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자가 어디까지 도망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잡혀 오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봉씨 집안사람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봉현수는 구린 구석이 꽤 많아 보였다.온다연이 침묵에 잠긴 것을 보고 유강후의 말투는 더욱 차가워졌다.“넌 절대 따라 배우지 마. 만약 지난번과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못 했다.차량 뒷좌석에서 유강후는 두 사람 사이의 빈 공간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가까이 와서 앉아.”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유강후에게 다가갔다. 그것도 답답한 듯, 유강후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겼다.“내가 말했지. 문에 붙어서 앉지 말라고.”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안아서 자기 무릎에 앉히려고 했다. 그녀는 황급히 뒤로 뺐다.“안 돼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막강한 아우라에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댔다.“오늘은... 키스를 너무 많이 했어요. 입술이 아프다고요...”유강후의 눈빛은 이제야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가웠다.“이리 와. 내가 봐줄게.”온다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강후는 어린아이를 안듯이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그러고는 턱을 잡고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입 벌려 봐. 까졌는지 확인할게.”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했다.“싫어요. 또 키스하려는 거죠.”여린 목소리는 애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반항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유강후는 깊어진 눈으로 손에 힘을 줘서 그녀의 입술을 벌렸다.입 안쪽은 약간 까져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더 크게 벌려 봐. 안엔 어떤지 보게. 심각하면 약 발라야 해.”여기서 말을 안 들으면 그는 힘만 더 줄 것이다. 그래서 온다연은 순순히 입을 더 벌렸다.다행히 상처가 깊은 곳까지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강후가 그녀의 입속을 바라보는 눈빛은 점점 깊어졌다.그는 그녀의 혀를 잠
유강후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입구에 서 있었다. 아주 장엄한 분위기를 뿜으면서 말이다.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그의 표정은 아주 차가웠다. 눈빛 또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시선으로 구멍이라도 뚫을 것처럼 온다연을 빤히 바라봤다.누가 봐도 사장의 말을 들은 반응이었다. 그 모습에 온다연은 손끝이 약간 떨렸다. 주한이 좋아하던 음료수를 산 것만으로 알아보게 될 줄은 몰랐다.이 편의점은 주한이 자주 오던 곳이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와서는 음료수 두 병을 사 왔다. 사정이 좋아진 다음에는 근처의 식당에 가서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하기도 했다.온다연이 이곳에 안 온 지는 4년 정도 되었다. 이쯤이면 사장도 잊을 줄 알았는데 결국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그녀는 음료수를 꽉 잡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람 잘못 보셨다고요. 저 여기 처음 와요.”유강후를 발견한 사장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온다연을 바라봤다. 그녀의 창백한 안색과 떨리는 손끝을 보고, 사장도 무언가 눈치챈 듯했다.“아, 그러네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그 아가씨가 지갑을 두고 갔는데, 빨리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몇 번째 잘못 알아보는지 몰라요.”온다연은 한시름 놓으며 결제하려고 했다. 이때 유강후가 다가와서 물었다.“어떤 지갑이요? 보여주실 수 있어요?”사장은 잠깐 멈칫하다가 온다연을 바라봤다.“아가씨 남자 친구예요?”온다연은 음료수를 꽉 잡은 채 대답했다.“네!”사장은 자기 생각에 더욱 확신했다. 온다연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약간의 동정이 서려 있었다.그는 웃으면서 서랍에서 지갑을 꺼냈다.“이 지갑이에요. 혹시 근처에서 본 적 있으면 알려줘요. 얼핏 보면 여기 아가씨랑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요. 안에 사진이 있거든요.”유강후는 말없이 지갑을 펼쳤다. 갈색 지갑 안에는 잔돈과 카드가 있었다. 그리고 자그마한 사진도 있었다.사진 속의 여자는 온다연과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작고 피부는 뽀얀 것이 온다연과 마
