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아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당연하죠!이로써 회의는 무사히 끝마쳤다.윤소겸은 자신의 일생일대 가장 빛나는 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쪽은 팔릴 데로 다 팔리고 마지막에 뒷수습까지 남에게 맡기게 되었다.“윤설아,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사무실로 돌아가기도 전에 윤소겸이 달려들어 윤설아의 팔을 잡아당겼다.“윤 부장, 이게 무슨 짓이야?" 윤소겸에 붙잡힌 그녀는 애써 벗어나려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이거 놔, 아프잖아.”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윤소겸이 씩씩거리며 물었다."모두 다 네가 계획한 거지? 네가 이런 일을 만들어서 날 모함한 거지? 왜 우리가 우리 향수를 조사해야 하는 건데? 무슨 근거로 내 향수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건데!”윤소겸이 큰 목소리로 그녀에게 따지며 물었다. 사무 구역인지라 그의 목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 머리를 내밀어 쳐다보았다.회사의 높은 분들이 싸우고 있는데 그 누구도 나서서 말리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윤 부장, 진정해. 지금 이런 문제가 생겼으니 우리 모두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하잖아. 네가 이렇게 소리 질러도 소용없어."그녀가 평온하게 말했다."이제 그만 놔.”“안 놔! 너 똑바로 말해!”“뭘 더 말하란 거야? 이 일은 갑자기 발생한 거잖아. 만약 내가 뒤처리 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면, 좋아, 네가 직접 해결해!”그녀도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손에 든 물건을 모두 그의 품속에 던져버렸다.그것들은 모두 홍보팀에서 정리한 자료다. 이번 위기사건에 관하여 윤설아가 전적으로 책임져서 해결하는 것이기에 모두 그녀에게 준 것이다. 윤소겸이 그런 말을 하자 윤설아는 모든 자료를 다 그에게 던져 버렸다. 당황했던 그가 하마터면 자료들을 받지 못할 뻔했다.“내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것도 아니잖아? 향수 프로젝트는 줄곧 네가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터져서 내가 너 대신 뒤처리 하는 거잖아. 그런데 넌 오히려 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위기에 대처하는 면에서 윤설아는 확실히 그보다 경험이 많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침 문 어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노형원과 눈을 마주쳤다. 윤소겸이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윤설아가 먼저 말했다."나 잠깐 봐!”그녀는 노형원을 사무실로 불러들여 방문을 닫았다. 커튼은 닫지 않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표정이 굳은 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아마도 향수 사건이겠지.밖에서 서성이던 윤소겸의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그 여자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여자가 누군가의 돈을 받고 일부러 그들을 모함하려 했을 것이다.윤소겸은 윤설아의 사무실 앞에서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사무실에서 노형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윤설아의 시선은 줄곧 바깥을 주시하고 있었다. 윤소겸의 그림자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그제야 엄숙했던 표정을 풀었다. 그녀가 노형원에게 사무실 밖을 보라고 눈짓했다.“그 멍청이가 어디로 갈지 알아맞혀 봐?"노형원이 담담히 물었다.“어디로 가겠어. 그 멍청한 자식이 좋은 아이디어라도 떠올랐을까 봐?"윤설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녀는 윤소겸을 자신의 상대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다음 단계는 네 차례야, 그 조향사 쪽, 아무 문제 없지?”“당연하지. 모두 계획대로 되고 있어." 노형원이 주먹을 주었다 피며 웃었다."이제 성공이 눈앞이야. 이 일만 잘 끝나면 앞으로 윤 부사장이 아니라 윤 사장으로 불러야겠네.”“그만 해, 난 그 멍청이가 아니야. 듣기 좋은 말 몇 마디 했다고 내 처지를 잊어 버리진 않지.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잊지 마. 일 잘하시는 큰아버지가 아직 계시잖아.”그녀는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윤백건이 아직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은근히 불안했다. 윤백건은 그녀에게 있어서 시한폭탄과도 같은 사람이다.“네 큰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잖아. 너에게 아무런 위협도 가할 수 없는 게 아닌가?" 노형원은 대
