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지유는 상황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지만, 주현정이 말을 꺼내지 않으니 자신도 먼저 도아린에게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닭고기 수프를 데울게요.” 도아린은 보온병을 들고 병실 밖에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주현정은 배건후를 손짓해 부르며 말했다. “앞으로는 아린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정을 쌓아. 그 엉망진창인 사람들과는 깔끔하게 끝내고.” 배건후는 여전히 보온병에 담긴 죽에 신경이 쓰였다. 도아린은 손보미를 보러 간 것도 아니었고 아마 그녀가 입원한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우정윤이 그에게 미리 도아린의 생각을 물어보라고 제안했지만, 배건후는 또다시 도아린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보미 언니는 제 친구예요.” 배지유는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제가 해외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 언니가 저를 돌봐줬잖아요.” 주현정은 그녀를 눈으로 흘기며 말했다. “네 친구는 네가 알아서 만나. 네 오빠를 끌어들이지 말고.” 주현정은 다시 배건후를 바라보며 신신당부했다. “진씨 부부는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을 굉장히 신경 써. 그룹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너는 조심해야 한다. 며칠 후 네 아빠가 돌아왔을 때 네가 진씨 집안과의 협상을 잘 마무리한 걸 알면 굉장히 기뻐할 거다. 이 기간 동안 아린이에게 잘해.” 도아린은 주현정의 말이 끝난 걸 듣고 나서야 문을 두드리고 병실로 들어갔다. “어머니, 닭고기 수프를 데워 왔어요.” 도아린의 발걸음과 함께 병실 안에 풍겨온 것은 진한 닭고기의 향기와 은은한 버섯 향이었다. 배지유는 침을 삼키며 눈치를 살폈지만 먼저 마시고 싶다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도아린도 그녀에게 수프를 권할 생각은 없는 듯, 고기 한 점을 건져내어 반 그릇의 수프와 함께 주현정에게 내밀었다. “천천히 드세요, 뜨거우니까요.” “역시 닭고기 수프가 죽보다 맛있어.” 주현정은 어린아이처럼 만족스럽게 두 그릇을 후루룩 마셨다. 도아린과 배건후는 눈을 마주치며 무언가
“오빠...” 배지유는 겁먹은 듯이 손을 놓으며 말했다. “엄마가 좀 이상해요.” 어제는 주현정이 화가 나서 쓰러졌었는데 오늘은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주현정이 자신을 배려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도아린과 배건후가 떠난 후에 자신을 꾸짖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떠난 후 주현정은 오히려 퇴원 후 생일 파티 준비에 대해 얘기했다. 어젯밤의 불쾌한 일은 전혀 기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배건후의 날카로운 눈빛이 배지유의 속내를 꿰뚫어 보듯이 바라봤다. 그 순간 배지유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손가락을 꼬며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다. 병실에는 CCTV가 있었으니 숨길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어제 도아린이 윤 여사님을 먼저 뵙고 나서 엄마를 보러 올라왔잖아요, 그래서 엄마가 좀 기분이 안 좋았던 거예요.” 배지유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셨을 때 내가 너무 놀라서 도아린을 살짝 밀었어요.” 배건후가 화낼까 봐 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 “정말 살짝 밀었을 뿐이에요. 오늘 보니까 도아린도 멀쩡하잖아요!” 배건후는 냉정하게 물었다. “어머니가 왜 이상하다고 생각해?” 배지유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겨우 입을 뗐다. “엄마가 아까 닭고기 수프를 마실 때 좀 이상했어요... 혹시 뇌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건후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전화를 확인한 후 받았다. “방우진을 찾았어. 바로 그 사람이 날 공격했어. 경찰이 지금 체포하러 가는 중이래.” “어디야? 위치 보내.” 배지유는 육하경의 목소리에 민감했고 방우진이라는 이름에도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서둘러 배건후를 따라나서며 말했다. “나도 갈래요!” “엄마를 돌봐.” “엄마는 유 아주머니가 돌보고 있어요. 난 꼭 그놈이 어떻게 생긴 놈인지 직접 보고 싶어요! 하경 오빠를 그렇게 다치게 한 놈 말이에요.” 배지유가 끝까
