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은은 차성재가 준비해 준 혼수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방에 들어가서 하인에게 국화차를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차성재가 음료수 대신 물이나 차를 마신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오랜 시간 무술을 배워온 탓에 두 사람 모두 자리에 앉았다 하면 허리를 꼿꼿하게 쭉 펴고 앉았다.“결혼식은 어디서 할 건지 정했어?”차성재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서진 씨가 반도 호텔에서 한다고 말했어.”자세한 건 김서진이 말해주지 않아 한소은도 그저 호텔 이름만 알고 있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차성재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강성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이 바로 반도 호텔인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그러면 하객은 몇 분 정도 초대했어?”“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서진 씨가 정한 거라. 그쪽 집에서......”한소은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 가문의 복잡한 관계를 차성재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말을 흐렸다.“다들 잘해주셔. 서진씨 할머니하고 고모도 이미 만나 뵈었어.”“그래.”차성재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김서진의 할머니는 나도 만나 뵌 적이 있어. 그다지......”예의상 차성재는 다른 사람 앞에서 남을 욕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웃어른이니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함께 지내기 어려우신 분 같더군. 네가 인내심을 가져야 해. 결혼을 했으니 두 가문은 이제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어. 웃어른이 불편하게 한다 해도 대들어선 안 돼. 알겠지?”“나도 잘 알아.”“하지만......”차성재가 이어서 말했다.“웃어른을 존중하라는 건 나약하게 참기만 하라는 게 아니야. 상대방이 널 존중해 주지 않고 널 괴롭힌다면 참지 말고. 차씨 가문이 영원히 네 편을 들어준다는 걸 잊지 마.”“알겠어!”한소은은 갑자기 눈물이 왈칵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입을 삐죽이고는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오빠, 잊었나 본데. 내 무술은 오빠 못지않게 대단한걸.
“임신......”차성재는 놀라운 소식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놀라움을 진정시키고 말을 이어갔다.“내가 외삼촌이 된다는 말이야?”이 소식이 너무도 갑작스러워 차성재는 고민에 빠졌다.한소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소파에 앉은 차성재는 그렇게 반응이 커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손만 만지작거리다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고민하다 또다시 그녀를 바라보기를 반복했다.한소은은 그가 지금 얼마나 감격한 건지 잘 알았다. 그 모습을 보던 한소은은 입가에 걸리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지금 차성재의 반응은 김서진이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심각해 보였다.물론, 김서진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가 잠들어 있을 때였으니 그가 어떤 반응인지 잘은 몰랐다.“잘됐어. 정말 잘됐어!”차성재가 입을 열었다.“그럼, 몸조리 잘해. 다른 일은 김서진한테 맡기고.”“응. 이미 그 사람이 모두 하고 있어. 난 아무것도 못 하게 한다고. 작업실도 못 가게 하고.”한소은이 투덜거렸다. 임신하고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지루해 죽을 지경이다.“당연히 그래야지!”차성재는 김서진의 선택이 옳다며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흠, 내 편은 하나도 없네.’“오빠, 여기서 며칠 있을 거야? 시간 나면 강성 구경이라도 시켜주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성재가 손을 저었다.“오늘 바로 가야 해. 일을 처리하러 온 거라서. 그리고 넌 지금 임산부야. 막 돌아다니지 말고 먹는 것도 조심해야 해.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알아서 자기 몸 잘 챙겨.”어려서부터 아무도 이런 걱정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었다. 다시 한번 감동 한 한소은이 대답했다.“알았어. 오빠도 몸 잘 챙겨.”그러고는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참, 외삼촌은...... 잘계시지?”한소은은 외삼촌이라는 호칭에서 조금 머뭇거렸다. 그 사람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자기의 외삼촌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게다가 지금은 저지른
사실 차성재는 그녀에게 할 말이 있어서 온 게 맞다. 하지만 그녀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차에 올라탄 차성재가 깊게 한숨을 쉬고 운전대를 잡았다.“환아에 가야겠군.”환아에 도착해서 차성재는 먼저 김서진에게 연락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방금 사인을 마친 서류를 직원이 들고 나가자 차승재가 들어왔다.“우리 집에 다녀갔다고 은이에게 들었어요. 왜 더 얘기 나누지 않고 나에게로 온 건가요?”김서진이 서류를 탁 덮으며 일어섰다.“혹시 비즈니스 때문에 온 건가요?”차성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아 그에게 물었다.“우씨 가문을 들어 본 적 있나요?”“우씨 가문?”갑작스러운 물음에 김서진은 조금 당황했다. 그가 우씨 가문에 관해 물을 거라는걸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우씨 가문도 우리 차씨 가문과 비슷한 고대 무술 가문이에요. 하지만 오래전에 섬으로 이사를 하며 세상과 단절되는 삶을 살고 있죠.”김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아요. 우씨 가문 아가씨가 내 작은아버지와 정략결혼을 한다는 것도 알아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차성재가 조금 놀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알고 있었어요?”“우리 집 일인데 내가 모를 리가 없죠.”김서진은 피식 웃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차성재의 엄숙한 표정을 보고 심각한 일이라는걸 느꼈다.‘이것 때문에 날 찾아온 건가?’“이 정략결혼 때문에 날 찾아온 건가요?”차성재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그런 이유도 있어요.”“사실 소은이에게 우씨 가문을 조심하라고 말해주려 온 건데 소은이가 임신했다더군요. 이런 일 때문에 걱정할까 봐 당신한테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여기까지 왔어요.”김서진은 차성재라는 사람이 얼마나 신중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일부러 찾아올 정도라면 분명 중요한 일일 것이다.“무슨 일인지 말해봐요.”“우씨 가문의 실력은 어느 정도 알고 있겠죠. 세상과 단절된 삶을
