. 여기서 나를 괴롭힐 시간 있으면, 차라리 가서 그년이나 혼내 주세요.”손강해의 눈빛이 매서워지더니 주먹을 꽉 잡았다.아들 집 마련해 줄 돈이 날아간 생각을 하니 그는 살인 충동까지 느꼈다.“어떻게 생긴 년이야? 어디 사는지 알아?”손보미는 도아린의 사진을 찾아 보냈다.“이 여자는 배경 있는 집안 딸이니 역으로 당하지 않게 조심하세요. 잘못하면 나는 물론이고 동생 인생도 완전히 끝장나니까.”...도아린은 배건후가 산더미같이 원단을 고르는 걸 보고 눈꼬리를 찌푸렸다.그는 아직도 점원에게 원단을 더 가져오라고 지시하고 있었다.배건후의 옷은 모두 디자이너가 맞춤 제작한 것이라 한복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도아린은 처음에는
“저는 대역 안 할 거예요.”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배건후는 그녀가 영화나 드라마 대역을 말하는 줄 알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안 한다면서 촬영장에는 왜 가서 난리를 친 거야.”“그 루비 목걸이 말이에요.”도아린은 말끝을 흐리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배건후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루비 목걸이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여러 곳을 수소문했지만 아무런 소식도 얻지 못했다.배건후가 해명하려는 찰나, 도아린이 말을 이었다.“손보미에게 그 목걸이를 줬으면, 이 원단도 그쪽 주는 게 좋겠네요.”배건후가 정색하며 물었다.“무슨 뜻이야?”도아린은 휴대폰을 꺼내 전자 잡지를 찾았다.표지에는 80% 정도 유사한 루비 목걸이가 있었고 함께 있는 사진 속에는 빨간색 한복이 있었다.“나 손보미의 차에서 이 잡지를 봤거든요. 그 루비 목걸이, 손보미한테 준 거 맞죠?”도아린은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차분하게 말했다.“결국, 돌고 돌아 그 여자 손에 들어갔네요. 그러니 한복도 그냥 그쪽 주세요.”배건후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누가 그 목걸이를 보미에게 줬대?”“고객이 마음에 안 들어 해서 나한테 주는 거라 했잖아요. 당신한테 감히 싫다는 소리를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다만 목걸이만 주고 한복은 안 주니까 누군가가 삐쳐서 싫다고 했겠죠. 그래서 나한테 던져준 거고요.”“아린아, 내가 그 루비를 찾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배건후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됐어. 멍청하기는. 마음대로 생각해.”그는 돌아서서 나가버렸다.도아린은 어이없다는 듯 목을 쓸어 만졌다.‘손보미의 마음도 제대로 모르면서 나를 멍청하다고 하는 거야. 갱년기라도 왔나?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가는 거야?’배건후가 담배 피우러 간 사이, 도아린은 남자 옷감을 고르기 시작했다.“이거, 그리고 이거. 포장해 주세요.”“난 한복 안 입어.”배건후가 갑자기 도아린의 뒤에서 나타났다.도아린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배건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방 매장에서 도아린의 모습을 찾았다.그녀가 자신에게 선물을 사준다고 해서 아까 거리낌 없이 말했던 것을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다.그가 매장으로 들어서자 점원이 맞이했다. 그는 도아린을 가리키며 일행이라고 했다.도아린이 지갑을 고르는 모습을 보자 배건후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답답했던 마음도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도아린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참 고민하다가 그에게 물었다.“어떤 게 좋아요?”배건후는 태연한 척하며 담담하게 말했다.“장지갑이 나아.”도아린은 장지갑을 꺼내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무 고급스러워서 당신이 쓰면 괜찮겠지만, 그 사람이 쓰기에는 너무 눈에 띄어요.”배건후는 움찔하더니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 사람이 누군데?”도아린은 다시 반지갑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남자의 차가운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하경 씨요. 오늘 우릴 많이 도와줬으니 고맙다는 뜻으로 지갑을 선물하려고요.”그는 보육원의 비밀을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소유정을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도아린은 인과응보를 믿는 편이었다. 일단 원인에 개입했으니, 마땅한 결과로 균형을 맞춰야 했다.그녀는 한참 동안 지갑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다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반짝였다. “건후 씨는 하경 씨랑 친하니까 그 사람이 전에 어떤 지갑을 썼는지 알죠?”배건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몰라.”“그럼 지갑이 필요할까요, 벨트가 필요할까요, 아니면...”“내가 걔 속을 어떻게 알아.”도아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남자는 다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이라면 뭘 받고 싶어요?”“사람마다 다 달라.”배건후는 비꼬듯 말했다.“진짜 나한테 선물할 때 물어봐. 괜히 나 머리 쓰게 하지 말고.”그는 홱 돌아서서 매장을 나가버렸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래로 내려갔다.잠시라도 더 그 자리에 있었다간 도아린에게 폭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배지유가 보여준 영상은 흔들려서 그들이 다정하게
