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범준은 배지유의 말뜻을 바로 알아차렸다.도아린을 위해 해명하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 도아린이 상식이 없다고 비웃고 있었다. 윤명희의 생명 은인은 자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저희 아내를 살려주셨기 때문에 이 카드를 가지셔도 됩니다.”배지유는 마음이 혹하긴 했지만 양심상 고개를 흔들었다.“아닙니다. 저희 오빠가 제가 새언니 공을 빼앗은 걸 알면 저를 욕할지도 몰라요.”윤명희가 나지막하게 물었다.“오빠가 새언니한테 잘해줘요?”“네. 새언니 어머님께서는 둘째를 낳는 도중에 돌아가셨고, 동생은 3살 되던 해 장애인이 되었고 10살 되던 해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지금은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누워계세요. 의료비는 저희 오빠가 계속 지원해 주고 있고요. 아저씨 디저트 가게도 오빠가 차려준 거예요.”배지유는 말하면서 계속 테이블 위에 있는 블랙 카드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성대호의 말이 맞았다. 잘못을 인정하면 공을 빼앗았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또 블랙 카드를 계속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배지유를 통해 도아린에게는 부모님도, 남동생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로써 친딸일 확률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진범준은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배지유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배지유 씨, 이런 걸 알려줘서 고마워요. 블랙 카드는 저희 성의니까 받아주세요.”배지유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바로 블랙 카드를 챙겼다.“감사합니다. 진 대표님, 내일 저희 새언니랑 쇼핑하러 가려고요. 평소에 별로 꾸미지 않거든요.”배지유가 병실을 떠나려고 할때, 진범준이 담담하게 말했다.“그 카드는 임시로 쓰는 카드에요. 해남으로 돌아가면 없애버릴 거니까 배지유 씨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사세요.”배지유는 멈칫하고 말았다.임시 카드를 선물하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진씨 가문이 정말 통이 큰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야박할 줄 몰랐다.배지유는 얼른 명품백 사러 가고 싶었다.“감사합니다. 진 대표님, 사모님, 안녕히 주무세요.”배지유는 나가면서
육하경은 반응할 새도 없었다.피하는 건 불가능했고, 최대한 몸을 피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등에 맞고 말았다.목에서는 쇳내가 풍겨왔다.야구방망이가 또 한 번 날아오자, 육하경은 앞구르기로 공격을 피했다.상대방은 야구모자에 마스크까지 하고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그는 육하경의 손을 쳐다보더니 또 공격하려고 했다.육하경은 그래도 무술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는 않았다.다대일은 몰라도 일대일에는 자신이 있었다.육하경이 야구방망이를 빼앗고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상대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이 드레스를 빼앗으려고?”육하경이 슬금슬금 다가가면서 물었다.“누가 보냈어.”상대는 고통스럽게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육하경은 다가가 그의 목덜미를 잡은 채 야구모자와 마스크를 벗겼다.상대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이때, 코를 자극하는 냄새와 함께 육하경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마이바흐 한 대가 길에서 달리고 있었다.가로등 때문에 차 안은 밝아졌다, 우두워졌다하고 있었다.배건후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다 동작을 멈췄다.“어떻게 나왔어.”도아린은 그제야 배건후가 어떻게 휴게실에서 나왔는지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걸어서요.”“똑바로 말해.”“말해봤자 믿어줄 거예요?”“일단 말해봐.”도아린은 피식 웃고 말았다.“아가씨가 저를 의무실로 유인하려고 했어요. 제가 싫다고 하니까 핸드폰을 빼앗았고, 갖고 싶으면 휴게실로 따라오라고 했어요. 제가 방심하고 있을 때 휴게실 문을 밖에서 잠가버렸고요. 문을 한참 두드렸는데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다 어떤 아줌마가 바닥에 기절해 있는 것을 발견했고요.”배건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모르는 사람을 구해준 거야? 상대방이 심장병을 앓고 있거나 다른 병을 앓고 있었으면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고. 윤 사모님이 목에 캔디가 걸렸기 다행이지. 응급조치에 실패했으면 책임을 져야 했을 수도 있다고.”‘말하지 말 걸 그랬네. 어차피