온다연은 조수석에 앉아 고개를 돌린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유강후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이 거리에서 그녀는 몇 년 동안 살았다. 곳곳에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설령 유씨 집안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해도 그녀는 거의 매일 이곳으로 왔다.물론 그때는 주한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그녀는 이 거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지라 어느 골목 벽에 벽돌이 몇 개 떨어졌는지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다만 유감스럽게도 항상 그녀의 곁에 있어 주던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주한은 4년 전 악랄한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주한이 눈을 감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17살이었다.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주한은 영원히 눈을 감게 되었다. 그리고 주한을 죽게 만든 인간들은 멀쩡히 살아 있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들고 있던 음료수를 꽉 잡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등에 핏대가 드러났다.‘주한, 내가 꼭 복수해줄게!'멍 때리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차를 세웠다.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던지라 춥기도 했고 습하기도 했다. 거리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차는 나무 그늘에 세웠던지라 불빛이 어두웠다.동시에 차 안의 분위기는 어둡고도 위험하기도 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고개를 억지로 돌리며 빤히 보았다.“말해 봐. 예전에 다른 남자랑 이 거리를 걸었어?”말을 마친 그는 온다연을 빤히 보았다.만약 온다연이 세심한 사람이었다면 유강후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그는 온다연이 그런 적 있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예전의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10년 전 그가 바꿀 수 없었던 그때, 그녀가 유난히도 힘들었던 그때, 조금 전 그 사장이 말한 것처럼 그녀에게 따듯함을 준 남자애가 있는지 궁금했다.만약 있었다면 그 남자애는 영원히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살게 될 것이다.그는 그녀의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 살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
유강후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강제로 온다연의 고래를 돌렸다.“왜 피하는 거지?”온다연은 그의 손을 떼어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아저씨, 아파요. 정말로 아프단 말이에요.”나무 그늘 아래 불빛은 어두워졌고 그녀의 눈빛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작고 나른한 목소리만 들려왔다. 꼭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오늘은 안 돼요. 아파요...”그녀는 이 거리에서 그와 키스하고 싶지 않았다. 행복했던 기억이 가득했던 이 거리에 불쾌한 기억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유강후는 손을 내렸다.“어느 식당에서 밥 먹고 싶어?”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음료수만 만지작거렸다.“제가 가고 싶은 식당은 그리 호화로운 곳은 아니에요. 혹시 아저씨가 싫으시면 안 가도 돼요.”그 식당은 그녀와 주한이 자주 가던 식당이었다. 방금 그 일로 그녀는 식당 주인이 또 그녀를 알아볼까 봐 조금 겁이 났다.지금은 주한이가 제일 좋아했던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으니 그와 함께 마시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로 만족했다.그러나 뜻밖에도 유강후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어느 식당인데?”온다연은 다소 뜻밖이었던지라 자심 고민하다가 말했다.“그냥 다른 식당 가요.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먹고 싶은 건 아니에요.”운전대를 잡고 있던 유강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어느 식당인데?”온다연은 앞을 보았다. 앞쪽 모퉁이에 예전에도 있었던 커다란 회화나무가 보였다.저도 모르게 주한이 떠올랐다. 주한은 커다란 회화나무 아래에서 쉬는 것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이다.“저 앞쪽 모퉁이에 골목이 있을 거예요. 차로 들어가긴 힘든 길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다른 곳으로 가요.”유강후는 차에서 내렸다. 트렁크에서 양털 목도리를 꺼내 온다연에게 꼬옥 둘러준 뒤 자신은 옷깃을 세웠다.“걸어가자.”말을 마친 뒤 그는 온다연의 손을 잡아 자신의 주머니 안으로 쏙 넣었다.거리는 30, 40년 정도의 역사가 있었던지라 조금 낡았다.비까지 내리고 있어 길은 아주 미끄러웠고 조금만 방심하면 넘어질