배건후의 얼굴은 점점 더 차갑게 굳어갔다.교차로를 지나는 순간, 그가 갑자기 말했다.“회사로 가.”조수현은 황급히 90도로 차를 돌렸다.관성 때문에 도아린은 배건후의 품으로 넘어졌지만, 그는 곧바로 그녀를 밀어냈다.‘미친 거 아냐? 개자식.’마이바흐가 모건 그룹 빌딩 앞에 멈춰 서자 배건후는 차 문을 세게 닫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서류를 나눠주고 있던 우정윤은 배건후가 굳은 얼굴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그는 얼른 차를 타서 사무실로 가져갔다.“대표님, 지시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배건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하마터면 우정윤의 얼굴에 뿜을 뻔했다.그는 차를 탁 내려놓으며 물었다.“천사 보육원 자료는 다 알아봤어?”“네, 알아봤습니다.”우정윤은 재빨리 파일을 가져와 공손하게 배건후에게 건넸다. 굳은 얼굴로 자료를 한 장씩 넘기는 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천사 보육원은 이름을 여섯 번이나 바꿨는데 매번 비리가 적발되어 시정 명령을 받고서야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그들은 이중장부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시설도 이중으로 꾸몄다.사람들에게는 허름한 시설을 보여주고 후원금을 받은 후에는 다른 시설을 보여주며 후원금을 횡령했다.마지막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3년 전이었다. 그 후로는 운영자가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크게 돈을 모으지는 않고 조용히 자선 활동을 하는 것 같았다.배건후의 예리한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자료가 너무 깨끗할수록 더 수상한 법이다.“후원은 일단 보류하고 더 자세히 조사해 봐.”배건후는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지고 차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우정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어제 세인트존스 호텔에서 천사 보육원 리모델링 비용을 전액 부담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배건후는 위험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도아린은 차 안에서 기다리다 거의 잠들 뻔했다. 이때 차가 흔들리더니 배건후가 타고 들어왔다.그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도아린 역시 침묵을 지켰다
배건후는 도아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피부가 너무 건조해.”도아린: “...”그녀가 만져보니 촉촉하기만 했다.도아린은 웃는 얼굴로 몰래 배건후의 팔을 꼬집었다.그녀가 세게 꼬집을수록 배건후는 더 장난을 쳤다.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에 주현정과 윤명희는 웃음을 터뜨렸다.“남자는 결혼해야 성공한다는 말이 맞나 봐요. 건후도 아린이와 결혼하고 나서 사업이 승승장구했거든요.”주현정은 아들 자랑에 신이 났다.“하경아, 너도 얼른 좋은 짝 만나야지.”육하경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건후만큼 운이 좋을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똑똑하고 현숙한 아내를 만나기가 쉽지 않죠.”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았다. 도아린은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니에요. 건후 씨가 워낙 능력이 뛰어나서 그래요.”그러고는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았다.‘봐, 누구든 너보다는 눈썰미가 있어. 다들 나의 좋은 점을 알아보는데 꼭 너만 내 흠을 잡고, 난리잖아.’배건후는 도아린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너무 복잡한 감정이라 도아린은 알고 싶지 않았다.“아린은 배짱도 두둑하고 꼼꼼하기까지 해서 우리 집 못난 놈들보다 훨씬 나아요.”윤명희도 딸바보였다.“제가 집에서 쓰러졌을 때, 그 녀석들은 어쩔 줄 몰라 쩔쩔매기만 하더라고요. 아린이가 있었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진범준은 그때 일을 떠올리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아내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윤명희는 그를 올려다보며 애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육하경 또한 도아린을 정의롭고 용감하며, 남들과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자존감이 높다고 칭찬했다.오늘의 화제는 온통 도아린의 칭찬이었다.칭찬 세례에 도아린은 몸 둘 바를 몰라 배건후의 팔에 매달려 그의 팔을 문질렀다.그런데 갑자기 화제가 바뀌었다.“얘들이 손주 얼굴 좀 빨리 보여주면 좋을 텐데.”주현정의 말에 발꿈치를 들고 수줍어하던 도아린은 순간 멈칫했다.아이가 없는 것은 배건후의 문제였기에, 이 화제는 그가 마무리해야 했다.하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