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일찍 돌아간 건 그녀 마음의 상처였다. 그런데 오자마자 그녀의 상처를 들쑤시자, 한소은이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제가 알고 있는 건 남을 존중해야 존중받는다는 거예요.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와서 신분도 모르는데 어떻게 인사를 드리죠?""그럼 지금은 알았잖아!"김지영이 말했다."그런데도 인사 안 해?""두 분이 일방적으로 한 말이에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너……."김지영은 그녀가 일부러 이러는 걸 보고 너무 화가 나 그녀의 뺨을 갈기고 싶었다. 그러자 김서진의 할머니가 손을 들며 그녀를 진정시켰다."말장난은 그만하지. 내가 서진이의 할머니인지 아닌지는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너랑 말장난하려고 오늘 온 게 아니야. 이 한마디만 하지. 김씨 가문에 들어오려면 내 동의를 받아야 한다. 서진이가 허락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내 동의를 받는 게 가장 중요해."한소은이 가볍게 웃었다.그녀가 전혀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웃자, 김서진의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뭘 웃는 거야? 내 말을 안 믿어?""아니요. 그저 할머니께서 제 뜻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아 웃는 거예요. 전 김씨 가문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요.""김서진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그녀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서진 씨랑 결혼하는 거랑 김씨 가문에 들어가는 거랑 아무 상관 없는 것 같은데요. 전 그저 김서진,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 거예요. 김씨 가문에 들어갈지 말지는 관심 없고 신경도 안 써요. 할머님의 허락은……."여기까지 말한 한소은이 뜸을 들이며 웃었다."죄송하지만 별로 받고 싶지 않네요. 제가 할머니랑 평생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김지영이 그녀가 한 말에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이 계집애가 감히 엄마한테 이런 말을 해?'전에 김지영의 시어머니도 이렇게 겁을 주었었다. 그때 김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었음에도 아무 말 못 했었다.'지금 뭐라고 한 거야? 엄마랑 평생 사는 게 아니라고? 이게 누구랑
이 말은 너무 심했다. 김지영은 숨을 들이마시며 속으로 역시 엄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하는 말마다 뼈를 때렸다.그녀의 엄마 말이 맞았다. 여자들이 재벌 집에 시집간 목적이 뭐겠는가. 돈과 권력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다 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이혼해도 결국 사람도 돈도 잃게 될 거라고 미리 알려주면 아마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만약 그녀의 시어머니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그녀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한소은이 침묵했다. 김서진의 할머니는 속으로 의기양양하면서 틀림없이 그녀를 놀라게 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이때 한소은이 입을 열었다."할머니, 참 고생 많으셨어요.""????""???"'이 계집애가 미쳤나? 아니면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거야? 인상이 좋아지면 내가 허락할 줄 알고?'"김씨 가문에 몇십 년 있으시면서 그저 도구에 불과하셨다니. 이 나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게 정말 안쓰럽네요! 저러면 안 될 것 같아요. 다행히도 전 제 사업이 있어서 가진 게 하나도 없는 게 아니네요."그녀가 감격하며 말했다. 그리고 김서진의 할머니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김지영은 심지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왜 엄마가 도구에 불과하다는 거야? 분명 걔를 두고 한 말인데. 알아들은 거야 못 알아들은 거야?'하지만 김서진의 할머니는 이해가 빨랐다. 그녀가 자기 말을 빌려 반격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김씨 가문의 가규에 따라 며느리는 아이를 낳아도 재산을 가질 수 없다고 했는데 한소은이 지금 김서진의 할머니를 연상한 것이다. 김서진의 할머니를 평생 김씨 가문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재산도 아이도 모두 잃은 여자라고 생각했다.김서진의 할머니는 화가 나서 열불이 났다."이 교활한 게!""할머니께서 그러셨잖아요. 제가 잘 못 이해 한 건가요?"한소은이 눈을 깜빡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할머니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 말
한소은은 깜짝 놀랐다. 이래 봬도 부잣집 사모님인 그녀들이 자기에게 이런 짓을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무방비 상태였던 한소은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뜨거운 차를 받아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뜨거운 차가 그녀의 몸에 닿기도 전에 휙 하며 누군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어머나......”김지영은 당황함에 눈을 크게 뜨고 한소은 앞에 막아선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김서진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혔다. 그가 돌아온 것도 모자라 한소은이 맞았어야 할 뜨거운 물을 곧이곧대로 모두 대신 맞아 버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등 뒤로 숨기며 아끼는 보물인것 마냥 보호했다.“서진아!”김서진의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나면서도 어찌할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고모, 이제 그만 하세요!”김서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회사에서 회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집안사람들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던 그였기에 그녀가 홀로 이 사람들을 상대하게 둘 수 없었다.어제 고모가 문전박대를 당했으니 결코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무슨 일을 벌일지는 예측 불가지만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으니, 대비해야 했다.역시나 오늘, 고모가 할머니까지 모시고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건 한소은이 순순히 문을 열어줬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 보고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다칠까 걱정이 되어 전화를 받자마자 회사 일은 던져 두고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 온 것이다.타이밍이 좋았다. 집으로 들어선 그 순간 그녀에게 물을 뿌리려는 고모를 보고 생각할 것도없이 그녀 앞에 막아섰다.“서진아......”김지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김서진을 불렀다. 한소은에게 뿌렸던 뜨거운 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김서진의 몸에 뿌려졌다. 셔츠가 흠뻑 젖었고 어렴풋이 비치는 그의 피부는 뜨거운 물에 데어 빨갛게 되어
