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순간 아쉬움이 밀려왔다.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가 어렸을 때 풋풋하고 아름다운 연애의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는 이미 많은 순간을 놓쳤다. 지금 다시 보상하려고 해도 늦은 것 같았다.유강후는 작은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누가 웃는데? 다른 커플들은 다 업고 다니는데, 우리는 왜 안 되는 거지?”말을 마친 그는 코트 끝자락으로 그녀의 신발에 묻은 흙을 닦아주었고 이내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업혀!”온다연은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거절하고 싶기도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려 마음이 복잡했다.이 거리는 그녀와 주한의 추억이 가득한 거리였다. 그녀는 이런 거리에서 유강후와 애정행각을 벌이고 싶지 않았고 유강후와의 추억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그녀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고 내일이 없이 사는 사람이었던지라 많은 추억을 안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커다란 회화나무를 보더니 작게 말했다.“그럼, 저기 나무까지만 업어주면 안 돼요?”유강후는 그런 그녀가 이상해 미간을 찌푸리며 다소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안아서 가지.”말을 마치 그는 그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바로 오른팔로 안아 올렸다.그는 키가 컸지만, 그녀는 키가 작고 아담했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 꼭 작은 동물을 안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아무리 거리의 조명이 어두워도 온다연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그의 어깨에 파묻으며 들지 않았다.귀가 빨갛게 익어버렸다.유강후는 키가 큰 만큼 다리도 길쭉했기에 얼마 걸리지 않아 바로 회화나무 아래로 왔다.모퉁이로 걸어가려던 때 그는 다시 그녀를 길가의 벤치에 세워두고 등으로 업으려고 했다.이번엔 얌전히 업혔다.그의 등은 아주 넓고 듬직했다. 등에 업혔을 때 그녀는 착각하게 되었다.어쩌면 그녀에게 제일 의지가 가는 사람은 유강후일 것이라고.옷가게를 지나쳐 갈 때 커다란 유리창에 비친 유강후의 모습을 힐끗 보았다.젊고, 키도 크고
온다연은 고개를 확 들었다. 그러자 맑은 두 눈과 눈이 마주쳤다.식당으로 들어온 사람은 소년미가 잔뜩 풍기는 사람이었다. 연한 회색의 목폴라 티에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는 남자는 얼굴도 훈훈해 꼭 영화 포스터에서 볼 법한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식당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온다연은 그를 보자마자 놀라면서도 믿기지 않는 눈길로 보았다.남자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시선을 돌려 유강후를 보았다.온다연도 남자의 곁에 있던 사람을 보았다.젊고 예쁜 여자였다. 겨울인데도 옷차림이 얇았다. 여자는 크롭티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화장은 조금 두꺼웠지만, 애티는 가릴 수 없었다.온다연은 시선을 돌려 바깥을 보았다. 그들이 내린 차가 보였다.붉은색 페라리는 대충 문 앞에 세워져 있었고 차 앞에 달린 번호도 특이했다.그녀는 시선을 빠르게 거두며 주문 받으러 온 직원에게 말했다.“농어찜이랑 닭볶음탕, 그리고...”온다연은 메뉴판을 보며 주문했다. 소년이 집요하고 막막한 시선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이다.그녀는 이내 여자가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주희야, 우리 앉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으니까 옆 테이블에 앉자.”주희와 여자는 두 사람의 뒤에 앉았다. 온다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유강후는 그녀가 차 안에서부터 들고 있던 음료수를 컵에 따라 주었다. 온다연이 마시기도 전에 여자가 다가왔다.여자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머, 유 대표님.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 남하윤이에요, 기억하고 계시죠? 저의 아빠 성함이 남재웅이에요.”유강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버님은 잘 지내고 계시죠?”여자는 웃으며 말했다.“네, 어제도 대표님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대표님이 영원에서 기획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아주 훌륭하다면서 칭찬하셨는걸요. 윗선에서도 아주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평진과 부현의 프로젝트도 대표님께 넘어갈 것 같다고 말씀하셨죠.”이때