한소은이 과일과 죽을 들고 오이연을 보러 왔다.이 계집애는 직장을 그만둔 후 작업실을 도와주다가 오히려 밥 먹는 시간이 불규칙해졌다. 어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전화를 받고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서한에게서 아주 경미한 위궤양일 뿐 별일 아니라는 말을 들은 한소은이 그제서야 안심하고 아침 일찍 죽과 과일을 사서 병원으로 달려왔다.“누가 나더러 밥 잘 챙겨 먹으라고 매일 잔소리 했지? 그러는 넌, 밥 먹는걸 잊어버린다는 게 말이 돼?”말은 모질게 했지만, 이내 죽을 덜어 작은 그릇에 옮겨 담았다.“지금 네 위장 기능이 약해서 소화가 잘되는 것만 먹을 수 있대. 이제 아무리 먹고 싶어도 맛있는 걸 못 먹게 됐네."한소은이 병실 침대에 걸터앉아 죽을 후후 불며 오이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꽃처럼 이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욕을 해야 할지 같이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웃음이 나와?”“당연하지. 네가 이렇게 잔소리하는 거 정말 오랜만이다." 오이연은 달콤하게 웃었다. 물론 이 달콤함은 한소은이 그녀를 보러 온 것 때문만이 아니다.어떤 말솜씨가 서툰 남자가 전화로 그녀의 목소리가 안 좋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한밤중에 달려와 위가 아파 옴짝달싹 못 하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왔다. 또 밤새 잠도 자지 않고 그녀를 돌보았고, 아침밥도 챙겨준 후에야 병원을 떠났다.그의 보살핌에 오이연은 무척이나 감동했다.“너 진짜 아프구나? 병원에 있는 게 그렇게 좋아?" 한소운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죽을 떠서 오이연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주었다."입이나 벌려!얌전히 입을 벌리고 죽을 받아먹던 오이연이 웃으며 말했다."맞아, 나 지금 많이 아파. 안 아프면 왜 병원에 있겠어.”“말은 참 잘해. 내가 지금 말해두는데, 앞으로 또다시 밥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 그땐 정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실 바깥에서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여러 사람이 우르르 달려가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병실 문을 닫지 않아 문 앞을 뛰어가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한소은이 일어나서 병실 문을 닫고 다시 돌아와 오이연에게 죽을 먹였다.이 바닥은 정말이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이 터진다. 그녀들과 상관이 없는 이상, 쓸데없는 일에 참견할 필요도 없고 어떤 일인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오이연은 죽 두 그릇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바나나를 먹었다.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아마도 그 기자들이 다시 돌아가는 소리일 것이다. 그제야 병실 밖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이참에 푹 쉬어. 지금 작업실도 별로 바쁘지 안잖아. 다른 거 생각할 필요도 없어. 네 몸만 회복되면 쉬고 싶어도 못 쉬게 할거야."한소은이 그녀에게 말했다.“언니, 테마 시리즈 프로젝트 진행 중이잖아?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아?"리사의 그 테마 향수에 대해 오이연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급해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싶었다.이건 작업실 오픈 후의 첫 번째 주문이기 때문이다. 첫걸음을 잘 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아직 주제를 완전히 정하지 못했지만, 초보적인 계획은 짜두었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정할 거야. 그때면 너도 회복됐을 거고, 같이 프로젝트 진행하면 돼 안심해, 너 빼고 하진 않을 테니까!"한소은이 웃으며 오이연에게 농담을 했다. 그녀는 진작에 리사 쪽 회사와 접촉하고 있었다. 다만 그쪽에서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다.이 프로젝트를 넘겨받게 된다면 이런 일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걸음만 잘못 가도 다른 사람이 허점을 파고들어 그녀를 공격하게 될 수 있다.과거의 그녀라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많은 풍파를 겪고, 한 번 또 한 번의 모함을 당한 후에야 얻은 교훈이다.다행히도 모두 잘 헤쳐 나왔고, 그녀의 곁에는 줄곧 그 사람이 그녀를 가르치고 보호하고 있었다.“이 여자가 미쳤구나......”누군가가 갑자기 병실 문을 걷어차며 힘껏 열었다. 입구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어리둥절 한 세 쌍
