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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7 화

작가: 동그라미
임슬기는 아주 길고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서 배정우는 한쪽 무릎을 꿇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오른손을 잡은 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슬기야, 나랑 결혼해줘.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줄게.”

임슬기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야, 네 신부가 되어 줄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런데 그때 화면이 갑자기 바뀌더니 임슬기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그날로 돌아갔다.

그녀는 임신 테스트기를 배정우에게 보여주었다.

“정우야, 나 임신했어. 곧 엄마 된대.”

배정우는 잠시 멍해졌다가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가 아빠가 된다고?”

임슬기는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는 그들의 첫 번째 아이였다.

‘앞으로 여러 명 더 생기겠지?’

배정우는 손에 들고 있던 검사 결과서를 내팽개치고 그녀를 끌어안더니 매력적인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 슬기야. 우리 가족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도록 노력할게.”

화면이 여기서 멈췄고 눈앞이 갑자기 암흑에 잠겼다. 배정우도, 웃음소리도 사라졌고 칠흑 같은 어둠이 임슬기를 삼키려는 듯했다.

바로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배정우의 화난 목소리였다.

‘왜 이러지? 누가 또 화나게 했나?’

곧이어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정우 씨, 연다인 씨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더니 조금 전 손목을 그었어요. 과다출혈로 위독한 상태라서 빨리 응급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혈액은행에 RH- 혈액이 한 팩밖에 없습니다.”

배정우는 눈살을 찌푸리고 들것에 실린 임슬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원래 붉었던 입술도 말라서 핏기가 없었는데 배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와 눈에 띄게 대비되었다. 창백한 건 더 창백하게, 빨간 건 더 빨갛게 보였다.

간호사의 말에 권민도 불안한 나머지 혼날 것을 무릅쓰고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도...”

권민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배정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빨리 수혈해주세요. 다인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책임을 물을 겁니다.”

배정우가 뿜어내는 살기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에 떨었다.

겁에 질린 간호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인 후 허둥지둥 달려갔다. 그런데 급하게 뛰어간 바람에 다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권민은 들것에 실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임슬기를 보며 물었다.

“대표님, 그럼 사모님은...”

권민을 노려보는 배정우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권민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용기를 내어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도 RH-입니다. 지금 수혈받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배정우는 고개를 숙여 임슬기를 보면서 싸늘하게 웃었다.

“죽어? 얘는 죽을 자격도 없어. 그리고 목숨이 질겨서 쉽게 죽지도 않아.”

그 말을 들은 순간 임슬기는 모든 게 생각났다.

배정우는 그녀와 연다인 중에서 연다인을 선택했다. 사랑이든 목숨이든.

아까 그건 진짜 꿈이었고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배정우는 이젠 영원히 돌아올 수 없었다. 지금 임슬기의 앞에 있는 사람은 그녀가 죽기만을 바라는 배정우였다.

꿈은 허망했고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곧이어 임슬기는 다시 의식을 잃었고 어두운 나락 속으로 떨어졌다.

의사는 옆에 서서 임슬기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시뻘건 피를 내려다보았다. 들것에 깔린 하얀 시트는 진작 빨갛게 물들었다. 배정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의사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배정우 씨, 이분 구할까요?”

“마음대로 해요.”

배정우는 이 말만을 남기고 휙 가버렸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연다인의 옆이었다.

요 며칠 아이를 잃은 것도 모자라 악독한 임슬기 때문에 배를 다쳤으니 정신이 불안정한 것도 당연했다. 앞으로 더욱 세심하게 돌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권민은 의사 곁을 지나가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선생님, 꼭 살려주세요. 사모님 이대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정우가 두렵긴 했지만 의사로서 사람을 살리는 건 그의 책임이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연다인의 응급실 밖에 도착한 배정우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게다가 무서운 살기까지 내뿜어서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일 것 같았다.

사람은 연다인에게 있었지만 마음은 임슬기에게 향해 있었다.

‘정말 죽는 건 아니겠지?’

임슬기를 사흘 동안이나 혼자 가뒀으니 반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자살이라니...

‘날 떠나려고 아픈 걸 그렇게 싫어했던 임슬기가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 일이 있은 후로 2년이 지났다. 이젠 고분고분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더욱 심해졌다. 임슬기가 도망치려 할수록 배정우는 그녀가 평생 도망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잠시 후 의사가 응급실에서 나왔다.

“배정우 씨, 연다인 씨 이젠 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다만 환자분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서 옆에서 많이 보살펴줘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연다인이 무사하다는 소리에 배정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그의 목숨은 연다인이 구해준 것이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할 수는 없었다. 이건 그녀와의 약속이었다.

진승윤이 도착했을 때 배정우는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담뱃불이 밝았다가 어두웠다 반복했고 담배 연기 때문에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배정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배정우가 싸늘하게 웃었다.

“왜? 날 비난하러 왔어?”

권민이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설득할 수 없어서 가장 강력한 지원군을 찾아야 했다. 어쨌거나 임슬기가 그의 목숨을 살려준 적이 있으니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진승윤은 어릴 적부터 배정우와 함께 자란 절친이었다.

배정우와 달리 그는 법대를 선택했고 졸업 후 법률 사무소를 차렸는데 지금 대성 그룹 법률 자문도 맡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배정우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까지 괴롭힐 생각이야?”

지난 2년 동안 진승윤도 그 모습을 봐왔지만 부부 사이의 일이라 개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 목숨이 달린 지금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죽도록 내버려 두는 건 살인이나 다름없다고. 알아?”

그 말에 배정우는 담배를 끄고 무서운 눈빛으로 진승윤을 쏘아보았다.

“살인? 그건 임슬기가 나한테 빚진 거야.”

“벌써 2년이야. 이젠 그만할 때도 됐잖아.”

“아니. 부족해.”

진승윤은 더 이상 그와 논쟁하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정우야, 난 네가 잘못된 행동을 하게 내버려 둘 수 없어.”

그러고는 가버렸다. 예전에 배정우가 임슬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죽으면 배정우는 분명 후회할 것이다.

배정우의 친구로서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막을 의무가 있었다.

진승윤은 서둘러 임슬기가 있는 응급실로 갔다.

그 시각 의사는 급히 수혈할 만한 사람을 찾다가 진승윤을 만났다.

“진승윤 씨?”

“임슬기 씨 담당 의사인가요?”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슬기 씨가 과다출혈로 쓰러졌는데 지금 RH- 혈액이 부족합니다...”

“제가 수혈할게요.”

의사가 당황해하자 진승윤은 팔을 내밀고 다시 말했다.

“제 피를 뽑으라고요.”

“아, 그리고 드릴 말씀이 더 있습니다. 임슬기 씨 폐암 말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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