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도유준을 끌고 도아린에게 다가가더니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저 여자가 신은 신발을 신어보고 싶어요.”도아린이 뒤를 돌아보며 무심한 시선으로 도유준을 한번 훑고, 곧바로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번 경마에서 돈을 딴 후 두 배로 돌려준 그 김영실이 자신의 딸이 얼마나 우수한지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도아린은 그때 봤던 사진 속의 이마에 난 점을 떠올렸다.“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죠. 이 신발은 제가 먼저 고른 거예요.” 도아린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먼저 봤다 한들, 살 수 있어요?” 이나윤은 명품 가게에서 신발만 신어보고 사진 찍어 SNS에 올리며 허세를 부리는 가짜 상류층들을 제일 싫어했다. 도유준이 말하길, 그의 누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3년 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의 옷차림을 봐서는 평범한 사람과 결혼했을 게 분명하니, 방금 사진을 찍은 것도 그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도아린은 의자에 앉아 발을 올리고 신발을 감상하며 말했다. “이렇게 비싼 신발, 당연히 신어보고 편하면 살지 말지 결정해야죠.” 이나윤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건 한정판이에요. 돈 있다고 누구나 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녀는 판매원 쪽을 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 기억에 한정판은 경매로 살 수 있죠? 두 배로 부를게요.”도아린은 도유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계산하는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도유준은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정국이 준 카드는 대부분 이나윤을 위해 썼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부모님께 소개하지 않았다. 오늘도 겨우 상가로 그녀를 달랬는데 도아린이 또 상황을 망치려 하고 있었다. 도유준은 가격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6000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는데 카드에 남은 돈이 부족했다.“그만해, 나윤아. 저쪽에 더 좋은 것도 있어.” 도유준은 이나윤의 어깨를 감싸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나윤은 도아린을 비웃으
만약 여기가 공공장소가 아니었다면 이나윤은 당장 도아린을 죽여버리고 싶었다.판매원은 더욱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이나윤에게 신발을 내밀었다.“앉으세요, 제가 직접 신겨드릴게요.” “필요 없어요! 집에 가서 소독한 다음에 신을 거예요. 저 여자가 무좀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이 사이즈 맞으시나요? 경매로 구입한 한정판은 교환이나 환불이 안 됩니다.” 판매원이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이나윤은 이미 도아린에게 크게 화가 나 감정이 격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카운터를 두드리며 말했다. “산다고 했으니 당연히 맞죠. 더 말 많으면 고객센터에 의견 제기할 테니까 알아서 해요!” 이나윤은 화를 내더니 도유준을 노려보았다. “이 신발 사주면 부모님께 널 소개해 줄 생각은 해볼게.” 이나윤은 절대 바보가 아니었다. 단순히 도아린과의 감정싸움 때문에 2억을 쓰는 일은 없었다. 이 일이 도유준 때문에 시작됐으니 당연히 그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유준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는 도아린이 몹시 미웠다. 그저 신발 한 켤레일 뿐인데 이나윤에게 양보했더라면 2억을 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다. 문제는 그에게 그만한 돈이 없다는 것이다.도아린은 카운터 옆에 기대어 앉아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며 도유준이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도유준은 마음을 굳히고 도정국이 준 4억 원의 창업 자금을 꺼냈다. “나윤아, 한 번 신어 보는 게 어때?”혹시라도 맞지 않으면 돈을 아낄 수 있으니까.이나윤은 그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아 판매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 발 사이즈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판매원은 이번 달의 보너스를 벌게 되어 기쁜 나머지, 즉시 결제를 하고는 매장 매니저까지 불러 와 함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신상품이 들어왔을 때 우선적으로 연락드릴 수 있습니다.” 이나윤은 씩씩거리며 이름과 전화번호를 빠르게 적어 판매원에게 건넸다.
