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엽은 두 손으로 우해영의 어깨를 주무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밑으로 내려보면 그녀의 쇄골과 부드러운 피부가 보인다. 하지만 그 아래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우해영은 자기의 몸을 잘 보호하고 있었다. 샤워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빈틈없이 자기를 꽁꽁 감추었다.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던 김승엽의 손에 탄탄한 피부의 촉감이 전해져 왔다. 이건 늘 무술을 연습하는 사람의 그런 탄탄함이다. 다른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말랑한 느낌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때 키스를 했을 때 와도 다른 느낌이다.저번에 두 사람이 키스를 나누었을 때 자기의 품에 기대었던 그녀의 허리는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지금 생각해도 몸이 후끈해질 만큼 그의 마음을 흔들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동일하게 스킨십을 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두려움이 느껴지고 있다.‘내가 잘못 느낀 것일 거야! 지금 두 사람이 멀리 떨어져서 그럴 거야.’김승엽은 그때의 그 키스가 다시 떠올랐다. 그녀의 말랑한 입술을 생각하니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는 그때의 느낌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해영 씨...”김승엽이 허리를 굽혀 우해영의 귓가에 입김을 불었다. 그녀의 앙증맞은 귓불에는 다이아몬드 피어싱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저번에 선물해 준 귀걸이를 하지 않은 게 조금 실망스러웠다.“왜 내가 선물해 준 귀걸이 안했어요?”“...”우해영은 무의식적으로 김승엽을 한 대 칠 뻔했다.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집에 잘 챙겨 두었어요. 중요한 건 잘 보관해 둬야죠. 당신네 집처럼 귀중한 물건은 잘 챙겨 두어야 좀도둑이 들었을 때 쉽게 훔쳐 가지 못할 거 아니에요?”우해영은 김승엽을 떠볼 생각이었다. 김승엽은 그녀의 말에 다른 뜻이 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자기가 선물 해 준 귀걸이가 중요하다는 말만 귀에 들어왔다.‘역시, 마음속에 내가 있으면서 일부러 고고한 척하는 거구나.’‘이렇다는 건 내가 뭘 더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닐까?’이렇
지금 이 정도는 우해영이 김승엽을 많이 봐준 것이다.그녀는 남자와 접촉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 하지만 아직 큰일이 남아 있기에 지금 당장 김승엽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작게 혼내는 것뿐이다.무방비 상태였던 김승엽은 그녀에게 입술을 물려 버렸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아파서 이를 악물다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 소리를 질러 버렸다.“미쳤어요? 정말 정신이 이상한 거예요?”그냥 가볍게 혼내고 지나가려 했던 우해영은 그가 욕을 하자 얼굴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녀의 눈빛도 서리가 어려있는 듯 한층 더 차가워졌다.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참지 못하고 욕을 했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치자 김승엽은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두려움에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사람도 잡아먹을 듯 소름 끼쳤다.“아니, 정말... 아프다고요!”김승엽은 자기도 모르게 기세가 약해졌다. 그녀를 마주 보고 있으니 약간 위축되는 것도 같았다.씁 하고 숨을 들이마시고는 손으로 입술을 만지려다 아플까 봐 만지지 못하고 이내 손을 내리며 엄살을 부렸다.우해영의 살기는 그를 남자답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살기 대신 한심한 느낌이 마음속에 가득했다.‘정말 못났어.’만약 김씨 가문에서 고서를 그렇게 꼭꼭 숨기지만 않았어도 자기 이렇게 직접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우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찬물 한 컵을 받아 그에게 전해 주었다.“그래요.”“???”마치 다음 순간 그녀가 자기 얼굴에 물을 뿌리기라도 할 듯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물로 좀 헹궈봐요. 그럼 덜 아플 거예요.”우해영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여전히 차가운 태도였지만 조금 전까지 사람을 죽일 듯한 눈빛보다는 훨씬 나았다.그녀에게서 물을 받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입을 헹구려던 순간 문득 무언가 떠올라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소금을... 넣은건 아니죠?”우해영은 어이가 없었다.“내 방에 그런거 없는 거 당신이 누구보다
김승엽이 김씨 가문을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노부인이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이다. 김서진과 비교하면 조금 어리석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가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을 확률도 높고 그에게서 비밀을 캐내기도 더욱 쉬울 것이다.화장실에서 입을 헹구고 있는 김승엽은 그녀가 이런 마음을 가졌는지 절대 모를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만나왔던 여자에 비해 우해영은 정말 마음을 얻기 힘들다고 생각했다.얼굴을 들어 거울을 보며 찢어진 입술을 연신 찬물로 헹궈 내니 이제는 덜 아팠다. 하지만 아직 붓기가 가시지 않아 입술이 도톰하게 부어올랐다.두 개의 선명한 이빨 자국이 그의 입술에 박혀있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입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김승엽은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더 이상 이렇게 피동적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수돗물을 닫고 그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문 앞에 서 있는 우해영을 발견하고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우해영은 단번에 그가 다가오는 걸 느꼈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가 바로 자기의 코앞까지 다가온 걸 보고 조금 당황했다. 김승엽은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나섰다.‘이게 뭐 하는 짓이지?!’우해영은 곁눈으로 그의 팔을 한번 보고는 발로 그를 차버릴까 생각하다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치켜올려 한 번씩 웃고는 김승엽을 바라보았다.“왜요. 입술이 덜 아파서 한 번 더 물리고 싶은 거예요?”“뭐 하는 짓이에요?”김승엽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에게 되물었다.그의 물음에 우해영은 잠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웃었다.“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김승엽 씨,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우해영은 가만히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녀는 무릎을 조금 구부리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다면 당장이라도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고통을 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차라리 이 결혼 파혼하는 건 어때요?”잠시 머뭇거리다 김승엽이 입을 열었다.
