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한소은이 상대가 누군지 물으려는데 응접실에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리사?”한소은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에게 달려갔다.“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얘는… 내가 오면 안 될 곳을 왔니?”리사는 두 팔을 벌려 한소은을 껴안으며 반갑게 인사했다.“오랜만이야! 정말 보고 싶었다고!”“나도 보고 싶었어!”한소은도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패션쇼가 있어서 온 거야?”“무대에 설 일이 있어야 올 수 있는 곳이야?”리사는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너에게 사업 제안 하나 하러 왔어.”“사업?”한소은은 퇴근 준비를 서두르는 동료들을 바라보고는 리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잠깐만 여기 있어. 옷만 갈아입고 올게. 나가서 얘기하자. 배고프지? 내가 쏠게.”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소은은 부랴부랴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김서진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조금 늦게 들어간다고 양해를 구했다.“일식? 태국 요리? 아니면 프랑스 요리? 뭘 먹을래?”한소은이 주차장을 나서며 리사에게 물었다.리사는 입을 삐죽이더니 말했다.“프랑스에서 프랑스 요리는 질리게 먹었어. 여기서까지 맛보고 싶지는 않아. 나… 샤브샤브 먹고 싶어!”샤브샤브를 강조하는 리사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였다.한소은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샤브샤브 먹으러 가자.”근처 샤브샤브 맛집으로 간 한소은은 리사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리사는 고기 위주로 이것저것 시키고는 한소은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나 오늘 많이 먹을 거야! 지갑 두둑이 챙겨 왔지? 아, 참! 너 약혼자가 꽤 부자라고 들었으니까 괜찮지?”오기 전에 한소은과 김서진 커플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리사는 부자 남편을 둬서 부럽다고 호들갑을 떨었다.한소은도 대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갑 거덜 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너 몸매 때문에 걱정하는 거야. 요즘은 다이어트 안 해?”“쳇!”그러자 리사가 새침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며
“그게 무슨 소리야? 컨셉이 뭔데? 타깃은 누구야? 원하는 종류나 계열은 있어? 얼마나 필요하고 언제까지 만들면 돼?”한소은의 연이은 질문이 쏟아졌다.새우를 입에 넣고 있던 리사가 눈을 깜빡이며 말을 더듬었다.“그게….”“너 설마 아무 구상도 없이 사업 제안하러 온 거야?”한소은이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게다가 너희 회사에 실력 있는 조향사도 많잖아. 너희 아버지도 이 일을 하시는 분인데 왜 하필 나야? 설마… 내가 사주는 샤브샤브가 먹고 싶어서 일부러 온 건 아니고?”농담 식으로 가볍게 질문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프랑스 본토에는 유능한 조향사들이 차고 넘쳤다. 리사 아버지만 봐도 그랬다. 실력은 물론이고 거느린 연구팀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그분이 직접 가르친 제자도 있었다. 인재가 이렇게 많은데 일부러 찾아왔다는 건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을까?“그건 아니야!”리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사실은 아빠는 이미 프로젝트를 맡아서 진행하고 있어서 일손이 부족해. 저번에 네가 나한테 만들어 준 향수를 회사 친구들에게 보여줬는데 다들 마음에 들어 했어. 그래서 너랑 이 사업을 하고 싶어서 왔어.”“컨셉이랑 요구 사항은 이미 핸드폰에 메모해 뒀어. 내가 잘 까먹잖아. 지금 보내줄게.”말을 마친 리사는 핸드폰을 꺼냈다.“나 회사 쪽에 자신 있게 큰소리 치고 나왔단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우리가 시장에 내놓는 옷이나 액세서리들은 전부 협력사 제품이잖아. 향수도 그랬거든. 주주들을 설득하느라 애 먹었어. 자신만의 개성이 있는 제품을 원해. 이번 쇼가 그만큼 중요하거든. 일반 브랜드의 향수로는 사람들을 사로잡기 힘들 거야!”한소은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사치품 브랜드를 일반 브랜드라고 말하는 너도 참 대단하다.”리사가 그만큼 그녀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는 뜻이기도 했다.“일반 브랜드 맞지!”리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비싸긴 하지만 돈만 있으면 누구나 구매할 수 있는 제품이잖아. 그러니까 일반 브랜드지! 사실 나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김서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오는 길이에요?”“거의 도착해요.”그녀가 말했다.“5분 있으면 도착할 것 같아요.”“그럼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려요.”그가 말했다.“바로 나갈게요.”한소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어디 나가요?”“네.”“무슨 일인데 그래요?”“이따가 만나면 얘기해 줄게요.”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거의 다 왔어요.”