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이 웃자 율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남자친구 있어요?” “없어.” 도아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쓰레기 같은 남편만 있을 뿐이다.“소원은 입 밖으로 뱉으면 이루어지지 않잖아.”“그럼 어떡해요?” 율이가 눈물을 글썽였다.“다시 마음속으로 조용히 빌면 돼.”“같은 소원을 빌어도 돼요?”“그 소원은 안 비는 게 좋을 것 같네. 나는 그렇게 따뜻함이 하나도 없이 차갑고 항상 자신의 억지 논리를 펼치는 사람은 필요 없거든.” 도아린은 율이의 손을 잡았다.“그럼 보미 언니는…” 율이가 물었다.“보미 언니는 달라. 보미 언니는 운이 좋아서 그 어떤 행동을 해도 그 아저씨는 항상 보미 언니를 소중히 여겨줄 거야.”그때 병실 문이 열렸고 배건후가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어린애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듯한 표정이었다.도아린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율이의 손을 잡은 채 향 주머니를 아이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나 먼저 갈게. 내일 또 보러올게.”율이는 주머니를 꾹 누르며 도아린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손보미는 배건후가 도아린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율이에게 물었다.“무슨 얘기 했어?”보미가 너무 큰 소리로 물어오는 탓에 율이는 움츠리며 대답했다.“아무… 아무 말도 안 했어요.”손보미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미안해. 보미 언니가 너무 큰 소리 말했지? 아린 언니가 계속 내 남자친구를 유혹하려고 해. 저 멋진 아저씨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이 여리단다.”손보미는 율이의 손을 잡고 달래며 말했다.“앞으로 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나한테 알려줘야 해.”율이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아린 언니는 멋진 아저씨 같은 남자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보미 언니는 그녀가 아저씨를 유혹하려고 불쌍한 척한다고 말했다.손보미는 율이의 우상이었지만, 지금은 아린 언니의 말이 더 신뢰가 갔다.손보미는 과자 상자를 집어 들고는 비웃는
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비웃는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율이의 병실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마트에서 홍보 영상을 봤기 때문이고 나는 내연녀한테 골탕을 먹일 거라서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자선이든 뭐든 내 눈에는 다 위선적인 홍보로 보일 뿐인 거죠.”도아린은 잠시 멈췄다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렇죠?”배건후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도 한때는 손보미의 의도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율이를 세심하게 돌보는 손보미의 모습을 보고 한 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녀가 의도적인 목적이 있다고 해도 율이와 보육원이 혜택을 받는다면 좋은 일일 것이다. 도아린의 직설적인 말투에 그는 그녀가 점점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당신 첫사랑의 이미지가 무너지지 않길 원한다면, 내 앞에서 너무 나대지 말라고 전해줘요.”그 말을 남기고 도아린은 돌아서서 떠났다.마침 주차할 자리를 찾고 있던 육하경은 도아린을 발견하고 경적을 울렸다. 도아린은 자신이 곧 차를 뺄 테니 자신의 자리에 주차하라고 손짓했다. 육하경은 도아린의 차 뒤에 잠시 차를 대고 와서 창문을 두드렸다.“아린 씨도 율이를 보러 왔어요?”도아린이 창문을 내렸다. “홍보 효과가 좋은가 봐요.”육하경은 온화한 미소 지으며 차 안을 가리켰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물론이죠.”“방금 천사 보육원에 갔다 왔는데, 사립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시설이 별로 좋지 않더라고요.” 육하경은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 “보육원을 새로 리모델링하고 싶어요. 그 기간 아이들은 우리 호텔 뒤뜰에 묵게 하려고요.”“좋은 생각이에요.” 도아린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육하경은 점잖고 다소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아린 씨는 제가 이슈를 만들기 위해 이러는 거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최근에 세인트존스 CEO로 임명된 저로서는 뭔가를 해서 호텔의 인지도를 높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게 맞아요.”“의도가 좋다면 이 기회를 빌려 인지도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죠.”
