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안색도 안 좋고,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심지어 눈까지 감고 짜증난 모습도 보이던데…… 설마 아직 화가 덜 풀렸을까?’‘그럼 화도 안 풀렸는데 왜 만나자고 한 걸까? 아니, 화가 풀렸다면 왜 또 저러는 거지?’그녀의 속내를 알 수 없지만, 어제의 전례가 있으니 무턱대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해영 씨, 뭐 좋아하세요? 편하게 주문하세요. 여기 프랑스식 디저트가 아주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아니면 다른 것 드시고 싶은 거라도…….”“아니요, 배가 고프지 않아요!”무의식 중에 말이 나와 버렸다.말을 뱉고 해미는 바로 후회했다. ‘우해영은 이렇게 대처하지 않았을 텐데…… 이러면 안되는데…….’그리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갑게 말을 꺼냈다. “A세트 주세요.”사실 세트가 무엇인지 자세히 보지도 못했다. 단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아무거나 주문했다.“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승엽이 웃으면서 메뉴판을 건넸다.몇 초 간의 정적이 흘렀다. 해민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말없이 상대방을 보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게 자꾸 시선은 피하게 된다. 너무 힘들다.“저는…….”“저는…….”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뗐다. 둘 다 깜짝 놀라 멍 때렸다. 그리고는 또 바로 입을 다물었다.“먼저 말씀하세요.”승엽이 웃으며 신사적으로 말했다.“먼저 말씀하세요!” 그녀는 단지 이 적막을 깨고 싶었을 뿐이다. 승엽이 말을 꺼낼 준비가 된 이상 자신은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 된다. 잘 됐다. 마침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 난감하단 차였다.“먼저 말씀하시죠. 전 나중에 해도 돼요.” 그녀가 사양하는 줄 알고 승엽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먼저 말씀하세요!” 미간을 찌푸리며 해민이 말했다. 그녀는 지금 불안하고 긴장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데이트는 정말 괴롭다
“해영 씨, 저를 용서해주실 건가요?”그가 다시 되물었다.“저는…….”해민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자신은 언니가 아니니 그녀를 대신해서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죄송합니다. 제가 또 깜빡했어요. 해영 씨.” 승엽은 곧 바로 진심어린 모습으로 사과했다.“용서를 하고 안 하고는 모두 해영 씨 마음이에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제가 해영 씨 결정을 좌우해서는 안 되죠.”“아니, 저는…….”“알겠어요, 미안해요.” 그녀의 말을 끊고 승엽은 의기소침해졌다.“사과 받을게요!”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와 버린 말에 해미 자신도 깜짝 놀랐다. “진심이에요? 정말 저를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깜짝 놀라며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승엽은 고개를 들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이런 눈빛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며칠 전 승엽과 만났을 때, 그녀를 보는 눈빛도 이랬다. 그리고 그녀에게 키스할 때는 지금 눈빛보다 더 뜨거웠다.“저는 사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아요. 승엽씨도 마음에 두지 말아요.”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정말 모른다. 그래도 언니가 정략결혼으로 마음 굳혔으니 이 결혼이 잘 성사되게 하려면 이 관계를 잘 처리해야 한다. 그가 많은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만일 승엽이 자신이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중도 포기하면 이 결혼은 물 건너간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정말 기억 안 나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고 승엽이 재차 물었다.어제 분명히 그렇게 화를 냈는데, 자신을 한바탕 패고 싶은 기세였는데? 지금은 화가 나지 않는다고? 정말 이런 식의 사과방식이 먹힌 걸까?“네.”“잘 됐네요!”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고 보니 그녀의 두 손이 모두 책상 아래에 있는 것을 알았다. 어쩐지 방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기…… 손은 왜? 다치셨어요?”“아니에요!” 해미는 당황한
‘다른 칭찬할 것도 많은데, 왜 하필 얼굴을 칭찬하는 걸까? 내 얼굴은 해영과 똑같으니 그가 좋아하는 여자가 해영인지 아니면, 나인지 모르겠다.’ “예뻐요. 정말 너무 예쁘네요. 해영 씨만큼 예쁜 여자는 없는 것 같아요.”김승엽이 아첨하며 말했다. 어느 정도 진심이 들어있는 것도 같았다.승엽의 눈에 해영은 확실히 아주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다.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차가운 아름다움이랄까? 그녀보다 예쁜 여자가 없다고 말한 것은 과장된 표현이었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서진이 녀석이 결혼해서 데리고 온 여자는 정말 아름다웠다. 서진의 아내는 첫눈에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아름다움은 아니었지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는,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그런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서진과 결혼했으니, 아무리 아름다워도 소용없었다. 그는 김씨 집안의 재신을 원했지, 여자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달랐다. 그녀는 예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무궁무진한 부를 가져다줄 수 있고, 그가 김씨 집안의 재산을 되찾는 것을 도울 수 있는 여자였다. 달콤한 말로 달래면 곧 넘어올 것만 같았다.해민은 손으로 뺨을 가볍게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어제의 내가 예뻐요, 아니면 오늘의 내가 예뻐요?”‘???’그녀의 질문에 승엽은 멍해져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무슨 질문이 이래!’‘어제의 나는 뭐고, 오늘의 나는 또 뭐야? 아니, 예쁜 것도 날짜별로 나누는 거야?’‘만약 우리가 사귀게 되면, 매일 나를 쫓아다니며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건 목숨이 달린 질문이잖아?’“그렇게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인가요?” 그가 머뭇거리는 걸 본 해민은 실망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당연히 언니겠죠. 다들 언니를 좋아하니까.’“아니, 아니에요. 그런데 정말 제가 사실대로 말하기를 원해요?” 승엽은 그녀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며 그녀가 화를 내고 또 태도를 바꿀까 봐 걱정했다.“솔직히 말씀해 주셔도