도유준의 이마엔 땀이 맺혔다. 그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나윤아...” “쓸모없는 놈!” 이나윤은 힘껏 발을 내디뎠고 신발은 억지로 들어갔다. “아!” 도유준의 손가락이 뾰족한 굽에 깔려 아파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나윤은 신발이 맞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도아린 앞에서 일부러 발을 꾹꾹 굴렀다. “정말 편하네요. 미안해요, 아끼던 걸 뺏어서.” 이나윤은 도유준의 팔을 끌고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떠났다.“너 간 줄 알았어.” 소유정이 전화를 걸어 도아린을 찾았고 그녀는 벨 소리를 따라왔다. 도아린은 2000만 원짜리 상품권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작은 돈 좀 벌었어. 너 옷 사줄게.” “정말?” 소유정은 도아린의 목에 팔을 감고 눈웃음을 지었다. “역시 너는 사업 수완이 있어.” 도아린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정국에게서 책임을 묻는 전화가 걸려 왔다. 도유준이 집에 돌아가서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도아린이 억지로 여자 친구에게 신발을 사게 했고 일부러 가격을 올렸다고. 결국 그는 베이커리 창업 자금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유준이가 네가 그 매장의 VIP 회원이라고 하던데, 그 신발을 어떻게든 반품해 봐.” “그 신발은 이미 도유준 여자 친구가 신고 쇼핑했어요. 재판매 불가라서 환불은 어려워요.” 도아린은 문을 열며 머리로 휴대폰을 고정시킨 채 신발장을 뒤졌다. 집안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배건후는 아마 오늘도 집에 오지 않았나 보다. 집에 없는 게 차라리 좋았다. 그녀는 이 조용함이 마음에 들었다. “도대체 어떤 신발이 2억이 하냐? 다이아라도 박혔어? 네 동생이 겨우 여자 친구를 사귄 건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해? 도아린,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 도아린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 신발 내가 먼저 본 거고, 그 여자가 높은 가격을 불러서 뺏어간 거예요. 도유준은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자기 돈을 다 썼죠. 제가 뭐 어쩌겠어요?” “유준이 여자 친
좋은 마음으로 그를 도와서 유럽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손보미와도 잘 되게 했지만, 어찌 그는 자신의 이런 마음도 몰라주고 이상한 말만 하고 있다.“말해봐요. 이혼한다고 하면 제가 어떻게 도와줄까요.”병원에서 손보미의 곁을 지키지도 않고 회사에서 야근도 하지 않고 배건후가 지금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그녀에게 요구를 제시하고 싶은 게 뻔했다.분명 본인이 먼저 부탁할 사안이 있으면서도 저렇게 도도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남자의 자존심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배건후는 그녀의 손에 들린 백 팩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짐은 아직도 갖고 오지 않고 옷만 몇 견지 들고 와서 자고 가고, 여기가 호텔인 줄 알아?”도아린은 그를 흘겨보았다. 3년 동안 그녀는 집을 자주 나갔었다. 배건후는 한 번도 잡은 적이 없었고 항상 도아린 스스로가 견디지 못해서 돌아오곤 했다. 언제부터 그는 그녀가 짐을 갖고 들어와서 머무는지 짧게 머물다 가는지를 신경 썼는지 모를 일이다.이렇게 쓸데없는 말들을 하는 건 도아린에게 그녀가 을이라는 것을 깨우쳐주면서 배건후의 말을 순순히 따르라는 의미였다.도아린은 가방을 소파에 던지고는 한숨을 쉬었다.“건후 씨, 우리 오늘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봅시다. 어때요?”배건후는 위를 꾹 누르면서 귀찮다는 표정이었다,“위가 쓰려. 말할 기분 아니야.”“...”도아린은 배건후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는 타협하듯 말했다.“뭘 좀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요?”“한번 시도해봐.”배건후가 뜨뜻미지근하게 말했다.‘시도는 무슨!’영양 밥상 같은 건 절대 다시 만드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면 배건후는 화를 낼 게 분명했다.하지만 배건후는 얘기를 할 마음이 없고 얘기를 하려면 반드시 자신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도도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도아린은 열심히 감정을 조절했다. 배건후가 순순히 합의이혼을 해준다면 더 참을 수 있다.도아린은 뒤돌아 주방으로 갔다. 지난 이틀간 그녀는 집에서 식사하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에서 열쇠를 갖고 먼저 운전석에 올라탔다.도아린이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경적을 울렸다.“왜, 내 말에 속이 뜨끔했어?”