“맞아요. 바로 그 두 사람이에요.”차성재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 두 사람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거예요. 음양 듀오는 고대 무술 가문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해요. 나쁜 짓을 수도 없이 많이 한 사람들인데 최근에야 이 두 사람 뒤에서 누군가가 지시를 내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김서진이 그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을 했다.“당신 말은 그 두 사람을 사주한 사람이 우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말인가요?”“소식에 의하면 그 여자가 맞을 거예요.”차성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우씨 가문의 아가씨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예요?”그 여자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을 익히 들었다. 자기의 작은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우씨 가문과 정략결혼을 하려는지 그의 속셈은 뻔히 보였다.오랜 시간 동안 김 씨 고택에서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권력을 빼앗으려는 생각은 정말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있는 방법 없는 방법 모두 동원 했고 인정사정없이 그를 해치려는 사람들이었기에 고택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으면 절대 가지 않았다.피를 나눈 가족인 데다가 할아버지께서 임종 전에 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김서진은 완전히 김씨 집안 사람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주고 그들이 걱정 없이 먹고 살 만큼 돈도 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줄 수 없다.김서진이 자기를 건드리지 못한다고 여겼는지 최근 들어 점점 더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암암리에서 손을 쓰는 건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다.하지만 이젠 달랐다. 그에게는 한소은이 있고 곧 태어날 아기도 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됐다. 자기에게 무슨 짓을 해도 괜찮지만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까지 손을 댄다면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와도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여자라고 얕잡아 보면 안 돼요. 그 여자 정말 수단이 악독한 사람이에요.”차성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여자를 직접 만나본 건 아니지만 그 여자에 대한 소문이 그저 나온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둬요. 게다가 우
“배치는 다 끝났습니다. 이제 내륙으로 들어가셔도 될 거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재벌 몇몇이 내륙 시장을 손에 쥐고 있으니 먼저 우씨 가문의 시장을 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어려울 거예요.”“당연한 소리. 어렵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왜 의뢰했겠어?”우해영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너희가 쓸모가 없었다면 찾지도 않았겠지.”우해영의 말에 남자는 감히 토를 달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재벌이면 어때. 윤씨 가문을 봐. 고작 그 정도 장난에 난리가 나서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잖아. 차씨 가문도 우리가 한바탕 했었고. 김씨 가문은......”우해영이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이어서 말했다.“김씨 가문은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지시한 일만 잘해둬.”“네!”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제야 만족했는지 우해영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멀리서 걸어오는 김승엽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먼저 가봐.”“네?”“가라고!”커피잔을 탁 내려놓으며 우해영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러자 남자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그가 카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김승엽이 들어오며 그를 한번 쏘아보았다.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남자는 어리둥절했다.김승엽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우해영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우해영 씨!”김승엽이 예의 바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 같지만 우해영은 지금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김승엽 씨.”우해영은 그가 화났음을 알아차리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들며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우연이네요.”그녀의 태도에 김승엽은 흠칫 놀랐다. 저번 데이트 때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말투로 그와 말한 적이 없었다. 데이트하는 내내 겁에 질린 듯 한껏 몸을 움츠렸던 그녀가 지금, 이 순간 허리를 쭉 펴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심지어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그에게 들켰음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아무렇지 않다는 그녀의 태도에 김승엽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말에 김승엽은 뺨을 얻어맞은 것 처럼 얼굴이 얼얼하게 아파져 왔다. 분노로 들끓던 가슴이 그녀의 눈짓 한 번에 단숨에 사그라들었다.김승엽은 지금 자기의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저번 데이트 때 만났던 여자와 완전 딴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저번과 똑같은 얼굴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한 말이 저번 데이트와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다면 아마 자기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게......”