배지유는 결단을 내린 듯이 성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갑자기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끝났다. 방우진이 돌아온 것이다. 그 불량배가 분명히 자신을 폭로할 거다! 오빠가 자신이 자료를 훔쳐 그에게 넘겼다는 사실과, 손보미와 공모해 상가를 속여 넘긴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자신을 벌할까? 단지 도아린을 휴게실에 가뒀다는 이유만으로 서재에서 무릎을 꿇게 했던 오빠였다. 만약 이번 일을 알게 되면 관례 상 자신을 때릴지도 모른다.배지유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워졌고, 휴대폰을 꽉 쥔 채 어쩔 수 없이 온몸을 떨었다. 파란색과 빨간색 경찰차 불빛이 눈앞에 다가오자 두 명의 경찰이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다가왔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육하경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배건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경찰은 육하경의 손을 잡고 잠시 침묵한 뒤에 말했다. “죄송합니다.” “놓쳤다는 겁니까?” 육하경이 놀란 듯 물었다. 그중 한 명의 경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희가 방심했습니다. 방우진을 골목에서 데리고 나오던 중, 갑자기 건물 옥상에서 난간이 떨어졌습니다. 그 난간에 동료 한 명이 맞아서 다쳤고 그 틈에 방우진이 도망쳤습니다.” “도망갔다고요?” 배지유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녀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졌고 한참 동안 입술만 떨다가 마침내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도망쳤다니... 도망쳤어...” 경찰은 그녀가 너무 충격을 받은 줄 알고 몇 마디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좋은 소식 하나를 전해주었다. 방우진이 도망치긴 했지만 난간에 달린 창살에 다리가 찔려 상처를 입었고, 경찰이 주변의 작은 병원들을 모두 수색하고 있으니 곧 잡을 수 있다고 했다. 배건후는 육하경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사건의 추가 정보를 물었다. 배지유는 차에 앉아 있었지만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
여자는 도유준을 끌고 도아린에게 다가가더니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저 여자가 신은 신발을 신어보고 싶어요.”도아린이 뒤를 돌아보며 무심한 시선으로 도유준을 한번 훑고, 곧바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번 경마에서 돈을 딴 후 두 배로 돌려준 그 김영실이 자신의 딸이 얼마나 우수한지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도아린은 그때 봤던 사진 속의 이마에 난 점을 떠올렸다.“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죠. 이 신발은 제가 먼저 고른 거예요.” 도아린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먼저 봤다 한들, 살 수 있어요?” 이나윤은 명품 가게에서 신발만 신어보고 사진 찍어 SNS에 올리며 허세를 부리는 가짜 상류층들을 제일 싫어했다. 도유준이 말하길, 그의 누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3년 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의 옷차림을 봐서는 평범한 사람과 결혼했을 게 분명하니, 방금 사진을 찍은 것도 그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도아린은 의자에 앉아 발을 올리고 신발을 감상하며 말했다. “이렇게 비싼 신발, 당연히 신어보고 편하면 살지 말지 결정해야죠.” 이나윤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건 한정판이에요. 돈 있다고 누구나 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녀는 판매원 쪽을 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 기억에 한정판은 경매로 살 수 있죠? 두 배로 부를게요.”도아린은 도유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계산하는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도유준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정국이 준 카드는 대부분 이나윤을 위해 썼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부모님께 소개하지 않았다. 오늘도 겨우 상가로 그녀를 달랬는데 도아린이 또 상황을 망치려 하고 있었다. 도유준은 가격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600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는데 카드에 남은 돈이 부족했다.“그만해, 나윤아. 저쪽에 더 좋은 것도 있어.” 도유준은 이나윤의 어깨를 감싸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나윤은 도아린을 비웃으