도아린은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라타서 안전띠를 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배건후의 눈빛이 부드러워졌고 핸들을 돌리는 손짓조차 음악에 따라 움직인다고 느꼈다.맨션의 부근에 마트가 있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을 데리고 멀리 있는 큰 백화점으로 갔다.도아린은 카트를 밀며 앞에서 걷고 있었고 배건후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느릿느릿 뒤따라오고 있었다. 백화점 안의 마트는 최근에 다시 리모델링해서 상품의 종류가 많았고 도아린은 한참을 돌아다녀도 채소와 과일을 파는 구역을 찾지 못했다.뒤에서는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일부러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는 거야? 내가 네 남자라고 자랑하고 싶어?”“건후 씨,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다른 곳에 돌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린은 가소롭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채소 구역으로 갔다.감자, 당근, 버섯, 새우...배건후는 카트에 담긴 채소들이 모두 그가 주문한 음식 재료들이 아닌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도아린, 귀가 먹은 거야 아니면 일부러 나 골탕 먹이는 거야? 네가 나한테 부탁할 입장이라는 거 잊지 마. 이런 식으로 하면 나는 절대 사인 안 해.”도아린은 뒤돌아 그를 보았다.“나는 귀가 먹지도 멍청하지도 않아요. 더 투정 부린다면 음식에 독을 풀어서 벙어리로 만들어 버릴 거예요.”“...”배건후는 화가 나서 위가 뒤틀렸다.이런 소리를 하다니, 도아린은 겁을 상실한 게 분명했다. 배건후는 위를 어루만지다가 뒤돌았는데 도아린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는 진열대의 끝에 멈춰 섰다. 작은 스크린에서는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는 손보미가 보육원의 아이들을 위해 더 많은 사람이 아이들의 심리 건강에 신경을 써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전에 도아린이 부딪혔던 여자아이는 손보미의 곁에 딱 붙어있었다. 자신의 보고
도아린은 건들거리며 자리에 앉아 일부러 면치기를 요란하게 했다.가지 못하게 한다면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할 속셈이었다.배건후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불쾌한 게 확실했지만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우아하게 식사를 했다.도아린은 면치기도 하고 쩝쩝거리기도 하면서 식사를 마쳤지만, 배건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도아린은 먼저 식사를 마치고 포크로 달걀을 건져서 먹었다.“식사는 괜찮아요? 이제 얘기를 나눌 수 있겠어요?”배건후는 시선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검은 눈동자와 긴 속눈썹은 정말 수려했다.껍데기는 이렇게 잘생겼는데 차라리 벙어리였으면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너무 뚫어지게 그에게로 향한 탓인지 저녁 식사가 맛있었던 덕분인지 배건후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우아하게 입을 닦았다.“다 봤어?”도아린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진씨 가문이랑 무슨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거예요?”배건후는 시선을 내리고 한참 지나서야 대답했다.“이혼 빼고 다른 요구는 아무거나 해도 돼.”도아린은 손이 떨리며 포크로 집었던 고기 부스러기가 다시 육수로 떨어졌다.“건후 씨, 당신 마음속에는 손보미뿐이잖아요. 왜 나를 당신 사모님 자리에 두지 못해서 안달인 거예요?”“4000억을 갖기 싫은 거야?”배건후가 차갑게 웃었다.“돈을 제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지금은 돈이 별로 아쉽지 않은 게 진씨 가문이 있어서 그래? 진씨 가문의 수양딸이 된다고 해서 그 가문의 재산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어서 나와의 관계를 공개하고 이 기회를 빌려 손보미를 망가뜨려 다시는 복귀 못 하게 할 생각인 거야?”도아린은 포크를 그릇에 떨어뜨리고는 비웃으며 말했다.“배건후, 내가 당신과 비밀결혼이라고 해도 이 바닥에서 아는 사람이 있어. 당신과 손보미의 스캔들에 대한 소문이 자자한데 그 사람들이 다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들이 당신을 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손보미 씨한테 태클을 걸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
