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건들거리며 자리에 앉아 일부러 면치기를 요란하게 했다.가지 못하게 한다면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할 속셈이었다.배건후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불쾌한 게 확실했지만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우아하게 식사를 했다.도아린은 면치기도 하고 쩝쩝거리기도 하면서 식사를 마쳤지만, 배건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도아린은 먼저 식사를 마치고 포크로 달걀을 건져서 먹었다.“식사는 괜찮아요? 이제 얘기를 나눌 수 있겠어요?”배건후는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검은 눈동자와 긴 속눈썹은 정말 수려했다.껍데기는 이렇게 잘생겼는데 차라리 벙어리였으면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너무 뚫어지게 그에게로 향한 탓인지 저녁 식사가 맛있었던 덕분인지 배건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우아하게 입을 닦았다.“다 봤어?”도아린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진씨 가문이랑 무슨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거예요?”배건후는 시선을 내리고 한참 지나서야 대답했다.“이혼 빼고 다른 요구는 아무거나 해도 돼.”도아린은 손이 떨리며 포크로 집었던 고기 부스러기가 다시 육수로 떨어졌다.“건후 씨, 당신 마음속에는 손보미뿐이잖아요. 왜 나를 당신 사모님 자리에 두지 못해서 안달인 거예요?”“4000억을 갖기 싫은 거야?”배건후가 차갑게 웃었다.“돈을 제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지금은 돈이 별로 아쉽지 않은 게 진씨 가문이 있어서 그래? 진씨 가문의 수양딸이 된다고 해서 그 가문의 재산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어서 나와의 관계를 공개하고 이 기회를 빌려 손보미를 망가뜨려 다시는 복귀 못 하게 할 생각인 거야?”도아린은 포크를 그릇에 떨어뜨리고는 비웃으며 말했다.“배건후, 내가 당신과 비밀결혼이라고 해도 이 바닥에서 아는 사람이 있어. 당신과 손보미의 스캔들에 대한 소문이 자자한데 그 사람들이 다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들이 당신을 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손보미 씨한테 태클을 걸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
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손보미에게 새 사람이 생겼죠? 그래서 지금 나한테서 당신의 자리를 찾으려는 거죠?”3년 전, 감정과 알코올의 힘에 그녀는 방을 잘못 들었었다.하지만 배건후는 정신이 또렷했다. 그는 분명 오해가 있는 걸 알면서도 강제로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그러니 이 남자의 진심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첫사랑한테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와중에 다른 여자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쓰레기 같은 자식!’배건후는 차갑게 웃었다.“내 자리를 찾는다고? 내가 네 생활의 전부잖아? 너는 내가 입고 먹고 이동하는 모든 것을 다 참견하는 데 욕구도 해결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도아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붙어오는 단단한 가슴팍을 느끼며 도아린은 상대방의 눈빛 속에서 이게 농담인 건지 벌을 내리는 건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두려운 기분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도아린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면서 등이 문에 세게 부딪혔다. 그 바람에 문이 갑자기 열렸고 배건후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준 덕분에 뒤로 넘어지지 않았다.배건후는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로 다가갔다.“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 몸은 아주 순종적이네.”도아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격렬하게 발버둥을 쳤다.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쓰러졌고 배건후는 그녀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도아린은 무척 당황했지만,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배건후의 손을 잡았다.“배건후, 이혼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내가 좋아져서야?”배건후는 행동을 멈추고 비웃듯 대답했다.“진씨 가문과의 합작을 위해서 그런다는 거 너 알고 있잖아. 진씨 가문에서는 부부 사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힘을 들여서 스캔들을 무마하는 것보다는 부부 금실이 좋다는 허상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도아린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배건후를 자극하려는 의도였지만 그의 해명을 들었을 때는 그래도 마음이 아팠다.“진씨 가문은 금방 연성에 왔어. 진씨 가문 이전에는 조씨 가문이 있었어... 명문가에서는 모두 부부 사이가 화목하지 못한