유강후는 순간 아쉬움이 밀려왔다.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가 어렸을 때 풋풋하고 아름다운 연애의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는 이미 많은 순간을 놓쳤다. 지금 다시 보상하려고 해도 늦은 것 같았다.유강후는 작은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누가 웃는데? 다른 커플들은 다 업고 다니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 거지?”말을 마친 그는 코트 끝자락으로 그녀의 신발에 묻은 흙을 닦아주었고 이내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업혀!”온다연은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거절하고 싶기도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려 마음이 복잡했다.이 거리는 그녀와 주한의 추억이 가득한 거리였다. 그녀는 이런 거리에서 유강후와 애정행각을 벌이고 싶지 않았고 유강후와의 추억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그녀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고 내일이 없이 사는 사람이었던지라 많은 추억을 안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커다란 회화나무를 보더니 작게 말했다.“그럼, 저기 나무까지만 업어주면 안 돼요?”유강후는 그런 그녀가 이상해 미간을 찌푸리며 다소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안아서 가지.”말을 마치 그는 그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바로 오른팔로 안아 올렸다.그는 키가 컸지만, 그녀는 키가 작고 아담했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 꼭 작은 동물을 안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아무리 거리의 조명이 어두워도 온다연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그의 어깨에 파묻으며 들지 않았다.귀가 빨갛게 익어버렸다.유강후는 키가 큰 만큼 다리도 길쭉했기에 얼마 걸리지 않아 바로 회화나무 아래로 왔다.모퉁이로 걸어가려던 때 그는 다시 그녀를 길가의 벤치에 세워두고 등으로 업으려고 했다.이번엔 얌전히 업혔다.그의 등은 아주 넓고 듬직했다. 등에 업혔을 때 그녀는 착각하게 되었다.어쩌면 그녀에게 제일 의지가 가는 사람은 유강후일 것이라고.옷가게를 지나쳐 갈 때 커다란 유리창에 비친 유강후의 모습을 힐끗 보았다.젊고, 키도 크고
온다연은 고개를 확 들었다. 그러자 맑은 두 눈과 눈이 마주쳤다.식당으로 들어온 사람은 소년미가 잔뜩 풍기는 사람이었다. 연한 회색의 목폴라 티에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는 남자는 얼굴도 훈훈해 꼭 영화 포스터에서 볼 법한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식당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온다연은 그를 보자마자 놀라면서도 믿기지 않는 눈길로 보았다.남자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시선을 돌려 유강후를 보았다.온다연도 남자의 곁에 있던 사람을 보았다.젊고 예쁜 여자였다. 겨울인데도 옷차림이 얇았다. 여자는 크롭티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화장은 조금 두꺼웠지만, 애티는 가릴 수 없었다.온다연은 시선을 돌려 바깥을 보았다. 그들이 내린 차가 보였다.붉은색 페라리는 대충 문 앞에 세워져 있었고 차 앞에 달린 번호도 특이했다.그녀는 시선을 빠르게 거두며 주문 받으러 온 직원에게 말했다.“농어찜이랑 닭볶음탕, 그리고...”온다연은 메뉴판을 보며 주문했다. 소년이 집요하고 막막한 시선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이다.그녀는 이내 여자가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주희야, 우리 앉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으니까 옆 테이블에 앉자.”주희와 여자는 두 사람의 뒤에 앉았다. 온다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유강후는 그녀가 차 안에서부터 들고 있던 음료수를 컵에 따라 주었다. 온다연이 마시기도 전에 여자가 다가왔다.여자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머, 유 대표님.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 남하윤이에요, 기억하고 계시죠? 저의 아빠 성함이 남재웅이에요.”유강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버님은 잘 지내고 계시죠?”여자는 웃으며 말했다.“네, 어제도 대표님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대표님이 영원에서 기획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아주 훌륭하다면서 칭찬하셨는걸요. 윗선에서도 아주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평진과 부현의 프로젝트도 대표님께 넘어갈 것 같다고 말씀하셨죠.”이때