김승엽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신은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나와 있는 게 싫잖아요? 그런 거면 차라리 파혼해요. 무리하게 결혼할 거 없어요.”“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요?”우해영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누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솔직히 그녀는 정말 그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싫다거나 그와 결혼하기 싫다는 말을 한 적 없었다.“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싫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사실 당신은 내가 마음에 들지도 않고 이 결혼이 기대되지도 않은 거죠?”김승엽은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그녀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도 알고 있어요. 당신 같은 미모에 집안까지 갖춘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는 걸. 그래서 당신이 날 선택했을 때 정말 기뻤어요.”“난 당신이 날 좋아해서 선택한 줄 알았어요. 적어도 호감은 가지고 있을 줄 알았죠. 전에 데이트할 때도 즐거웠고... 그래서 당신이 내게 조금이라도 감정이 있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오늘 당신이 하는 걸 봐서는 내가 잘못 생각했나 봐요. 사실 난 강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당신이 정말 싫다면 이 결혼 없던 걸로 해요.”“파혼했다고 해도 우리 두 가문 사이의 거래는 계속 진행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필요한 게 있다면 말만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도울 테니까. 그저 난 당신이 행복했으면 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말을 마치고 김승엽은 벽을 짚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가 그녀의 어깨로 가져갔다. 하지만 끝내 그녀의 어깨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녀와 닿고 싶지만 주저하다 이내 팔을 내리고 한숨을 푹 쉬면서 밖으로 나갔다.“...”홀로 남겨진 우해영은 그 자리에서 멍해져 버렸다.지금껏 살면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다.우해영 주변에 있는 인간관계는 다소 간단했
우해영의 눈빛이 부드러워진 것을 발견하자 김승엽은 말을 덧붙였다.“혹시 다른 사람이 파혼한 걸로 뭐라 할까 봐 그러는 거면 안그래도...”“그 입 닥치라고요!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누가 감히 그런 거로 나 우해영에게 뭐라 할 사람 없어요!”그러고 나서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당신도 마찬가지예요!”김승엽은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자기의 몸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앞으로 당겨져 갔다. 곧이어 그녀의 입술이 자기의 입술에 닿았다.갑작스럽게 발생한 일에 김승엽은 정신이 멍해졌다.‘이 여자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지금 우해영의 행동은 완전히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아까까지만 해도 지극히 그를 혐오하며 입술에 상처까지 냈다. 그런데 지금 왜 갑자기... 그에게 키스하는 걸까?김승엽은 그녀를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키스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우해영은 분명 키스 경험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무작정 두 입술을 세게 비비고 있다. 김승엽의 입술에는 아까 그녀가 낸 상처에서 다시 피가 스며 나오며 쓰라린 느낌에 피 맛까지 섞여 있었다.그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이상하게 느껴졌다.김승엽은 그녀를 밀어내야 할지, 아니면 고통을 참고 스킨십을 더 나아가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우해영의 행동에 흠칫 놀랐다.피 맛을 느낀 건지 우해영이 혀를 살짝 내밀고 그의 피를 핥았다.핥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김승엽의 입술을 한번 세게 빨았다. 그 행동에 김승엽의 입술에 난 상처가 더 찢어졌다.이런 젠장!‘이 여자 변태 아니야?’지금 김승엽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밖에 없었다. 순간 그녀가 했던 모든 행동이 납득이 갔다. 아무래도 그녀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걸 즐기는가 보다.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 여자와 결혼하고 나서 자기는 분명 매일 매일이 지옥이지 않을까 싶었다.이렇게 생각하니 김승엽은 조금 공황 상태에 빠졌다. 두려움에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밀어냈다.“해, 해영 씨, 이러지 마
김승엽은 밤새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들지 못했다. 이튿날 어떤 태도로 우해영을 대해야 할지 고민하며 한참을 몸부림치다가 옷을 가다듬고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는 그의 어머니와 누나 말고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조용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해영 씨는?”김승엽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러자 김지영이 괴상한 말투로 대답했다.“고귀한 아가씨께서 우리 집의 음식이 입에 맞겠어?”사실 어제 우해영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김지영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한소은 그 여자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김서진과 밖에서 살면서 고택에 오지 않으니, 평소에 마주칠 일이 없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해영은 달랐다. 결혼을 하기도 전에 김씨 고택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어제 그녀가 고고한 척 지시하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 얼마나 더 행패를 부릴지 생각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그래도 지금은 김씨 가문의 어르신인 어머니가 계시니 심한 짓은 못하겠지만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 여자가 김승엽을 꼬드겨서 이 못난 동생이 자기를 집에서 쫓아버릴까 봐서 걱정이었다.