김승엽은 더 이상 기세등등하지 않고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요. 미안해요. 내가 말이 헛나왔어요. 하지만 당신이 이해해 줬으면 해요. 세상에 어느 남자가 자기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보고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해영 씨, 난 당신을 사랑해요!”말을 하면서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김승엽이 손을 뻗었다.우해영은 그가 자기의 손을 잡을 기회를 주지 않고 획하고 손을 빼버렸다. 그녀가 손을 뺄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한 김승엽은 엉거주춤하게 손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해영 씨.”“그렇게 부르지 마요!”우해영이 차갑게 그를 쏘아보았다. 그가 자기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다는 것 만으로도 역겨웠다.“왜요? 저번엔 이렇게 불러도 뭐라 하지 않았잖아요.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그래서 화가 난 거예요? 아까 그 일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아까는 내가 잘못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잠시 고민하다 김승엽은 방금 산 팔찌를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건넸다.“자요. 당신 생각이 나서 선물도 샀는데 여기서 마주치다니. 우린 정말 운명인가 봐요.”“여기서 당신을 우연히 마주친 게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해영 씨, 이제 그만 용서......”“한 번 더 말하겠는데 그렇게 내 이름 부르지 마요!”우해영이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말투로 그의 말을 끊었다.어찌나 차가운 말투였는지 김승엽은 몸서리를 쳤다. 한 번만 더 그렇게 불렀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겁에 질려 조금 떨리는 손으로 다시 팔찌를 그녀에게로 밀었다.“그럼, 마음에
말을 마치고 그녀는 바로 카페를 나가려 했다.그 모습을 보던 김승엽은 얼른 그녀를 쫓아갔다.“어디 갈 건데요? 내가 데려다줄게요.”“나도 차 있어요.”우해영은 멈추지 않고 빠르게 걸어 나갔다.“차는 기사 보고 먼저 집에 가져가라 하고 내 차 타고 가요. 오랜만에 얼굴 보는 건데 이렇게 가지 말고 좀 더 서로를 알아 가는 게 어때요?”“기사 없이 내가 운전해서 온 거에요.”“당신이 운전했다고요? 운전할 줄 모른다면서요.”김승엽은 저번에 얼핏 그녀가 운전할 줄 모른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헤어질 때도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걸 보았었다.그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우해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배웠어요.”“이렇게 빨리요?”김승엽은 깜짝 놀랐다. 겨우 며칠 만에 운전을 배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면허를 따려면 며칠 가지고는 턱도 없었다.“계속 배우고 있었어요. 면허는 최근에야 딴 거고.”우해영은 더 이상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아 대충 핑계를 대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리고 팔을 쭉 뻗어 김승엽과의 거리를 벌렸다.“김승엽 씨. 당신과 계속 만나거나 결혼할 생각은 있지만 자중하셨으면 해요. 난 나만의 사적인 공간이 필요해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고 날 존중해 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그녀의 말을 들은 김승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번에 그녀와 데이트하고 이제 모든 게 자기 손에 쥐어져 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오늘 본 우해영은 이 모든 걸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다.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또 어디가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그녀의 날카로운 눈을 보며 김승엽은 순간 소름이 끼쳤다. 두 발은 마치 그 자리에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아, 알았어요.”우해영은 그제야 팔을 내려놓았다. 뒤로 두 발 물러서서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이윽고 김승엽의 시선에서 멀리 벗어났다.그 자리에 멍하니 있던 김승엽은 혹시라도 그녀가 한 번쯤은 뒤로 돌아보지 않을까 했지만 헛된 생각이었다. 우해영은 한치의 미련
부지가 그리 넓지 않은 성남의 한 전원주택. 도심과의 멀리 떨어진 탓에 이 지역의 개발 가치는 높지 않았다. 자연 집값이 높지 않고 인가도 드물었으며, 이 저택의 주인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우해영의 차가 천천히 들어와서 멈춰 서자, 곧바로 쫓아 나온 고용인이 차문을 열었다.차에서 내린 해영은 다시 주차하도록 고용인에게 차 키를 던지고 곧장 집안으로 들어갔다.“아가씨 돌아오셨습니까?”집안에서 마중 나온 고용인이 인사를 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슬리퍼를 건네주며 구두를 벗는 것을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또 다른 고용인이 다가와 코트를 벗고 환복을 도왔다. 이런 전체 과정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고, 그녀 역시 익숙한 모습이었다.두 팔을 벌려 고용인들의 시중을 받던 해영이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물었다.“그녀는?”“해민 아가씨는 방 안에 있습니다.”고용인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음.”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팔을 내리고 가볍게 움직였다. 두 걸음도 채 떼지 않았을 때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렸다.“잠깐.”옷을 들고 나가려던 고용인을 불러 세운 그녀는 다가가 코트 주머니에서 쥬얼리 박스를 꺼내 한 번 쳐다보았다.“가도 돼.”해영은 아래층에 있는 방으로 내려갔다. 하루 두어 시간 정도만 해가 들어오는 이 반지하 방에 우해민이 거주하고 있었다.물론 집에는 이런 방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3층 건물에는 방도 많았고, 창고, 헛간만해도 여러 칸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해민을 이 반지하방에서 지내게 했다.그 이유는 단 하나, 해민이 자신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이미 이렇게 뛰어난 자신이 있는데, 왜 부모님은 저런 쓸모없는 인간을 또 낳았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을 하고서 비실거리는 해민의 모습을 보기만 하면 화가 났다.다행히 그녀를 남긴 것도 나름 쓸모가 있어서 어쨌든 병신 쓰레기를 기른 것만은 아닌 셈이다.해영은 방문을 열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서 기척을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