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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 화

작가: 동그라미
‘망했다. 도망 못 가겠네.’

한때 임슬기를 사로잡았던 목소리가 이제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임슬기는 배정우와 함께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그와 연다인이 다정하게 속삭이는 모습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젠 치가 떨릴 정도로 지겨워졌다.

그녀는 바닥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치더니 고개를 흔들면서 창백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너랑 돌아가지 않을 거야. 배정우, 우리 이혼하자.”

‘이혼? 나랑 이혼하겠다고?’

배정우는 긴 다리를 뻗어 임슬기에게 다가가 손목을 덥석 잡고는 옆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였다.

“임슬기, 내가 말했지. 이혼은 꿈도 꾸지 말라고. 너 아직 빚도 채 갚지 못했어.”

임슬기는 목이 졸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폐암 때문에 숨쉬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폐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목에서 올라오는 피를 억지로 참았다.

“내가 대체 너한테 뭘 빚졌는데?”

‘연다인이 유산해서? 아니면 연다인이 칼에 찔려서?’

하지만 어느 쪽이든 임슬기가 한 건 하나도 없었다. 단지 배정우가 믿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알면서 뭘 물어?”

배정우는 그녀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차에 밀어붙이고는 음침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임슬기,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지 마.”

‘인내심? 언제 나한테 인내심을 보여준 적이라도 있었어?’

임슬기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피를 다시 삼켰다.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던 그때 배정우가 드디어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를 차 안으로 밀어 넣더니 그도 차에 올라탔다.

입을 막고 기침을 몇 번 하자 폐가 다 아팠다. 그녀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유리창 쪽으로 몸을 웅크렸다.

“아직도 연기하는 거야? 차라리 배우 하지 그랬어?”

배정우의 조롱에 임슬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란 말인가?

잠시 후 임슬기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배정우를 돌아보며 절망적인 말투로 말했다.

“방금 날 죽이려고 했어?”

그러자 배정우가 하찮다는 듯 비웃었다.

“널 죽인다고? 넌 죽을 자격도 없어.”

별장으로 돌아온 후 배정우는 임슬기를 차에서 끌어 내린 다음 질질 끌고 위층으로 올라가더니 침실 바닥에 세게 던져버렸다.

그녀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배정우의 두 눈에 싸늘함과 혐오가 가득했다.

“임슬기, 여기서 잘 반성하고 있어. 또 도망쳤다간 모든 걸 잃을 줄 알아.”

임슬기는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아픔을 참으며 그의 어두운 두 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난 이미 모든 걸 잃었어.”

그녀는 눈앞의 남자, 임씨 가문, 부모님, 그리고 남동생까지 잃었다. 잃을 게 더 있을까?

남은 것이라고는 몸뚱어리뿐이었지만 이젠 그것마저 곧 사라질 것이다.

배정우는 임슬기를 힐끗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 동생 만나고 싶어?”

‘종현이?’

임슬기의 두 눈이 번쩍이더니 이를 악물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내 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아? 빨리 말해줘.”

배정우는 임슬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문을 세게 닫고 나가버렸다.

임씨 가문은 사라졌지만 임슬기에게는 아직 아가씨로서의 자존심과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동생, 그리고 그녀가 갈망하는 자유가 있었다.

배정우가 빼앗을 수 있는 게 아직 많았다.

임슬기가 허둥지둥 다가가 문을 열려 했지만 문이 밖에서 잠겨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면서 목놓아 울부짖었다.

“배정우, 내 동생 어디 있는지 제발 알려줘.”

하지만 문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가둘 생각인 거지?’

아래층으로 내려온 배정우는 무서울 정도로 어두운 표정으로 권민에게 말했다.

“여자 하나 제대로 못 지키고. 쓸모없는 놈.”

권민이 고개를 숙였다.

“사모님께서 창문으로 나갈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로 생각지 못했다. 평소 그렇게 연약해 보이던 임슬기가 창문으로 나갈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배정우는 임슬기가 창문으로 나갔다는 권민의 말을 듣자마자 분노했다.

‘나한테서 벗어나려고 창문에서 뛰어내려?’

그는 계단을 돌아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가자.”

권민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아무도 안 남겨두고 그냥 가도 괜찮겠어요? 사모님 식사도 하셔야 할 텐데...”

배정우가 무섭게 째려보자 권민은 겁에 질려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차에 탄 후 권민이 물었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병원.”

연다인이 유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슬기가 휘두른 칼에 찔렸기 때문에 몸이 매우 허약했고 위로와 보살핌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연다인이 칼에 찔렸다는 것만 생각하면 배정우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임슬기 대체 언제 저렇게 악독해졌지? 잘못한 건 분명 임슬기인데 왜 항상 억울한 척하는 건지, 참.’

배정우는 생각할수록 더욱 짜증이 났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곧장 연다인의 병실로 향했다. 병실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문소리에 연다인이 고개를 돌렸는데 배정우를 보자마자 바로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일어나려고 했다.

“정우야.”

배정우는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움직이지 마. 지금 몸이 약해서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연다인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의사 선생님 실력이 좋아서 며칠 후부터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연다인이 철이 들수록 배정우는 임슬기를 더욱 싫어했다. 임슬기가 조금만 철이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정우야, 슬기... 괜찮아?”

연다인은 머리가 좋았다. 배정우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배정우는 철이 들고 말을 잘 듣는 여자를 좋아했기에 그의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때가 되면 배씨 가문 사모님 자리는 무조건 그녀의 것이 될 것이다.

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연다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걔 얘기는 왜 꺼내?”

연다인은 배정우의 팔을 잡고 훌쩍였다.

“다른 뜻은 없고 그냥 네가 슬기를 힘들게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 어쨌거나 슬기 내 친구고... 네 법적 아내이기도 하잖아.”

말을 마친 그녀는 한숨을 쉬며 씁쓸하게 말했다.

“결국 난 숨어서 살아야 하는 내연녀일 뿐이고.”

연다인이 임신했을 때 배정우는 그녀에게 명분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은 아이도 잃었고 명분도 주지 못했다. 하여 그는 연다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다인아, 며칠 후에 퇴원하면 반도로 들어와. 내가 명분을 줄게.”

연다인은 기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슬기랑 이혼할 거야?”

“아니.”

연다인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혼하지 않으면 어떻게 명분을 줘? 슬기조차 이혼을 원하는데 정우는 대체 왜 안 하겠다는 거야? 설마 슬기한테 미련이 있나?’

그 생각에 연다인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더 노력해야겠어.’

“근데 들어가도 돼? 슬기더러 날 돌보게 하는 건...”

배정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걔는 거절할 자격이 없어.”

임슬기는 남동생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다. 동생이 배정우의 손에 있다고 믿는 한 그의 말에 복종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사실을 몰랐다. 임슬기가 폐암에 걸렸다는 것을.

기침을 심하게 한 바람에 세면대가 온통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임슬기는 고개를 들고 거울 속의 초췌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6개월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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