조수현이 후시경으로 보면서 말했다.“대표님 핫스팟을 연결하면 되잖아요.”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배건후와 말 섞기 싫어서였다.배건후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핫스팟을 켜주려고 할때, 성대호한테서 연락이 왔다.“하경이한테 일이 터졌어. 지금 나리 병원에 있는데 와봐야 할 것 같아.”...육하경은 혼미한 상태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서 뒤통수가 계단에 부딪혀 아직 의식불명의 상태였다.이제 막 위임을 받았는데 육하경의 부모님은 애가 탔다.육하경의 부모님은 육하경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고 회사 고위층들이 질투 나서 일부러 복수하는 줄 알고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경찰은 CCTV를 조회하다 상대방이 육하경의 지갑을 훔쳐 간 것도 모자라 여성용 드레스까지 훔쳐 간 것도 확인했다.“대호야, 아저씨한테 솔직하게 말해봐. 하경이 여자친구 있어?”육영수는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단순한 도둑질이 아니라 육하경의 여자친구가 방탕하여 누구를 잘못 건드렸다고 생각했다.성대호는 뻘쭘해하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아저씨, 하경이 오빠 여자친구 없어요.”배지유는 연락받고 급히 달려오는 바람에 콧등에 땀이 맺혀있었다.“있어요.”육하경의 엄마인 황은숙이 옆에서 흐느끼면서 말했다.“저번에 장례식장을 갔을 때 향낭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어요. 하경이가 어떤 귀여운 여자한테서 선물 받은 거라고 했어요. 계속 그 향낭을 보면서 멍때리고 있더라고요.”“향낭이요? 누가 선물한 향낭인데요?”배지유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물었다.이때 성대호가 조용히 하라면서 그녀를 말렸다.“아저씨, 아줌마. 걱정하지 마세요. 하경이가 괴롭힘 받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거예요. 건후도 지금 오는 길이에요. 경찰분들이 하루빨리 범인을 잡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거예요.”몇 분 뒤,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의사 선생님이 걸어 나오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어떻게 되었어요?”“환자분 두개골에 피가 고여있긴 하지만 출혈은 많지 않아서 생명의 위험은 없는 상태입
육하경은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있을 때, 배지유가 뒤에 서 있던 도아린을 잡으면서 불쾌하게 말했다.“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거야.”도아린이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배지유는 병실 문이 닫히기까지 기다렸다가 계속해서 말했다.“도아린. 엄마를 죽이고 동생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것도 모자라 우리 집에 시집와서 우리 엄마 건강까지 악화시켰잖아.”배지유는 냉랭한 눈빛으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하경이 오빠도 너를 잠깐 도와줬다는 이유로 저렇게 누워있잖아. 넌 정말 팔자가 사나운 여자야.”도아린이 배지유의 눈을 쳐다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하경 씨가 너때문에 다친 거라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배지유는 멈칫하고 말았다.그녀는 도아린이 자신과 방우진의 관계를 모를 줄 알고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면서 말했다.“누가 누구를 가만두지 않을지 두고봐!”이때 배건후와 성대호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배지유는 냉큼 달려가면서 말했다.“오빠, 그 깡패 새끼 얼굴을 봤어요?”“깡패 새끼인지 어떻게 알아.”배건후의 눈빛은 어두워지고 말았다.“내가 아까 지유한테 알려줬어.”성대호가 핑계를 대줬다.“나도 짐작만 했을 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회사 고위층 사람들이 대놓고 하경이를 해쳤겠어?”배지유는 침을 삼키고 말았다. 성대호가 무언의 눈빛을 보내오자 더는 뭐라 할수 없었다.배건후는 병실 앞에 서있는 도아린을 발견하고 다가갔다.“날 기다리고 있었어?”도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지유가 불안해하는 표정을 보고 무조건 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배건후는 자연스럽게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고 함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간호사분은 육하경에게 환자복을 갈아입혀 주고는 그의 옷을 들고 나가려고 했다.바로 이때, 주머니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굴러서 배건후의 발 옆에 떨어졌다.자수가 새겨진 향낭이었다. 중간이 조금 벌어져 안에 있는 향이 드러났다.도아린은 몸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아무렇지 않게 준 선물을 육하경이 계속 가지고
