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라는 말에 한소은은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안돼요! 천천히 할 순 없어요!”김서진은 그녀의 너무 과한 반응에 의심이 들었다. “오늘 도대체 왜 그래요?”“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임신했다는 말은 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마 퇴사해서 조금 아쉬워서 그런 것 같아요. 미련이 없을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니 신생에 있을 때가 가장 좋았었어요.”이 말도 진심이었다. 신생에 있을 때 동료들은 그녀에게 잘해주었고 처음 입사했을 때 조현아가 잠시 괴롭히긴 했지만 그녀의 능력을 인정받은 뒤에는 모두 친한 친구가 되었다.솔직히 말해서 그 쓰레기 같은 노형원을 떠나고 나서야 그녀는 바깥세상이 이토록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작에 그곳에서 나왔어야 했다.“정말요?”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김서진은 여전히 약간 의심하고 있었다. 오늘 그녀의 반응은 어딘가 이상했다.“정말이에요!” 그녀는 팔을 벌려 그의 목을 감싼 채 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있어서 가능했어요. 가끔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제가 가장 어려울 때, 제가 도움을 청하고 싶을 때, 모두 당신이 생각났어요. 저를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때 왜 절 도와주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저의 구세주에요!”그녀의 눈은 정말 진지했고 이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이 말은 오랫동안 그녀의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줬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당신을 좋아했거든요!”“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믿지 않았다.예전부터? 전에 그들은 서로 몰랐다. 기껏해야 신예 대회에서 한 번 교집합이 있었을 뿐이다. 설마 첫눈에 반했다고 얘기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정말이에요. 못 믿는 거예요?” 그는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면서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한소은은 눈을 깜빡이며 그
“7살일 거예요.” 김서진은 중얼거렸다. “그때 당시에, 아마... 7살 정도?”김서진도 단지 미루어 짐작했을 뿐,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기억이 있었다. “그때 올 때, 부모님과 같이 왔었어요.”“부모님...” 이 명칭은 그녀에게 있어 정말 먼 얘기였다.심지어 기억 속에 있는 부모님도 이미 얼굴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기억이 희미하다.“전 기억이 없어요.” 그녀는 조금 풀이 죽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자신의 부모님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았고, 기억이 희미해져갔다. 그녀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큰 충격을 받았고 이전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당시 외할아버지는 기억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하셨다.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앞으로 잘 살아보라고 말씀하셨지만 개인에게 있어서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었다.“제가 일곱 살이면 당신 나이는 몇 살이었길래 사랑에 빠진 거예요? 아니다. 짝사랑?” 그녀는 생각한 뒤 다시 물었다. “맞다, 겨우 7살 애한테 마음이 흔들렸던 거예요?”“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김서진은 그녀의 이마를 살짝 치며 웃었다. “그때 당시, 당신은 귀여운 아이였어요. 얼굴에 환한 미소가 있었고, 마치 한 줄기 햇살 같았어요. 그리고...”그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쳐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말랑한 볼을 만졌다. “그리고 얼굴이 좀 통통했어요.”“아!” 그녀는 탄성을 지르며 그의 손바닥을 쳤다. 그 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계속 물었다. “그다음은요? 그다음은요?”“우리 부모님이 당신 집으로 가셔서 뭐 하셨는지 기억나요?”“그 해는 할머니가 100세 되는 해였어요. 아마 축하해 주러 오셨을 거예요.” 그녀의 흥미에 비해서 그는 별로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너무 오래됐어요. 저도 별로 기억이 없어요!”한소은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별로 추억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유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윤소겸은 공장에서 조립라인에 예쁘게 포장된 향수 한 병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물건을 시장에 출시하고 그다음 돈을 벌 것을 생각하니 돈 버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느껴졌다.아버지께서는 장사가 쉽지 않다면서 신중하게 많이 배워두라고 하셨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옛날 사람이라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고 사상도 보수적인 것 같다. 좀만 과감해지니 이런 일도 어렵지 않았다.“사장님, 이 향수는 일주일 뒤면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주일 뒤에 출시할 수 있을 거예요.” 공장의 담당자가 그에게 보고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당신들 모두가 일등공신이에요!”“감사합니다, 사장님.”“아, 맞다. 그 부장 최근에 왔었나요?” 윤소겸이 물었다.“아니요, 오지 않았습니다.” 담당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본격적으로 조립라인에 오른 뒤로는 부장님은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전화 두 통으로 몇 마디 당부하고 공사 날짜 물어본 게 전부입니다.”“안 왔다고?” 윤소겸은 목소리를 높이며 안색이 변했다. “아주 한가하군.”