주희의 신경은 온통 온다연에게 가 있었고 남하윤의 말이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다만 유감스럽게도 온다연은 그를 등지고 앉아 있었던지라 계속 유강후를 빤히 보게 되었다.한참 지난 후 온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작은 식당 화장실 옆엔 문이 하나 있었다. 온다연은 화장실 가는 척 그 문으로 나갔다.2분 뒤, 주희도 그 문에서 나왔다.“누나.”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그녀를 불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온다연은 흐트러진 그의 옷깃을 정리해주며 작게 말했다.“연예계 들어가기로 한 거야?”주희가 답했다.“네, 돈 좀 벌려고요.”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어떤 길을 걸어가든 누나는 널 말릴 생각 없어. 하지만 아직 수능을 못 쳤잖아. 적어도 수능은 끝내고 해.”주희는 온다연의 손을 꼬옥 잡으며 결의에 찬 어투로 말했다.“저 더는 기다릴 수 없어요. 누나가 매일 유씨 집안사람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것만 떠올리면 너무 괴로워서 버틸 수 없어요. 게다가 누나는 제 약값까지 감당하고 있잖아요. 누나가 힘들게 사는 게 싫었어요. 요즘엔 누나가 유강후랑 함께 살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유강후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사람이라고요. 누나, 전 더는 누나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소년의 눈빛은 단호했고 두 눈엔 오로지 온다연만 담고 있었다.온다연은 손을 빼내며 문 쪽을 힐끗 보더니 작게 말했다.“여긴 대화를 나누기엔 적합하지 않아. 짧게만 말할 수 있으니까 잘 들어야 해.”“첫째, 일단 수능부터 봐. 두 번째, 네 형 일은 신경 쓰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세 번째, 앞으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너랑 상관없는 일인 거야. 내가 죽든 말든 모른 척하고 살아. 이건 내가 네 형한테 빚진 것이기도 하고 너한테 빚진 것이라고 하니까...”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희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말했다.“누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나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발걸음 소리도 가까이에서 들리자 마음 급해진 온다연은 있는 힘껏 주희의 손을 떼어낸 후 밀어버리곤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작은 나무문이 닫힌 순간 모퉁이에 서 있는 유강후가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키가 아주 컸던지라 좁은 복도에 서 있기만 해도 공간에 산소가 부족해지는 기분이 들어 숨이 막혀왔다.온다연은 심호흡을 하곤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아저씨, 우리 돌아가요. 저 몸 상태가 좀 안 좋은 거 같아요.”바깥에서 다소 오래 서 있었던지라 그녀의 안색이 조금 창백했고 손도 차가웠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환자 같았고 보기만 해도 나약하고 가련해 보였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몸이 왜 이렇게 찬 거지?”온다연은 행여나 주희가 문을 확 열고 들어올까 봐 겁이 나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저 아파요. 돌아가고 싶어요. 우리 집으로 가요, 네?”불빛 아래서 본 그녀의 얼굴은 더 창백했다. 입술엔 혈기도 없어 유강후는 정말로 그녀가 아픈 줄 알고 안아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손길을 피해버렸다.“안 돼요. 여긴 아저씨 지인이 있잖아요.”망을 마친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물건을 챙긴 뒤 계산을 했다.유강후는 그녀가 수상했지만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오니 저도 모르게 의심을 지우게 되었다.나가기 전 온다연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힐긋 보았다.주희는 복도 모퉁이에 서서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주희의 얼굴은 주한과 닮아 있었다. 특히 지금처럼 빤히 보고 있을 때 그 눈빛은 죽은 주한과 똑같았다.온다연은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더는 그를 볼 겨를이 없었기에 빠르게 고개를 돌려 나가버렸다.집으로 돌아왔을 때 장화연은 이미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아두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아 욕조에 담근 후 꼼꼼히 몸을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그런데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유강후는 천천히 강압적이면서도 부드럽게 그녀를 탐했다. 