“얼마나 큰 사고를 쳤는지 알아?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고! 경찰이 날 잡아가면 모든 걸 불어버릴 거야.”방우진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시계 괜찮더라고. 이걸로 나한테 빚진 이자를 없던 걸로 쳐줄게. 가게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터넷에 폭로해 버릴 거야.”“안돼. 조금만 더 시간 줘. 내가 꼭...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 새끼가!”배지유는 화가 나서 핸드폰을 박살 내려다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창문을 통해 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는데 다름아닌 성대호가 실망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다.성대호는 자기가 잘못 본 거라고 믿고 싶었다.그런데 아까 통화한 내용을 듣고 모든 기대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배지유는 뒤돌아 떠나가려는 성대호를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오빠, 난 그저 드레스만 갖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하경이 오빠를 저렇게 만들어 버릴 줄 몰랐어.”성대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섰다.“그 드레스는 왜 필요한데?”“그게...”배지유는 고개를 숙인 채 눈알을 굴리면서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드레스 고르러 갔을 때 마침 그 드레스를 입고 싶었거든. 그런데 새언니가 보라색 원피스가 이쁘다면서 일부러 스타일리스트한테 못생기고 올드한 스타일로 해달라고 부탁했더라고.”배지유는 나름대로 괜찮은 이유라고 생각했는지 자신감 붙은 얼굴로 고개를 쳐들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성대호를 쳐다보았다.“연회장에서 사람들이 새언니만 예쁘다고 칭찬하더라고. 나한테는 나이도 어린것이 더 올드해보인다고 했고.”배지유는 계속해서 말했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캐물었더니 그제야 인정하더라고. 그리고 나한테 멍청하다면서, 보는 눈이 없다고 했어.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여자분이 새언니를 나무랐고... 새언니는 이 일을 또 오빠한테 이를 거라는 생각에... 어차피 욕먹을 바에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오빠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누구한테 더 잘 어울리는지. 그런데 방우진이 사람을 다치게 할 줄 몰랐어.”성대호는 들을수록 미간을 찌푸렸다.여자를 많이 만
“배지유! 멈춰!”성대호가 달려갔을 땐 배지유는 이미 한쪽 발을 창문 위에 올려놓은 상태였다.이에 성대호는 발걸음을 멈추고 두 팔 들어 항복했다.“너희 오빠랑 내가 있는데 육씨 가문에서는 너를 괴롭히지 못할거야. 하경이도 너를 용서해 줄 거고.”한쪽 다리가 밖에 걸쳐있는 배지유는 차마 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바람이 불어오자 떨어질까 봐 창문틀을 꽉 잡았다.사실 두려웠지만 어떻게든 참아보기로 했다.그녀는 성대호가 마음이 약해져서 양보해 줄 줄 알았다.“오빠, 부잣집 며느리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약점이 잡히면 언제 어디서든 비웃음당할 수 있다고. 남은 평생 손가락질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성대호가 천천히 접근하면서 말했다.“일단 내려와. 거기 너무 위험해.”“오빠가 나한테 잘 대해 준다는 거 알아. 다음 생에는 될수 있으면 오빠 여동생이 되었으면 좋겠어. 오빠는 겉으론 착해 보여도 속은 악독한 새언니를 찾지 않겠지.”성대호는 배지유가 밖을 내다보는 틈을 타 급히 달려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이번 생에도 난 네 오빠야!”“이거 놔. 난 오빠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 않아... 차라리 날 죽게 내버려 둬. 내가 죽어버리면 다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못하겠지.”“네가 살아있는 동안은 내가 꼭 옆에서 잘 보호해 줄게.”배지유는 그윽한 눈빛으로 성대호를 쳐다보았다.“그러면 비밀로 해줄 수 있어?”성대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성대호는 그녀를 창문에서 내려다 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배지유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한참 동안 제대로 서 있지 못했다....도아린은 계속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병원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배건후의 차가운 기운 때문인지 우울하기만 했다.이번 사건이 배지유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말했다간 모함한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육하경과 서로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몇번 도움받았기 때문에 그가 이렇
아파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도아린은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건후 씨의 산삼과 비교하면 향낭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요구하기 전에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부터 되돌려 보세요!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하루빨리 이혼해요. 서로한테 피해주지 말고요.”“서로한테 피해를 주지 말자고?”배건후가 피식 웃고 말았다.마음속에서는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배건후는 시시때때로 중저음에 그윽한 눈빛을 보내오면서 매력 발산하고 있었다.배건후가 지퍼를 열고 셔츠 단추를 여는 순간 복근이 드러났다. 