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없이 푹 늘어진 그녀의 모습에 걱정이 사그라지지 않는 김서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요. 그냥 감기라도 병원에 가서 진료받고 의사가 괜찮다고 해야 마음이 놓일 거 같아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김서진이 고집을 부릴 때에는 아무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아픈 데다가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진 한소은은 자기를 가볍게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김서진을 거부하지 않았다.그녀를 살포시 차에 내려두고 급히 차에 시동을 걸어 병원으로 향했다.조수석에 앉은 한소은은 말할 힘도 없어 그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힘이 빠질 대로 빠진 그녀는 그저 잠만 자고 싶었다.겨우 실눈을 뜨고 운전석에 앉아 운전하는 김서진을 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괜찮아요. 지금 좀 자고 싶은데 병원에 가지 말고 집에서 쉬면 안 돼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소은은 가볍게 기침했다.“고집 그만 부려요!”김서진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보면 그녀가 당장이라도 죽는 줄 알겠다.“말 그만하고 물이나 마셔요. 금방 병원에 도착할 거니까 내말 말 들어요!”그러고는 그녀에게 물 한 병을 전해 주었다.그가 전해준 물을 받아 들고 가볍게 웃음 짓던 한소은은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옆으로 몸을 돌려 김서진의 모습을 보던 그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조용히 잠이 들어있는 그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김서진은 웬일로 그녀가 잠자코 말을 듣는지 궁금해져 그녀를 슥 보았다. 피곤한 얼굴로 잠이 든 그녀를 보고는 차에 온도를 높이고 더욱 속도를 내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병원으로 가는 내네 그녀가 아픈 것을 참고 자기의 고모와 할머니를 상대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왔다.자신이 이미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잘 처리했고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피해 가지 못했다.그가 본가에서 나와 살던 몇 년 동안 본가를 그들이 살게 내버려 두고 매년 그들에게 준 돈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김서진이 거짓말을 한 게 뻔했다. 누가 업어갈 정도로 잠이 들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게다가 차에서 병실까지 가는 내내 깨지 않았다는 건 더욱 말이 안 되었다.“자주 아프지 않았는데 갑자기 아프니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어요!”한소은은 살짝 몸을 움직여 보았다. 아직도 회복이 덜 되었는지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손에는 링거까지 맞고 있었다. “이건 해열제인가요?”이미 여러 개 비워진 링거병을 보며 한소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그건 영양주사예요. 의사가 당신 지금 아무 약이나 막 쓰면 안 된다고 했어요.”김서진이 물 한 잔을 따라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세심하게 빨대까지 꽂아 그녀가 편하게 물을 마실 수 있게 했다.“의사가 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혹시 내가 어떤 약에 알레르기 반응이라도 유발하나요?”한소은은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어려서부터 아픈 적이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었고 이렇게 입원해서 링거까지 맞는 일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어떤 약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다. 이번에 입원하면서 알아낸 건지 한소은은 매우 궁금했다.“아니에요. 지금 당신 몸 상태가 조심해야 하는 시가라서 그래요. 게다가 의사가 영양실조라고 해서 영양주사를 맞고 있는 거예요. 당신 몸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몸조리 잘해야 한대요.”김서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몸이 약을 쓸 수 없을 만큼 허약하다는 건가요?”어리둥절한 한소은의 표정을 보며 김서진이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따라준 물을 모두 마시자, 물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티슈로 그녀의 입을 살짝 닦아 주었다.조심스럽게 그녀의 시중을 들어주면서 김서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보며 웃기만 했다.그가 지금 매우 기분 좋은 상태인 건 알 것 같다. 귀가 입에 걸릴 듯 웃는 그를 보며 한소은은 더욱 어리둥절했다.“도대체 왜 웃는 거예요? 당신 웃음이 조금 소름 돋는 건 알고 있
