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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 화

작가: 동그라미
임슬기는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고 비틀거리며 욕조 옆으로 걸어가 수도꼭지를 틀더니 물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욕조에 앉았다.

한때 신부 앞에서 그녀를 평생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던 남자가 변했다. 사실 2년 전에 변했는데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배정우는 겉으로는 임슬기를 금이야 옥이야 아끼는 척했지만 실은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 가둔 것이었다.

배정우에게 임슬기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법적 아내? 아니면 화풀이 장난감?

마침내 물이 따뜻해지면서 그녀의 차가운 몸도 조금씩 녹아내렸다.

임슬기는 머리를 물속에 담그고 눈을 감았다. 배정우가 그녀의 목을 조르던 장면이 문득 떠올라 순간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숨을 몇 번 크게 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남동생을 찾기 전까지 죽어선 안 되었다.

임슬기는 욕조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고 문이 열리는지 다시 확인했다. 예상대로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어보았는데 굳게 잠겨 있었다.

배정우는 이번에 그녀를 방에 가두기로 작정한 듯했다.

그녀는 배정우에게 전화를 걸어 결과가 어떻든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배정우의 차에 두고 왔다는 걸 떠올렸다.

한때 시끌벅적했던 이 별장은 배정우가 변하면서 따라서 차갑고 적막해졌다.

처음에는 밥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사라졌다. 이제 이 별장에는 어둠이 가득했고 그녀 혼자만 남았다.

결국 배가 고프고 피곤한 나머지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창밖에서 갑자기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번개가 칠흑 같은 밤하늘을 갈랐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임슬기는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끌어안고 공포에 질린 채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이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났고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벽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워 창밖에서 엿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세찬 바람 소리는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임슬기는 비 오는 밤을 싫어했고 특히 천둥과 번개가 동반하는 비 오는 밤을 가장 무서워했다. 그녀는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렸다.

10살 때 임슬기가 유괴당했을 때도 이런 밤이었다. 하여 비 오는 밤이면 우비를 입고 가로등 밑에서 그녀에게 손짓하던 그 사람이 떠올랐다.

임슬기가 가까이 다가간 그때 번개가 치면서 그 사람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빨간 눈과 얼굴의 흉터, 그리고 혐오스럽고 변태적인 웃음소리가 지금도 생생했다.

또다시 천둥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겁에 질린 임슬기는 귀를 막고 온몸을 이불 속에 숨긴 채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정우야, 어디 있어? 무서워.”

“정우야...”

하지만 돌아오는 건 쓸쓸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가뜩이나 음산했던 분위기가 더욱 무서워졌다.

천둥 치는 밤이면 임슬기를 품에 안고 따뜻한 손으로 귀를 막아주면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위로해주던 남자는 이제 더는 옆에 없었다.

10살 때 비 오던 그날 밤이 무서웠는지, 아니면 배정우가 생각나서 슬펐는지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정우야, 우린 결국 다시 돌아갈 수 없구나.’

병원.

연다인은 배정우가 달래서 겨우 잠이 들었지만 천둥소리가 울린 순간 다시 놀라서 깨어났다. 그녀는 울면서 배정우의 소매를 잡았다.

“정우야,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너무 무서워.”

연다인을 내려다보던 배정우는 임슬기가 떠올랐다.

‘걔도 천둥소리를 무서워하는데. 혼자 별장에 둬도 괜찮나?’

신혼 초기에 천둥이 치기만 하면 임슬기는 배정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모습이 놀란 토끼처럼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배정우가 생각에 잠긴 그때 창밖에 또다시 번개가 쳤고 연다인은 놀라 배정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상처 부위를 건드려 아파서 신음했고 그의 품에 안겨 몸을 벌벌 떨었다.

연다인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쳐다보았다.

“정우야, 날 버리지 마. 제발.”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배정우는 침대에 앉아 연다인을 안고 어깨를 토닥였다.

“안 갈 테니까 무서워하지 마. 자꾸 움직이면 상처 다시 벌어져.”

연다인은 배정우의 품에 안겨 나지막하게 말했다.

“혹시... 슬기 걱정하고 있어?”

그 이름을 듣자마자 배정우가 얼굴을 찌푸렸다.

“슬기 걱정하고 있다면 가서 옆에 있어 줘. 어쨌거나...”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배정우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지만 미간은 더욱 찌푸려졌다. 임슬기만 생각하면 짜증이 확 밀려왔다.

‘젠장, 나 방금 임슬기를 걱정했어?’

2년 전 배정우가 교통사고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수도 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어디에 있었는가? 다른 남자와 침대에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늘 밤 임슬기가 죽는다고 해도 배정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연다인은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배정우가 지금 화난 상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연다인은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품에 파고들었다.

“이대로 안고 자면 불편해? 누울까?”

배 속의 아이를 잃었으니 배정우를 잡을 수단을 하나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최대한 빨리 아이를 다시 가져야 했다. 절대 임슬기에게 기회를 줘서는 안 되었다.

배정우는 움직이지 않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자. 괜찮아.”

그는 연다인과 지나친 스킨십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정도가 그에게는 적당했다.

그런데 눈을 감자마자 임슬기가 이혼하자고 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왜 또 걔 생각을 하는 거지?’

분명 더 이상 임슬기를 사랑하지 않는데 마음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아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바로 그때 권민이 문을 열고 들어와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회사에서 긴급회의를 요청했습니다.”

“무슨 일이야?”

“번개가 전력망을 강타해서 명인시 동쪽 지역이 정전되었고 일부 지역은 산사태가 나서 배달하는 사람들하고도 연락이 안 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 소리에 배정우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연다인의 머리를 베개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실에서 나온 후 권민은 배정우를 힐끗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별장도 동쪽에 있는데 사모님이...”

권민은 배정우의 반응을 살피려고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그는 여전히 배정우가 임슬기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 단지 연다인이 끼어들어 판단력을 잃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배정우는 잠깐 멈칫했다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 여자는 목숨이 질겨서 죽지 않아.”

“대표님...”

권민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배정우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움찔한 권민은 하려던 말을 다시 도로 삼켰다.

회의가 끝났을 땐 벌써 새벽 2시였다. 그때도 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무 뉴스 채널을 켰다. 그런데 산사태 영상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별장이 산사태가 발생한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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