완벽한 치골 라인까지 보여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난 도전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야. 순종적인 사람은 보기만 해도 질려. 오히려 너같이 화끈한 사람이 좋아.”배건후는 빨개진 도아린의 귀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과연 무슨 맛일까.”도아린은 옷깃을 여몄다.배건후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자니 더럽다기보다 매력이 넘쳤다.하지만 이혼은 필수였기 때문에 도아린은 그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았다.귀가 빨개진 것은 그저 화가 나서였다.“건후 씨, 보미 씨가 최근에 입었던 옷들이 많이 노골적이던데 그 욕구를 참지 못하고 여기서 발산하는 거예요?”배건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도아린의 허리를 꽉 잡고는 그녀의 배꼽을 어루만졌다.도아린은 그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배건후를 자극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가 홧김에 정말 덮칠까 봐 두려웠다.도아린은 급히 그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보미 씨는 건후 씨만 바라보고 있는데 지금 이러는 거, 너무하지 않아요?”차는 가로등 밑에 세워져 있었다.배건후가 몸으로 불빛을 막는 바람에 차 안의 분위기는 더욱 야릇해졌다.그는 허리를 숙여 도아린의 귓불을 깨물었다.이때 비웃음이 가득한 말투가 들려왔다.“보미 씨는 몸매를 유지해야 해서 쌀 한 톨도 세어가면서 먹는 사람이야. 너같이 거친 사람이랑은 달라. 너는 거칠게 대하기 딱 좋아.”‘하긴. 한번 하면 7날이나 입원해야 하고 3년이나 휴식해야 하잖아. 보미 씨
익숙한 목소리에 도아린은 표정이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민재 씨? 민재 씨도 하경 씨 보러 왔나 보네...’도아린은 고개를 들어 창문에 기댔다.배건후 다리 위에 앉아있던 도아린은 그의 신체적 변화를 느낄 수 있었고, 그녀의 정서도 경직된 근육을 통해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어두운 곳에 서있는 육민재는 훤칠한 것이 분위기가 넘쳤다.육민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아린은 마침 가로등 때문에 더욱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도아린은 급히 옷깃을 여미고 건조한 목으로 힘겹게 인사했다.“민재 씨... 씁.”또 한 번 가슴을 꽉 쥐길래 도아린은 욕할뻔하다가 배건후를 힘껏 꼬집었다.‘일부러 망신 주려고 하고 있네.’육민재는 차 안까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아린 씨 목소리 같긴 한데 확신이 서지 않더라고.”육민재가 웃으면서 다가왔다.가로등이 비추는 공간에 도착한 그는 차와 떨어진 거리가 3미터도 되지 않았다.온몸이 굳어져 버린 도아린은 무의식적으로 배건후의 팔을 꼬집었다.“거, 거기서 말해요.”도아린이 급한 마음에 소리쳤다.이때 배건후가 그녀의 단추를 풀어 코끝으로 등을 느끼고 있었다.입술은 차가웠지만 뿜어내는 뜨거운 콧김에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시력이 안 좋은 육민재는 눈을 찡그렸다.아까는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도아린의 헝클어진 머리, 삐뚤어진 옷깃, 감출 수 없는 당혹스러움을 발견하고 더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할머니 생신날, 도아린이 배건후랑 결혼한 이후로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육민재는 도아린이 배건후한테 버림받고 혼자 있는 모습을 들키기 싫어 이러는 줄 알고 온화하게 웃었다.“저번에는 그냥 우연히 도와준 것뿐이야. 그런데 밥 사겠다는 말 진심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내일 시간 되면...”도아린은 듣자마자 그가 동영상 일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육민재가 우연히 도와줬다고 말했지만 도아린에게는 친구의 믿음을 얻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없었다.사실 육민재가 엄청
“그럼요.”도아린은 오늘 회의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그녀는 한 비서에게 전화와 프로젝터를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곧 대형 스크린에 배건후가 장수현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장면이 그대로 나타났다.변호사로서 의뢰인이 유언장 같은 문서를 작성할 때, 분명 녹화도 요구했을 것이었다.장수현에게 모든 것을 전달한 후, 배건후의 시선이 카메라로 향했다.그의 눈빛은 깊고 날카로웠으며 자세는 단정하고 위엄이 넘쳤다. 그저 영상 속 모습만으로도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압박감을 느꼈다.주현정은 주먹을 꽉 쥐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더 이상 아들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도아린은 제 전처입니다. 나는 도아린 씨가 모건 그룹을 잘 이끌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도아린 씨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저를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번 임명은 변경되지 않으니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사직서를 제출하세요!”