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도망 못 가겠네.’한때 임슬기를 사로잡았던 목소리가 이제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임슬기는 배정우와 함께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그와 연다인이 다정하게 속삭이는 모습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젠 치가 떨릴 정도로 지겨워졌다.그녀는 바닥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치더니 고개를 흔들면서 창백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너랑 돌아가지 않을 거야. 배정우, 우리 이혼하자.”‘이혼? 나랑 이혼하겠다고?’배정우는 긴 다리를 뻗어 임슬기에게 다가가 손목을 덥석 잡고는 옆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 다른
임슬기는 소매로 입가의 피를 닦고 비틀거리며 욕조 옆으로 걸어가 수도꼭지를 틀더니 물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욕조에 앉았다.한때 신부 앞에서 그녀를 평생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던 남자가 변했다. 사실 2년 전에 변했는데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배정우는 겉으로는 임슬기를 금이야 옥이야 아끼는 척했지만 실은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 가둔 것이었다.배정우에게 임슬기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법적 아내? 아니면 화풀이 장난감?마침내 물이 따뜻해지면서 그녀의 차가운 몸도 조금씩 녹아내렸다.임슬기는 머리를 물속에 담그고 눈을 감았다. 배정우가
권민도 배정우의 눈빛이 변한 걸 눈치채고 급히 물었다.“대표님, 우리...”그런데 뜻밖에도 배정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임슬기를 엄청 걱정한다, 너?”그 말에 권민은 입을 다물었고 더는 임슬기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배정우도 다시 병원에 돌아가지 않고 사무실에 남아 업무를 처리했다. 하지만 이유 없이 짜증이 났고 모든 신경이 임슬기에게 가 있는 듯했다.‘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있다면 나한테 전화했겠지. 전화가 없는 걸 보면 아무 일 없다는 거야.’...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비가 그쳤다.임슬기는 몸을 떨며
임슬기는 아주 길고 긴 꿈을 꾼 것 같았다.꿈속에서 배정우는 한쪽 무릎을 꿇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오른손을 잡은 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슬기야, 나랑 결혼해줘.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줄게.”임슬기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정우야, 네 신부가 되어 줄게.”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그런데 그때 화면이 갑자기 바뀌더니 임슬기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그날로 돌아갔다.그녀는 임신 테스트기를 배정우에게 보여주었다.
‘폐암 말기?’진승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봤다.“확실합니까?”“네.”의사는 잠깐 망설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게다가 위 세척도 해야 합니다.”“위 세척이요?”진승윤은 또 한 번 당황했다.“네. 식중독인 데다가 비누도 반 조각 먹었고 며칠 전에는 바닷물에도 빠졌었습니다.”의사마저 안타까워했다.“이러다가는 환자분이 6개월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진승윤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알겠어요. 일단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세요.”“알겠습니다. 간호사한테 일단 피부터 뽑으라고 할게요.”진승윤은
배정우에게 세게 밀쳐진 임슬기는 캐비닛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저도 모르게 아픈 신음을 냈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아픔을 참으며 뒷머리를 만져보았다. 오른손은 이미 피투성이였고 너덜거리는 살점이 더욱 섬뜩하게 보였다. 하지만 배정우는 전혀 보지 못했다.그는 임슬기가 연다인을 때리려는 줄 알고 본능적으로 다시 그녀를 밀쳤다.“그 더러운 손 치워.”그러고는 연다인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는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차갑게 노려보며 경고했다.“임슬기,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
임슬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배정우가 이렇게 일찍 들어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승윤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아침 먹을 거 좀 가져왔어. 너도 같이 먹자.”‘같이?’배정우의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지더니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그는 진승윤을 지나 임슬기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입은 잠옷이 눈에 너무도 거슬렸다.임슬기가 퇴원했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집으로 왔다. 그런데 임슬기는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채 다른 남자와 아침을 먹고 있었다.배정우는 진승윤을 스쳐지나 임슬기의 머리채를 잡고 식탁에
“나더러 다인이를 챙기라고?”“무슨 문제 있어? 다인이 환자니까 밥할 때 신경 좀 써. 그리고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들를 테니까 밥은 꼭 해두고.”그 말에 임슬기는 이상한 생물체를 보듯 눈을 크게 뜨고 배정우를 쳐다봤다. 배정우는 마치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 임슬기가 그 고마움을 모르면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내 결혼 생활에 끼어들고 집안을 망하게 한 여자 시중이나 들라고? 나한테 모욕을 주는 방법도 정말 가지가지네.’그녀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배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임슬기, 거절하려고? 네 동생 생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데, 진승윤이 다가와 임슬기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슬기 씨, 흥분하면 안 돼요. 집에 가서 푹 쉬세요.”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한 지 오래였다. 배정우는 눈에 살기를 띠며 소리쳤다.“진승윤! 그 손 놔!”“배정우, 네가 만약 진심으로 슬기 씨를 생각한다면, 지금 슬기 씨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할 거 아니야. 퇴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임신까지 한 몸이야. 종일 고문 당하듯 이렇게 끌려다니면 버틸 수 있을 거 같아?”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슬기의 몸이 휘청거
임슬기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연다인은 달려가 배정우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정우야, 어떡해? 슬기 미쳤나 봐.”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듯한것처럼 불쌍하면서도 여린 목소리였다.임슬기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배정우, 애정 행각은 나가서 해. 역겨우니까.”임슬기의 말에 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연다인을 밀어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넌 여기 왜 온 거야?”연다인은 잠시 멈칫하다가 급히 그의 팔을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뉴스에서 임슬기가 잡혔다길래 서둘러 온 거야.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경찰이 그들을 막아섰다.“임슬기 씨, 경찰서로 동행해 주시죠.”이 모든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연다인이 영상을 공개하고 기자들까지 불러 모았는데, 경찰을 빼놓을 리가 없었다.연다인은 단순히 망신만 주려는 게 아니었다. 임슬기가 살인 혐의로 수갑을 차고 체포되는 모습을 세상에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이었다.“내려줘.”그 말을 듣고도 배정우는 쉽게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를 바닥에 내려줬다.임슬기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수갑을 찼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배정우는 알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왔다.
