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우에게 세게 밀쳐진 임슬기는 캐비닛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저도 모르게 아픈 신음을 냈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아픔을 참으며 뒷머리를 만져보았다. 오른손은 이미 피투성이였고 너덜거리는 살점이 더욱 섬뜩하게 보였다. 하지만 배정우는 전혀 보지 못했다.그는 임슬기가 연다인을 때리려는 줄 알고 본능적으로 다시 그녀를 밀쳤다.“그 더러운 손 치워.”그러고는 연다인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는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차갑게 노려보며 경고했다.“임슬기,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
임슬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배정우가 이렇게 일찍 들어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승윤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아침 먹을 거 좀 가져왔어. 너도 같이 먹자.”‘같이?’배정우의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지더니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그는 진승윤을 지나 임슬기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입은 잠옷이 눈에 너무도 거슬렸다.임슬기가 퇴원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집으로 왔다. 그런데 임슬기는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채 다른 남자와 아침을 먹고 있었다.배정우는 진승윤을 스쳐지나 임슬기의 머리채를 잡고 식탁에
“나더러 다인이를 챙기라고?”“무슨 문제 있어? 다인이 환자니까 밥할 때 신경 좀 써. 그리고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들를 테니까 밥은 꼭 해두고.”그 말에 임슬기는 이상한 생물체를 보듯 눈을 크게 뜨고 배정우를 쳐다봤다. 배정우는 마치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 임슬기가 그 고마움을 모르면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내 결혼 생활에 끼어들고 집안을 망하게 한 여자 시중이나 들라고? 나한테 모욕을 주는 방법도 정말 가지가지네.’그녀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배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임슬기, 거절하려고? 네 동생 생
임슬기는 폐가 움츠러드는 듯한 고통에 기침이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그래. 알았어.”그러고는 캐리어를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뜩이나 몸이 약한 데다가 병까지 걸렸고 또 복부의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라 28인치 캐리어를 혼자 들려니 두 걸음도 못 가서 온몸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멈추지 않았다.반쯤 갔을 때 배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짐 갖다 놓은 다음에 밥 준비해. 점심은 집에서 먹을 거야.”임슬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배정우가 임종현에게 해를 끼칠까 봐 발걸음을 멈추고
목이 가벼워지자 임슬기는 몇 번 기침을 했다. 기침하다 나온 피는 몰래 검은 옷에 닦은 다음 고개를 들고 배정우를 보며 웃었다.“정우야, 얼마나 더 말을 들어야 해? 난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너한테 2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어. 이젠 너한테 자유를 주고 두 사람이 당당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데 날 보내주지도 않잖아. 배정우, 내가 뭘 더 어떻게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배정우는 어두운 눈으로 임슬기를 쳐다봤다.“아직 부족해. 임슬기, 넌 아직 빚을 채 갚지 못했어.”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는 사람을 두려움
그 말에 연다인이 분노를 터트렸다. 조금 전 연약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임슬기, 누가 내연녀라는 건데?”“당연히 너지. 여기 너 말고 더 있어? 나랑 정우는 정략결혼이 아니라 연애하고 결혼했어. 넌 뭔데?”예전에 임슬기는 명인시의 가시 돋친 장미라 불릴 정도로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왜냐하면 독설을 잘했고 안하무인인 데다가 세상에 두려움이 없었다. 배정우 같은 사람 말고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남자가 없을 것이다.하지만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하도 괴롭힘을 당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을 뻔했
임슬기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벌벌 떨렸다.2년 전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TV를 통해 알게 되었다. 유언도 듣지 못했고 아버지의 시신조차 보지 못했다. 그녀가 갔을 땐 이미 재만 남아 있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너무 단순했고 연다인과 배정우를 철석같이 믿은 게 잘못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절대 임슬기의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연다인, 혹시 우리 아빠를 죽인 사람이 너야?”연다인이 코웃음을 쳤다.“상상력이 참 풍부하구나, 너.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임슬기는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몸이 쇠약해져 휘청거리다가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계단 난간을 잡아 넘어지진 않았다.문을 열자 배달원이 서 있었다. 임슬기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물건을 안쪽에 놓아줄 수 있나요?”배달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을 안쪽에 놓았다. 그리고 돌아서다가 임슬기의 머리와 손에 피가 나는 걸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다친 것 같은데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임슬기는 고개를 내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이곳은 재벌