배건후는 또 위통이 시작됐다.도아린은 차갑고 평온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정리했다.“손보미가 욕먹은 걸 내 탓으로 돌리고 싶다면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진씨 가문과의 협력은 제가 돕지도 막지도 않을 테니 당신에게 달렸어요. 어머님의 상태는 보셨죠? 언젠가는 약속대로 저에게 20억을 주는 게 좋을 거예요. ”배건후는 거울을 통해 그녀를 보며 차가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아무것도 안 하면서 20억을 원한다고?”“...”도아린은 마음의 파도가 완전히 가라앉은 후에야 말을 이었다.“당신이 진씨 가문과의 합작에 성공했다고 했을 때 설마 나한테 금실 좋은 부부 연기를 계속하게 할 생각은 아니죠?”그렇게 된다면 끝이 없고 이혼은 기약 없이 먼 얘기가 될 것이다.침실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배건후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점점 어두워졌다.한참 후, 그는 턱을 만지며 말했다.“아니.”그날 저녁, 배건후는 또 서재에서 야근했다.도아린은 하는 일마다 순조롭지 못했던 3년 전의 꿈을 꿨다.그녀는 폭설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서 있었고 두 발은 얼어서 감각을 잃었다.목표물이 나타나자 그녀는 황급히 다가가려고 했지만, 다리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바람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장면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그녀의 목적을 알게 된 남자는 따분한 표정이었다. 마치 그녀의 말을 한마디라도 더 들으면 그녀의 불운이 자신에게 옮겨지기라도 하는 듯 얼른 사람들에게 그녀를 쫓아내라고 명령했다.도아린은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눈더미에 버려졌고 간신히 일어섰다.펑펑 쏟아지는 눈은 그녀의 남은 희망까지 파묻었다. 이토록 절망하고 있을 때, 따뜻한 체온이 남아있는 코트가 그녀의 어깨에 걸쳐졌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고 내리는 눈 속에서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았다.꿈에서 깨어나 도아린은 핸드폰 알람을 껐다. 배건후에 모든 기대를 걸었던 탓에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실망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컸다.만약 처음부터 배건후와 돈으로만 맺어진
도아린은 병원에서 율이를 만날 줄 몰랐다. 율이의 가녀린 몸에는 커다란 병원복을 입고 있었고 듬성듬성했던 긴 머리카락도 짧게 변해있었다.“네가 왜...”율이는 다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고 당황해서 뒤돌아보았다.벽에 붙은 1미터 남짓한 타일에는 사람의 실루엣 두 개가 희미하게 비쳤고 그들의 걸음은 멈추었다가 점점 멀어졌다.율이는 자신을 싫어하던 손보미가 문득 떠올라 빠르게 손을 떼고 어색하게 옷에 손을 문질렀다.“죄송해요.”도아린은 쪼그리고 앉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어제 율이를 데리고 와서 검사해야 했는데 세게 부딪힌 것인지 아닌지 걱정되었다.“아니야. 내가 사과해야지. 네 병원비는 내가 책임질게.”“아니에요.”율이가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사실 저는...”“율이야!”보육원의 선생님이 찾으러 나왔다가 율이를 보고 빠르게 다가오더니 율이의 뒤통수를 때렸다.“너 왜 함부로 돌아다니는 거야.”율이의 가녀린 몸이 휘청거렸지만, 여전히 도아린을 보며 웃고 있었다.“살살 해요. 아직 어린 애잖아요.”도아린이 쌀쌀하게 말했다.유은서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누구세요?”“저는...”“제 친구예요. 저를 보러 왔어요.”율이는 도아린의 말을 끊고 그녀의 손을 잡고는 곁에 있는 사람을 소개했다.“이분은 보육원의 유은서 선생님이세요.”유은서는 도아린의 손에 들린 정교한 상자를 보고 율이한테 주는 선물인 줄 알고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아이고, 진작에 말씀하시지. 무거우실 텐데 제게 주세요.”도아린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급하게 오느라 선물을 준비 못 했네요.”유은서는 표정이 확 굳더니 율이를 힐끔 보고 병실 쪽으로 돌아갔다.“이따가 율이가 인터뷰가 있으니 잠깐 보고 가세요.”율이는 도아린의 손을 꼭 잡았고 눈빛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가 서려 있었다.