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손보미에게 새 사람이 생겼죠? 그래서 지금 나한테서 당신의 자리를 찾으려는 거죠?”3년 전, 감정과 알코올의 힘에 그녀는 방을 잘못 들었었다.하지만 배건후는 정신이 또렷했다. 그는 분명 오해가 있는 걸 알면서도 강제로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그러니 이 남자의 진심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첫사랑한테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와중에 다른 여자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쓰레기 같은 자식!’배건후는 차갑게 웃었다.“내 자리를 찾는다고? 내가 네 생활의 전부잖아? 너는 내가 입고 먹고 이동하는 모든 것을 다 참견하는 데 욕구도 해결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도아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붙어오는 단단한 가슴팍을 느끼며 도아린은 상대방의 눈빛 속에서 이게 농담인 건지 벌을 내리는 건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두려운 기분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도아린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면서 등이 문에 세게 부딪혔다. 그 바람에 문이 갑자기 열렸고 배건후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준 덕분에 뒤로 넘어지지 않았다.배건후는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로 다가갔다.“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 몸은 아주 순종적이네.”도아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격렬하게 발버둥을 쳤다.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쓰러졌고 배건후는 그녀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도아린은 무척 당황했지만,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배건후의 손을 잡았다.“배건후, 이혼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내가 좋아져서야?”배건후는 행동을 멈추고 비웃듯 대답했다.“진씨 가문과의 합작을 위해서 그런다는 거 너 알고 있잖아. 진씨 가문에서는 부부 사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힘을 들여서 스캔들을 무마하는 것보다는 부부 금실이 좋다는 허상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지.”도아린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배건후를 자극하려는 의도였지만 그의 해명을 들었을 때는 그래도 마음이 아팠다.“진씨 가문은 금방 연성에 왔어. 진씨 가문 이전에는 조씨 가문이 있었어... 명문가에서는 모두 부부 사이가 화목하지 못한
배건후는 또 위통이 시작됐다.도아린은 차갑고 평온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정리했다.“손보미가 욕먹은 걸 내 탓으로 돌리고 싶다면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진씨 가문과의 협력은 제가 돕지도 막지도 않을 테니 당신에게 달렸어요. 어머님의 상태는 보셨죠? 언젠가는 약속대로 저에게 20억을 주는 게 좋을 거예요. ”배건후는 거울을 통해 그녀를 보며 차가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아무것도 안 하면서 20억을 원한다고?”“...”도아린은 마음의 파도가 완전히 가라앉은 후에야 말을 이었다.“당신이 진씨 가문과의 합작에 성공했다고 했을 때 설마 나한테 금실 좋은 부부 연기를 계속하게 할 생각은 아니죠?”그렇게 된다면 끝이 없고 이혼은 기약 없이 먼 얘기가 될 것이다.침실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배건후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점점 어두워졌다.한참 후, 그는 턱을 만지며 말했다.“아니.”그날 저녁, 배건후는 또 서재에서 야근했다.도아린은 하는 일마다 순조롭지 못했던 3년 전의 꿈을 꿨다.그녀는 폭설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서 있었고 두 발은 얼어서 감각을 잃었다.목표물이 나타나자 그녀는 황급히 다가가려고 했지만, 다리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는 바람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장면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그녀의 목적을 알게 된 남자는 따분한 표정이었다. 마치 그녀의 말을 한마디라도 더 들으면 그녀의 불운이 자신에게 옮겨지기라도 하는 듯 얼른 사람들에게 그녀를 쫓아내라고 명령했다.도아린은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눈더미에 버려졌고 간신히 일어섰다.펑펑 쏟아지는 눈은 그녀의 남은 희망까지 파묻었다. 이토록 절망하고 있을 때, 따뜻한 체온이 남아있는 코트가 그녀의 어깨에 걸쳐졌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고 내리는 눈 속에서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았다.꿈에서 깨어나 도아린은 핸드폰 알람을 껐다. 배건후에 모든 기대를 걸었던 탓에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실망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컸다.만약 처음부터 배건후와 돈으로만 맺어진
