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지유는 결단을 내린 듯이 성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갑자기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끝났다. 방우진이 돌아온 것이다. 그 불량배가 분명히 자신을 폭로할 거다! 오빠가 자신이 자료를 훔쳐 그에게 넘겼다는 사실과, 손보미와 공모해 상가를 속여 넘긴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자신을 벌할까? 단지 도아린을 휴게실에 가뒀다는 이유만으로 서재에서 무릎을 꿇게 했던 오빠였다. 만약 이번 일을 알게 되면 관례 상 자신을 때릴지도 모른다.배지유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워졌고, 휴대폰을 꽉 쥔 채 어쩔 수 없이 온몸을 떨었다. 파란색과 빨간색 경찰차 불빛이 눈앞에 다가오자 두 명의 경찰이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다가왔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육하경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배건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경찰은 육하경의 손을 잡고 잠시 침묵한 뒤에 말했다. “죄송합니다.” “놓쳤다는 겁니까?” 육하경이 놀란 듯 물었다. 그중 한 명의 경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희가 방심했습니다. 방우진을 골목에서 데리고 나오던 중, 갑자기 건물 옥상에서 난간이 떨어졌습니다. 그 난간에 동료 한 명이 맞아서 다쳤고 그 틈에 방우진이 도망쳤습니다.” “도망갔다고요?” 배지유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녀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졌고 한참 동안 입술만 떨다가 마침내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도망쳤다니... 도망쳤어...” 경찰은 그녀가 너무 충격을 받은 줄 알고 몇 마디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좋은 소식 하나를 전해주었다. 방우진이 도망치긴 했지만 난간에 달린 창살에 다리가 찔려 상처를 입었고, 경찰이 주변의 작은 병원들을 모두 수색하고 있으니 곧 잡을 수 있다고 했다. 배건후는 육하경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사건의 추가 정보를 물었다. 배지유는 차에 앉아 있었지만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
여자는 도유준을 끌고 도아린에게 다가가더니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저 여자가 신은 신발을 신어보고 싶어요.”도아린이 뒤를 돌아보며 무심한 시선으로 도유준을 한번 훑고, 곧바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번 경마에서 돈을 딴 후 두 배로 돌려준 그 김영실이 자신의 딸이 얼마나 우수한지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도아린은 그때 봤던 사진 속의 이마에 난 점을 떠올렸다.“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죠. 이 신발은 제가 먼저 고른 거예요.” 도아린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먼저 봤다 한들, 살 수 있어요?” 이나윤은 명품 가게에서 신발만 신어보고 사진 찍어 SNS에 올리며 허세를 부리는 가짜 상류층들을 제일 싫어했다. 도유준이 말하길, 그의 누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3년 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의 옷차림을 봐서는 평범한 사람과 결혼했을 게 분명하니, 방금 사진을 찍은 것도 그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도아린은 의자에 앉아 발을 올리고 신발을 감상하며 말했다. “이렇게 비싼 신발, 당연히 신어보고 편하면 살지 말지 결정해야죠.” 이나윤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건 한정판이에요. 돈 있다고 누구나 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녀는 판매원 쪽을 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 기억에 한정판은 경매로 살 수 있죠? 두 배로 부를게요.”도아린은 도유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계산하는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도유준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정국이 준 카드는 대부분 이나윤을 위해 썼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부모님께 소개하지 않았다. 오늘도 겨우 상가로 그녀를 달랬는데 도아린이 또 상황을 망치려 하고 있었다. 도유준은 가격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600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는데 카드에 남은 돈이 부족했다.“그만해, 나윤아. 저쪽에 더 좋은 것도 있어.” 도유준은 이나윤의 어깨를 감싸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나윤은 도아린을 비웃으