일부 사람들은 도아린의 대표 승임을 저지하기 위해 회사를 협박하며 집단 사직서를 제출할 생각이었지만 배건후의 말을 들은 후, 그들은 도리어 잠시 망설였다.그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고 이 시점에서 사직을 한다면, 그것은 회사 명령에 불복하는 것이었다.가벼운 처벌로는 모건 그룹에서 영원히 일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심할 경우 업계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조차 어려워질 것이다!그 누구도 자신의 경력을 걸고 이런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었다.모두가 망설이면서도 자신들의 자리를 잃는 것에 불만을 가진 채, 도아린이 자신의 머리 위로 올라설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도아린은 세 개의 서류를 꺼내 민철홍, 신 대표, 그리고 다른 책임자에게 각각 전달했다.“모건 그룹은 배 대표 혼자만의 회사가 아닙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죠. 여러분은 제가 회사를 망치고 여러분이 고생해서 쌓아온 기반을 무너뜨릴까 봐 걱정하시는데,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그녀는 책상
민철홍은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며 대답했다.“네, 다 준비됐습니다!”대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자동으로 길을 터주며 주현정과 도아린이 대형 홀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회의실 안에서, 도아린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경영진을 살펴보다가 한 사람의 부재를 눈치챘다.‘우정윤!’그는 특별 보좌관으로 새로운 경영진과의 연계를 담당했어야 했고 사직했다고 해도 대행 총괄인 신 대표가 그를 쉽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해남에서 도아린이 장수현을 만났을 때도 우정윤은 나타나지 않았다.‘어디에 있는 걸까?’도아린은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써서 일북에게 전달했고 일북은 확인 후 바로 회의실을 나갔다.“모두 모였네요, 이제 발표하겠습니다.”주현정이 마이크를 켜고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알다시피, 배 대표가 교통사고를 당해 일정 기간 요양 중입니다.”“이 기간 동안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은 많지만 하나하나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어제 민 사장님께서 경영진을 대표해 배 대표를 찾아갔습니다.”테이블에 앉아 있는 임원들의 시선이 모두 민철홍에게 집중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의 표시를 보였다.“회사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배 대표는 본인이 보유한 모든 주식과 경영권을 도아린 씨에게 이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주현정이 도아린에게 손을 내밀자, 도아린은 모두가 잘 볼 수 있도록 일어섰다.회의실은 잠시 침묵이 흘렀고 모두가 상황을 이해한 후, 눈앞의 여자가 바로 배건후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임을 깨닫자 회의실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일부는 도아린이 이 직무를 맡을 자격이 없다고 의문을 제기했고 또 다른 이들은 이 결정 자체에 의문을 품었다.“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준다고?”“아니면 강요당한 것일까? 혹시 뭔가 음모가 숨어 있는 게 아니야?”수군거리는 사람들 속에서도 도아린은 당황하지 않고 여유 있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 모습을 본 주현정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더욱 확신했다.‘배지유가 도아린 절반만 닮았어도...’그녀
집에 돌아온 후, 도아린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한 뒤 피곤함에 몸을 맡기며 잠에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사고가 나던 날로 돌아갔다. 구급차에 누워 있는 자신과,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며 귀에 대고 속삭이는 배건후의 모습이 보였다.하지만 배건후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고 그녀는 배건후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갑자기 도아린은 비명처럼 낮게 소리치며 꿈에서 깨어났다.그때 옆 방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일북은 그녀의 안전을 위해 가장 가까운 방에 있었지만 방 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악몽에서 깨어난 도아린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쾅!번개가 치고 그 뒤로 낮게 울리는 천둥소리가 들렸다.도아린은 발코니로 가서 창문을 닫으려다 갑자기 아래 전봇대 근처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남자는 검은 코트를 입고 야윈 체격을 감췄으며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손에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그는 깊게 한 모금 들이킨 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담배꽁초를 꺼내 꾹 눌러 끄고는 다시 걸어갔다.