보육원에 위문을 오는 사람은 많지만 거의 다들 생활용품을 주고 사진을 찍고 나서는 거의 오지 않았다.율이는 도아린을 한 번만 보았지만, 이 예쁜 언니를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율이야, 이리로 와. 모두 보미 언니가 너한테 사준 간식이야. 뭐 먹고 싶은지 한번 봐봐.”도아린은 그것을 훑어보았다. 과자, 쿠키, 보기에는 예쁘지만, 맛은 없는 간식들, 그리고 간편 밀크티도 있었다.손보미는 전화를 끊고 과자를 하나 꺼냈다.“토마토 맛이야. 좋아해?”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해요.”손보미는 과자 봉투를 뜯어서 아이에게 건넸다.율이는 하나를 꺼내서 손보미와 눈을 마주쳤다.‘절대 주지 마. 네 손이 닿은 걸 먹고 싶지 않아.’율이는 거부하는 손보미의 시선을 읽었고 손에 들린 과자는 천근 무게처럼 느껴졌다.율이는 그 자리에 굳어서 불안하고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아이는 뒤돌아 도아린을 보았고 그녀는 봄날의 햇살처럼 아이에게 힘을 주었다.“아린 언니, 먹어요.”율이는 도아린에게 주었다. 도아린은 허리를 숙여 절반을 물었다.“너도 먹어.”율이는 남은 절반을 입에 넣었고 환하게 웃었다.아린 언니는 예쁘고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손보미의 시선이 점점 차가워졌다. 도아린이 율이의 병실까지 찾아온 걸 보면 절대 좋은 마음이 아니었다.“도아린, 나 율이랑 동영상을 찍어야 해.”율이는 도아린이 떠나는 게 서운했지만 뭐라고 요구할 수 없어 그저 그녀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도아린은 율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잘 찍고 있어. 또 보러 올게.”병원을 나와 도아린은 부근의 마트로 가서 율이가 먹고 싶어 하는 과자를 찾았다. 짝퉁 브랜드의 몇천 원도 안 되는 과자도 유은서는 율이에게 주기 아까워했다. 보육원에서 율이는 더 먹지 못할 것이다.도아린은 짝퉁이 아닌 제대로 된 브랜드의 과자와 우유 시리얼을 사서 손보미가 떠난 후 다시 율이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도아린은 두 시간 정도 기다렸지만, 손보미가 가지 않을 줄 몰랐고 심지어 배건후도 왔다.율이는 부담감이 너무 커서 몇 번을 찍었지만, 요구를 만족하지 못했다. 손보미는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를 위로하면서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주었고 드디어 율이는
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건후는 도아린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소름이 돋았다.도아린이 배건후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은 마치 웃음 속에 칼날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배건후가 막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손보미가 그를 막아섰다.“의사 선생님이 율이의 상태가 좀 복잡하다고 하셨어. 신장 이식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 의사 선생님 만나러 같이 가줘.”배건후는 잠시 망설였지만, 손보미가 거듭 부탁하자 그녀와 함께 의사를 만나러 갔다.율이는 도아린을 병실로 데려갔다. 방 안에는 온갖 신선한 꽃과 산처럼 쌓인 선물상자들이 가득했다. 이 모든 것을 준비하는 걸 도아린이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정말 많은 사람이 병문안을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피곤하지? 간식 좀 먹고 기운을 보충해.” 도아린은 자신이 사 온 과자를 꺼내서 유은서가 막을 새도 없이 과자를 개봉했다.“이건 내가 산 거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죠?” 도아린은 비아냥거리며 우유도 열었다.“이 과자를 우유를 적셔서 먹는 거 알아?”율이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도아린은 과자 하나를 꺼내 시범을 보이며 말했다.“이렇게 분리해서 우유에 찍어서 먹어...”그녀는 율이의 입에 과자를 넣어주었다.율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처음 먹어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율이가 웃자, 입가에서 우유가 흘러나왔다.도아린은 웃으며 휴지를 꺼내 율이의 입가를 닦아준 후, 과자를 아이의 손에 쥐여주며 직접 먹어보라고 했다.율이는 도아린이 가르쳐준 대로 과자를 입에 넣고 몸을 배배 꼬면서 말했다.“과자처럼 저도 이렇게 비틀 수 있어요.”도아린은 율이의 모습에 배를 잡고 웃었지만, 유은서는 문 앞에서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율이야, 보육원은 아이들은 모두 한 가족이라는 것을 잊지 마. 혼자 독차지하려 하면 안 돼.”유은서가 이렇게 말하자 도아린이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율이가 먹는 약도 나눌까요?”도아린은 간호사에게