소유정은 바로 유진혁을 불러 함께 세인트존스의 뒤뜰에 가서 시설을 조사했다. 유진혁은 촬영하고 편집까지 하면서 그녀의 전속 사진사처럼 따라다녔다....주현정이 퇴원하고 싶다고 떼를 쓰자, 유민정은 어떻게 할 수 없어 도아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의사는 환자를 자극하지 말고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에서 하고 싶은 건 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결국, 도아린은 퇴원절차를 밟고 주현정을 저택으로 데려왔다.주현정은 도아린이 주방에서 일하는 틈을 타 배건후에게 전화해서 집으로 오라고 불렀다. 배지유는 TV에서 손보미의 홍보 영상을 찾으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드디어 찾아냈다.“엄마, 지유 언니는 스케줄이 그렇게 바쁜데도 병원에 가서 율이를 챙기고 있어요.” 배지유는 주현정의 팔을 잡고 애교를 부렸다. “사실 인터넷에 떠도는 건 다 헛소문이에요. 지유 언니는 일도 열심히 하고 마음씨도 따뜻해요.”도아린은 과일 차를 내오면서 그 얘기를 들었지만 못 들은 척했다.주현정은 배지유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아서 다른 채널로 돌렸다. “아린아, 엄마가 생일 때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까?”“전에 어머님이랑 아버님이 함께 찍은 사진이 기억나는데 거기서는 어머님이 치파오를 입으셨던 것 같아요.” 도아린은 주현정에게 차를 따르며 말했다. “아버님께 깜짝 이벤트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배지유가 옆에서 비웃으며 말했다. “엄마의 그 치파오는 해남에서 유명한 장인이 직접 만들어 준 건데, 그분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그걸 어떻게 다시 만들 수 있겠어요?”그러다가 배지유는 눈을 반짝이며 제안했다. “새언니가 뛰어난 재단사 밑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그 재단사에게 엄마 치파오를 맡기면 되잖아요. 그게 새언니가 엄마한테 효도하는 좋은 방법일 것 같은데요?”손보미의 말을 들어보면 치마를 수선하는 작업도 몇억이 든다고 하는데 치파오 하나 맞추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다. 돈에 인색한 도아린은 분명 돈을 쓰기 아까워할 것이다. 이
“뭐야, 이제 이 집에서 살기 싫다고 우리 엄마까지 내쫓으려고 하는 거야?”배건후가 거절하기도 전에 배지유가 먼저 반박했다.물론 주현정은 그녀가 도아린을 괴롭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예전의 불쾌한 일들은 다 잊어버렸다. 주현정이 있어야 오빠가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엄마가 출국하는 순간, 오빠가 도아린에게 넘어가서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린이는 그냥 물어본 거야.” 주현정은 딸을 힐끔 보며 핀잔을 줬다. “내가 해외로 가서 네 아빠를 감시해야지. 안 그러면 또 딴짓할지 모르잖니?”사실 주현정이 해외로 나가지 않았던 이유는 아들 배건후에게 빨리 아이를 낳으라는 압박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탓에 진짜 해외로 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시작했다. 사람은 아플 때면 본능적으로 가까운 가족이 그리워지는 법이니까.주현정은 껍질을 깐 귤을 배건후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일은 아린이와 함께 시장으로 가서 나한테 맞는 옷감을 골라줘.”배건후는 신맛을 싫어해 귤을 바로 도아린에게 넘겼다. 그러자 도아린은 귤 한 조각을 떼어 배건후의 입에 넣어주었다.“...”도아린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달죠? 내가 특별히 고른 거예요.”‘어디 한번 신맛에 죽어봐라. 들어올 때도 죽상을 짓고는, 누구를 겁먹게 하려는 거야?’배지유는 이상한 눈빛으로 오빠를 쳐다보았다. 귤의 신맛 때문에 눈썹이 꿈틀거리면서도 그는 달다고 대답했다.‘도아린이 오빠한테 도대체 뭘 한 거야?’유민정이 와서 식사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자 배건후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입안의 귤을 슬며시 뱉었다.식사 자리에서 배지유는 도아린이 자신에게 밥을 퍼주길 바랐지만, 도아린은 주현정에게 먼저 퍼주었고 드물게 배건후가 도아린의 밥을 퍼주었다.“이 정도면 되겠어?”도아린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충분해요.”“...”배지유는 직접 밥을 퍼서 자리에 앉은 후, 계속해서 배건후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오빠,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도아린은 갑작스러운 배건후의 움직임에 작은 비명을 내며 낮은 소리로 나무랐다.“당신 미쳤어?”“계속 소리 내봐.” 