그녀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부끄러워하면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한때 경원에서 잘 나가던 부잣집 딸 고유정이 이런 최후를 맞이하게 될 줄은.물론 사람들의 호기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더 큰 소식이 퍼졌다. 바로 이씨 가문이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었다.조사를 받게 된 원인은 이씨 집안의 딸 이효진이 영원에서 대놓고 남자를 불러 거창하게 놀았기 때문이다.이효진의 진짜 SNS 계정을 찾아낸 사람들은 그녀가 올린 사치스러운 사진과 영상에 넋을 잃고 말았다.몇억이나 하는 슈퍼카에 가치가 억에 달하는 보석까지, 그리고 엄청나게 호화로운 커다란 별장 전부 그녀가 찍은 영상에 나왔다.게다가 이효진은 부계정을 만들어 네티즌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간간이 [내가 누구 딸인지 알아?]라는 댓글도 달았다.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네티즌들이 이효진을 신고하면서 엄밀하게 이씨 집안을 조사해주길 바란다는 청원을 올렸다.이씨 집안은 여론의 압박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되었고 수색영장도 떨어졌다.이씨 집안에 폭풍우가 휘몰아쳐 곧 망할 것 같았다.이러한 사람들과 인기 검색어 순위를 다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연예인 주혜성이었다. 그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 예능을 하게 되었다. 뛰어난 예능 감각과 꿀 바른 듯한 목소리에 순식간에 수많은 팬을 보유하게 되었고 인기도 치솟았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또 몇 개월이 지났다. 온다연의 고양이 구월이도 그녀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오후에 경원으로 돌아갈 때 그녀는 구월이도 데리고 갔다.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원에 급한 일이 생겨 유강후는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몇 시간 뒤, 유씨 집안 집사인 주석진이 찾아왔다.“온다연 씨, 사모님께서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셋째 회장님께서도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셋째 회장님은 유재성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유씨 집안의 셋째였던지라 젊었을 땐 셋째 도련님이라고 불렀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셋째 회장님이라고 불렀고, 셋째 도련님은 유강후의 호칭이 되었다.온다연은
차는 빠르게 달려 유씨 가문 본가로 왔다.차가 멈추자마자 온다연은 강제로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커다란 거실엔 유재성을 제외한 유씨 집안사람 전부 앉아 있었고 다들 사나운 눈빛으로 온다연을 보고 있었다.특히 최금영의 눈빛은 꼭 그녀를 이 자리에서 찢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유자성의 표정도 한껏 일그러졌다.비록 유자성은 예전에도 온다연에게 눈길을 준 적 없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었다. 이렇듯 쳐다보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보아하니 그도 온다연을 죽여버리고 싶은 듯했다.이들 중에서 오직 심미진만이 복잡하고 난감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이들을 본 온다연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그녀와 유강후의 관계를 알아버렸다고 생각했다.서늘한 한기가 그녀의 발밑으로부터 허리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오늘 어쩌면 정말로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시선을 돌려 유하령을 보았다.주먹을 꽉 움켜쥐며 생각했다. 만약 이 집에서 죽게 되면 반드시 유하령과 함께 죽이리라 말이다.이때 유하령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가와 손을 올리더니 그녀의 뺨을 갈궜다.“천박한 년!”온다연은 몸을 굽히며 유하령의 손길을 피해버렸다.그리고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유하령을 보더니 머리채를 확 잡고 힘껏 벽에 받아버렸다.그녀는 비록 키가 작았지만, 막상 궁지에 몰리게 되면 엄청난 괴력을 뿜어냈다.유하령은 소리를 질렀다. 벽에 머리가 부딪치고 나니 어질거렸다.머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온다연, 이 천박한 X! 지금 날 때린 거야?!”온다연은 그녀가 일어서기도 전에 다시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또 벽에 받아버렸다.유하령의 이마엔 어느새 피가 흘러나왔고 엄청난 통증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그녀는 손을 들어 까진 이마를 만졌다. 손에 피가 한가득 묻어났다.그러더니 비명을 지르며 말했다.“아아악! 감히 날 때렸어! 이 미친 X이!”온다연은 한 걸음 물러서며 차갑게 그녀를 보았다.“난 왜 널 때릴 수 없는데? 네가 뭐라고?”