김서진은 그녀가 불안해한다는 걸 느끼고 확신에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정말이에요. 의사가 벌써 8주가 되어 간다던데 당신 몰랐던 거예요?”의사가 처음으로 임신할 경우 임신에 대한 지식도 적고 경험해 보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했다고 김서진이 말했다.한소은은 그의 말에 납득했다. 확실히 뉴스에서 임신한 지 몇 개월이 되어서야 발견했다는 뉴스를 본 적 있었던 거 같았다. 하지만 조금만 자기의 몸에 신경을 썼더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김서진의 물음에 한소은은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두 달 가까이 생리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원래도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었고 그 두 달간 일이 많아 매우 바빴기에 그저 힘들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었다.“나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건 줄 알았어요.”“당신 정말 바보 같네요!”김서진이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콧등에 톡 하고 쳤다. 임신한 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혼내주고 싶었다.그녀는 자기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아프면서 병원에는 가려 하지도 않고 또 그 두 사람이 난동을 피우는 것까지 다 받아주었다. ‘정말 자기 자신이 강철로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하나 봐.’한소은이 의식을 잃고 김서진의 품에 안겨 병원에 왔을 때 진찰하던 의사가 깜짝 놀랄 정도로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게다가 임신까지 확인되어 쓸 수 있는 약이 별로 없었다.“아참. 당신이 집에서 약을 먹었다고 했잖아요. 무슨 약인지 알아요?”김서진은 의사가 물었던 말을 기억하고 그녀에게 바로 물어보았다.“그냥 보통 해열제에요.”한소은은 그가 왜 이런 물음을 묻는지 알지 못하는 표정이었다.“어떤 해열제예요?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해요? 아기에게 영향이 갈지 의사가 확인해 봐야 한다고 했어요.”김서진은 그녀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뒷말을 흐리며 말했다.하지만 한소은은 바로 그가 하는 말의 중점을 콕 집어 물었다.“혹시 아기에게 부작용이 생길 수 있나요?”‘그래서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갑자기 찾아온 아기는 정말 서프라이즈였다. 마치 하늘이 내린 선물 같았다.사실 저번 임신 소동이 있고 난 뒤 한소은은 김서진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반응을 보니 그런 걱정을 했다는 게 무색해질 정도로 그가 기뻐하는 것 같았다.역시 아기를 가지려 노력하는 것 보다 인연이 닿아 자연스럽게 생기는 게 맞는 일이다.“결혼식을 서둘러야 할 것 같네요.”한소은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얌전히 다시 누웠다. 어쩐 지 벌써 한 아기의 엄마가 되어 모성애가 가슴이 벅차도록 솟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임신했으니 이젠 잘 쉬어야 했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몸조리를 잘해야만 한다.“결혼식을 서두르는 건 좋은데 당신은 신경 쓸 거 없어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면 사람을 시켜서 하게 하면 되니까 당신은 어디도 가면 안 돼요. 알겠죠?”한소은의 눈에 비친 그가 명령하는 모습은 더없이 멋져 보였다. 한소은은 그가 자기를 걱정하는 걸 잘 알았기에 고분고분 머리를 끄덕였다.“알았어요!”——황도 노래방에서 김승엽이 한 손에는 술병을 쥐고 눈살을 찌푸렸다. 조용히 앉아 있는 여자를 보며 내심 생각했다.‘여기 온 지 반나절이 지났는데 왜 아무 말도 없는 거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소문에 의하면 우씨 집안의 아가씨는 생각이 깊고 야망이 큰 여자다. 김승엽의 어머니도 진즉에 우해영의 성격이 좋지 않다고 했었지만, 그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상대하기 어려운 줄 몰랐다.오늘 두 사람이 예의상 만나 함께 그다지 즐겁지 않지만 나쁘지 않은 식사를 했다. 하지만 우해영은 줄곧 머리를 숙이고 그에게 눈길 한번을 주지 않았다. 김승엽은 그녀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만약 이 결혼이 그녀와의 정략결혼이 아니고 두 집안이 얻는 이득이 없었다면 김승엽은 지금 옆에 앉아 고개만 숙이고 있는 여자가 자기와 선을 보러 나왔다는 걸 믿지 않았을 것이다.그럼에도 우해영이 가진 권력과 집안 배경, 그리고 자기를 지지