도아린이 웃자 율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남자친구 있어요?” “없어.” 도아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쓰레기 같은 남편만 있을 뿐이다.“소원은 입 밖으로 뱉으면 이루어지지 않잖아.”“그럼 어떡해요?” 율이가 눈물을 글썽였다.“다시 마음속으로 조용히 빌면 돼.”“같은 소원을 빌어도 돼요?”“그 소원은 안 비는 게 좋을 것 같네. 나는 그렇게 따뜻함이 하나도 없이 차갑고 항상 자신의 억지 논리를 펼치는 사람은 필요 없거든.” 도아린은 율이의 손을 잡았다.“그럼 보미 언니는…” 율이가 물었다.“보미 언니는 달라. 보미 언니는 운이 좋아서 그 어떤 행동을 해도 그 아저씨는 항상 보미 언니를 소중히 여겨줄 거야.”그때 병실 문이 열렸고 배건후가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어린애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듯한 표정이었다.도아린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율이의 손을 잡은 채 향 주머니를 아이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나 먼저 갈게. 내일 또 보러올게.”율이는 주머니를 꾹 누르며 도아린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손보미는 배건후가 도아린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율이에게 물었다.“무슨 얘기 했어?”보미가 너무 큰 소리로 물어오는 탓에 율이는 움츠리며 대답했다.“아무… 아무 말도 안 했어요.”손보미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미안해. 보미 언니가 너무 큰 소리 말했지? 아린 언니가 계속 내 남자친구를 유혹하려고 해. 저 멋진 아저씨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이 여리단다.”손보미는 율이의 손을 잡고 달래며 말했다.“앞으로 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나한테 알려줘야 해.”율이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아린 언니는 멋진 아저씨 같은 남자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보미 언니는 그녀가 아저씨를 유혹하려고 불쌍한 척한다고 말했다.손보미는 율이의 우상이었지만, 지금은 아린 언니의 말이 더 신뢰가 갔다.손보미는 과자 상자를 집어 들고는 비웃는
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비웃는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율이의 병실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마트에서 홍보 영상을 봤기 때문이고 나는 내연녀한테 골탕을 먹일 거라서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자선이든 뭐든 내 눈에는 다 위선적인 홍보로 보일 뿐인 거죠.”도아린은 잠시 멈췄다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렇죠?”배건후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도 한때는 손보미의 의도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율이를 세심하게 돌보는 손보미의 모습을 보고 한 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녀가 의도적인 목적이 있다고 해도 율이와 보육원이 혜택을 받는다면 좋은 일일 것이다. 도아린의 직설적인 말투에 그는 그녀가 점점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당신 첫사랑의 이미지가 무너지지 않길 원한다면, 내 앞에서 너무 나대지 말라고 전해줘요.”그 말을 남기고 도아린은 돌아서서 떠났다.마침 주차할 자리를 찾고 있던 육하경은 도아린을 발견하고 경적을 울렸다. 도아린은 자신이 곧 차를 뺄 테니 자신의 자리에 주차하라고 손짓했다. 육하경은 도아린의 차 뒤에 잠시 차를 대고 와서 창문을 두드렸다.“아린 씨도 율이를 보러 왔어요?”도아린이 창문을 내렸다. “홍보 효과가 좋은가 봐요.”육하경은 온화한 미소 지으며 차 안을 가리켰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물론이죠.”“방금 천사 보육원에 갔다 왔는데, 사립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시설이 별로 좋지 않더라고요.” 육하경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 “보육원을 새로 리모델링하고 싶어요. 그 기간 아이들은 우리 호텔 뒤뜰에 묵게 하려고요.”“좋은 생각이에요.” 도아린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육하경은 점잖고 다소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린 씨는 제가 이슈를 만들기 위해 이러는 거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최근에 세인트존스 CEO로 임명된 저로서는 뭔가를 해서 호텔의 인지도를 높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게 맞아요.”“의도가 좋다면 이 기회를 빌려 인지도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죠.”