배건후가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속삭였다. “엄마가 아직 문 앞에 있어...”도아린은 그와의 친밀함을 마음속으로 거부했지만, 몸은 점점 힘이 풀렸다. 배건후는 다리를 포개며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고 바짝 다가간 도아린은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뚜렷하게 느꼈다.마치 총 한 자루가 그녀를 향해 있는 것 같았고 두려움에 몸부림을 쳤다. 도아린은 배건후의 강렬한 욕망과 그녀를 소유하고자 하는 듯한 눈빛을 읽었다. 배건후는 그녀를 소파에 강하게 눌러 그녀의 입술을 빨아당기면서 숨결을 앗아갔다. 문밖에서 주현정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옆에 있던 배지유가 눈을 흘기며 못마땅해했다. “엄마, 정도껏 해요.”“작게 말해.” 주현정은 방 안에서 더욱 격렬한 소리가 나자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배지유의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가며 물었다. “인턴은 언제 시작할 거니? 네 오빠에게 부탁해서 편한 자리 하나 맡도록 해.”“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배지유가 투덜거렸다. 오빠는 전혀 그녀의 요구를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배건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도아린은 눈가가 촉촉해졌고 부은 입술을 닦아내며 맨발로 침실로 돌아갔다. 배건후는 샤워를 오래 한 후에야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채 그녀 옆에 누워 불을 껐다.어둠 속에서 배건후의 팔이 도아린의 허리 위로 올라왔다. 도아린이 밀어내자 그 팔은 다시 그녀를 감쌌다.“도아린, 나랑 밀당할 생각인 거야?”“건후 씨, 망상도 병이야. 시간 있으면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어요.”“계속하고 싶지 않으면 움직이지 마.” 배건후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이불과 함께 품 안에 가둬두었다.처음엔 그가 몸에서 나는 시원한 느낌이 참을만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가슴이 점점 뜨거워졌다. 도아린은
손보미의 목소리가 커서 조용한 침실 안에서 똑똑히 들렸다. 도아린은 일어나 앉아서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어린이 병원.율이는 로비에서 향주머니를 가지고 놀다가 한 남녀가 고통스러워하는 임신부를 부축하여 병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율이는 저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갔다.임신부는 순산이 어려워 의사가 제왕절개를 권했지만,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의 의사를 물었다. 임산부의 시어머니는 여자가 아이 낳을 때 아픈 게 당연하다면서 뭔 호들갑이냐며 거절했다. 의사가 거듭 설득했지만 두 사람은 끝내 서명을 거부했고 결국 임산부와 아이는 모두 목숨을 잃게 되었다.죽은 아이가 아들이었다는 소식을 들은 시어머니는 통곡하며 난리를 피웠고 죽은 임신부의 남편은 어디선가 과도를 꺼내 들고는 이성을 잃고 휘둘렀다. 율이를 찾고 있던 당직 간호사는 난동을 부리는 환자의 보호자가 동료를 찌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다급하게 외쳤다.“보호자 분, 진정하세요!”“아!”보안 요원이 제때 출동하여 난동을 피우는 남편을 제압해 빈 병실에 가뒀다. 율이는 간호사 품에 매달려 몸을 달달 떨었고 병원은 그녀의 후원자인 손보미에게 즉각 연락했다.손보미는 오늘 밤 계약할 광고 건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인스타에 글을 남긴 국내 브랜드였는데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그녀의 인기로 주목받기를 바라는 브랜드였다. 언론은 율이의 사건을 항상 주시하고 있어 그녀가 율이를 내버려 두고 광고 계약을 위해 갔다가는 쇼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너는 병실에서 얌전히 자고 있을 것이지 뭣 하러 나가서 돌아다녀?”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손보미는 율이를 나무랐다.율이는 침대 머리맡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입술은 파랗게 질렸다.손보미는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진정해. 조금 있다가 기자들이 인터뷰하러 올 수도 있어. 네가 운이 좋네. 그 간호사가 널 제때 발견하지 않았다면 너도 칼에 찔렸을 거야.”율이는 크게 몸을 떨었고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손보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무시하고 배건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의사 말은 뭐래.”