말이 끝나자, 김승엽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정작 농담을 들은 우해영은 웃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 못한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색하며 대답했다.“난 옆방으로 넘어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 담을 뚫고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그녀의 말에 김승엽은 말문이 막혔다. 어디서 이런 이상한 여자가 나왔는지 궁금해졌다.‘우씨 가문이 이름 모를 섬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낸다더니 사회와 너무 동떨어져 그 집안사람들이 모두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김승엽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순순히 그녀의 말에 순응했다.“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해영 씨는 옆방으로 넘어갈 수 없어요. 내가 어리석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군요.”조용히 그의 모습을 보던 우해영은 나지막이 말했다.“당신은 어리석지 않아요.”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말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김승엽의 마음속에 박혔다. 앞서 못마땅했던 기분이 그녀의 말에 사르르 녹아버렸다.“그렇다면 우해영 씨는 내가 어떤 사람인 거 같아요? 당신 눈에는 내가 어때 보이나요?”“......”우해영은 말없이 입술만 오므렸다. 그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는 것인지 그저 대답하기 싫어서 입을 열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그녀의 작은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김승엽은 그런 그녀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성격이 답답하고 조금은 멍청해 보였지만 그녀의 얼굴만큼은 정말 예뻤다.‘다른 건 둘째 치고 얼굴 하나는 정말 이쁘네.’이 순간 김승엽은 성격이 괴팍하고 사나우며 재미가 없다는 그녀에 대한 소문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이렇게 예쁜 얼굴에 자기를 도와줄 세력과 집안 배경까지 있는 여자와 평생을 함께하는데 그 정도는 참아 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녀와 정을 쌓는 것이다. 농담 같지 않은 농담도 하고 그녀에게 모두 맞춰주고 있지만 정작 그녀의 반응은 담담했다.‘그렇다면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나?’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우해영
홀로 노래를 마친 김승엽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한 우해영을 한참 바라보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김승엽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해영 씨, 혹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우해영은 그의 물음에 눈을 깜빡이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그녀가 거절하는 것 같지 않자, 김승엽은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마음에 든다는 거군요. 그럼, 이 결혼 이대로 진행해도 되는 거죠?”김씨 가문이 이 결혼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씨 가문의 심드렁한 반응에 김승엽은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아무래도 우씨 가문을 넘보는 집안이 많았기에 김승엽은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진행 시키고 싶었다.사실 김씨 가문의 능력과 재력으로 이렇게까지 우씨 가문에 잘 보이려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김씨 가문의 권력은 모두 김서진 그 자식 손에 있다. 자기가 그의 작은 삼촌이라 해도 손에 쥐고 있는 실권이 별로 없었고 가질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다. 그에 비해 명문가인 우씨 가문은 이런 그를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그러나 아무렴 어떤가. 김승엽의 뒤에는 김씨 가문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김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될 수도 있다. 우씨 가문도 이런 가능성을 보고 그를 선택한 것이다.“해영씨......”김승엽이 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에 올리며 스킨십을 하려 했다. 이제 조금만 더 그녀와 가까워 지면 앞으로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이런 생각을 하면서 김승엽은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몸을 붙였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에 살짝 닿은 순간, 우해영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펄쩍 뛰었다. 손에 쥐고 있던 와인잔이 엎어지면서 와인이 김승엽의 바지에 쏟아졌다.“죄송합니다!”갑자기 벌어진 일에 우해영의 얼굴에는 당황함이 가득했다. 반면, 그녀의 반응에 놀란 김승엽이 두 팔로 가슴 앞을 막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우씨 가문이 고대 무술 가문이라는 건 누구나 잘 아는