“아린아, 나 찾았어? 의사랑 지유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거든... 무슨 일이야?”신지훈은 유리 너머로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바로 떠나지 않았다.도아린은 코를 긁는 손짓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물었다.“어머님, 건후 씨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갔어요?”“난 안 갔어...”주현정은 후회와 죄책감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와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을 때 주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배건후의 장례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우정윤은 배건후가 누명을 썼다는 것과 회사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주현정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배건후의 사망 소식을 일단 숨기고 회사를 안정시킨 후에 발표하자고 조언했다.주현정은 아들의 마지막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수술로 다소 복구되었지만 사망 후에는 변형이 심해져서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그래서 대부분 우정윤이 나서서 처리했다.“그 말은...”도아린은 깊은숨을 쉬며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말인즉 주현정도 배건후의 시체가 온전한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우 실장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도아린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현정이 물었다.“아린아, 하고 싶은 말이 뭔데?”그녀는 조금이라도 진정하려고 다리를 움켜잡으며 말투를 조절했다.“제가 확인한 후에 말씀드릴게요.”“아린아,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잘 챙겨야 해...”“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도아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더 이상 전화를 끊지 않으면 더 이상 감정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신지훈은 차기 차 쪽으로 돌아가며 계속해서 돌아보았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쇼핑백을 안쪽으로 던졌다.차를 몰고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누가 그를 부른 것만 같이 발걸음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신지훈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차 안을 둘러
하지만 서대은은 계획한 것대로 말하지 않았다. 청룡과 주작이 반대했기 때문에 현무와 백호의 의견이 일치하더라도 상황을 바꾸기는 어려웠다.그래서 강재민은 그냥 순순히 동의하는 척하면서 더 기다려보자는 선택을 했다.서대은 때문에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서대은은 발밑에 있는 유리컵을 한번 훑어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육청아 씨, 저랑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세요?”육청아는 손에 위스키 한 잔을 들고 의자에서 내려왔다.잔을 흔들릴 때마다 얼음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아린 씨가 대은 씨를 믿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쪽 아버지 병이 갑자기 나았다는 걸 아린 씨가 알면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서대은은 시선을 내리며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었다.“제 아버지의 몸으로 협박할 생각 마세요!”육청아는 혀를 차며 서대은의 모습을 비웃었다.“대은 씨 아버지가 받은 장기가 누구 것인지 알아요? 그쪽은 모르겠지만 제가 살짝 입을 열기만 해도 아린 씨는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뭐라는 거죠?”서대은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고는 펜던트를 티셔츠 안에 숨겼다.서대은은 도청 장치를 끈 것이었다. 도아린은 이어폰을 뺐다.‘대은이 아버지가 퇴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기 이식을 받았기 때문이었어? 청아 씨말에 따르면 나랑 연관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그럴 리 없어!’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려 했지만 손끝이 너무 떨려서 그만 놓쳐버렸고 휴드폰은 미끄러져서 틈새로 떨어졌다.도아린이 몸을 숙여 휴대폰을 주울 때,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면서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정말 세상이 넓어서 그런지 별 사람이 있더라고... 상황만 괜찮다면 내가 본때를 보여줄 텐데!”“신 대표님!”도아린의 목소리에 신지훈이 뒤를 돌아보았다.해남시 쇼핑몰 지하 주차장에서 도아린을 만날 줄 몰랐는지 그는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도아린 대표를 만났어. 다음