“소은 언니, 왜 그래?”이연은 문을 닫으러 간다고 했던 그녀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을뿐 더러 문뒤에 숨어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쉿!”그녀는 손짓을 하더니 곧이어 말했다.“좋은 구경거리가 생겼어.”그년의 말을 들은 이연은 어이가 없었다. “...... .” 방금전에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했던가 사람이 누군가 싶었다.한소운이 왜 이토록 저 구경거리에 흥미를 느끼는지 그녀는 모른다. 한소운은 그 사람이 시끌벅적 떠들고 있을 때 불현듯 저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났기 때문이다.저 사람은 바로 윤중성의 서자인 윤소겸이다.저 사람을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조현아로부터 들은바, 그때 당시 노형원은 대윤 그룹에 가입하여 향수 산업에 진출할 것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는 새로운 프로젝트 부를 개설하고 향수를 개발하는데 몰입했는데 주요 책임자가 노형원이라고 했었다.그러나 지금은 그가 어떻게 대윤 그룹의 프로젝트팀장으로 됐는지, 또 어떻게 그가대윤 그룹에 섞여 들어갔는지 알 길이 없다. 전에 그와 애증이 교차한 사이 인지라 그의 음모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현아는 그녀를 일깨워 주었다.“뭔가 너를 노리면서 프로젝트 제기하고 이 일을 하는 것만 같아.”그때 당시 한소운은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이 일을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이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줄곧 해 온 것이지 결코 누군가를 라이벌로 삼은 적이 없었다.“사랑”이라는 두 글자로만 이유가 충분했고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었다.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대윤 그룹의 그 프로젝트가 정식으로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책임자가 바뀌게 되었는데 새로 온 책임자가 바로 윤소겸이다.그중에 숨겨진 이유는 사실 비밀도 아니다. 윤소겸은 윤중성의 서자이고 아빠가 아들을 높은 곳에 올려보내려면 자연히 공을 세우고 업적을 쌓을 기회를 줘야하므로 애꿎은 노형원만 희생양이 되어버린 셈이다.노형원의 일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이 없었기에 그녀는 사후 어떻게 되었는지도
“윤 팀장님 말씀은 회사 손실이 우선이고 미나씨의 몸 상태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까? ” 기자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윤소겸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기자의 덫을 알아차렸다.“미나씨의 몸 상태가 가장 우선입니다. 다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우리 회사 향수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시 우리 회사에 대한 비방과 모독으로 여겨 끝까지 법적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미나씨의 치민원이 바로 귀사의 향수라는 병원의 검사 보고서가 있습니다. 의심할 바도 없는 확실한 증거인데 윤 팀장님은 언제까지 인정하지 않을 겁니까? 어떠한 증거를 원하시는 겁니까?”“윤 팀장님, 지금 이렇게 달려와서 죄를 묻고 있는데, 미나씨한테 말을 바꾸게 하려는 것 아닙니까?”“대윤 그룹은 진상을 규명하지 않고 이 일을 억누르려는 것입니까?”“미나씨도 알레르기가 있다는 건 많은 소비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향수에 금지 성분이 함유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도 자자하던데 어떻게 안전 검사를 통과해서 출시했는지 설명해 주시죠. 이익교환이 있는 거 아닙니까?“소비자들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윤 팀장님이 얼렁뚱땅 비방이라며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비방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왜 법적 절차를 밟지 않습니까?”기자들은 마치 준비라도 하고 온 듯 한마디씩 주고받아 윤서겸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처음에는 침착하게 한 두 마디 하면서 대응했으나 기자 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이러한 경험이 없었던 그는 말문이 막혀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당신들...... ,당신들...... .”“윤팀장님,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면 기자들도 당신을 모독한다고 말하시게요?”“......”그는 감히 대중의 분노를 살 수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와서는 안 되는 것을 깨닫고 회사에서 다들 가지 말라고 극구 자신을 말린게 이해됬다.그의 모든 분노는 병상에 누워있는 양미나에게 쏟아졌다. 주변에 매체가 많아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무슨 말을 하든 신중해야 했