도아린은 변슬기를 데리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배지유가 자신을 일부러 모욕하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이곳에 유명 스타들이 모여 있다는 걸 알게 됐다.스크린에서만 보던 유명인들을 실제로 보니 변슬기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두 눈으로는 전부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는 다소 어색하게 셔츠를 만지작거렸다.아버지가 친구를 만나러 가니 단정하게 차려입으라고 당부했지만, 변슬기는 또 소개팅 자리일 거로 생각하며 일부러 평소 입던 옷을 입고 왔다.그녀는 상대가 아버지의 돈이 아니라 자신의 평범한 모습을 좋아하길 바랐다.그러나 여기에서 음료를 나르는 여직원들조차 자신보다 더 격식 있게 차려입은 것을 보고 당황했다.“도 선생님, 저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볼품없는 거 아니에요?”도아린은 그녀의 셔츠 뒷면에 약간의 땀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제가 여분의 드레스를 준비해 놨어요. 갈아입어도 좋아요.”변슬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일단 아빠 친구를 만나고 나서 생각할게요.”멀리서 변우빈이 그녀를 보고 약간의 타박 섞인 눈빛을 보였지만, 곧 미안하다는 듯 설명했다.“우리 딸은 성격이 참 고집스러워.”그는 변슬기에게 손짓했고 딸이 곁에 앉자 말했다.“내가 단정하게 입고 오라고 했잖아. 그런데 일하는 옷을 입고 오면 어떡하니.”변슬기는 당황스러워 목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주현정이 보이자 긴장한 표정으로 도아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큰일 났다!’문 앞에서 배지유와 다툰 것도 모자라 이번엔 배지유의 엄마까지 만나게 됐다.지난번처럼 자신에게 온화하게 대해줄 리가 없을 것이다.“...네 딸이구나?”주현정은 마치 이해했다는 듯 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지난번에 봤을 때 어쩐지 낯이 익다 했어.”변슬기는 몰래 아버지의 옷자락을 꽉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분 배지유 엄마예요.”변우빈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웃으며 소개했다.“이분은 주현정
배지유가 휠체어를 돌리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 배지유?”“변슬기?” 배지유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너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거야? 이 시간에 오다니, 연회가 거의 끝나가잖아.”변슬기는 공유 자전거를 타고 와서 온몸에 땀범벅이었고 앞머리가 하얀 이마에 붙어 있었다.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정리하며 숨을 고르면서도 자신감 있게 말했다.“아니야, 난 사람을 찾으러 온 거야.”이어지는 장면이 바로 도아린이 목격한 것이다.배지유는 휠체어를 움직여 변슬기의 주위를 맴돌면서 눈에 비웃음이 가득했다.“너희 집은 이번 생은 물론이고, 전생에도 이런 호화로운 사람들을 본 적 없을걸? 여기를 시장으로 착각한 거야? 아무나 데려와서 ‘내 삼촌, 내 이모’라고 하면 통할 것 같아? 여기는 모두 톱스타들이야! 너 콘서트 한 번이라도 가본 적 있어?”배지유는 입을 가리며 더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생활비 벌려고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하는 주제에 무슨 돈으로 콘서트를 본다는 거야! 연예인을 만나고 싶어? 기숙사로 돌아가서 기다려. 누굴 보고 싶은지 댓글 남기면 내가 대신 사진 찍어줄게.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돈을 안 받아. 대신 너는 우리 기숙사의 1년 치 청소를 맡고 내 빨래도 다 해야 해. 속옷과 양말도 손빨래로!”변슬기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난 연예인 보러 온 게 아니야.”“올해 최고의 억지상은 바로 너네!” 배지유는 엄지를 세우며 비웃었다.“여긴 다 연예인들뿐이야. 네가 누굴 찾는다고 하면, 내가 직원한테 말해서 불러줄게.”변슬기는 그녀를 무시하고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그러자 배지유의 눈빛이 갑자기 험악해지며 휠체어를 몰아 변슬기에게 돌진했다.거의 부딪힐 뻔한 순간, 휠체어가 갑자기 멈췄다.화가 난 배지유가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가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인 도아린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네가 왜...” 도아린은 왜 자신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건가?