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싸늘한 눈빛으로 유하령을 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담긴 악의를 발견한 유하령은 멈칫하더니 이내 화를 냈다.유하령은 또 온다연을 때리려 했다.이때 유민준이 방에서 나와 달려오며 말했다.“그만해!”온다연이 유하령에게 맞고 있는 모습에 유민준은 얼른 달려와 유하령을 밀쳐냈다.그리고 온다연을 붙잡고 있던 두 사용인에게 뺨을 때렸다.“이거 놔!”그는 온다연을 잡았다. 긴장한 얼굴로 온다연의 뺨을 살폈다.“아파? 많이 아프지?”온다연은 뺨을 감쌌다. 터진 입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나와 하얀 옷 위에 떨어져 가슴 아프게 했다.유민준은 너무도 마음이 아파 고개를 돌린 뒤 유하령을 노려보았다.“네가 뭔데 다연이를 때리는 거야?”유하령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오빠, 이제야 걱정해주는 거야? 그런데 어쩌지? 이미 늦었는데?! 오빠는 잊었나 봐, 예전에 저 X을 본인이 어떻게 대했는지. 겨우 그 좋아하는 마음으로 용서해 줄 것 같아? 저 X이 예전에 오빠가 했던 짓을 전부 잊어줄 것 같냐고!”그녀는 온다연을 가리키며 악독한 말만 내뱉었다.“똑똑히 봐. 얘는 오빠가 어릴 때부터 괴롭혔던 애라고! 오빠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릴 때부터 괴롭혔던 애를 좋아할 수 있는 거야? 겨울에 얘 옷에 얼음 가득 넣고, 여름에 난방 끝까지 올려놓은 방에 가둔 사람도 오빠잖아. 설마 오빠는 자신이 괴롭혔던 사람이 취향인 거야?”유민준의 표정이 굳어지고 서늘한 한기를 뿜어냈다.유하령의 말은 아버지에게 훈계를 당하고 온 가족의 반대를 들었을 때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그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10년 전으로 가 자신을 때리고 싶었다. 정신 차릴 수 있게.온다연이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다는 사실은 아버지의 신임을 잃고 온 가족의 지지를 잃게 되었을 때보다 더 백 배, 천 배 더 고통스러웠다.그는 고개를 홱 돌려 온다연의 손을 잡으며 다소 당황한 어투로 말했다.“다연아,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렇지? 말해줘, 얼른 날 좋아한다고 말해줘! 네
강한 바람이 정원에 있던 나무와 풀을 흩날리며 착륙했다.집 안에 있던 사람도 그 소리를 듣고 전부 밖으로 나왔다.유자성은 그 헬기가 유강후의 헬기임을 알고 있었던지라 눈빛이 어두워졌다.지금 이 순간 그는 온다연을 죽여버리고 싶었다.눈길 한번 주지 않은 고아가 자기 아들에게 꼬리 쳤을 뿐 아니라 자신의 동생마저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유씨 집안은 그녀를 재워주고 먹여주었는데 그녀는 집안을 망치려 들고 있었다.‘더는 살려둬서는 안 되겠어!'한참 후, 헬기는 저택 정원 잔디밭에 착륙했다.헬기가 착륙하자마자 유강후는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내렸다.그는 검은 옷에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고 그 기세는 아주 싸늘해 보는 사람마저 등골이 서늘해지게 했다.유강후는 빠르게 유자성에게로 다가갔다. 코트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짙은 살기를 뿜어냈다.유자성은 순간 자신과 함께 20년 넘게 자란 이복동생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유씨 집안사람 중 유강후가 가장 행동력이 빠르게 인내심이 있다는 것을.그리고 유일하게 아버지 유재성의 두뇌를 물려받은 사람이기도 했다.유강후가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엔 유강후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다.그랬기에 자신이 아무리 유강후의 형이라고 해도, 유강후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해도 실권을 들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유강후였다.게다가 유자성은 알고 있었다. 그때 그 일 후로 유강후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음을. 집안사람들에겐 여전히 예의를 차리고 있지만 사실 유강후는 가족애라는 것이 없었다.이 집안에서 유강후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 유재성이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한낱 고아 때문에 자신을 적으로 돌리려 하고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유자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살기를 띄었다.‘그 고아, 아무래도 정말로 살려둬선 안 되겠어!'‘형제 싸움은 절대 우리 집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니까!'유강후가 다가오기도 전에 유자성이 차갑게 말했다.“뭐냐, 가족도 아닌 남을 위해
온다연이 너무 안쓰러워 덩달아 괴로움이 밀려온 유강후는 끊임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아니야. 다연이는 최고의 엄마야.”“우리 아이는 다연이를 엄청 좋아해. 그러니까 계속 꿈에 나타나잖아.”“울고 싶으면 울어. 참지 않아도 돼.”온다연은 울먹였다.“꼭 돌아오겠죠? 강후 씨, 아이는 다시 절 찾아올 거예요. 맞죠?”“그런데 꿈속에는 신발 한 켤레도 없이 맨발이었어요. 너무 불쌍해요.”꿈속의 장면이 떠오른 온다연은 가슴이 터질 듯 울부짖었다.“그곳이 너무 춥대요. 왜 데리러 안 오냐고 원망하는데...”“강후 씨, 아이가 추워하나 봐요.”“나 너무 힘들어요.”“괴로워요.”...극심한 괴로움과 고통은 몸의 경련을 일으켰다.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느새 유강후의 옷자락을 적셨다.그는 온다연의 피와 살에 녹아들듯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돌아올 거야. 