주희의 신경은 온통 온다연에게 가 있었고 남하윤의 말이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다만 유감스럽게도 온다연은 그를 등지고 앉아 있었던지라 계속 유강후를 빤히 보게 되었다.한참 지난 후 온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작은 식당 화장실 옆엔 문이 하나 있었다. 온다연은 화장실 가는 척 그 문으로 나갔다.2분 뒤, 주희도 그 문에서 나왔다.“누나.”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그녀를 불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온다연은 흐트러진 그의 옷깃을 정리해주며 작게 말했다.“연예계 들어가기로 한 거야?”주희가 답했다.“네, 돈 좀 벌려고요.”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어떤 길을 걸어가든 누나는 널 말릴 생각 없어. 하지만 아직 수능을 못 쳤잖아. 적어도 수능은 끝내고 해.”주희는 온다연의 손을 꼬옥 잡으며 결의에 찬 어투로 말했다.“저 더는 기다릴 수 없어요. 누나가 매일 유씨 집안사람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것만 떠올리면 너무 괴로워서 버틸 수 없어요. 게다가 누나는 제 약값까지 감당하고 있잖아요. 누나가 힘들게 사는 게 싫었어요. 요즘엔 누나가 유강후랑 함께 살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유강후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사람이라고요. 누나, 전 더는 누나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소년의 눈빛은 단호했고 두 눈엔 오로지 온다연만 담고 있었다.온다연은 손을 빼내며 문 쪽을 힐끗 보더니 작게 말했다.“여긴 대화를 나누기엔 적합하지 않아. 짧게만 말할 수 있으니까 잘 들어야 해.”“첫째, 일단 수능부터 봐. 두 번째, 네 형 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세 번째, 앞으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너랑 상관없는 일인 거야. 내가 죽든 말든 모른 척하고 살아. 이건 내가 네 형한테 빚진 것이기도 하고 너한테 빚진 것이라고 하니까...”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희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말했다.“누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나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발걸음 소리도 가까이에서 들리자 마음 급해진 온다연은 있는 힘껏 주희의 손을 떼어낸 후 밀어버리곤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작은 나무문이 닫힌 순간 모퉁이에 서 있는 유강후가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키가 아주 컸던지라 좁은 복도에 서 있기만 해도 공간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기분이 들어 숨이 막혀왔다.온다연은 심호흡을 하곤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아저씨, 우리 돌아가요. 저 몸 상태가 좀 안 좋은 거 같아요.”바깥에서 다소 오래 서 있었던지라 그녀의 안색이 조금 창백했고 손도 차가웠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환자 같았고 보기만 해도 나약하고 가련해 보였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몸이 왜 이렇게 찬 거지?”온다연은 행여나 주희가 문을 확 열고 들어올까 봐 겁이 나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저 아파요. 돌아가고 싶어요. 우리 집으로 가요, 네?”불빛 아래서 본 그녀의 얼굴은 더 창백했다. 입술엔 혈기도 없어 유강후는 정말로 그녀가 아픈 줄 알고 안아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손길을 피해버렸다.“안 돼요. 여긴 아저씨 지인이 있잖아요.”망을 마친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물건을 챙긴 뒤 계산을 했다.유강후는 그녀가 수상했지만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오니 저도 모르게 의심을 지우게 되었다.나가기 전 온다연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힐긋 보았다.주희는 복도 모퉁이에 서서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주희의 얼굴은 주한과 닮아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빤히 보고 있을 때 그 눈빛은 죽은 주한과 똑같았다.온다연은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더는 그를 볼 겨를이 없었기에 빠르게 고개를 돌려 나가버렸다.집으로 돌아왔을 때 장화연은 이미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아두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아 욕조에 담근 후 꼼꼼히 몸을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그런데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유강후는 천천히 강압적이면서도 부드럽게 그녀를 탐했다. 그녀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부끄러워하면
한 입 베어 먹자마자 권예진의 눈이 반짝였다.“이 맛은... 정말 맛있어요! 예전에 경원시에서 먹었던 맛이랑 비슷해요. 그 식당 주방장이 옛날 누구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왕에게 요리를 해주던 사람이래요. 그때 딱 한 번 먹어보고 다시는 못 먹어 봤거든요! 근데 오늘 이렇게 다시 먹어 보게 되다니... 진유나 씨, 요리 솜씨가 정말 좋으시네요!”온다연은 눈물이 맺힌 속눈썹과 볼 가득 음식을 담고 웃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운 다람쥐 같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맛있으면 많이 먹어요. 많이 가져왔어요. 하지만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집에 있는 요리사가 만든 거예요.”권예진은 전혀 가식 없이 죽과 반찬을 맛있게 먹었다.그리고는 계속 감탄했다.“진유나 씨, 정말 맛있어요! 매일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하시겠어요.”