말을 마친 우해영은 곧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그녀가 집으로 가려고 마음을 먹은 게 눈에 보여 김승엽은 더 이상 그녀를 막지 않고 따라갔다.“해영 씨!”주차장까지 따라 나간 김승엽은 한 손으로 그녀가 차 문을 열려는 것을 막아 나섰다. 우해영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더욱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느끼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혹시 내게 불만이 있는 건가요?”“아, 아니요.”우해영은 당황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눈을 본 순간 김승엽은 자기가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우씨 가문의 아가씨가 얼마나 맹렬하고 기세 높은지, 그녀 밑에서 일하는 두 킬러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는 이미 신물이 나도록 들었었다. 그렇게 사납고 무서운 여자가 자기 앞에서 이렇게 단순 무구한 눈빛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것도 잠시, 김승엽은 그녀의 이런 모습이 납득이 갔다. 어쩌면 그녀가 싸움에 강한 여자일지 몰라도 감정 방면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다른 방면에서 너무 뛰어나다 보니 온 신경을 거기에 쏟아붓느라 연애를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앞에서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한 번도 누구와 연애를 한 적 없는 소녀가 이렇게 멋지고 품격 있는 남자를 보니 설레어서 긴장하는 게 맞지. 안 그러면 아까 왜 날 때리지 않았겠어? 분명 내게 반한 거야.’김승엽은 온종일 부자연스러웠던 그녀의 행동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김승엽은 점점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마 앞으로 내려온 잔 머리카락을 슥 넘기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불만이 없다면 내가 마음에 든다는 말이군요.”“아, 아니에요.”우해영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침을 꼴깍 삼켰다.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은 그렇다 할 정도로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해영 씨, 난 당신이 좋아요. 아니, 사랑해요.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난 당신에게
갑작스럽게 뺨을 맞고 그녀에게 밀쳐지기까지 한 김승엽의 얼굴에 화난 기색은커녕 오히려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우해영이 급히 차 안으로 들어가고 이윽고 그녀의 차가 주차장을 떠나는 것까지 지켜보았다.차가 완전히 주차장을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손을 들어맞았던 뺨을 어루만졌다. 사실 그녀가 때린 뺨은 아프지 않았다. 화가 나서 때린다기보다 그저 부끄러움에 작은 경고를 하는 것 같았다.우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말 때리려 작정했다면 지금쯤 김승엽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그 정도로 힘껏 때리지 않았다는 건 화가 났다는 게 아니라 그저 부끄러워서 그런 것 뿐일 거야. 이 정도로 부끄럼이 많다니. 재밌는걸.’방금 그 키스는 분명 그녀의 첫 키스였을 것이다.무섭기로 소문이 자자한 우씨 가문의 아가씨가 키스도 해보지 못한 숙맥이라니, 생각만 해도 김승엽은 흥분되었다.그녀가 이러한 배경과 능력이 있으면서도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일 줄은 김승엽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그녀를 살살 구슬려 우씨 가문의 재산뿐만 아니라 우씨 가문의 가업, 그리고 고대 무술 가문으로써 축적해 둔 모든 것들이 다 자기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그때가 되면 김서진 그 자식이 아무리 제 앞에서 날뛰어도 한방에 밟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한편, 차에 앉은 우해영은 여전히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그녀는 김승엽이 자기에게 그런 짓을 할 거란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두 입술이 맞닿은 느낌도 이상했지만, 혀를 내밀다니......생각만 해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징그러운 거 같으면서도 징그럽지 않은, 그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오늘 하루 종일 그런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김승엽이 이상하다 생각했고 자기 또한 이상해진 것 같았다.“이제 좀 그만 떨지?”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전해져 왔다. 그녀를 사색에서 끌어내는 목소리에 더욱 덜덜 떨었다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