식사하는 동안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승엽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추측만 하고 있었다. 태도로 보면 괜찮은 것도 같지만,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무튼,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식사를 마친 승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해영 씨, 이 팔찌 마음에 들어요?”“좋아…….”해민은 말을 하다말고 생각했다. “괜찮아요.”원래는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 팔찌는 언니에게 준 것이라 함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싫다는 뜻인가요?” 그녀가 말을 바꾸는 것을 보고는 승엽이 다시 물었다.‘그 선물이 싫었구나.’‘그래도 팔에 차고 있는 것을 보면, 나한테 마음이 있다는 뜻인데. 역시 엄마 말이 맞아. 여자에게는 큰 선물을 해야 해.’“그럼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뭐예요? 알려주면 제가 사줄게요.”승엽이 호기롭게 말했다. 해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다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아니에요, 괜찮아요.”설령 자신이 눈앞의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사양하지 마세요. 비록 제가 당신만큼 돈이 많지 않을지 몰라도 내 여자를 위해 돈을 쓰는 데는 절대 인색하지 않으니까요!”말을 마친 승엽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부분 여자는 마음과 말이 달랐고, 혹시 해영도 그럴지 몰랐다. 그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요! 식사를 마치고 어차피 소화를 좀 시켜야 했는데 잘됐어요. 아래층이 백화점인데, 우리 구경하러 가요.”해민은 언니 해영이 준 ‘과제’ 때문에 온 것이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둘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나란히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해민은 상품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렇게 혼자 나와 백화점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이렇게 조용히 걸을 수 있고 햇볕을 쬘 수 있으며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이 정말 좋았다.“해영 씨,
언니는 가끔, 해민에게 자신을 대신해 사무실에 있으라고 시키곤 했다. 그때는 대충 몇 마디만 하면 됐고, 그것이 어려우면 정색하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으면 됐다. 그러면 상대방이 의아한 얼굴로 알아서 나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해민은 언니의 신분을 대신해 밖에 나와서 혼자 다녀야 했고, 눈앞의 남자와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게다가 이상한 말도 해야 하니 배로 견디기 힘들었다.승엽은 여전히 해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해민은 무언가 일이 잘 안되는 것만 같아 초조 해졌다. 하지만 그때 승엽이 대답했다. “그렇게 해요! 저는 당신이 말한 것이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어?’해민은 고개를 들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가 또 이어서 말했다.“결혼하려면 서로 솔직해지는 것이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도 저에게 좀 솔직해야 하지 않을까요?”그는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뜻은 분명했다. ‘당신이 나에게 재산을 공개하라고 한 이상, 당신도 당신의 모든 것을 나에게 사실대로 알려줘야 합니다.’그러나 해민은 그의 말뜻을 잘못 이해했다. 그녀는 재산이나 지분 따위는 알지 못했다. 다만, ‘솔직히’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혔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솔직하지 않았다. 자신은 우해영이 아닌 우해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것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만약 언니가 알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그녀는 긴장되는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해민의 모습을 본 승엽은 마음이 풀어지며, 그녀가 실제로 얼마나 ‘용맹한' 여자인지 잊어버리고는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지 마세요. 다치잖아요.”승엽은 해민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눌러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했다. “…….”이 다정한 동작은 해민의 볼을 빨갛게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점점 가까워지는 승엽의 얼굴을 보며 심장이 마구 쿵쾅대는 것을 느꼈다.‘그는