주현정은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그저 화났다는 의미일 것이다.그러니 그녀의 기분만 풀어주면 도아린이 그 자리를 넘보는 건 불가능해질 것이다.“현정아, 사람은 성인이 아니니 누군들 실수하지 않겠어?” 배석준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내가 증명해 보일게. 나와 지유야말로 네 뒤를 든든히 지켜줄 사람이라는 걸 말이야!”그는 배지유를 찾아 그녀를 데리고 주현정을 만나러 가려고 했다.세 식구가 언론 앞에 함께 나타나기만 하면 이혼 소문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도아린 같은 외부인은 배씨 가문의 재산에 끼어들 수 없게 될 것이다.하지만 그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배지유가 사라진 후였다.“엄마, 화내지 마세요.” 도아린이 다정하게 위로했다.“배 대표님은 함부로 결단을 내리지 못할 거예요.”“차라리 저 사람이 결단을 내렸으면 좋겠네.”주현정은 도아린과 함께 인파를 지나갔다.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는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는 다소 어색하게 무릎을 문지르며 이따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주현정을 본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내가 방해되지는 않았어?”“그 말은 내가 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내 연회에 와줘서 고마워.”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가갔다. 세 사람은 원형 소파에 앉았다.“이쪽은 내 딸 도아린이야. 이분은 변우빈이라고 하고 내 가장 친한 친구야. 아저씨라고 불러.”“아저씨, 안녕하세요.” 도아린은 무심코 상대방을 살펴봤다.변우빈은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배석준와 비슷한 체격이었지만 조금 말랐다. 그의 얼굴과 손에는 노동으로 살아온 사람이 가진 강인함이 배어 있었다.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변우빈은 계속 주현정의 눈을 바라봤고 주현정의 미소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 담겨있었다.“네 딸도 데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주현정이 뒤를 돌아보며 묻
석 대표는 멈칫하더니 그제야 앞에 휠체어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요란하게 치장한 여자가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이분은...”그는 주현정이 이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첫 반응은 배석준이 다른 여자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배석준의 새로운 연인은 주현정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석 대표님, 짓궂으십니다. 방금까지도 저희 딸을 카메오로 요청한다고 하셨으면서...”배석준은 말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그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배지유를 보고 있었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비교하는 사람도 있었다.배지유는 엄청 민감해서 의식적으로 치마를 잡았는데 그들이 자신의 얼굴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제야 천천히 손을 떼었다.“배 대표님 따님이 몇 명이세요?”석 대표가 물었다.“... 한 명입니다.”석 대표는 웃어 보이고는 볼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떴고 그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도 흩어졌다.“아빠! 저 사람들 무슨 뜻이에요?”“...”배석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영문을 알게 되었다.배지유는 휠체어에 앉아있어 시선이 막혔지만, 배석준은 멀지 않은 곳에서 도아린을 데리고 인사를 나누는 주현정을 보았다.그들이 칭찬하는 사람은 배지유가 아니라 도아린이었다.“지유야, 여기서 아빠를 기대려. 아빠가 가서 엄마를 찾아볼게.”그는 배지유가 충격을 받을까 봐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하고는 빠르게 걸어갔다.“주현정! 당신 지금 지유는 병원에 내버려 두고 도아린을 데리고 연회에 참가하고 있어? 당신 같은 엄마가 어디 있어?”손님들은 배석준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고 자리를 피했고 주현정의 얼굴에 있던 웃음도 점차 사라졌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대답했다.“지유는 당신 같은 아빠만 있으면 돼요.”배석준은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앞서 당신은 외부인 하나 때문에 나랑 이혼하려고 했고 이제는 이혼 얘기를 하지 않으니 각종 방법으로 우리를 치욕스럽게 하고 있어. 당신이 다시 JS 픽처스를 운영하게 되었는데도 나한테 얘기
JS 픽처스의 고위인사는 배석준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배 대표님, 또 해외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현정이의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더 머물다가 가려고 합니다.”배석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평소에 연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연예인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주현정이 JS 픽처스에서 지위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각종 이유를 찾아 함께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를 거부했지만, 약속이나 한 듯 카메라 앞에서는 활짝 웃었다. 그들은 모두 주현정 덕분에 잘 되었기에 체면은 반드시 살려주어야 했다.“크흠.”배지유는 배석준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헛기침을 했다.“아, 우리 딸이 마침 해남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데리고 왔습니다.”