만약 여기가 공공장소가 아니었다면 이나윤은 당장 도아린을 죽여버리고 싶었다.판매원은 더욱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이나윤에게 신발을 내밀었다.“앉으세요, 제가 직접 신겨드릴게요.” “필요 없어요! 집에 가서 소독한 다음에 신을 거예요. 저 여자가 무좀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이 사이즈 맞으시나요? 경매로 구입한 한정판은 교환이나 환불이 안 됩니다.” 판매원이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이나윤은 이미 도아린에게 크게 화가 나 감정이 격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카운터를 두드리며 말했다. “산다고 했으니 당연히 맞죠. 더 말 많으면 고객센터에 의견 제기할 테니까 알아서 해요!” 이나윤은 화를 내더니 도유준을 노려보았다. “이 신발 사주면 부모님께 널 소개해 줄 생각은 해볼게.” 이나윤은 절대 바보가 아니었다. 단순히 도아린과의 감정싸움 때문에 2억을 쓰는 일은 없었다. 이 일이 도유준 때문에 시작됐으니 당연히 그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유준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는 도아린이 몹시 미웠다. 그저 신발 한 켤레일 뿐인데 이나윤에게 양보했더라면 2억을 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문제는 그에게 그만한 돈이 없다는 것이다.도아린은 카운터 옆에 기대어 앉아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며 도유준이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도유준은 마음을 굳히고 도정국이 준 4억 원의 창업 자금을 꺼냈다. “나윤아, 한 번 신어 보는 게 어때?”혹시라도 맞지 않으면 돈을 아낄 수 있으니까.이나윤은 그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아 판매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 발 사이즈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판매원은 이번 달의 보너스를 벌게 되어 기쁜 나머지, 즉시 결제를 하고는 매장 매니저까지 불러 와 함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신상품이 들어왔을 때 우선적으로 연락드릴 수 있습니다.” 이나윤은 씩씩거리며 이름과 전화번호를 빠르게 적어 판매원에게 건넸다.
도유준의 이마엔 땀이 맺혔다. 그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나윤아...” “쓸모없는 놈!” 이나윤은 힘껏 발을 내디뎠고 신발은 억지로 들어갔다. “아!” 도유준의 손가락이 뾰족한 굽에 깔려 아파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나윤은 신발이 맞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도아린 앞에서 일부러 발을 꾹꾹 굴렀다. “정말 편하네요. 미안해요, 아끼던 걸 뺏어서.” 이나윤은 도유준의 팔을 끌고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떠났다.“너 간 줄 알았어.” 소유정이 전화를 걸어 도아린을 찾았고 그녀는 벨 소리를 따라왔다. 도아린은 2000만 원짜리 상품권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작은 돈 좀 벌었어. 너 옷 사줄게.” “정말?” 소유정은 도아린의 목에 팔을 감고 눈웃음을 지었다. “역시 너는 사업 수완이 있어.” 도아린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정국에게서 책임을 묻는 전화가 걸려 왔다. 도유준이 집에 돌아가서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도아린이 억지로 여자 친구에게 신발을 사게 했고 일부러 가격을 올렸다고. 결국 그는 베이커리 창업 자금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유준이가 네가 그 매장의 VIP 회원이라고 하던데, 그 신발을 어떻게든 반품해 봐.” “그 신발은 이미 도유준 여자 친구가 신고 쇼핑했어요. 재판매 불가라서 환불은 어려워요.” 도아린은 문을 열며 머리로 휴대폰을 고정시킨 채 신발장을 뒤졌다. 집안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배건후는 아마 오늘도 집에 오지 않았나 보다. 집에 없는 게 차라리 좋았다. 그녀는 이 조용함이 마음에 들었다. “도대체 어떤 신발이 2억이 하냐? 다이아라도 박혔어? 네 동생이 겨우 여자 친구를 사귄 건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해? 도아린,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 도아린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 신발 내가 먼저 본 거고, 그 여자가 높은 가격을 불러서 뺏어간 거예요. 도유준은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자기 돈을 다 썼죠. 제가 뭐 어쩌겠어요?” “유준이 여자 친