쾅!다시 번개가 치자 그 검은 그림자는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도아린은 창문을 확 열고 머리를 내밀었지만 그 남자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그는 약간 다리를 절뚝거리는 듯 보였고 크고 굵은 빗방울이 코트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괜찮으세요?”일북이 소리를 듣고 방으로 다가왔다.“혹시 돌아오는 길에, 집 아래에서 사람 본 적 있어?”도아린이 급히 물었다.일북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예, 나이 든 남자가 있었어요. 전화하면서 사투리 쓰고 있었어요.”‘나이든 남자?’배건후는 원래 연성 출신이라 가끔 그 지역 특유의 억양을 쓸 뿐 사투리는 쓰지 않았다.도아린의 눈빛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아무 일도 아니야, 아마 내가 너무 예민했나 봐. 계속 누군가가 감시하는 느낌이 들어서.”일북은 방으로 돌아갔다가 이내 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도아린은 머릿속에서 그 마지막 말을 계속 반복하며 마치 차가운 바다 깊이 빠져든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건후 씨가 죽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중에 나한테 해줄 얘기가 많다고 했잖아. 어떻게 그 약속을 어길 수 있어!’“아린아, 도아린!”주현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도아린을 몇 번이나 불렀지만 반응이 없자 그녀의 손을 잡았다.“건후 씨가 죽을 리 없어요.”도아린은 중얼거리듯 말했다.“그럴 리 없어요... 어떻게 죽을 수 있죠? 약속을 지키지 않을 사람이 아닌데, 나한테 할 얘기가 아직 많다고 했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감정이 격해져 주현정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절 속이는 거죠? 건후 씨는 살아 있어요! 혹시 얼굴을 많이 다쳐서 못 나온 건가요? 아니면 불구가 돼서? 아니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건가요? 건후 씨가 죽을 리 없잖아요!”“아린아...흑흑...”두 여자는 서로 부둥켜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도아린은 가슴이 답답해지며 마치 무언가 꽉 막힌 듯 괴로웠다. 갑자기 그녀는 주현정을 밀쳐내고 돌아서서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급히 온 탓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녀는 헛구역질만 하며 숨이 가빠졌다.주현정은 급히 생수를 건넸지만 그마저도 마신 뒤 토해냈다.주현정은 도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배건후와 도아린은 결혼 이후 다른 부부들처럼 알콩달콩한 결혼 생활을 보내지 못했고, 결국 이렇게 되자 그녀는 아들이 도아린을 소홀히 대해온 것이 마음이 아팠다.도아린이 아들을 위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현정은 위로를 받았지만 도아린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아린아, 건후는 헛되이 죽지 않을 거야! 나는 반드시 그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도아린은 온몸에 힘이 빠져 겨우 일어섰다.“어머님, 할 말이 있어요.”그녀는 눈물을 닦고 감정을 추스르며 배건후가 자신에게 남긴 두 가지 서류를 꺼내 들었다.서류를 확인한 주현정은 아들이 이런 계
“대호 오빠! 내 발... 발이 부러진 것 같아...”“입 닥쳐!”성대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꾸짖었다.“멍청한 것!”그가 다시 속도를 올리자 차 밑으로 목발이 들어가며 뒷바퀴가 갑자기 튕겨 올라갔다.“악!”배지유의 종아리가 완전히 부러졌다.차 문이 열린 채로 도로를 질주하던 차는 바로 교통경찰의 눈에 띄었다. 두 대의 경찰 오토바이가 곧바로 추격하며 외쳤다.“앞차, 멈추세요! 0731차량 소유자, 즉시 멈추세요!”백미러로 잠시 상황을 살피던 성대호는 핸들을 꽉 쥔 채 교차로를 지나면서 급히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배지유는 심한 통증에 의식이 흐려져 갔지만 본능적으로 의자에 매달려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차는 급하게 방향을 틀었고 관성에 의해 결국 차 밖으로 떨어졌다.“끼익.”뒤에서 달리던 차는 도로에 사람이 떨어지자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뒤따라오던 차들은 미처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추돌했다. 결국 앞차는 큰 충격을 받아 앞으로 밀렸고 배지유 다리 위로 덮쳐왔다.“아악!”성대호는 여전히 미친 듯이 도망쳤고 다음 교차로를 향하던 중 경찰차와 경호원들에 의해 마지막 도망길도 차단당했다.“차에서 내리세요! 당신을 위험 운전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휴게실 안,소식을 들은 주현정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도아린에게도 상황을 전했다.도아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성대호는 자신이 받은 증거가 배건후가 일부러 넘긴 것임을 알게 된 뒤 숨었어요. 건후 씨는 이미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어머님께는 아무 얘기도 안 하던가요?”주현정은 고개를 저었다.“내가 배석준이랑 이혼한 후, 건후는 나와 일부러 거리를 두었어. 내가 그와 만난 횟수는 널 만나는 것보다 적었어! 건후도 참... 무슨 일이 있으면 가족들에게 말해서 상의하지...”도아린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가족?’‘배지유처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가족은 오히려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일 뿐이지.’‘