사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무서워 보였던 김서진의 할머니가 평생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사람이 바로 자기의 남편이었다.김서진의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셨을 때 할머니는 그에게 단 한 번의 대꾸를 한 적이 없었다. 김씨 집안의 모든 일은 남편의 말을 따라야 했고 제아무리 큰 며느리가 싫고 손자가 싫다해도 남편이 그들을 마음에 들어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김서진의 할아버지가 김서진을 가르치고 그에게 가업을 물려준다고 했었을 때 불만이 많았지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김서진의 할머니에게 발언권이 생겼다. 문득 생긴 권력에 모두 자기를 어르신으로 모시고 뜻을 거역하지 않으니 자기가 뭐라도 된 듯 모든 일에 참견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땐 김서진이 이미 성인이 된 후였고 그녀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녀는 더욱 이 손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서진이 집에서 나가 따로 사는 것도 자기 눈앞에서 거슬리게 구는 것 보다 나을 듯 해 눈감아 주었다.하지만 그가 결혼하겠다고 웬 여자를 김씨 집안에 들이는 건 모른 척할수 없었다.오늘 그녀가 한소은을 찾아온 것도 그저 겁을 좀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김서진이 일찍이 돌아왔고 게다가 그녀 앞에서 한소은을 감싸고 도니 예전에 큰아들이 며느리를 감싸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러자 더욱 화가 났다.“김서진! 내가 네 할머니라는 거 잊지 마라!”몹시 노여웠는지 김서진의 할머니가 일어서며 그에게 호통을 치다시피 했다.“내 할머니라는 거 당연히 알아요. 그 외에도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우리 집, 우리 가족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 기억하고 있어요.”김서진이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할머니, 나이도 많으신데 이제 그만 집에서 쉬시는 게 어때요? 김씨 집안에 자손이 많은 건 아니지만 어린 손자들이 재롱을 피우는 걸 보시면서 쉬셔도 돼요. 다른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김서진의 말을 들은 할머니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어떤
한껏 긴장한 얼굴로 잔소리를 해대며 바쁘게 옷의 단추를 푸는 한소은의 모습이 김서진은 마냥 귀여운 듯 바라보았다. 너무 급해 손이 말을 듣지 않는지 자기에게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 더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지어냈다.“뜨겁지도 않은 물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급한 거예요. 난 괜찮아요.”“이런 말 할 시간 있으면 혼자서 단추를 푸는 게 어때요? 많이 데이지 않았다고 방심하면 큰일 난다고요!”한소은은 이번엔 그의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에 화가 났다. 자기가 걱정하는 것도 모르고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그가 내심 얄미웠다.“그럼, 정말 벗어요?”김서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단추를 하나둘씩 풀어나갔다.그저 단추를 푸는 행동이었지만 그의 기다란 손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단추를 풀어 셔츠 밑의 피부를 드러내니 왠지 모르게 야릇하게 느껴졌다. 그 모습에 한소은은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목이 타는지 꿀꺽 침을 삼켰다.“혹시......”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김서진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놀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느릿느릿한 그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가 그의 셔츠를 확 찢어 버렸다.한소은의 힘이 얼마나 셌는지 단추 몇 개가 떨어져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그의 옷은 그대로 너덜너덜하게 헤쳐졌다.장난을 칠 생각이었던 김서진이 말문이 막혀 멍해졌다.“이렇게 빨갛게 데었는데 뭘 꾸물거리는 거예요!”한소은은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말하며 김서진을 소파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사람을 시켜 화상 연고를 가져오라고 말했다.“화상 연고 좀 가져다줘.”“당신 지금......”김서진은 한 번도 한소은이 이렇게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새로운 그녀의 모습은 내심 그의 마음에 들었다.“아프지 않아요?”한소은의 온 신경은 모두 빨갛게 덴 그의 상처에 있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자기의 몸에 상처가 생긴 것처럼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사실 무예를 연마할 때 한소은은 크고