꽃 모양으로 된 테이블에 네 개 조직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는 ‘라윤주’의 자리였다.도아린은 서대은의 오른쪽에 앉았고 옆에는 현무 조직의 강재민과 육청아가 있었다.육청아는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가끔 그녀를 힐끗히 쳐다봤다. 마스크를 통해서도 그녀의 질투와 혐오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마주 앉은 청룡과 ‘라윤주’는 오랜 친구였다. 온라인에서의 대화를 나눌 때는 익숙한 패턴이었지만 만나게 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아현’이라는 이름으로 비밀조직 LY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네 명의 최고 책임자들을 만났었다. 그때 청룡은 지금과 다른 느낌이었지만 말이다.청룡은 그녀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 듯했다.“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인데 이제 새로운 책임자를 뽑아야 되지 않나요?”백호가 청룡을 보며 말했다.“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청룡은 도아린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제안하고 싶어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유럽식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그는 여전한 옷차림에 여전한 목소리였지만 도아린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3년을 기다렸어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죠?”백호는 주작을 보며 말했다.“그쪽 의견은 어때요?”주작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부드럽게 말했다.“다들 알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당연히 ‘라윤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서대은의 대답은 이전에 육청아와 약속했던 것과 달랐다. 그녀가 살짝 움직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강재민이 책상 아래서 그녀의 발을 차며 입을 다물게 했다.육청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노려보았다.백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튕기며 강재민을 바라봤다.“현무 쪽 의견은 어때요?”강재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바꾸는 건 명분도 없고 순서도 맞지 않으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
그녀는 갑자기 육하경이 차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면 집에도 분명히 설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도아린은 급히 일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빌라 안에 핀홀카메라랑 도청 장치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말이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강재민이 문을 두드렸다.“아린 씨, 쉬고 있어요?”“아직이요.”도아린은 문을 열며 잠옷을 들고 있는 손을 보여주었다. 마치 갈아입으려는 모습이었다.“무슨 일이죠?”“육하경 그 자식이 방에 핀홀카메라를 설치했어요.”강재민은 손에 뜯어낸 장비를 들고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방을 확인해 볼게요!”도아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뭐라고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강재민은 핸드폰에 설치되어 있는 앱으로 벽을 점검하고 콘센트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화장실과 드레스룸도 꼼꼼히 점검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며 말했다.“아린 씨 방에는 없어요.”도아린은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처음 하경 씨를 만났을 때, 하경 씨는 도둑 잡는 걸 도와주고 있었는데 제가 하경 씨를 도둑으로 오해했었어요. 하경 씨는 좋은 일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결론은 하경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그럼 아린 씨는 제가 자작극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강재민은 자신이 육하경에게 속았다고 느꼈다. 일부러 핀홀카메라를 발견하게 내버려두고 도아린에게 고자질하도록 유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도아린에게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냥 재민 씨가 오해한 걸 수도 있다는 거죠.”“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아린 씨와 함께 있었어요. 이런 걸 할 시간이 없었다고요!”강재민의 손에 들린 장비가 증거였다.도아린은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그냥 하경 씨가 한 거라고 칩시다. 별일 없으면 저는 샤워하러 가야겠어요.”‘그냥이라니 무슨 뜻이지? 그래도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운 건가? 분명히 육하경 그
“미안해요. 주 대표님과 약속을 했어서 말할 수 없어요.”강재민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알겠다고 했다. 그녀의 대답을 받아들인 듯했다.도아린이 휴대폰을 꺼내서 일북에게 연락했다.“일 끝나면 도씨 가문 옛날 본가로 와. 내가 도착하면 위치 보내줄게. 택시 타고 와.”“알겠습니다!”일북은 간단하고 명확하게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육하경에게 다시 연락했다.“옛날 집 말이에요. 열쇠 바꿨어요?”“도어락으로 바꿨고요. 비밀번호는 아린 씨 생일로 했어요.”육하경은 부드럽게 말했다.“간단하게 리모델링했는데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제가 다시 손볼게요!”“괜찮아요. 제가 필요한 건 재민 씨가 해결해 줄 거예요.”그녀는 일부러 육하경 앞에서 강재민을 언급하고 강재민 앞에서 육하경을 칭찬했다.“하경 씨 너무 친절하시네요. 이건 단순히 리모델링이 아니라 완전 새로 꾸민 거잖아요! 가구도 다 바뀌었고... 모두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이전에 도정국이 살던 침실은 도하린의 방으로 리모델링되었고 옆 객실은 벽을 허물어 한쪽은 옷장, 나머지 한쪽은 작업실로 만들었다.옷장 안에는 일상적인 옷, 액세서리, 신발, 가방이 준비되어 있었고 작업실에는 그녀가 필요한 테이블, 모델, 다리미, 다양한 실크들이 벽에 정리되어 있었다.“하경 씨가 세인트존스 호텔만 관리한다는 게 시간이 너무 아깝네요...”도아린은 둘러보며 감탄했다.“하경 씨를 모건 그룹으로 데려오는 건 어때요?”“육씨 가문 사람이에요.”강재민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 뒤를 따랐다.도아린은 뒤를 돌아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육민재 씨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같은데요?”강재민의 눈빛이 위험하게 좁아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육씨 가문 사람들은 너무 야망이 커요. 하경 씨를 모건 그룹에 보내면 회사가 육씨가문한테 먹혀버리지 않겠어요?”“야망이 큰 건 육청아죠.”도아린은 차갑게 웃으며 강재민의 표정이 변하는 걸 봤다. 원래 독하던 눈빛에서 살기 서린 눈빛으