배석준을 둘러싼 고위인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주현정은 배지유가 연예계의 나쁜 물을 먹을까 봐 현역일 적에 절대 배지유를 데리고 활동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위인사들도 그저 주현정에게 딸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본 적은 없었다.반응이 빠른 누군가가 술잔을 들며 공손하게 말했다.“따님은 주 대표님과 배 대표님의 우수한 점을 다 닮으셔서 단정하고 청초하십니다. 우리가 올해 새로 영입한 신인보다 예쁘신 것 같습니다.”“맞아요. 해남대학교의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시니 예쁘시고 학식도 많으시네요. 지금 업계에서는 이렇게 완벽한 인재를 제일 좋아합니다!”배지유는 칭찬을 듣고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잡고 살짝 몸을 앞으로 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삐끗해서 일어서서 인사를 올리지 못하겠네요.”“별말씀을요. 발을 삐끗하면 잘 치료해야 해요. 젊고 예쁘신데 후유증을 남기면 안 되죠.”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배지유의 마음속에서는 저주로 들렸다.그녀는 발 한쪽을 다친 게 아니라 다리 하나를 잃었다. 나머지 생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배석준은 배지유의 성격을 알기에 그녀가 난리를 피울까 봐 얼른 다른 곳으로
주현정은 말투가 가라앉았고 표정이 엄숙했다.“남자의 내연녀로 이십몇 년을 있다가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어른이 화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나. 도아린의 양아버지는 양어머니의 혼수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위협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딸의 효도를 받을 자격 없어!”현장에는 여자 연예인들도 많았다.같은 딸의 마음으로 이렇게 심란한 일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도아린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아린이 양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했다고 여겼다.강홍련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도아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방금 자신의 말이 강씨 가문에게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웠다.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도아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강씨 어르신은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복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씨 어르신께서 좋은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주었는데 당신은 밖에서 어르신의 명성이나 흐리고 다니면 안 되죠. 농부와 뱀의 이야기를 재희 씨도 들어봤을 거로 생각해요.”도아린은 강씨 어르신의 편에 섰는데 강재희는 반박할 수 없었다.여론에서 아버지의 대회에 흑막이 있다는 일로 들끓던 것이 금방 사그라들었는데 강홍련 저 멍청이 때문에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주현정은 도아린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제 딸이고 JS 픽처스의 후계자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제 딸을 치욕스럽게 하다니, 저희 협력은 앞으로 계속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재희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는 도아린이 연회에 참가한 것은 단지 주현정과 예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주현정이 도아린을 딸로 삼고 JS 픽처스의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만약 도아린과 모순이 격화된다면 앞으로의 협력에는 장애가 생길 것이다.“강홍련 씨, 사과해요!”강홍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재희는 지금 자신을
도아린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진열대에 있는 다이아몬드의 빛이 꺾이어 그녀의 눈동자를 비춰 유독 눈부셨다.강홍련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섰다.강홍련은 도아린보다 머리 하나쯤 작아서 고개를 들어 도아린을 바라보았는데 도도한 척하는 모습이 광대 같았다.“네가 JS 픽처스에게 ‘봉황의 시대’를 광고하도록 넘겼는데 강씨 가문의 고급 주얼리들은 모두 JS 픽처스의 연예인들이 광고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어. ‘봉황의 시대’와 JS 픽처스의 연예인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봉황의 시대’가 강씨 가문의 것으로 생각하게 될 테지.”이게 바로 연예인을 찾아 광고하는 이유였다.예를 들어 어떤 톱스타가 운동화의 모델이 되었다면 그가 나타났을 때 팬들은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신었는지 알게 된다. 따로 브랜드를 찾아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도아린은 도덕과 재능을 겸비한다는 말로 강씨 가문에게 치욕을 안겨주었지만 결국은 강씨 가문이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강씨 가문에서 이득을 보는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도아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는 강씨 가문의 사촌이야!”강홍련은 불쑥 얘기했다.“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밀어준다면 배건후와 결혼할 수 있어. 강씨 가문에서 안씨 가문을 지지한다면 내 아들은 안씨 가문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거야!”“그래서요.”강홍련은 도아린이 모른 척할 줄 몰랐고 그녀의 코에 대고 얘기했다.“그래서 나한테 잘하라고. 그러면 강씨 가문에서는 네가 해남에서 살아나갈 기회라도 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대회 성적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너를 디자인 업계에서 쫓아내는 것도 일이 아니지. 내 삼촌 강태식은 이 바닥을 꽉 잡고 있어. 내 삼촌이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너의 ‘봉황의 시대’도 잘난 척할 거 없어. 언론에서 만들어준 것뿐이야. 만약 삼촌의 학생들이 다 그게 별로라고 얘기한다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거야!”많은 손님이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강홍련의 지나친 말에 시선을 두