무조건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 다연아, 이제 그만 아파해.”...한참 동안 울다가 지쳐버린 온다연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안방 문을 열려 있었는데 침대는 깨끗이 치워졌고 도우미 몇 명이 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찾고 있었다.그에게 안겨있던 온다연은 발버둥 치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 팔찌가 부러진 곳에 무릎을 꿇더니 나무판자 틈을 따라 조금씩 이동하며 찾았다.온다연이 움직이는 방향 따라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마침내 호박석은 바닥과 벽이 맞닿은 틈새에서 발견됐다.온다연은 그것을 손에 쥔 채 미친 사람처럼 울고 웃었다.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예 몰랐던 도우미들은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나지 않아 푹 숙인 채 입을 닫았다.유강후는 그녀 앞에 무릎을 반쯤 꿇고 품에 안았다.“다연아, 이제 찾았으니까 좀 쉴래?”온다연은 호박석에 담긴 아이의 체온이라도 느끼려는듯 손에 꽉 쥔채 놓지 않았다.“강후 씨, 아이가 잠든 곳에 가고 싶어요.”온다연은 몸이 너무
‘호박석에 들어있는 게 정말 아이의 머리카락이라고?’온다연이 차고 있던 팔찌는 엊그제 영문도 모른 채 끊어졌고 그때 호박석을 잃어버렸다.그걸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아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를 잃어버렸으니 죄책감이 밀려왔고 반드시 다시 찾으리라 다짐했다.‘찾아야 돼. 아직 그 방에 있을 거야.’온다연은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어갔다.이를 본 장화연도 얼른 뒤따라가며 그녀를 말렸다.“다연 씨, 건강이 회복되면 언제든지 아이를 만날 수 있어요.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이대로 나가면 다칠 겁니다.”온다연은 주저 없이 장화연을 밀어냈다.“비켜요. 장 집사님이 참견할 일이 아니잖아요.”장화연은 경호원에게 눈치를 주고선 여전히 온다연을 부축했다.“그럼 뭐라도 좀 먹고 가세요. 엄마가 힘없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속상해할 겁니다.”그 말을 듣고 멈칫한 온다연은 곧바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내가 초라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싫어하겠지?’‘하긴 이런 엄마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온다연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죽 먹을게요. 줘요.”장화연은 그녀를 작은 식탁으로 부축해 갔다.“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온다연은 죽을 필사적으로 입에 밀어 넣었다.너무 급하게 먹은 탓에 속이 안 좋은지 곧바로 심한 기침을 이어갔다.장화연을 다급하게 죽그릇을 옆으로 치웠다.“이렇게 드시면 안 됩니다.”때마침 병실로 돌아온 유강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기침하고 있는 온다연을 발견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다급하게 달려오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유강후는 병실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단호하게 호통쳤다.“사람이 몇인데 이런 일도 똑바로 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한 명을 케어하는 게 어려워?”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이때 온다연이 유강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그러고선 팔찌를 뚫어져라 쳐
장화연은 한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답했다.“다연 씨는 가족이 없잖아요. 아이가 유일한 희망인데 지금은...”“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도련님은 무조건 다연 씨의 편을 들어야 합니다. 망설임 없는 확고한 모습을 보여줘야 다연 씨는 안정감을 느낄 겁니다.”“잠드신 것 같은데 침대로 옮기시죠.”유강후는 신생아를 안은 듯 조심스럽게 온다연을 침대로 옮겼다.온다연의 연약함은 깃털과도 같아서 그가 조금만 힘을 줘도 금방 찢어질 게 틀림없다.하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리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유강후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치 이렇게 하면 온다연이 그에게 잡혀 영원히 도망칠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어느새 유강후도 잠이 들었다.꿈속에는 그는 온다연과 두 아이를 낳았다.아들은 유강후를 닮고 딸은 온다연을 닮았는데 두 아이가 유강후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안아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그들은 평범한 부부처럼 밤에는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아침에는 달콤한 입맞춤으로 하루를 시작했다.유강후는 매일 그녀에게 해바라기 한 송이를 선물했고, 온다연은 늘 밝은 미소와 부드러운 포옹으로 그에게 보답했다.그러던 어느 날 온다연이 선물이라며 그림을 주었다. 그림에는 해바라기로 가득한 꽃밭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온다연은 이 그림의 이름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얘기했다.