그녀의 얼굴에 드리웠던 어둠이 사라지고 햇살처럼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기회가 된다면 꼭 밥 얻어먹으러 가고 싶어요.”온다연이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언제든 환영이에요.”“그럼 꼭 기억해 두세요. 저는 사양 안 하는 사람이니까 맛있는 건 절대 안 놓쳐요.”권예진은 말한 대로 전혀 사양하지 않고 생선 살 죽을 깨끗이 비우고 만두도 절반이나 먹어 치웠다.행복한 표정으로 음식을 먹는 그녀를 보며 온다연은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저렇게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라면 뭐든 잘 헤쳐나갈 것만 같았다. 염지훈이 그녀를 놓친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다.온다연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맞다, 제 친구가 여기서 의상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데 최근에 새로운 개량 한복을 디자인했어요. 며칠 후에 패션쇼를 할 예정인데, 권예진 씨도 관심 있으면 같이 가요.”권예진의 눈이 반짝였다.“설무 스튜디오 말씀이세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권예진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꼭 가야죠! 그 스튜디오 옷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 아세요? 얼마 전에 나온 화려한 의상들 정말 잘 팔렸는데, 전 세계에 100벌 한정 판매
온다연은 주방에 닭곰탕을 끓여 달라고 한 후 직접 죽을 쑤었다.먼저 유강후에게 죽을 먹이고 체온을 재어 보니 어제처럼 열이 높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도시락을 들고 병원으로 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권예진이 병실 문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온다연을 보자 그녀는 일어섰지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온다연은 그녀에게 다가가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안에 안 들어가고 여기 있어요? 그 사람이 괴롭혔어요?”권예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가 더 빨개졌다.“아니에요.”온다연이 말했다.“아침 식사를 가져왔어요. 같이 먹어요.”병실에 들어가 보니 염지훈은 이미 깨어 침대에 기대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그는 흰 셔츠로 갈아입고 있었고 안색은 어젯밤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온다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는 반가운 기색을 보였지만 권예진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굳어졌다.“권예진, 꺼지라고 했잖아. 안 들려?”권예진의 눈시울이 더 붉어졌지만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진유나 씨가 들어오라고 하셨어요.”염지훈은 차갑게 말했다.“네 얼굴 보기 싫다고 했잖아. 사람 말 못 알아들어?”권예진은 몸을 떨며 황급히 뛰쳐나갔다.온다연도 화가 나서 말했다.“지훈 씨,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요? 그래도 어젯밤 당신을 간호해 줬고 위출혈로 쓰러졌을 때 병원에도 데려왔잖아요. 그녀가 아니었으면 당신은 집에서 죽었을지도 몰라요!”염지훈은 차갑게 말했다.“그런 호의 필요 없어!”그는 권예진에게 집에 오지 말라고 거듭 경고했었다. 그런데 왜 그녀가 거기에 있었던 걸까?그날 밤에도 그녀는 몰래 그의 집에 잠입해 그의 물에 약을 타고 그의 침대로 들어왔었다.평소 순진한 척 가장했던 그녀에게 완전히 속았던 자신이 한심했다.두 집안이 오랜 세월 친분을 쌓아온 사이가 아니었다면 그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감히 그의 앞에서 얼쩡거리고 또 온다연의 앞
“진유나 씨, 제발 불쌍히 여겨서라도 곁에 있어 주세요...”권예진은 조금 전 염지훈이 피를 토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이 사람은 당신만 있으면 돼요. 다른 사람은 아무 소용도 없어요.”온다연은 염지훈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고 그녀에게 모든 걸 다 해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예전에 그와 결혼할 거라 생각했을 때조차 도망치고 싶었다.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조용히 말했다.“권예진 씨, 나와 이 사람은 안 돼요. 끊을 거면 깔끔하게 끊어내야죠. 이렇게 질질 끌면 더 힘들어질 뿐이에요.”권예진이 말했다.“하지만 이 사람은 이미 이렇게 아픈데...”온다연이 말했다.“오늘 밤은 부탁해요.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돌아섰다.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자 유강후는 일어섰다.“끝났어?”온다연은 다가가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돌아가요.”유강후는 잠시 망설였다.“상태가 좀 심각해 보이는데 누군가 여기 남아서 지켜봐야 하는 거 아니야?”온다연은 병실 쪽을 흘끗 보고 고개를 저었다.“그의 어린 비서가 그를 많이 좋아하고 사람도 괜찮아요. 내가 알아봤는데, 집안도 그와 어울리고요. 두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게 좋겠어요.”