도아린이 말을 마치자 강재민은 금세 기뻐하며 억누를 수 없이 즐거운 표정을 드러냈다.반면 맞은편에 있던 신지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주먹을 쥐고 손가락 마디를 소리 나게 꺾으며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했다.“들으셨잖아요? 빨리 처리해 주세요.”그의 차가운 포스에 겁을 먹은 직원은 알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집으로 가려던 길에 강재민은 한술 더 떠서 말했다.“아린 씨, 저 호텔에서 자기 싫어요. 집에 가서 지낼 생각이면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 겸사겸사 아린 씨가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도 보고 싶고요.”“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경호원분도 집에서 자잖아요. 저도 절대 규칙 어기지 않을게요.”“도 대표님.”신지훈이 뒤에서 따라오며, 다소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비록 이혼했다고 해도 배 대표님은 본인 명의의 지분과 자산을 전부 도 대표님에게 넘긴 사람이에요. 감정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배 대표님이 병에 걸린 와중에 배 대표님이 준 돈으로 다른 남자를 먹여 살리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그 말에 도아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그녀는 신지훈을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신 대표님,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 건후 씨가 지분과 자산을 저한테 준 건 자발적인 결정이에요. 제게 준 이상 제가 어떻게 쓰든 제 권리고요. 게다가 사고 나기 전부터 건후 씨는 제가 재민 씨와 사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전부 제게 줬다는 건 제가 재민 씨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됐던 거겠죠. 이렇게까지 저를 아껴주는데 저도 건후 씨가 편히 요양할 수 있도록 재민 씨와 행복하게 살아야죠!”도아린에게 반박당하자 신지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는 턱을 꽉 깨물고 강재민을 조롱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보아하니 강재민 씨는 남의 돈으로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군요. 실례했습니다!”강재민은 원래 반박하려 했지만 신지훈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오히려 능청스럽게 말했다.“제 외모가 아린 씨 이상형이라서
“집을 남겨둔 게 맞는 선택이었네요!”도아린이 반응하기도 전에 육하경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기 집에서 사는 게 호텔보다 편하고 안전하잖아요.”순간, 도아린은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애초에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하고 있어서 집과 차를 남겨뒀다는 건가? 오늘 있었던 모든 일까지 다 계획한 것이었을까?’에스컬레이터에 손을 올려둔 도아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심장도 조여드는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육하경에게 말했다.“그것도 맞네요. 그러니까 제 차도 돌려줘요. 괜히 새로 사면 해남으로 돌아갈 때 다시 팔아야 되잖아요..”고개를 돌려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본 강재민의 눈빛에는 질투가 가득했다.마침 에스컬레이터를 다 내려왔고 그는 다시 도아린을 품 안에 가뒀다.“육하경 씨,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육하경은 도아린을 향해 옅게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주말에 차량 정비 예약해 놨어요. 그때 다시 연락해요.”“그래요.”도아린이 차 키를 받아들였다.강재민은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도아린이 자신의 손을 살짝 쥐는 걸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육하경의 모습이 쇼핑몰 안으로 사라지자 강재민은 불만스럽게 말했다.“제가 차 사줄게요. 해남으로 돌아갈 때면 사람을 시켜서 가져가게 하면 돼요.”“괜찮아요.”“괜찮긴 뭐가 괜찮아요.”강재민이 단호하게 말했다.“내 여자는 남이 베푸는 거 받을 필요 없거든요.”그 말을 들은 도아린은 그저 코를 문지를 뿐, 별다른 해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강재민에게 이끌려 옷 몇 벌을 사고 나왔다.“이 차를 회사로 몰고 가세요. 전 아린 씨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다가 올게요.”강재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북에게 차를 가져가라는 신호를 줬다.일북은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절하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그녀는 차 키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차는 전에 육하경 씨가 타던 거야.