심장이 터질듯한 행복감이 밀려온 유강후는 이대로 떠나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자존심만 세우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귀함을 벗어던지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남은 여생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할 용기가 생겼다.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가질 수 없는 게 제일 비참하다.그 시각 온다연도 꿈을 꾸고 있었다.꿈속의 온다연은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고 누군가에게 손을 밟혔다.유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그러게 내 말을 들었어야지. 이건 벌이야.”나은별은 그의 곁에 기대어 애교를 부리며 웃었다.“강후 씨, 벌이 너무 가벼운데? 말 잘
하지만 이제 온다연에게 아이는 없다.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미 없었을 수도 있다.온다연은 더 이상 유강후가 본인을 속이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고 그와 따지려는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이미 모든 것에 실망했으니 다시 누군가는 사랑할 능력과 용기조차 없었다.따스한 햇볕과 달리 그녀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이 세상은 온다연에게 너무 각박했고 살고픈 희망을 가질때 쯤 잔인하게 짓밟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유강후는 차가운 온다연의 손을 어루만지더니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며 말했다.“아침 바람은 쌀쌀하니까 여기에 앉아 있지 마.”그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온다연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나은별을 만나고 왔겠지?’‘이 향기는... 나은별에게서 나는 건가?’‘역시나 나보다는 나은별이 더 중요하구나. 전화 한 통에 밤새도록 자리를 비운 걸 보면...’‘됐다. 누굴 좋아하든 마음대로 해.’온다연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이때 장화연이 죽과 함께 아침밥을 챙겨왔다.“도련님, 이쪽에서 드세요. 제가 다연 씨를 돌볼게요.”“내가 할게. 죽 이리 줘.”유강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려 소파 등받이에 기대게 한 후 푹신한 쿠션을 그녀의 허리 뒤에 놓아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만들어줬다.그럼에도 온다연은 힘이 없는 듯 똑바로 앉아 있지 못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쿠션 두 개를 더 가져와 그녀를 지탱했고 모든 걸 마친 후 그는 죽을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마침 장화연은 죽을 그릇에 옮겨 닮고 있었다.유강후는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위가 안 좋으니까 앞으로 이것보다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줘.”“알겠습니다. 이것도 2시간이나 고아서 만든 죽입니다.”“다연이 언제 깨어났어?”장화연은 온다연을 힐끗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깨어난 지 여섯시간쯤 되었습니다. 눈을 뜨고도 지금껏 계속 말이 없었고 아침부터 저쪽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합니다.”그녀는
한바탕 난리 후 의사도 진땀을 뺐다.다행히 검사 결과 큰 문제는 없었다.보름이 넘도록 쉬지 못한 데다가 온다연이 걱정되어 줄곧 긴장한 상태였으니 몸이 지쳐 쓰러진 게 틀림없다.이런 상황에서도 온다연의 곁을 지키려고 하자 의사는 안된다며 강제로 수면제 한 알을 먹였다.곧이어 이권과 장화연도 들어왔다.장화연은 초췌한 모습의 유강후를 보며 가슴이 미어졌지만 표정만은 담담했다.“오늘은 푹 쉬세요. 다연 씨의 곁은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유강후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눈뜨면 바로 불러.”이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아무 생각 말고 얼른 주무세요.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어르신의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유강후는 여전히 온다연이 걱정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수면제를 먹은 탓에 잠이 쏟아졌다.곧이어 깊은 잠에 빠졌다.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약병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간호사가 시야가 들어왔다.간호사는 잠에서 깬 유강후를 보더니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방금 누가 에센스 하나를 깨뜨려서 제 몸에 향이 배었습니다.”유강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으니까 나가봐.”그렇게 말하고 그는 일어나 침대에서 나왔다.그래도 억지로라도 깊은 잠을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유강후는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이 아홉시간 정도 잤다는 걸 알아챘다.바깥은 이미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기분이 언짢아진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권, 들어와.”서둘러 안으로 들어온 이권은 안색이 많이 좋아진 유강후를 보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어제는 정말 표정이 않았는데...”“왜 안 깨웠어?”유강후의 말투에서는 언짢음이 담겨있었다.“깊이 자고 계시길래 일부러 안 깨웠습니다. 도련님, 거의 1년 넘게 맘 편히 잠을 못 주무셨잖아요. 다연 씨는 장 집사님이 지키고 있으니...”“이권!”유강후는 싸늘했다.“이제 제멋대로 행동하는구나? 이번 달