진승윤의 물음에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진승윤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대답하려는 찰나, 갑자기 차희라가 허둥지둥 병실로 달려 들어와 그녀의 침대에 매달리며 말했다.“슬기야, 제발 서우를 구해줘.”깜짝 놀란 임슬기는 자기도 모르게 김현정을 끌어안고 물었다.“김서우가 왜요?”“누구한테 맞은 뒤 경찰서에 잡혀갔어.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대. 방금 경찰서에 가서 봤는데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 가지고 거의 죽기 직전이야. 슬기야, 제발 구해줘. 그 애도 누군가의 손에 놀아난 거야.”잠들어 있는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알 수
진승윤이 떠난 후, 김서우는 허겁지겁 연다인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열 번 넘게 전화를 걸어도 연다인은 받지 않았고 김서우는 등골이 오싹해졌다.진승윤조차 자신을 죽이려 드는 이 상황에 이제 그녀는 완전히 끝장난 것과 마찬가지였다.‘누구한테 도움을 청하지? 배정우? 엄마?’하지만 오늘 실검 사건 때문에 차희라는 이미 그녀에게 화를 내며 전화도 받지 않고 있었다.‘그렇다면 배정우를 찾아갈까? 그래. 배정우도 임슬기를 싫어하니까 분명히 날 도와줄 거야.’하지만 김서우는 배정우의 연락처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김
병원을 나선 진승윤은 위용에게 전화를 걸었다.“김씨 가문 관련 사건 중 두 가지를 골라 실검에 올려. 반드시 실검에 올라야 해.”“알겠습니다.”“그리고 감찰부에 김씨 가문을 익명으로 신고해. 탈세 혐의로.”위용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진 대표님, 정말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응, 해야 해. 그뿐만 아니라 김서우를 정식으로 고소할 거야. 살인미수로.”전화를 끊은 뒤 진승윤은 차를 몰고 김씨 가문으로 향했다.김씨 가문의 집사였던 허재문은 진승윤을 보고 잠시 당황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진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
김서우는 진승윤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나...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오해에요...”“안 했다고? 오해?”진승윤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살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서우 씨, 거짓말의 대가가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을 텐데.”“승윤 씨, 그게 아니라... 진짜로 아무것도 아니에요.”“지금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거예요? 난 그렇게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말이 끝나자마자 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 주차장에는 김서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이제 말할 수 있겠어?”참을 수 없는 아픔
병원 복도.김현정은 허둥지둥 달려와 병실 문을 열고 침대에 누워 있는 임슬기를 보더니 진승윤을 향해 물었다.“진 변호사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김현정이 나갔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어떻게 또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거냐는 듯한 표정이었다.진승윤은 간단히 상황을 설명한 뒤 물었다.“김서우와 슬기 사이에 또 다른 문제라도 있었나요?”진승윤은 자신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김현정은 휴대전화에 저장했던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실검에 오른 내용이에요.”진승윤은
진승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꽃뱀이라니? 다 너 같은 줄 알아?”“임슬기가 몇 번이나 다친 건 다 김씨 가문과 관련이 있는데, 그게 너랑 상관없다고?”배정우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진승윤은 김서우가 떠오르자,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갔다.이 일이 진승윤과 관계가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이미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서우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결국 말로는 안 통하는군. 행동으로 보여줘야겠네.’얼마 후, 육문주가 응급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두 사람을 훑어보며 물었다.“슬기 씨 혹시 머리를 부딪혔어요?”
말이 끝나자마자 배정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재빨리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거칠게 임슬기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진승윤은 놓아주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배정우, 적당히 해.”지금 임슬기는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가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진승윤은 배정우와 싸우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물러설 생각이 없었던 배정우는 임슬기의 손을 꽉 잡은 채 그녀를 응시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임슬기, 이리 와.”이미 얼굴이 백지장만큼 창백해진 임슬기는 목에서 올라오는 피 비린 맛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김서우의 말 한마디에 임슬기는 즉시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김서우는 먼저 온라인에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그걸 구실 삼아 따지러 온 것이었다.임슬기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김서우를 째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김서우, 진실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김서우의 눈빛에는 잠시 당황함이 스쳤지만 이내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우리 엄마에게 약을 타서 우리 집 재산을 가지려 했던 거잖아!”“김씨 가문 재산이 나랑 무슨 상관인데?”“상관없다고?”김서우는 콧방귀를 끼고는 말
임슬기는 강재호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동생 잘 돌보고,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요.”“고마워요, 임슬기 씨.”강재호는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원래 육문주가 두 사람을 배웅하려 했지만, 진승윤이 먼저 임슬기의 짐을 차에 실었다.“육문주, 너는 해야 할 일이나 잘해. 이런 일에 신경 쓰지 말고.”육문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승윤 형, 내가 무슨 원수예요?”“배정우의 간첩이잖아.”“진짜 아니라고요.”육문주는 진승윤의 귀에 속삭였다.“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