민철홍은 무표정한 얼굴로 배지유를 한 번 쳐다본 후,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다들 돌아가서 자신의 자리 지키세요! 이전에 맡았던 프로젝트는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하고 잘 되면 배 대표님께서 보상이 있을 겁니다. 다만 제자리를 못 지키고 딴 궁리를 한다면 짐 싸서 나가야 할 거예요!”말을 마치고 그는 주현정에게 인사를 한 뒤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떠났다.“민 사장님!”배지유가 크게 외쳤지만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남은 사람들은 서로 말없이 눈치를 봤다.‘민 사장 말 들으니 큰 문제가 없나 보네.’‘아마 얼굴의 상처가 심해서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가 봐.’‘지금은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되겠네. 나중에 책임을 물으면 어려워질 테니까.’곧, 병원 복도에는 배지유만 남았다.그녀도 더는 제 편이 없다는 걸 깨닫고 더 이상 버티지 않고 돌아가려 했다.“배지유를 지금 당장 집에 데려가!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외출하지 못하게 해!”주현정이 싸늘한 어조로 명령했다.“네! 알겠습니다!”한 경호원이 휠체어를 밀기 위해 나섰다.배지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저항했다.“집안에 감금하는 건 불법이야!”“이게 다 널 위해서야. 더는 네가 그놈들이랑 손잡고 회사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네 오빠의 목숨을 노리게 할 수는 없어! 너 정말 남은 생을 감옥에서 보내고 싶어?”“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엄마! 왜 도아린 말을 믿고 내 말은 안 믿는 거예요? 내가 친딸이잖아요!”배지유가 아무리 저항하고 발버둥 쳐도 경호원은 휠체어를 붙잡고 밖으로 밀고 나갔다.배지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집에만 가만히 앉아 배건후의 처벌을 기다릴 수 없었다.그렇다고 또 성대호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면 그는 또 갖은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힐 테였다.하지만 지금은 성대호만이 그녀를 데리고 여기를 뜰 수 있었고 모욕당하는 것과 감옥에 가는 것 중에서 그래도 전자가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엘리베이터는 계속 내려가다 7층에 도달한 후 많은 환자들
주현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다시 분노에 차 소리 질렀다.“병실 밖에서 소란 피우지 말라고 했잖아요!”간호진이 곧바로 달려오고 주현정이 민철홍을 보며 말했다.“민 사장님은 나랑 안으로 들어가요!”“알겠습니다!”민철홍은 그녀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배지유도 틈을 타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가자고 재촉하며 말했다.“이건 위급한 상황이에요!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제 오빠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을 거예요!”그녀는 휠체어를 밀며 병실 안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도아린이 문 앞에서 막았다.“도아린! 너는 도대체 뭐냐! 왜 우리 집안일에 자꾸 끼어들어!”“배지유, 네가 왜 회사 임원들을 여기로 불렀는지 그 꿍꿍이를 모를 것 같아?”도아린이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배지유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너는 성대호 그 사람과 손잡고 건후 씨를 모함하고 모욕했어, 대체 뇌물을 얼마를 받은 거야?”배지유가 대답하기도 전에, 도아린이 시끄러운 임원들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여러분, 주 대표님의 지시에 따르고 회사를 지키지는 못할망정, 배지유처럼 직책도 없는 사람이 선동하는 대로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신 건 정말로 회사 생각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배지유처럼 뇌물을 받고 이러시는 건가요?”“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는 배 대표님이 걱정돼서 온 거야!”한 노인이 불만을 표하며 반박했다.“여기에 있는 임원분들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배지유는 자기 어머니의 약을 바꿔치기한 패륜 자예요. 게다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제 아버지를 유혹하라고 시켜서 자기 부모님의 결혼생활을 파탄 냈어요. 이런 몰상식한 사람에게 선동당한 여러분도 똑같이 천벌 받을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요!”“...”많은 사람들이 도아린의 말에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들 중 몇 명은 배석준이 정보를 캐내기 위해 보낸 사람들이었다.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배석준은 지금 전 대표의 신분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고 다시 회사의 권력을 쥐게 되면 지