“...그냥 놀랐다고 해.”손보미가 뒤돌아보니 율이가 침대에 앉아 도아린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말했다.“오늘 밤 광고를 계약하려고 광고주랑 만나기로 했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 아무리 상대가 국내 최고 브랜드라 해도 어쩔 수 없지. 율이가 안전한 게 제일 중요하니까.”손보미는 일부러 자신의 손해를 크게 말했는데, 배건후가 반드시 그 대가를 배로 보상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배건후는 아무 말이 없었다.손보미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의 그윽한 시선이 도아린에게 고정된 것을 발견한 그녀는 질투심 때문에 미칠 것 같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건후 씨?”“의사 좀 만나봐야겠어.” 배건후는 뒤돌아 걸어갔다.손보미는 율이가 도아린과 단둘이 있는 게 불안했지만, 배건후와 단둘이 있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뒤따라갔다.“아린 언니…” 율이는 몇 번 정도 흐느끼다가 도아린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그 향 주머니가 망가졌어요.”도아린은 그녀의 얼굴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그 향 주머니는 네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거야. 네가 괜찮은 게 무엇보다 중요해.”율이는 고개를 들어 혼란스럽지만, 안도감이 가득한 눈으로 도아린을 바라보았다. 율이는 도아린이 손보미처럼 자신을 나무라거나, 심지어 자신을 때린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율이는 도아린이 자신을 차갑게 대할까 봐 봐 그게 제일 두려웠다.도아린은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졌지만 웃지 않을 때는 차갑고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을 주었다.그러나 지금 율이는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 준다고 느꼈다.손보미가 떠난 것을 확인한 율이가 조용히 말했다. “아린 언니, 저 비밀 하나 알려 드릴게요...”율이는 목소리를 낮추어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그 아저씨가 저한테 달려들 때, 누군가가
“아악!”비명에 간호사가 달려왔고 도아린과 율이도 따라 들어왔다.율이는 손보미의 피투성이가 된 등을 보자 겁에 질려 차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얼굴을 살짝 돌렸다.도아린은 재빨리 율이의 눈을 가리고 그녀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손보미는 배건후의 품에 매달려 그의 팔을 꼭 붙들고 있었다.“건후 씨... 아파... 너무 아파...”배건후는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손보미는 아파서 바들바들 떨면서 그를 생명줄처럼 붙잡고 있었다.남자는 인내심을 갖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의사가 곧 올 거야.”간호사는 당직 의사를 불러와 함께 손보미를 치료실로 옮겼다.그녀의 등에는 모니터의 브라켓에 긁혀 삼각형 모양의 상처가 생겼다. 상처는 깊진 않지만, 꽤 컸다.의사는 피를 닦아내며 미간을 찌푸렸다.“손보미 씨, 우리 병원의 봉합기술로는 흉터가 남을 것 같은데요.”“안 돼요, 흉터는 절대 안 돼요!”손보미는 갑자기 강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상처가 찢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배건후는 힘껏 눌렀다.손보미는 그의 손을 잡고 울며 애원했다.“건후 씨, 난 흉터가 생기면 안 돼. 흉터가 생기면 좋은 드라마도 광고도 다 못 찍는단 말이야...”도아린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배건후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그녀의 무심한 표정에 짜증 난 듯싶었다.어쨌거나 손보미가 이렇게 다쳤는데 그녀는 동정심이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걱정하지 마, 병원에 연락해볼게.”배건후는 몇 마디 위로한 뒤,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그는 도아린의 곁을 지나며 적당히 하라는 듯한 눈짓을 던졌다.손보미의 시선은 배건후를 쫓아가다 결국 도아린의 얼굴에 고정했다.그녀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도아린의 맑은 눈동자에 조롱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도아린 씨.”손보미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바라보았다.“혹시 그 모니터가 고장이 난 거 알면서도 나한테 말 안 한 거야?”도아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