생각해 보니 집에서 쫓겨나기 전에 미리 대비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을 믿는 거 보다 자기를 믿는 게 낫겠다고 확신했다.“그만 해.”노 부인이 김지영을 꾸짖으며 아들에게 고개를 돌렸다.“해영이가 일이 있다고 아침 일찍 갔어. 그 아이 혼자서 큰 가문을 관리하려고 하니 바쁘겠지. 너희 둘 결혼하고 나서 네가 해영을 많이 도와줘야 해.”“당연하죠.”김승엽은 어머니의 말에 대답하며 내려왔다.방금까지는 거리가 멀어서 노부인이 발견하지 못했지만, 김승엽이 가까이 다가오니 그의 입술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노부인이 깜짝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네 입술 왜 그래?!”김승엽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술을 만져 보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그의 얼굴이 순간 빨갛게 물들었다. 어제 뜨거운 물에 뎄다고 말하려던 순간 김지영
검은색의 차가 한소은이 타고 있는 차 앞에 턱 하고 가로막았다.운전기사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푸념했다.“남의 집 앞에 차 세운 거 모르나? 정말 예의 없는 사람이네요.”그러고는 빵빵 하고 두 번 경적을 울리며 빨리 차 빼라고 경고했다.하지만 상대방은 차를 빼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차 안에는 분명 누군가가 타고 있었다.‘일부러 막고 있단 말이지?’운전기사가 신경질이 나 경적을 한 번 더 울리자, 한소은을 보호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모두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검은색의 차가 움직이지 않는 건 누가 봐도 고의적이었다.모든 사람이 긴장감이 넘치게 경계하고 있을 때 검은색의 차가 갑자기 움직였다. 차를 조금 뒤로 빼더니 차 머리를 돌려 가버렸다.이 상황은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예상대로라면 검은색의 차에서 사람이 내려와 그들과 따지는 게 맞을 텐데 뜻밖에도 아무런 소동 없이 이렇게 가버렸다.하지만 운전기사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2분 정도 그 자리에서 대기 하다 검은색의 차가 멀리 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어이없는 사람이네요!”그러고는 다시 차에 시동을 걸어 별장으로 향했다.한소은은 차가 사라지는 방향을 한번 보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지금, 이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방금 그 검은 차가 차 옆을 지나가면서 한소은은 차 안의 사람이 자기를 훑어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검은색의 차 유리창이 가리고 있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한소은은 문득 불안함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다행히 집에 도착해서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 김서진이 오늘 늦게 온다며 전화가 왔다.연말이 되어 회사 일이 얼마나 바쁜지 한소은은 잘 알고 있다. 국내의 업무는 물론 한소은이 거절한 해외의 업무도 그가 모두 대신 처리해 주고 있었다.김서진이 전화 왔을 때 아까 봤던 그 검은색의 차에 대해 한소은은 입을 열지 않았다.첫째는 이 일이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고 상대방이 자기에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한소은은 자기를 향해 오는 강한 바람을 느꼈다.그녀는 빠른 속도로 뒤로 몸을 기대고 허리를 굽혀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장풍을 피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이어서 공격해 오는 주먹을 받아쳤다.그 사람이 공격하는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빨랐고 공세도 매우 독했다. 절대 보통의 도둑이나 납치범이 아니다. 몇 번 상대하고 나서 한소은은 이 사람이 프랑스에서 자기를 납치했던 사람들보다 더욱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상대방은 분명 만단의 준비하고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녀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몇 년 동안 무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벌써 상대방에게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펑! 쾅!두 사람의 손목이 서로 부딪치며 막상막하의 상황에 이르렀다.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대치하고 있는 순간 별장의 불이 확 켜졌다.“갑자기 전기가 나간 거 같아요. 지금은 비상 전원을 사용하고 사람을 불러 수리하면...”일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방안에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멈칫하더니 이윽고 비명을 질렀다.불이 켜지고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서서히 밝은 방 안에 익숙해지자, 한소은은 자기를 기습한 사람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이 사람은 검은 복장에 가면까지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공격하는 동작과 체형을 보았을 때 여자임이 분명했다.“당신 누구야?”당황함과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고용인과 달리 한소은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한소은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훑어볼 때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한소은을 훑어보았다.“무술은 그럭저럭하네.”역시 이 사람은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한소은에 대한 혐오가 가득 묻어 있었다.그녀가 내뱉은 ‘그럭저럭’이라는 단어는 한소은의 무술 실력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한소은은 그녀의 말에 납득이 갔다. 김서진의 개인 별장인 데다가 보안 시스템이 잘 갖춰진 곳을 아무렇지 않게 잠입한 것도 모자라 자기를 기습할 수 있는 사람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