“아빠가 방법을 대서 가볼게. 너는 오지 마.”배석준은 배지유가 걱정되었다. 지난번에 배지유가 밖으로 나갔다 왔을 때도 돌아와서 다리가 아파 잠이 들지 못했다.배지유는 붉어진 눈으로 애원했다.“제 친구들은 제가 아직 안에 갇혀있는 줄 알아요! 아빠랑 제가 함께 엄마의 연회에 간다면 매체에서는 저희 세 식구의 화목한 모습을 찍게 될 것이고 소문들은 자연스레 사그라질 거예요!”배석준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딸의 명성은 도아린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돌이킬 방법을 계속 찾지 않는다면 배지유가 해남대학교로 돌아갔을 때 반드시 동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조롱당할 것이다.“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메이크업과 코디를 해줄게.”배석준이 데리고 온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지민이었다.김지민은 연예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 참석하는 연예인들이 무슨 브랜드를 입었는지 알아냈다. 배지유는 똑같은 옷을 입으면 안 됐고 다리의 흉터를 가릴 수 있으면서 예쁘고 매력적이어야 했다.이 부분에서 김지민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배지유는 만족스럽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그녀의 치마를 들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다리 하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발을 삐끗해서 휠체어를 탔다고 하면 될 것이다.이런 장소에 김지민은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되므로 부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연회장의 중심에는 도아린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고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는 현장에 있는 연예인들의 시선을 끌었다.이 여자의 아름다움이 너무 지나쳤다.연예계의 스타들은 자주 레드카펫을 밟고 시상식에 참가하므로 어떻게 분위기를 휘어잡는지를 잘 알고 자신이 어느 각도에서 가장 예쁘게 찍히는지도 알고 있었다.도아린은 처음 보는 얼굴이고 업계에 대해 영향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다 자신감이 넘쳤다.그녀가 스크린 앞으로 가서 사인할 때 스크린에는 ‘봉황의 시대’의
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은 ‘라윤주’의 이름을 듣고 초점을 잃었다.“뭐라고요?”“...”육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하경이 말을 이었다.“향 주머니로 화를 면한 것은 우연이에요. 정말 저를 도왔던 것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책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죠.”육하경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어르신들을 3일이나 괴롭혀서야 알아냈어요. LY에서 저를 후임자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육하경의 학업은 각 부분에서 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육씨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빽빽이 필요했다.육민재를 예로 들어보면 능력은 가장 뛰어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맏아들의 장손 혈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좋은 자원과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모든 게 알맞게 부합되어야 한다.육하경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었고 육씨 가문의 산업에 기대를 두지 않아 오랜 시간 밖에서 떠돌며 공부를 했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세인트존스 호텔의 관리 권한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쁘기도 놀랍기도 했다.놀란 마음으로 육하경은 전임자를 찾아갔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야 LY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육씨 가문 뿐만 아니라 많은 명문가가 LY와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인재를 추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하경은 그때 손에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전임자가 이상해하며 무늬를 찍어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경 씨가 말하는 그 이야기에도 관심 없습니다.”도아린은 책을 육하경에게 돌려주고는 차 문을 열었다.“도아린 씨!”육하경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손을 허공에 멈추고 결국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육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