“아니요, 싫어요.”우해민은 급히 손을 저었다. 잠시 고민하다 김승엽을 보며 말했다.“난 다이아몬드 반지를 좋아하지 않아요.”김승엽이 문득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참, 당신은 자주 무술 연습을 하죠...”그가 머뭇거리다 점원을 한번 보더니 이내 말을 바꾸었다.“확실히 어울리지 않네요.”“그렇다면 목걸이는 어때요?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괜찮은데.”점원은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신상을 추천했다.“저희 가게에 신상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입고 되었거든요. 정말 잘 어울릴 거 같은데 한번 해보실래요?”“사실, 난 다이아몬드를 좋아하지 않아요.”우해민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녀에게 있어서 다이아몬드는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했다. 그것보다 그녀는 진주 팔찌가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건 그가 자기에게 준 선물이 아니라 언니에게 준 선물이다. 이 사실은 마치 가시처럼 그녀의 가슴속에 박혀 그녀를 괴롭혔다.“그럼 어떤 걸 좋아해요?”김승엽은 그녀를 다그치지 않고 인내심 있게 물었다.“난...”우해민은 자기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모른다. 이전부터 그녀에게는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 자격조차 없었다.그녀는 씁쓸한 눈빛으로 카운터에 진열된 액세서리를 한번 훑어보다 가장 구석에서 시선이 멈추었다.우해민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그곳에는 한 쌍의 귀걸이가 있었다.“아, 귀걸이를 좋아하시군요!”“아니에요. 그저 둘러본 거뿐이에요”우해민은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귓불을 만져 보았다. 귀를 뚫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할 수가 없었다.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점원이 말했다.“지금 귀걸이는 고리형과 귀찌형이 있어요. 귀를 뚫지 않아도 착용하실 수 있어요.”“정말요?”그 말에 우해민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직원이 웃으면서 귀찌형 귀걸이 두 쌍을 꺼내 우해민에서 보여주었다.“이 제품들은 모두 귀찌형의 귀걸이들이에요.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한번 착용해 보세요.”직원이 꺼내 준 귀걸이는 마침 우해민이 좋
김승엽의 눈빛이 마치 뜨거운 불덩이라도 된 듯 해 우해민은 자기의 귓불이 익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숨기며 우해민이 급히 말했다.“그래요. 귀 뚫을게요!”그녀의 대답에 그제야 만족한 듯 김승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해영 씨, 정말 잘 생각했어요!”“……”점원이 그녀를 데리고 한쪽의 작은 칸막이로 된 곳으로 갔다. 전문 귀를 뚫는 기계가 있어 사실 뚫는 건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그래도 바늘이 귀를 뚫고 지나갈 때 조금 따끔하긴 했다.이 정도 아픔에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김승엽은 마음속으로 의문이 생겼다. 이건 거의 매일이다시피 무술을 연습하는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성격이 웬만한 남자보다도 드세기로 소문난 사람이 귀를 뚫는 걸 무서워한다니!이런 그녀의 모습에 김승엽은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사실 김승엽은 우해민이 고리형 귀걸이를 사든 귀찌형 귀걸이를 사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귀찌형 귀걸이를 계산하려던 순간, 자기가 설득해서 우해민이 귀를 뚫게 된다면 온전히 자기를 위해 귀를 뚫은 게 된다는 생각에 되든 안 되든 일단 말하고 본 것이다.우해영, 우씨 가문의 아가씨, 우씨 가문의 가주가 자기를 위해 귀를 뚫다니. 그녀가 자기를 위해 피를 흘렸다는 생각에 김승엽은 자기가 자랑스럽다고 느껴졌다.그녀가 자기에게 설득당해 귀를 뚫는다는 건 그녀의 마음속에 자기의 위치가 남다르다는 걸 증명한다.그저 즉흥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자기의 말을 따라주었다. 그녀의 마음에 분명 자기가 있다고 짐작했다.귀를 뚫고 나서 직원은 바로 그녀가 처음에 봐둔 귀걸이를 착용해 주었다.“이건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는 재질로 만든 귀걸이예요. 며칠 동안은 귀가 잘 아물도록 귀걸이는 빼지 마세요.”“네.”우해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김승엽이 계산을 하고 나가자, 직원이 때를 놓치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고객님, 여자친구가 정말 예쁘세요.”“여자친구가 아니라 약혼녀예요.”직원을 한번 흘려 보고
“민이라고요?”김승엽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맞아요!”혹시나 그가 잘못 들었을까 봐 우해민이 다급하게 설명했다.“해영이 아니라 해민이요. 우리 둘만 있을 때는 해민으로 불러주시면 안 되나요?”“해민… 어릴때 불리던 이름인가요?”우해민의 말에 김승엽은 더욱 어리둥절 해졌다. 오늘따라 그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씨 가문 아가씨의 뒷조사를 한 것에 따르면 개명했다는 정보는 없었다.게다가 해민이라는 이름에 크게 의미는 없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한껏 기대하는 모습에 김승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그의 대답에 우해민은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한마디 더 덧붙였다.“그렇다고 계속 해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요. 어떤 때에는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게 싫어질 수 있으니까.”“네?!”김승엽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몰랐다.‘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그녀의 성격이 이상하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이상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해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가 또 어떤 때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내 성격이 이상해서 싫어진 건 아니죠?”우해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솔직히 그가 쭉 해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지만 나중에 언니와 함께 있을 때 그가 해민으로 불렀다간 이런 속셈을 가졌다는 걸 언니에게 들킬 게 뻔했다.“아니에요, 아니에요!”김승엽은 연신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녀의 성격이 괴팍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화나게 할 용기는 없었다.“사람마다 성격이 다 다르잖아요. 난 이렇게 특별한 당신이 좋아요. 그렇다면 언제 해민으로 부르고 언제 해영으로 부를지 알려주세요.”그의 말에 우해민은 잠시 고민했다. 이윽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우리만 아는 암호를 만드는 건 어때요? 앞으로 내가 엽이라고 부를 때 당신도 날 해민이라고 불러줘요.”예상치 못한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