노형원, 노형원. 입만 번지르르하지 결과적으로 게으름만 피우고, 업계에서 아주 경험이 많다더니 게으름 피운 경험만 많은 것 같았다.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때 가서 누구의 공이 더 높은지 따지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이번 일을 기회로 퇴출시킬 수도 있다. 그가 정말 자신에게 복종하는지 아니면 윤설아가 보낸 스파이인지 알 순 없다. 하지만 어쨌든 윤설아의 사람이라 그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가 회사를 장악하면 모두 자신의 사람들로 바꿀 것이다.“너무 바빠서 그런가 봐요.” 담당자는 윤소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듯 웃으면서 말했다. “사장님은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자주 오셔서 관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이 프로젝트는 매우 중요해요, 사고가 나서는 안돼요. 당연히 와서 지켜봐야죠.”그는 문으로 걸어간 뒤 다시 몸을 돌렸다. “맞다, 제게 먼저 한 병 주세요.”“넵!” 그는 즉시 사람을 시
“제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엄마, 저 엄마 보러 왔잖아요.” 그는 손을 떼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진고은이 그의 손목을 꽉 잡았다. “가지 마! 너마저 가버리면 엄마는 아무도 없어.”윤소겸은 미간을 찌푸렸다. “엄마, 저 어디 안 가요. 물 한 잔 따라드릴게요. 입술이 다 말랐어요.”그가 이렇게 말하자 진고은은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고 확실히 말라 있었다. “피가 마른다고 해도 누가 신경이나 써주겠니.”“엄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제가 지금 이렇게 있잖아요! 아빠도 신경 써 주시고!”“네 아빠? 됐어!” 그녀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네 아버지는 오랫동안 우리 모자를 달콤한 말로 속였을 뿐이야. 네 아버지는 그 집에 있는 여자에게 마음이 가 있어.”“화나서 그런 소리 하시는 거죠.” 윤소겸은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를 일으켜 세운 뒤 그녀가 물을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아빠의 마음을 몰라주신 거예요? 다시 말하지만, 전 다 보여요. 아빠는 여전히 엄마를 아껴주고 있어요.”“너무 아껴서 그 100억 짜리 목걸이를 다른 사람에게 줘?” 그녀는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했고 물도 마시기 싫어서 컵도 그냥 그 자리에 두었다.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운소겸은 그녀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달려주려고 말을 이었다. “아 그 목걸이 때문이구나!”“봐, 너도 알잖아! 바깥사람들한테 어떻게 전해질까? 나 정말...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창피한 적이 없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틀 동안 뉴스도 보지 못했고, 인터넷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비웃는 게 무서워서.심지어 전화도 잘 받지 않았고 평소에 자주 가던 모임에도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웃을 것 같아서.“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윤소겸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웃었다. “전 다른 사람들이 비웃는 걸 보지도 못했는 걸요. 소문일 뿐이고, 엄마는 그 목걸이 하나 때문에 그러시는 거
그녀는 향수를 받아 본 뒤 말했다. “오, 너무 기대돼!”그녀는 이리저리 살펴본 뒤 포장을 뜯고 병을 꺼내 바로 자신의 손목에 뿌려보았다.“어때요?” 윤소겸은 웃으며 칭찬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진고은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 “향기로워! 정말 향긋해! 내가 지금까지 써본 향수 중에서 가장 좋아, 우리 아들 너무 대단하네!”엄마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나니 윤소겸은 더욱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아들이 좋은 소식 들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진고은도 기뻐하며 웃으면서 두 번 더 뿌렸다. 공중에 향긋한 향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얼굴을 젖힌 채 향수의 향기를 즐겼다. 윤소겸은 옆에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름다운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응?”진고은은 코를 훌쩍거린 뒤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왜 그래요?” 엄마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윤소겸은 급히 물었다.“아니야, 그냥 좀 이상한 것 같아서.” 그녀는 다시 숨을 들이마시며 확실히 별로인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어디가 이상해요?” 윤소겸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궁금해져서 그녀를 따라 숨을 들이마셨지만 너무 깊게 들이마셔서 향기가 바로 코로 들어와 몇 차례 재채기를 했다.“아이고, 소겸아 괜찮니?” 진고은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는 코를 비비며 물었다. “엄마, 어디가 이상해요?”진고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데 이상한 느낌이 있어.”향수병을 들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주 예쁜 하늘색의 액체와 병도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어서 어디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그녀는 평소에도 향수를 사용하지만 깊이 이해하고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들이 선물해 준 것이기에 그녀는 정말 기뻐했다. “상관없어. 이게 성공의 향기인가 봐.”“성공의 향기요?”“그래! 곧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우리 모자가 이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왔는데 결국 출세할 날이 왔어. 이게 성공의 향기가 아니면 뭐겠니?