만약 여기가 공공장소가 아니었다면 이나윤은 당장 도아린을 죽여버리고 싶었다.판매원은 더욱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이나윤에게 신발을 내밀었다.“앉으세요, 제가 직접 신겨드릴게요.” “필요 없어요! 집에 가서 소독한 다음에 신을 거예요. 저 여자가 무좀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이 사이즈 맞으시나요? 경매로 구입한 한정판은 교환이나 환불이 안 됩니다.” 판매원이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이나윤은 이미 도아린에게 크게 화가 나 감정이 격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카운터를 두드리며 말했다. “산다고 했으니 당연히 맞죠. 더 말 많으면 고객센터에 의견 제기할 테니까 알아서 해요!” 이나윤은 화를 내더니 도유준을 노려보았다. “이 신발 사주면 부모님께 널 소개해 줄 생각은 해볼게.” 이나윤은 절대 바보가 아니었다. 단순히 도아린과의 감정싸움 때문에 2억을 쓰는 일은 없었다. 이 일이 도유준 때문에 시작됐으니 당연히 그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유준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는 도아린이 몹시 미웠다. 그저 신발 한 켤레일 뿐인데 이나윤에게 양보했더라면 2억을 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문제는 그에게 그만한 돈이 없다는 것이다.도아린은 카운터 옆에 기대어 앉아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며 도유준이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도유준은 마음을 굳히고 도정국이 준 4억 원의 창업 자금을 꺼냈다. “나윤아, 한 번 신어 보는 게 어때?”혹시라도 맞지 않으면 돈을 아낄 수 있으니까.이나윤은 그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아 판매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 발 사이즈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판매원은 이번 달의 보너스를 벌게 되어 기쁜 나머지, 즉시 결제를 하고는 매장 매니저까지 불러 와 함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신상품이 들어왔을 때 우선적으로 연락드릴 수 있습니다.” 이나윤은 씩씩거리며 이름과 전화번호를 빠르게 적어 판매원에게 건넸다.
도유준의 이마엔 땀이 맺혔다. 그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나윤아...” “쓸모없는 놈!” 이나윤은 힘껏 발을 내디뎠고 신발은 억지로 들어갔다. “아!” 도유준의 손가락이 뾰족한 굽에 깔려 아파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나윤은 신발이 맞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도아린 앞에서 일부러 발을 꾹꾹 굴렀다. “정말 편하네요. 미안해요, 아끼던 걸 뺏어서.” 이나윤은 도유준의 팔을 끌고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떠났다.“너 간 줄 알았어.” 소유정이 전화를 걸어 도아린을 찾았고 그녀는 벨 소리를 따라왔다. 도아린은 2000만 원짜리 상품권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작은 돈 좀 벌었어. 너 옷 사줄게.” “정말?” 소유정은 도아린의 목에 팔을 감고 눈웃음을 지었다. “역시 너는 사업 수완이 있어.” 도아린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정국에게서 책임을 묻는 전화가 걸려 왔다. 도유준이 집에 돌아가서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도아린이 억지로 여자 친구에게 신발을 사게 했고 일부러 가격을 올렸다고. 결국 그는 베이커리 창업 자금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유준이가 네가 그 매장의 VIP 회원이라고 하던데, 그 신발을 어떻게든 반품해 봐.” “그 신발은 이미 도유준 여자 친구가 신고 쇼핑했어요. 재판매 불가라서 환불은 어려워요.” 도아린은 문을 열며 머리로 휴대폰을 고정시킨 채 신발장을 뒤졌다. 집안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배건후는 아마 오늘도 집에 오지 않았나 보다. 집에 없는 게 차라리 좋았다. 그녀는 이 조용함이 마음에 들었다. “도대체 어떤 신발이 2억이 하냐? 다이아라도 박혔어? 네 동생이 겨우 여자 친구를 사귄 건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해? 도아린,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 도아린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 신발 내가 먼저 본 거고, 그 여자가 높은 가격을 불러서 뺏어간 거예요. 도유준은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자기 돈을 다 썼죠. 제가 뭐 어쩌겠어요?” “유준이 여자 친