이어 언론은 모두 물러났다. 어차피 녹음하고 싶었던 것, 생각지도 못한 것, 모조리 녹음됐으니 돌아가서 편집하고 후기를 더한 뒤 원고를 쓰면 그만이다.이번 뉴스는 전에 한소운의 향수에 독을 넣은 것과 비교될 만큼 어쩌면 더욱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길지도 모른다.한소운에 관한 그 사건은 단지 한 단락씩 연결된 녹음뿐이었지, 아무것도 완전하게 실증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환아의 배경이 강하고 홍보팀도 능력이 뛰어났기에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되서 단번에 꺾어버렸다. 게다가 발표회까지 열어 완벽하게 세탁했을 뿐만 아니라 큰 후폭풍도 가져왔었다. 지금은 환아의 향수가 보양으로 쓰일수도 병도 치료할 수 있다며 불가사의하게 전해지고 있다.그 사건이 있은 후, 한소운은 이미 환아에서 사직했다는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이 그녀가 이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계속 아씨로 남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오히려 스스로 작업실을 차리고 자기만의 브랜드를 창립하려고 한다고 소문이 퍼졌었다.이 여인이 하려고 하는 일은 정녕 가늠이 안 된다.그러나 대윤 그룹의 이번 사건은 다르다. 그들은 처음으로 향수 산업에 발을 들여놓았고 처음 등장한 향수로서 시장에 들어서기 전 부터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시장에 내놓자마자 동나고 제품 고갈상태까지 이르렀다.그러나 뽐낸 지 이틀도 안 되었는데 겨우 이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스캔들이 났다.이번에는 연결된 녹음도 흐릿한 동영상도 아니다. 인증 물증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므로 대윤 그룹은 이번에 어떻게 해석하고 빠져나갈지 감이 안 선다.유명 모델로서 홍보력과 영향력을 충분히 갖춘 양미나가 저곳에 버젓이 누워있고 병원 보고서가 곧 물증인데 설마 조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조작이라면 일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누가 감히 병원과 결탁하여 가짜 보고서를 내고 고작 대윤 그룹을 상대하려고 이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그러므로 이 일은 진짜와 가짜를 막론하고 누가 옳고 그른가도 막론하며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는 최고다. 기자들은
집에 돌아온 윤중성은 바로 딸을 찾아갔다.“설아야, 설아 아직 안 돌아왔어?”급하게 난리치는 그와 달리, 요영은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텔레비전 앞에서 느긋하게 말했다.“회사에 있겠죠. 왜 오늘 이렇게 일찍 왔어요?”“큰일 났어요! 회사에서 설아가 분명히 나가는 걸 보고 따라왔는데 왜 아직 안온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다급하게 말하는 그에게 요영이 이상하다는 듯이 대답했다.“당신이 더 이상해요. 설아가 가는 걸 봤으면 부르면 되지, 일이 있는데 말하지도 않고. 꼭 집까지 돌아와서 찾아야 해요?”“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회사는 사람이 많고 말이 전달되기 쉬워서 곤란해요. 집에서 얘기하고 싶은데, 왜 아직 안온건지…….”윤중성은 매우 화가 나서 말하면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다가,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더욱 초조해졌다.“아, 휴대폰도 꺼져 있다니!”“어쩌면 무슨 볼일이 있는 걸지도 몰라요. 걔가 항상 퇴근할 때마다 바로 집에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급해서 뭘 해요, 별일 없을 거예요.”그녀가 몸을 기울여 찻잔에 물을 따르고 느긋하게 마시며 말했다.“걔는 괜찮겠지만, 나는 괜찮지 않아요! 회사에 일이 있다구요! 큰일! 알기나 해요?”히스테리적인 외침이 지붕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그를 힐끗 쳐다본 요영 여사는,“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거예요? 회사에 큰일이 생긴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가정주부가 집안만 관리할 줄 알죠. 윤씨 집안의 잡다한 일과, 그 많은 고모들, 이모들… 이런거요.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것도 도울 수가 없네요.”라며 여전히 느긋하게 답했다.“아무튼 당신이랑은 말이 안통해요!”손을 휘저으며 계속 초조하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꺼져 있는 휴대폰.바로 이때, 그의 시선이 요영이 보고 있는 텔레비전으로 꽂혔다. 뉴스 생방송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무척 산만하고 시끄러운 화면이었지만, 그 중 가장 큰 소리가 들려왔다.“이건 비방이고, 모독입니다!”“회사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