이른 아침, 윤설아는 노형원의 집 문을 세게 두드렸다.그는 윤설아의 노크 소리에 잠이 깬 듯, 눈을 잔뜩 비비며 문을 열었다. “하암, 졸려. 설아야, 아침 일찍 무슨 일이야?”“한소은에 대한 자료 좀 줘. 전부 다!” 그녀는 문이 열리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노형원은 하품을 하다 말고 당황한 표정으로 윤설아를 바라보았다. “뭐라고?”“한소은에 관한 자료면 다 좋아. 전부 다 줘!” 윤설아는 노형원의 허락도 없이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윤설아의 진지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의 모습은 전혀 장난 같지 않았다.그렇게 그녀의 자초지종을 들은 노형원은 피식 웃더니,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윤설아에게 건넸다. “마실래?” 윤설아는 얼굴을 찌푸린 채 소리쳤다. “대낮부터 무슨 술이야!”“대낮이면 뭐 어때!” 노형원은 곧장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데, 어떻게 날 바로 찾아올 생각을 한 거야?”“게다가 한소은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핫한 사람이잖아.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될 텐데, 왜 굳이 날 찾아온 거야?” 그는 이어서 또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난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찾을 수 있는 자료를 원하는 게 아니야. 그래서 널 찾아온 거고!” 윤설아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보기에 마치 시간에 쫓기는 것만 같았다. “빨리!”그런 윤설아의 모습은 노형원의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였다. “그 자료들로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야?”“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넌 또 한소은이랑 오래 알고 지냈으니, 걔가 학교에 다닐 때, 그리고 너와 회사를 운영했을 때 어땠는지 자세하게 알 거 아니야? 난 그런 자료들을 모두 원해!”노형원은 윤설아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 자료들을 너에게 준다고 쳐. 그런 다음 누구에게 주려고 하는 거지?”“내가 누구에게 주든 네가 알 필요 없어. 중요한 건 난 지금 그 자료가 필요하다는 거야! 최대한 빨리 준비해 줘.” 노형원은 흥분한 윤설아를 가라
윤설아는 비록 노형원의 말에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노형원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내가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적어도 우리의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야. 그러니 더 이상 내 행동에 관여하지 마!” 윤설아는 가방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자료는 정리되는 대로 바로 보내줘.”노형원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윤설아는 몇 걸음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맞다. 우리 회사 향수가 곧 출시된다고 하던데, 공장에 한번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어때?”“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은 다 주시하는 판국에, 내가 굳이 이 공로를 빼앗을 필요가 있겠어?” 사실 그는 윤설아가 몇 번이나 공장에 가서 현장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자신 있어? 향수가 정식으로 출시되기 전에 문제라도 발견되게 된다면, 어쩌려고 그래?” 윤설아는 호의로 그를 일깨워 주었다.“문제가 있었다면, 너와 내가 지금 여기서 다른 것에 대해 의논하지는 않았겠지.” 그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너보다 한 수 위야. 문제가 일어났다면, 진작에 일어났을 거야.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앞으로도 아무런 문제 일어나지 않을 거야.”“응!” 노형원은 이때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각났는지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뭐야?” 윤설아가 물었다. “victory!” 노형원이 소리쳤다.“승리?” 윤설아도 웃으며 말했다. “너 정말 자신만만 하구나!”노형원은 고개를 저었다.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 줄 모르잖아!”그들이 윤소겸을 위해 구덩이를 파고, 그가 안으로 뛰어들기를 기다리는 것은 둘째치고, 이번 향수가 정말 성공한다고 했을 때, 그는 과연 윤 씨 가문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일이 쉽게 돌아간다면, 그간 윤설아의 오랜 노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다년간 쌓아온 업적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됐어. 그렇다고 너무 방심하지 마. 이럴수록 사
작업실에서는 한참 새로 도착한 기가재를 옮긴다고 분주하였다. 한소은은 한 쪽에서 재고들을 확인하고 있었다.오이연은 일하다가 말고, 작업실을 한참 둘러보았다. 이 새로운 작업실은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적인 모습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마침내 자신들만의 스튜디오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설레게 만들었다.“이건 이쪽에, 아니, 저건 저쪽에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건 깨지는 물건이니, 조심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휘하는 모습은 그녀를 더욱 설레게 만들었다. 바쁜 와중에, 오이연은 한소은을 찾았다.한소은은 한 손에 펜을 쥐고, 또 다른 한 손에는 노트를 들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언니, 왜 그래?” 오이연이 물었다. “언니 방금 한참을 멍 때리고 있었어! 알아?”그제야 한소은은 정신을 차렸다. “아, 괜찮아! 기자재는 다 옮겼어?”“얼마 안 남았어. 원래 남아있던 물건들도 꽤 있어서, 전에 우리 작업실 때보다 짐이 더 많아진 것 같아. 그리고 몇몇 기자재는 최신형으로 바꿨어.” 오이연은 새로운 작업실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사실, 원래 있던 물건들도 괜찮기는 했는데, 서진 씨가 새로운 기자재로 바꾸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생각나는 대로 주문한 건데, 혹시나 또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 한소은이 말했다.“고마워! 정말 언니밖에 없다니깐!” 오이연은 한소은에게 기대었다.“언니, 나 정말 지금 너무 행복해. 정말 너무 기뻐! 우리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어!”“그치?” 오이연이 물었다.“응, 당연하지. 그런데 언제 나한테 정식으로 소개해줄 거야?”한소은은 오이연과 서한 사이의 일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오이연이 먼저 얘기하지 않아서, 굳이 추궁하지는 않았다.한소은의 말에 오이연은 얼굴이 곧 붉어졌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왜 놀리고 그래!”“아니, 난 네가 먼저 얘기하길 기다렸어. 하지만, 지금껏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길래…” 이때 밖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현아 언니?!” 오이연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