유강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그는 일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염지훈의 성격상 절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게다가 그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염지훈은 그 어린 비서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이제 두 사람을 확실하게 묶어둘 무언가를 할 때가 온 것 같다.그가 말이 없자 온다연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가요. 내일 다시 올 거예요.”유강후는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올렸다.“집에 가자.”온다연은 몸부림치며 말했다.“내려 주세요. 아프잖아요. 열도 나고...”유강후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지막이 말했다.“조금 아픈 것뿐이야. 죽기 직전이라도 너는 안을 수 있어.”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지훈 씨, 너무 무리한 요구예요.”염지훈은 억지로 웃었다.“그래? 그럼 너희들은 만날 때, 나랑 약혼한 건 생각도 안 했어?”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지 않았다.방안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그때, 권예진이 들어와 온다연에게 조용히 말했다.“진유나 씨, 강 대표님이 밖에 계세요. 많이 아파 보이시던데...”온다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그 사람도 왔어요?”그녀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염지훈이 불렀다.“다연아, 난 그 사람 발가락 하나만도 못한 거야?”온다연은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말했다.“잠깐 보고 올게요.”염지훈은 희미하게 웃었지만 가슴 속에는 격렬한 고통이 몰려왔다.온다연이 밖에 나가보니 멀지 않은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유강후였다.평소 차갑고 위엄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지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옅은 피곤함이 드리워져 있었고 깊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마치 그녀의 연민을 갈구하는 듯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연약함이 느껴졌다.예전에 그를 감싸고 있던 모든 갑옷을 벗어 던진 듯 지금 그녀 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높은 곳에 있는 전쟁의 신 같은 남자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었다.실망할 줄도 알고 상처받을 줄도 알고 아픈 줄도 알고 힘들어할 줄도 아는 사람 말이다.온다연이 마음이 아파 말을 하려던 찰나, 뒤에 있던 염지훈이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더니 피를 토해냈다.권예진은 깜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갔다.“박 대표님!”온다연이 뒤를 돌아보니 염지훈은 계속 피를 토하고 있었다.그녀 역시 놀라 의사를 불렀다.한바탕 소란 후, 염지훈은 더 이상 피를 토하지 않았다.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보호자는 환자를 어떻게 돌본 겁니까? 자극을 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방금 화가 나서 이렇게 된 겁니다. 3일 동안 유동식만 드셔야 하고 혼자 두어서도 안 됩니다. 보호자분, 누구시죠? 와서 서명하세요!”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가서 서
온다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권예진 씨 맞죠?”권예진은 잠시 멍해졌다.“제 이름을 아세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영상에서 봤어요.”권예진은 서둘러 말했다.“진유나 씨,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저 박 대표님의 비서일 뿐이에요...”“괜찮아요.”온다연이 말했다.“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박현욱 씨와의 혼약을 파기하려고 해요. 권예진 씨는 좋은 분 같으니 그가 좋아할 만도 하네요. 두 사람이 함께라면 저도 안심이 됩니다.”권예진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두 분, 파혼하신다고요?”온다연: “네. 이번에 그 이야기를 하려고 왔어요.”염지훈의 다정했던 목소리와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오르자 권예진의 가슴은 시큼하게 저려 왔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는 사실 좋은 사람이에요. 기회를 한 번 주세요. 너무 빨리 결정하지 마시고요.”온다연은 권예진을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를 좋아하는 거 알아요.”그녀의 말에 권예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아, 아니에요. 그분은 그저 상사일 뿐이고 집안끼리 아는 사이일 뿐이에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에요.”온다연은 미소짓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염지훈이 잠에서 깨어났다.온다연을 보고도 긴가민가한 듯 그는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다연아.”