“저기 있는 공룡 캐릭터가 가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도아린이 농구대와 가장 가까운 인형뽑기 기계를 바라보았다.“한번 해보죠.”두 사람은 각각 게임 코인을 바꿨다.도아린은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면서 누가 자신을 시험하는 건지 판단하려 했다.강재민이 연성까지 찾아온 것, 그리고 육하경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우연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만약 강재민이 그저 배건후를 없애려 했다면 이렇게까지 큰 판을 짤 필요가 없었다. 3년을 기다려 배건후의 집안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육하경은 그녀의 USB를 몰래 본 적이 있었으니 분명 배건후의 적이었지만 배건후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 없었다.‘반대로 생각해 보면 배건후가 살아 있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지?’‘재민 씨는 내가 건후 씨랑 다시 이어지는 걸 두려워했으니 당연히 원하지 않겠지. 그러면 하경 씨는? 목적을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워.’도아린은 육하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신경이 인형 뽑기 기계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인형을 집었지만 떨어뜨리고 말았다.“하...”육하경이 한숨을 쉬며 다시 게임 코인을 넣었다.“나이스!”그 소리에 도아린은 정신을 차렸다. 강재민을 보자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이었다.그는 빨리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정말 대단해요!”도아린은 강재민 옆으로 가서 그가 들고 있던 농구공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골대에 들어가지 않았다.“이렇게 던져야 해요. 손목에 힘을 주고요.”강재민이 도아린의 뒤에 서서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 쥐고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그대로 던져요!”도아린은 그의 말대로 손끝의 힘을 모아 공을 던졌다. 공은 링을 맞고 한 바퀴 돌더니 결국 골대를 통과했다.“들어갔어요! 제가 넣었다고요!”도아린은 흥분해서 소리쳤다.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육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했다.그의
“괜찮으세요?”그 남자의 목소리는 배건후와 똑같았지만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았다.도아린의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괜찮아요! 미안해요. 슛 던지는데 제가 방해했네요.”도아린이 쑥스럽게 웃으며 사람들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아린 씨!”육하경이 그녀를 찾아왔다.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그는 주변을 둘러본 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혼자 나왔어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어요?”“아뇨.”도아린은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너무 오래 걸리길래 그냥 나와봤어요.”육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미안해요. 괜히 다툴 게 아니라 그냥 재민 씨가 고른 보호대로 샀을 걸 그랬네요.”“아린 씨!”강재민도 그녀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엉덩이 보호대를 들고 있었다.“괜찮아요?”“괜찮아요. 얼른 스케이트 타러 가요.”도아린은 보호대를 받아 허리에 찼다.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하자 두 남자는 또다시 경쟁을 벌였다.누가 도아린을 가르칠지 다투면서 각자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한 명은 앞으로 돌고, 다른 한 명은 뒤로 돌면서 묘기를 펼쳤다.하지만 도아린은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느라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날 밤 양식장에서 만난 남자, 그리고 방금 만난 남자, 두 사람 모두 체형이 배건후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단순히 체형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같았다. 게다가 농구를 하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될 정도였다.‘건후 씨가 정말 죽었다면 왜 계속해서 날 시험하는 걸까?’다른 사람들은 다들 그녀가 주현정과 함께 병문안을 가서 배건후를 확인한 줄로 알았다.그 병실에 있는 사람이 정말 배건후였다면 도아린이 그를 닮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그렇다면 그들은 그녀의 반응을 통해 배건후가 정말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도아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그녀의 반응으로 인해 상대는 이미 배건후가 병원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