좋은 마음으로 그를 도와서 유럽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손보미와도 잘 되게 했지만, 어찌 그는 자신의 이런 마음도 몰라주고 이상한 말만 하고 있다.“말해봐요. 이혼한다고 하면 제가 어떻게 도와줄까요.”병원에서 손보미의 곁을 지키지도 않고 회사에서 야근도 하지 않고 배건후가 지금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그녀에게 요구를 제시하고 싶은 게 뻔했다.분명 본인이 먼저 부탁할 사안이 있으면서도 저렇게 도도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남자의 자존심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배건후는 그녀의 손에 들린 백 팩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짐은 아직도 갖고 오지 않고 옷만 몇 견지 들고 와서 자고 가고, 여기가 호텔인 줄 알아?”도아린은 그를 흘겨보았다. 3년 동안 그녀는 집을 자주 나갔었다. 배건후는 한 번도 잡은 적이 없었고 항상 도아린 스스로가 견디지 못해서 돌아오곤 했다. 언제부터 그는 그녀가 짐을 갖고 들어와서 머무는지 짧게 머물다 가는지를 신경 썼는지 모를 일이다.이렇게 쓸데없는 말들을 하는 건 도아린에게 그녀가 을이라는 것을 깨우쳐주면서 배건후의 말을 순순히 따르라는 의미였다.도아린은 가방을 소파에 던지고는 한숨을 쉬었다.“건후 씨, 우리 오늘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봅시다. 어때요?”배건후는 위를 꾹 누르면서 귀찮다는 표정이었다,“위가 쓰려. 말할 기분 아니야.”“...”도아린은 배건후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는 타협하듯 말했다.“뭘 좀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요?”“한번 시도해봐.”배건후가 뜨뜻미지근하게 말했다.‘시도는 무슨!’영양 밥상 같은 건 절대 다시 만드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면 배건후는 화를 낼 게 분명했다.하지만 배건후는 얘기를 할 마음이 없고 얘기를 하려면 반드시 자신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도도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도아린은 열심히 감정을 조절했다. 배건후가 순순히 합의이혼을 해준다면 더 참을 수 있다.도아린은 뒤돌아 주방으로 갔다. 지난 이틀간 그녀는 집에서 식사하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에서 열쇠를 갖고 먼저 운전석에 올라탔다.도아린이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경적을 울렸다.“왜, 내 말에 속이 뜨끔했어?”도아린은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라타서 안전띠를 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배건후의 눈빛이 부드러워졌고 핸들을 돌리는 손짓조차 음악에 따라 움직인다고 느꼈다.맨션의 부근에 마트가 있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을 데리고 멀리 있는 큰 백화점으로 갔다.도아린은 카트를 밀며 앞에서 걷고 있었고 배건후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느릿느릿 뒤따라오고 있었다. 백화점 안의 마트는 최근에 다시 리모델링해서 상품의 종류가 많았고 도아린은 한참을 돌아다녀도 채소와 과일을 파는 구역을 찾지 못했다.뒤에서는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일부러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는 거야? 내가 네 남자라고 자랑하고 싶어?”“건후 씨,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다른 곳에 돌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린은 가소롭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채소 구역으로 갔다.감자, 당근, 버섯, 새우...배건후는 카트에 담긴 채소들이 모두 그가 주문한 음식 재료들이 아닌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도아린, 귀가 먹은 거야 아니면 일부러 나 골탕 먹이는 거야? 네가 나한테 부탁할 입장이라는 거 잊지 마. 이런 식으로 하면 나는 절대 사인 안 해.”도아린은 뒤돌아 그를 보았다.“나는 귀가 먹지도 멍청하지도 않아요. 더 투정 부린다면 음식에 독을 풀어서 벙어리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배건후는 화가 나서 위가 뒤틀렸다.이런 소리를 하다니, 도아린은 겁을 상실한 게 분명했다. 배건후는 위를 어루만지다가 뒤돌았는데 도아린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는 진열대의 끝에 멈춰 섰다. 작은 스크린에서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는 손보미가 보육원의 아이들을 위해 더 많은 사람이 아이들의 심리 건강에 신경을 써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전에 도아린이 부딪혔던 여자아이는 손보미의 곁에 딱 붙어있었다. 자신의 보고