온다연은 그를 부축해 앉히며 타박했다.“술을 그렇게 마셨다면서요?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염지훈은 고개를 떨구며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죽어간다니까 이제야 와 본 거야?”온다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이에요?”염지훈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방 안 공기는 어색하게 굳어졌다.권예진은 그런 염지훈을 보니 마음이 아파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섰다.방에 남은 두 사람은 각자 생각에 잠겨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한참 후에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박씨 가문에서 데려온 집사와 가정부들은요? 따라오지 않았나요?”염지훈의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온다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어요. 당장 갈게요. 병원 위치를 보내주세요!”그녀는 전화를 끊고 침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문 옆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는 유강후를 발견했다.온다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손을 잡고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아직 열이 나는데 왜 일어났어요?”유강후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방금 누구 전화였어? 어딜 가려고?”“염지훈 씨가 위출혈로 쓰러졌대요. 병원에 가야 해요.”남자는 즉시 표정이 어두워졌다.“안 돼. 절대 못 가.”유강후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하지만 그녀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염지훈 씨는 이곳에 가족이 하나도 없어요. 꼭 가봐야 해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 마디 내뱉었다.“안 돼. 그 자식이 널 속인 거야. 소처럼 튼튼한 놈이 갑자기 아플 리 없잖아. 너를 내 곁에서 떼어 놓으려는 술수야!”온다연은 조용히 그의 눈을 응시했다.“강후 씨도 평소에 건강한데 지금 앓아누웠잖아요. 워낙 그 사람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는데, 오늘 가지 않으면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아요.”유강후는 얼굴빛이 흐려지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나도 많이 아파. 열이 펄펄 끓어.”그는 온다연의 손을 끌어다 자기 이마에 얹었다.“못 믿겠으면 만져봐.”손바닥에 전해지는 열기에 온다연은 좀 걱정됐지만 염지훈의 상태가 더 위중하다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그녀는 손을 뿌리치며 속삭이듯 말했다. “어머님과 집사들도 강후 씨를 돌볼 수 있잖아요. 하지만 염지훈 씨는 이곳에 아무도 없고 지금 위출혈로 의식도 없대요.”일어서는 그녀의 모습은 단호했다.“후딱 갔다 올게요. 걱정되면 이권 씨랑 같이 가도 돼요.”“강후 씨는 가지 말아요. 둘이 또 주먹질할까 봐 두려워요.”말을 마친 그녀는 유강후가 동의하든 말든 옷을 갈아입고 현관문을 나섰다.안색이 어두워진 유강후는 온다연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따라나섰다.병실 문을 열자마자 온다연은 염지훈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미모
바닥에 널브러진 빈 술병만 열 개가 넘으니 염지훈은 완전히 만취 상태다.권예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속삭이듯 말했다.“위도 안 좋은데, 이렇게 많이 마시고 죽고 싶어요?”그녀는 말하면서 염지훈을 부축해 소파 쪽으로 끌었다.하지만 190cm에 가까운 큰 키에 우람진 체격인 염지훈을 그녀가 160cm의 가냘픈 체구로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허우적대다가 염지훈의 몸이 그녀 쪽으로 기울었다.그녀의 가냘픈 몸으로는 거대한 남자의 체중을 지탱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순식간에 두 사람은 바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권예진은 그의 몸에 눌려 바닥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의 등을 치며 소리쳤다."저기요, 제가 밑에 깔렸어요. 얼른 일어나세요!""박현욱, 개자식! 나를 깔아 죽일 셈이야? 비켜!""3초 안에 일어나지 않으면 경찰 부른다!""야, 빨리 일어나!"하지만 염지훈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만 흘러나올 뿐,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었다.권예진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간신히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왔다.하지만 바닥에 쓰러진 염지훈을 다시 부축하려던 순간,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이상한 감촉이 전해졌다.염지훈의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고, 바닥은 이미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깜짝 놀란 권예진은 황급히 손으로 그의 얼굴을 치며 소리쳤다. “괜찮으세요? 피를 토했는데, 위출혈이 아니에요?”염지훈은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손을 잡아끌면서 웅얼거렸다.“다연아, 가지 마, 가지 마...”“유강후한테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줘... 약혼 파기하지 않을게...”권예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휴대폰을 꺼냈다.“비서님, 지금 당장 들어오세요. 대표님이 과음하셨는데, 위출혈인 것 같아요. 병원으로 이송 부탁드립니다.”염지훈의 비서는 이내 도착했다.두 사람은 엄청난 노력 끝에 간신히 염지훈을 차에 실었다.다행히 근처에 대형 한인 병원이 있어서 급히 달려갔지만 도착했을 때 염지훈의 상태는 더욱