연고를 받아 든 한소은은 손가락으로 연고를 조금 덜어 상처가 난 곳에 살살 발라주었다.사실 이 정도 상처는 김서진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최대한 가볍게 연고를 발라주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처음에는 한소은이 호들갑을 떠는 거라고 연고를 바르는 걸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고를 바르고 시원한 느낌이 전해져 오자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편하게 소파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자기의 복부에서 미끄러지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녀가 연고를 바르는 동안 시원한 느낌 외에도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조급한 느낌도 들었다.뜨겁고 조급한 느낌이 복부에서 솟아오르며 그의 입이 말라갔다.한소은은 온 신경을 집중해 그에게 연고를 발라주고 있었다. 마음속의 벅찬 감정은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감동은 여전했다. 그가 그 순간에 달려와 자기를 구해 줄 거라는걸 생각지 못했었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그의 고모였고 그의 할머니였다. 그런데도 그녀를 위해 자기 앞에 막아섰고 그녀를 지켜내며 가족들과 얼굴을 붉혔다.그전까지 한소은은 다른 사람이 말하는 안정감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자기를 이토록 아껴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안정감이라는 걸 몸소 느꼈다.연고를 다 바른 후 한소은은 느릿하게 연고 뚜껑을 닫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상처에 붕대라도 감아야 하는 게 아닌지 뒤로 돌아 그를 바라보던 순간 김서진이 그녀의 팔을 휙 잡아당겼다. 갑작스럽게 당겨지니 한소은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에게로 픽 쓰러졌다.“상처에 닿지 않게 조심해요!”한소은은 간신히 한 손으로 소파를 짚으며 가까스로 그의 상처에 닿는 걸 피했다.“괜찮아요.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요. 당신이 약까지 발라 줬잖아요.”김서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안쪽으로 몸을 움직여 그녀가 자기 몸에 기대어 누울 수 있도록 했다.그가 무얼 하려는지 알아차린 한소은은 눕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가만히 있
맥없이 푹 늘어진 그녀의 모습에 걱정이 사그라지지 않는 김서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요. 그냥 감기라도 병원에 가서 진료받고 의사가 괜찮다고 해야 마음이 놓일 거 같아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김서진이 고집을 부릴 때에는 아무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아픈 데다가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진 한소은은 자기를 가볍게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김서진을 거부하지 않았다.그녀를 살포시 차에 내려두고 급히 차에 시동을 걸어 병원으로 향했다.조수석에 앉은 한소은은 말할 힘도 없어 그저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힘이 빠질 대로 빠진 그녀는 그저 잠만 자고 싶었다.겨우 실눈을 뜨고 운전석에 앉아 운전하는 김서진을 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괜찮아요. 지금 좀 자고 싶은데 병원에 가지 말고 집에서 쉬면 안 돼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소은은 가볍게 기침했다.“고집 그만 부려요!”김서진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보면 그녀가 당장이라도 죽는 줄 알겠다.“말 그만하고 물이나 마셔요. 금방 병원에 도착할 거니까 내말 말 들어요!”그러고는 그녀에게 물 한 병을 전해 주었다.그가 전해준 물을 받아 들고 가볍게 웃음 짓던 한소은은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옆으로 몸을 돌려 김서진의 모습을 보던 그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조용히 잠이 들어있는 그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김서진은 웬일로 그녀가 잠자코 말을 듣는지 궁금해져 그녀를 슥 보았다. 피곤한 얼굴로 잠이 든 그녀를 보고는 차에 온도를 높이고 더욱 속도를 내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병원으로 가는 내네 그녀가 아픈 것을 참고 자기의 고모와 할머니를 상대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왔다.자신이 이미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잘 처리했고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피해 가지 못했다.그가 본가에서 나와 살던 몇 년 동안 본가를 그들이 살게 내버려 두고 매년 그들에게 준 돈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김서진이 거짓말을 한 게 뻔했다. 누가 업어갈 정도로 잠이 들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게다가 차에서 병실까지 가는 내내 깨지 않았다는 건 더욱 말이 안 되었다.“자주 아프지 않았는데 갑자기 아프니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어요!”한소은은 살짝 몸을 움직여 보았다. 아직도 회복이 덜 되었는지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손에는 링거까지 맞고 있었다. “이건 해열제인가요?”이미 여러 개 비워진 링거병을 보며 한소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그건 영양주사예요. 의사가 당신 지금 아무 약이나 막 쓰면 안 된다고 했어요.”김서진이 물 한 잔을 따라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세심하게 빨대까지 꽂아 그녀가 편하게 물을 마실 수 있게 했다.“의사가 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혹시 내가 어떤 약에 알레르기 반응이라도 유발하나요?”한소은은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어려서부터 아픈 적이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었고 이렇게 입원해서 링거까지 맞는 일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어떤 약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다. 이번에 입원하면서 알아낸 건지 한소은은 매우 궁금했다.“아니에요. 지금 당신 몸 상태가 조심해야 하는 시가라서 그래요. 게다가 의사가 영양실조라고 해서 영양주사를 맞고 있는 거예요. 당신 몸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몸조리 잘해야 한대요.”김서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몸이 약을 쓸 수 없을 만큼 허약하다는 건가요?”어리둥절한 한소은의 표정을 보며 김서진이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따라준 물을 모두 마시자, 물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티슈로 그녀의 입을 살짝 닦아 주었다.조심스럽게 그녀의 시중을 들어주면서 김서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보며 웃기만 했다.그가 지금 매우 기분 좋은 상태인 건 알 것 같다. 귀가 입에 걸릴 듯 웃는 그를 보며 한소은은 더욱 어리둥절했다.“도대체 왜 웃는 거예요? 당신 웃음이 조금 소름 돋는 건 알고 있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