“어떻게 된 거예요?”도아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주현정을 바라봤고 주현정은 입을 가린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병실 안에는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는 각종 의료 장비가 가득했지만 정작 병상은 텅 비어 있었다.“건후 씨는 어디 있죠?”도아린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현정의 팔을 단단히 붙잡으며 물었다.“제발 말해 주세요. 건후 씨,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건후가, 건후가...”그 순간, 경호원의 전화가 주현정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고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말하세요.”“아가씨가 회사의 몇몇 임원분들을 데리고 와서는 배 대표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곧 나갈게요.”전화를 끊은 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일단 밖의 문제를 해결하고 내 사무실에서 이야기하자.”도아린이 병상을 바라보았다.“여기까지 왔다면, 완전히 단념하게 만들어야죠.”30분 후.주현정과 도아린이 병실 문을 나섰다.“배 대표님 상태가 어떤지 정확한 설명을 해 주세요!”“추천하신 임시 대표가 능력이 나쁘진 않지만 결국 우리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배 대표님께서 만약 장기간 치료가 필요하다면 우리 쪽에서 적절한 대표를 선출하는 게 맞습니다!”“엄마! 이사님들도 이렇게 다 오셨는데, 도아린 같은 외부인은 오빠를 만나게 하면서, 왜 정작 가족인 저희는 못 보게 하는 거예요?”배지유가 휠체어를 조종하며 앞으로 나섰다.주현정은 딸을 싸늘하게 노려보다 곧바로 무리의 중심에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민 사장님, 제가 여러분을 못 만나게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배 대표는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무더기로 병원에 몰려와 소란을 피우는 건 환자를 위하는 행동인가요? 아니면 그의 치료를 방해하려는 건가요?”주현정의 목소리에 카리스마가 실려 있고 민철홍은 주변의 이사들을 돌아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배지유를 한 번 힐끔 쳐다본 후, 입
도아린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배건후가 자신의 명의로 보유한 회사의 모든 지분을 그녀에게 이전한 것이다!이건 마치... 유언을 남기고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도아린은 애써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눈물은 서류 위로 떨어졌다.도아린이 서둘러 닦아내며 물었다.“교통사고 이후로, 장 변호사님도 배 대표를 한 번도 못 만났죠?”“네. 이건 배 대표님이 미리 준비해 둔 거였어요. 저에게 절대 먼저 도아린 씨를 찾지 말라고 했습니다. 도아린 씨가 직접 찾아오면 그때 서류를 넘기라고 했어요.”도아린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눈물을 훔쳤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배건후가 미리 위험을 감지해서 이런 거라면 분명 대응책도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그녀에게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도아린은 배건후가 맡긴 책임을 짊어져야 했고 악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 없었다!그녀는 빠르게 서류 절차를 마무리한 후, 차에 올라타 청룡에 메시지를 보냈다.[누군가 모건 그룹을 노리고 있어요. 그들이 순순히 내가 회사를 접수하도록 두지 않을 거예요. LY의 인맥을 활용할 필요가 있어요.]청룡이 움직이자, 서대은도 곧 소식을 접하고 도아린에게 연락을 해왔다.[보스! 나에게 다시 한번 만회할 기회를 줘! 이번엔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아버님은.][이미 다른 곳으로 옮겼어.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이용해 날 협박할 수 없을 거야!][네가 하는 것 봐서.]진씨 가문의 사람들은 배건후가 미리 준비해 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그가 혼자 결정해 도아린에게 모든 것을 넘긴 것이었지만 도아린은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우리가 도울 일은?”“지금은 필요 없어요!”도아린이 고개를 저었다.“필요할 때가 오면 주저 없이 도움을 요청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다음 날, 도아린은 곧장 연성으로 돌아가 주현정을 만났다.주현정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고 도아린의 어깨가 눈물로 흠뻑 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