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네 말은 배에 탄 사람 들중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유강후는 단 한 번도 탑승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다.그 배는 유강후의 소유였기에 당시 초청을 받은 사람들도 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굳이 꼽자면 소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사이가 어색한 것 빼고는 거의 다 유씨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집안이다.집안의 뿌리까지 서로 얽혀있는 사이랄까?아무리 소씨 가문과 관계가 어색하다고 한들 가문 후계자가 유강후의 소꿉친구이니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능력이 많이 모자랐지만 책임감이 있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니까.이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저는 단지 수상쩍은 생각이 들 뿐입니다. 도련님이 물에 들어갔을 때 마침 상어 떼가 나타났잖아요. 배에 타고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중 한재민 씨만 도련님을 발견한 것도 뭔가 좀 걸립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계획 살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타깃은 도련님이 아닌 한재민 씨죠...”“듣기로는 그날 한재민 씨가 나은별 씨와 엄청 크게 다퉜다고 합니다.”유강후는 눈빛이 반짝였다.“이 일이 나은별이랑 관련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이권이 답했다.“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그 답을 들은 유강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은별이 성격이 더러운 건 사실이야. 우리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건 알지? 내가 아는 나은별은 그런 일을 계획할 사람이 아니야. 재민이의 아이까지 임신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그는 잠시 망설였다.“권아, 앞으로 이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내 친구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 만에 하나 정말 크게 싸웠다 해도 상대를 죽일 만큼은 아닐 거야.”이권은 말문이 막혔다.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나은별이 걸어온 전화였기에 이권은 자연스레 스피커폰으로 돌렸다.통화가 연결되자 곧이어 연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나 보러 와줘. 응?”“어제 꿈꿨는데 계속 그 장면이 떠올라서 너무 괴로워.”“재민 씨
이권은 재빨리 입을 닫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유강후는 자고 있는 온다연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자리 좀 지켜줘. 다연이 눈뜨면 바로 연락하고.”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답했다.“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지는 마세요. 다연 씨는 지금 대표님이 필요합니다.”유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선 곧바로 병실을 나갔다.장화연은 그들을 배웅했다.그 시각 침대 위의 온다연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곤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권은 유강후가 나오자 재빨리 옆에서 다가갔다.“도련님, 헬기는 준비했습니다.”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통보하는 거야? 제멋대로 결정하는 거 보니까 미래 그룹의 대표를 해도 되겠어.”“그래도 도련님을 대신해 총을 막았으니 적어도 한번은 찾아가는 게 예의라고 생각합니다.”유강후는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피우지 않고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경원은 매우 컸고 반짝이는 네온 불빛과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했다.한때 유강후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 도시마저 그의 발밑에 있다고 느꼈다.그러나 현실은 아이를 지키지 못했고 온다연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했다.만약 지금 가진 모든 것으로 아이의 생명을 바꾸고 온다연의 마음과 환심을 얻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내놓을 준비도 되어있다.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은 없다.담배 연기가 가라앉고 불꽃이 반쯤 꺼졌을 때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권아, 넌 와이프랑 사이가 좋아?”“성격이 예민한 것 말고는 괜찮아요.”“와이프 임신했다며? 몇 개월이야?”이권의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떠올랐다.“3개월이요. 임신해서 그런지 더 예민하더라고요.”유강후는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아이가 태어나면 큰 선물을 줄게. 권아, 나는 네가 정말 부럽다.”밝은 불빛과 달리 유강후는 오히려 밤의 어둠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울고