사건은 잠시 일단락됐다.***저녁에 권예진이 염지훈의 별장을 찾았는데, 문에 들어서자 진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안쪽을 들여다보니 염지훈이 술병 더미 속에 비스듬히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권예진은 깜짝 놀라 급히 달려갔다.하지만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염지훈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다연아, 너 왔구나...”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권예진은 가슴이 찌릿찌릿 아려와 그 자리에 멈춰 섰다.‘나를 그 여자로 착각한 건가? 그 약혼녀로?’염지훈은 흔들거리며 일어나 권예진에게 손을 내밀었다.“다연아...”권예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람을 잘못 봤어요, 박현욱 씨. 저는 진유나가 아니에요.”염지훈이 몸을 휘청이며 다가왔다.“다연이 아니면, 넌 누구야?”“아니, 넌 다연이야. 나를 보려고 북아메리카에 온 거야?”그가 하도 꽉 껴안아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된 권예진이 소리 질렀다.“염지훈 씨, 저는 진유나가 아니라 권예진이에요.”“아니!”염지훈은 갑자기 감정이 격해졌다.“넌 다연이야. 내 아내! 이 손을 놓으라고? 절대 못 놓아!”그는 흐느껴 울었다.“네가 먼저 나를 건드렸잖아. 네가 갑자기 내 차에 올라탔고, 같이 산에 눈 구경을 가자고 했어. 네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며 자꾸 내 마음을 흔들었어. 그래서 빠져든 거야.”“이제 와서 놓아달라니.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많은 걸 했는데, 어떻게 놓아줘?”그가 너무 꽉 껴안아 권예진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취해서 사람을 잘못 봤어요. 박현욱 씨, 저는 당신의 다연이 아니에요.”그녀가 저항할수록 염지훈의 팔에 힘이 더 실리면서 그녀를 옥죄었다.“아니, 넌 내 아내 다연이야. 내가 이번 생에 결혼해서 같이 살고 싶은 유일한 사람!""다연아, 유강후 곁에 있지 마. 그 자식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자격도 없어!""넌 잠시 잊었을 뿐이야. 유씨 가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해
오후에 유강후가 깨어났을 때 온다연은 옆에 없었다.그가 막 입을 열려는데 오진숙이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도련님, 물을 좀 마셔요.”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나 지금 아파?”오진숙이 걱정스럽게 말했다.“네, 의사 선생님께서 상처 부위가 감염돼 며칠 동안 열이 반복적으로 오르내릴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는 평소에 잘 아프지 않는 체질이고, 온다연이 곁에 없던 그 몇 년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열이 나면서 혼수 상태에 빠지자 전체 강씨 가문이 불안에 떨었다.유강후는 물을 조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다연은 어디 있어?”“서재에서 화상회의를 하고 계십니다.”오진숙의 말에 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진씨 가문에서 전화가 왔어?”오진숙은 감히 숨기지 못하고 그가 누워있는 동안 벌어진 일들을 대충 이야기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유강후는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럴듯하게 대처한 것 같았고 심지어 리더십도 있어 보였다.한편으로는, 그녀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점점 더 실감하면서 더 이상 이전처럼 그녀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감도 밀려왔다.더 큰 그물을 짜야만 그녀를 지켜낼 수 있을 것 같다.그는 옷을 갈아입고 서재로 갔다.널찍한 서재에 놓인 네 대의 컴퓨터가 모두 켜져 있었다.화상회의용 대형 스크린도 켜져 있었다.온다연이 컴퓨터 앞에 서서 이권 등에게 주식 매매를 지휘하고 있었다.화상회의 화면 속에서는 1,000여 명의 트레이더들이 그녀의 지시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매매를 진행 중이었다.이 광경을 본 유강후는 살짝 놀랐다.꼬맹이가 주식 그래프를 분석하면서 이렇게 많은 트레이더들을 지휘하다니.‘이 정도면 내가 해도 버거울 텐데...’그녀는 전혀 부담 없는 표정이었다.문 앞에 한참 서 있은 뒤에야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다.그때쯤 주가는 이미 기본적으로 안정된 상태였다.이권이 그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도련님, 깨어나셨네요? 온다연 씨가 저희를 이끌고 주식시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