좋은 마음으로 그를 도와서 유럽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손보미와도 잘 되게 했지만, 어찌 그는 자신의 이런 마음도 몰라주고 이상한 말만 하고 있다.“말해봐요. 이혼한다고 하면 제가 어떻게 도와줄까요.”병원에서 손보미의 곁을 지키지도 않고 회사에서 야근도 하지 않고 배건후가 지금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그녀에게 요구를 제시하고 싶은 게 뻔했다.분명 본인이 먼저 부탁할 사안이 있으면서도 저렇게 도도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남자의 자존심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배건후는 그녀의 손에 들린 백 팩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짐은 아직도 갖고 오지 않고 옷만 몇 견지 들고 와서 자고 가고, 여기가 호텔인 줄 알아?”도아린은 그를 흘겨보았다. 3년 동안 그녀는 집을 자주 나갔었다. 배건후는 한 번도 잡은 적이 없었고 항상 도아린 스스로가 견디지 못해서 돌아오곤 했다. 언제부터 그는 그녀가 짐을 갖고 들어와서 머무는지 짧게 머물다 가는지를 신경 썼는지 모를 일이다.이렇게 쓸데없는 말들을 하는 건 도아린에게 그녀가 을이라는 것을 깨우쳐주면서 배건후의 말을 순순히 따르라는 의미였다.도아린은 가방을 소파에 던지고는 한숨을 쉬었다.“건후 씨, 우리 오늘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봅시다. 어때요?”배건후는 위를 꾹 누르면서 귀찮다는 표정이었다,“위가 쓰려. 말할 기분 아니야.”“...”도아린은 배건후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는 타협하듯 말했다.“뭘 좀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요?”“한번 시도해봐.”배건후가 뜨뜻미지근하게 말했다.‘시도는 무슨!’영양 밥상 같은 건 절대 다시 만드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면 배건후는 화를 낼 게 분명했다.하지만 배건후는 얘기를 할 마음이 없고 얘기를 하려면 반드시 자신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도도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도아린은 열심히 감정을 조절했다. 배건후가 순순히 합의이혼을 해준다면 더 참을 수 있다.도아린은 뒤돌아 주방으로 갔다. 지난 이틀간 그녀는 집에서 식사하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에서 열쇠를 갖고 먼저 운전석에 올라탔다.도아린이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경적을 울렸다.“왜, 내 말에 속이 뜨끔했어?”도아린은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라타서 안전띠를 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배건후의 눈빛이 부드러워졌고 핸들을 돌리는 손짓조차 음악에 따라 움직인다고 느꼈다.맨션의 부근에 마트가 있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을 데리고 멀리 있는 큰 백화점으로 갔다.도아린은 카트를 밀며 앞에서 걷고 있었고 배건후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느릿느릿 뒤따라오고 있었다. 백화점 안의 마트는 최근에 다시 리모델링해서 상품의 종류가 많았고 도아린은 한참을 돌아다녀도 채소와 과일을 파는 구역을 찾지 못했다.뒤에서는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일부러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는 거야? 내가 네 남자라고 자랑하고 싶어?”“건후 씨,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다른 곳에 돌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린은 가소롭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채소 구역으로 갔다.감자, 당근, 버섯, 새우...배건후는 카트에 담긴 채소들이 모두 그가 주문한 음식 재료들이 아닌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도아린, 귀가 먹은 거야 아니면 일부러 나 골탕 먹이는 거야? 네가 나한테 부탁할 입장이라는 거 잊지 마. 이런 식으로 하면 나는 절대 사인 안 해.”도아린은 뒤돌아 그를 보았다.“나는 귀가 먹지도 멍청하지도 않아요. 더 투정 부린다면 음식에 독을 풀어서 벙어리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배건후는 화가 나서 위가 뒤틀렸다.이런 소리를 하다니, 도아린은 겁을 상실한 게 분명했다. 배건후는 위를 어루만지다가 뒤돌았는데 도아린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는 진열대의 끝에 멈춰 섰다. 작은 스크린에서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는 손보미가 보육원의 아이들을 위해 더 많은 사람이 아이들의 심리 건강에 신경을 써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전에 도아린이 부딪혔던 여자아이는 손보미의 곁에 딱 붙어있었다. 자신의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