“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아이는 다시 생길 거야. 너만 건강하다면 반드시 선물처럼 찾아올 거야.”...드디어 차가 병원에 도착했고 온다연은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급성 위경련으로 이미 약했던 위가 강한 자극을 받아 대량의 출혈을 일으켜 피를 토해낸 것이다.곧이어 응급 처치 및 수혈이 시작됐다.장장 두 시간 정도 지속되었다.그 후 온다연은 병실로 옮겨졌지만 밤이 될 때까지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의사도 이런 상황이 의외인 듯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진행했다.진찰을 마친 의사는 진지하게 말했다.“위출혈로 찾아오는 환자는 지금도 많습니다. 다만 그 심각도에 따라서 상황이 나뉘죠. 대량의 피를 토해낸 심각한 경우라면 30분 이내에 쇼크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다연 씨의 경우 이미 심한 위궤양 증세를 보이고 있으니 절대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보통 출혈이 끝나고 상태가 점차 호전되면 5시간 안에 의식을 되찾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열 시간이 지나도록 눈을 감고 있네요.”“대표님, 제 생각에 다연 씨는 스스로 코마 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깨어나고 싶지 않은 거죠. 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운 모양입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시죠.”의사가 떠난 후 유강후는 오랫동안 온다연의 침대 앞에 앉아 있었다.그는 손으로 온다연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온다연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말랐고 성격도 많이 변해 있었다.어쩌면 아이가 바뀐 걸 알아채고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더는 견디지 못해 육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진 것 같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대고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말자. 우리 함께 맞서 싸우자.”...얼마 후 장화연이 들어왔다.유강후는 외로운 조각상처럼 홀로 온다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세 시간 전에 봤던 모습과 똑같이 자세조차 바꾸지 않은 그를 보며 장화연은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유
그 말과 함께 온다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이렇게 빌게요. 제발 아이를 다른 사람한테 주지마요. 안 그러면 확 죽어버릴 거예요.”“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제발 아이만...”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애써 이성을 유지하며 온다연을 일으켰다.“다연아, 거짓말이 아니야. 저 아이는 우리 아들이 아니라니까?”온다연은 그를 바라봤다.“말했잖아요. 우림이랑 유전자 검사해 봤다고요. 혈연관계가 없다는 결과를 이미 확인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날 속일 거예요?”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저 아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면 진짜 아들은요? 누구한테 줬어요?”유강후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고 점점 더 과격해졌다.“말하라고요. 내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요.”어느새 유강후의 눈에도 슬픔이 차올랐지만 입을 꾹 닫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왜 대답을 못 해요? 말해줘요. 내 아이는 어디에 있는지.”“말하라고!”이때 뒤에 서 있던 이권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제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날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리더니 이권을 쳐다보며 물었다.“이권 씨는 알고 있죠?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요.”“이권, 입 닫아.”유강후가 단호하게 호통을 쳤지만 이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다연 씨, 아이는 죽었어요.”“그 작은 아이가 5개월 동안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요.”“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련님의 손바닥 위에서 마지막 숨이 끊겼습니다.”그 말은 날벼락처럼 날아가 온다연의 가슴을 후벼 찧었다.‘죽었다고?’‘내 아들이 죽었다고?’그녀의 눈빛은 서서히 생기를 잃었고 마치 영혼 전체가 고통에 휩싸인 것처럼 공허하고 슬퍼졌다.‘아니야. 분명히 건강을 되찾고 있었어.’‘거짓말하는 게 분명해. 세상이 지금 날 속이고 있는 거야.’심장이 멎은 듯 숨이 막혀온 온다연은 몸을 떨면서 중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