도아린은 건들거리며 자리에 앉아 일부러 면치기를 요란하게 했다.가지 못하게 한다면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할 속셈이었다.배건후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불쾌한 게 확실했지만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우아하게 식사를 했다.도아린은 면치기도 하고 쩝쩝거리기도 하면서 식사를 마쳤지만, 배건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도아린은 먼저 식사를 마치고 포크로 달걀을 건져서 먹었다.“식사는 괜찮아요? 이제 얘기를 나눌 수 있겠어요?”배건후는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검은 눈동자와 긴 속눈썹은 정말 수려했다.껍데기는 이렇게 잘생겼는데 차라리 벙어리였으면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너무 뚫어지게 그에게로 향한 탓인지 저녁 식사가 맛있었던 덕분인지 배건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우아하게 입을 닦았다.“다 봤어?”도아린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진씨 가문이랑 무슨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거예요?”배건후는 시선을 내리고 한참 지나서야 대답했다.“이혼 빼고 다른 요구는 아무거나 해도 돼.”도아린은 손이 떨리며 포크로 집었던 고기 부스러기가 다시 육수로 떨어졌다.“건후 씨, 당신 마음속에는 손보미뿐이잖아요. 왜 나를 당신 사모님 자리에 두지 못해서 안달인 거예요?”“4000억을 갖기 싫은 거야?”배건후가 차갑게 웃었다.“돈을 제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지금은 돈이 별로 아쉽지 않은 게 진씨 가문이 있어서 그래? 진씨 가문의 수양딸이 된다고 해서 그 가문의 재산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어서 나와의 관계를 공개하고 이 기회를 빌려 손보미를 망가뜨려 다시는 복귀 못 하게 할 생각인 거야?”도아린은 포크를 그릇에 떨어뜨리고는 비웃으며 말했다.“배건후, 내가 당신과 비밀결혼이라고 해도 이 바닥에서 아는 사람이 있어. 당신과 손보미의 스캔들에 대한 소문이 자자한데 그 사람들이 다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들이 당신을 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손보미 씨한테 태클을 걸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
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손보미에게 새 사람이 생겼죠? 그래서 지금 나한테서 당신의 자리를 찾으려는 거죠?”3년 전, 감정과 알코올의 힘에 그녀는 방을 잘못 들었었다.하지만 배건후는 정신이 또렷했다. 그는 분명 오해가 있는 걸 알면서도 강제로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그러니 이 남자의 진심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첫사랑한테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와중에 다른 여자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쓰레기 같은 자식!’배건후는 차갑게 웃었다.“내 자리를 찾는다고? 내가 네 생활의 전부잖아? 너는 내가 입고 먹고 이동하는 모든 것을 다 참견하는 데 욕구도 해결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도아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붙어오는 단단한 가슴팍을 느끼며 도아린은 상대방의 눈빛 속에서 이게 농담인 건지 벌을 내리는 건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두려운 기분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도아린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면서 등이 문에 세게 부딪혔다. 그 바람에 문이 갑자기 열렸고 배건후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준 덕분에 뒤로 넘어지지 않았다.배건후는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로 다가갔다.“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 몸은 아주 순종적이네.”도아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격렬하게 발버둥을 쳤다.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쓰러졌고 배건후는 그녀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도아린은 무척 당황했지만,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배건후의 손을 잡았다.“배건후, 이혼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내가 좋아져서야?”배건후는 행동을 멈추고 비웃듯 대답했다.“진씨 가문과의 합작을 위해서 그런다는 거 너 알고 있잖아. 진씨 가문에서는 부부 사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힘을 들여서 스캔들을 무마하는 것보다는 부부 금실이 좋다는 허상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도아린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배건후를 자극하려는 의도였지만 그의 해명을 들었을 때는 그래도 마음이 아팠다.“진씨 가문은 금방 연성에 왔어. 진씨 가문 이전에는 조씨 가문이 있었어... 명문가에서는 모두 부부 사이가 화목하지 못한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