임슬기의 휴대폰이 울리자마자 차량 내부의 기묘한 정적이 깨졌다.“슬기 언니, 지금 어디예요?”김현정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임슬기는 정신을 차렸다.“왜, 무슨 일이야?”“오늘 밤 그냥 호텔에서 묵어요. 집에 가지 마요. 지금 아파트 아래에 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어요.”‘기자들이 몰려있다고?’임슬기는 순간 멍해졌다.“현정아, 정확히 무슨 일인지 말해봐.”김현정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니가 자수하는 영상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요. 지금 인터넷에서 언니가 불륜을 저지르고 집사까지 죽였다고 난리
장승태는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절대 배정우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그는 갑자기 어깨에 박혀 있던 칼을 뽑아 들고 그대로 자기 심장을 향해 찔렀다.“안 돼!”임슬기가 재빨리 달려가 막으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그녀의 손끝이 허공에서 떨렸다.칼날이 장승태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고 새빨간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장승태, 죽으면 안 돼!”그는 이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었다.장승태는 희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나지막이 말했다.“미... 미안해. 난... 다인이한테... 목숨을 빚졌
“개자식!”“왜? 죽이고 싶어?”장승태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죽여봐! 어서!”그러고는 임슬기만 들을 수 있도록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배정우 앞에선 죽어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거야.”“뭐?”임슬기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분노했다. 이를 꽉 깨물자 딱딱 소리가 날 정도였다.만약 조금이라도 이성을 잃었다면 당장이라도 장승태를 죽였을 것이다.“연다인이 대체 너한테 뭘 줬길래, 네 목숨까지 걸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연다인? 그게 누군데?”“비열한 놈, 2년 전 분명 연다인이랑 네가 꾸민 일이잖아.
장승태는 사지가 꽁꽁 묶인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온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꼭 벌을 받는 죄인 같았다.임슬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배정우를 바라보았다.권민이 한 말이 사실이었다. 배정우가 정말 사람을 시켜 장승태를 찾게 했다.그 순간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내 말... 믿는 거겠지?’그때 배정우가 입을 열었다.“이 자식이 오 집사를 죽인 게 확실해?”임슬기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복수하고 싶어
배정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손등엔 핏줄이 불거져 나왔고 마치 당장이라도 핸들을 부숴버릴 듯한 기세였다.‘이게 무슨 뜻이지? 후회한다고? 무슨 자격으로 후회하는데?’“임슬기, 주제 파악 좀 해!”임슬기는 코웃음을 쳤다.‘주제 파악하라고? 어쩜 쓰레기 같은 인간끼리 하는 말까지 똑같지.’그런데 대체 그녀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처음부터 끝까지 임슬기는 무엇 하나 틀린 게 없었다.“나를 모욕하려고 온 거면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는 게 낫겠어.”말을 마치자마자 임슬기는 진짜로 문을
임슬기는 진통제를 먹은 후 호텔에서 30분 정도 더 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휴대폰을 꺼내보니 김현정의 전화가 열 통도 넘게 걸려 와 있었다.아직 오정태의 시신을 돌려받지 못한 상태라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가슴이 미어졌지만 김현정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임슬기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전화를 걸었다.“슬기 언니, 어디예요? 왜 전화 안 받았어요?”“집에 냄새가 너무 심해서 좀 나와서 산책했어. 금방 들어갈 거야.”다행히 김현정은 의심하지 않았다.“네, 그럴 만도 해요. 어젯밤 수도관이 터지는 바람에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