차가 주택단지를 지나 별장 앞에 멈춰서자 안에서 나오는 김서진이 보였다. 편한 차림으로 나온 것을 보아 중요한 모임에 참석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다가와서 운전석 문을 열자 한소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운전은 내가 할게요. 하루 종일 피곤했을 텐데 좀 쉬어요.”“네.”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으로 가서 앉았다.“서한 씨한테 운전을 부탁하지 그랬어요.”“우리 사이의 일이니까 둘만 가려고요.”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차에 시동을 걸고 고개를 돌려 그녀가 안전벨트를 제대로 했는지 확인했다.“출발할게요!”그는 아직도 목적지가 어딘지 알려주지 않았다.“이 시간에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거예요? 식사는 했어요? 저는 리사랑 저녁 먹고 왔어요.”그가 혹시라도 밥 먹으러 가자고 할까 봐 한소은은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같이 가줄 수는 없어요. 디저트도 괜찮고요.”“단 게 먹고 싶어요?”김서진이 물었다.“음… 너무 먹고 싶은 건 아니지만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그럼 소울 카페로 갈까요?”“좋죠.”차는 곧장 소울 카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사람이 별로 없었다. 김서진은 가게로 들어가서 디저트와 마실 것을 포장해서 다시 차로 돌아왔다.“이따가 같이 먹어요.”참다못한 한소은이 물었다.“그래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가보면 알아요!”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잠시 후, 그들을 태운 차는 한 전원주택 앞에 멈춰 섰다. 겉보기에는 소박해
“이곳은….”이미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확신이 없었다.“마음에 들어요?”그는 대답대신 주변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제 마음에 드는 게 왜 중요해요? 제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여기가 제 것이 되는 건가요?”한소은이 농담 식으로 말하며 눈을 깜빡였다.그러면서도 손길은 어느새 실험기구들을 만지고 있었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새 실험기구들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그렇죠!”김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마음에 들면 여긴 오늘부터 소은 씨 공간이에요!”한소은이 어깨를 움찔하며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일부러 저한테 주려고 여기를 사들인 거예요?”대략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확신을 받고 나니 조금 현실감이 없었다. 그녀 자신도 작업실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그는 이미 장소를 물색하고 인테리어까지 했다니!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 잘 알까?“그게 아니면 내가 여기를 구매할 이유가 없잖아요.”김서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열쇠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오늘부터 이곳은 소은 씨만의 공간이에요. 이거 찾느라고 두 달이 걸렸어요. 그나마 시내와 너무 멀지 않으면서 조용하고 정원에는 필요한 향료를 심을 수 있으니까 사용하는데 불편함은 없을 거예요. 공간은 크지 않아도 초반에 작업실로 쓰기에는 충분할 것 같아요.”‘당연히 충분하죠!’한소은은 속으로 부르짖었다.작업실을 갖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좋은 곳에서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안 되면 빈 사무실 하나 빌려서 시작해 볼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에 비해 정원까지 딸린 이 작업실은 가히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그녀의 미소를 보자 김서진은 며칠 사이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내가 이렇게 큰 선물을 줬는데 나한테도 뭔가 보상을 해줘야 하지 않아요?”한소은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틀면서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작업실을 구하려다가 “생각”에 그친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리사는 오늘에서야 주문을 하러 왔고, 조향 협회의 그 일까지 겹쳤다. 한소은은 최근에 이러한 일들이 쌓여가면서 처음으로 확실히 작업실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녀는 이러한 생각을 했을 뿐인데, 김서진은 그녀를 도와 이미 일을 끝마쳤다.“...” 그녀는 포크를 내려놓은 뒤 고개를 들고 김서진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고마워요!”김서진은 그녀의 너무 진지한 말투에 잠시 멍해졌다. 그녀의 눈에서 감격하는 모습을 보자 김서진은 입꼬리가 올라간 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 바보 같은 소리!”“진심이에요!” 한소은은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 “당신은 모를 거예요. 제가 오늘 리사를 만나고 나서 작업실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혼자서 작업실을 만들 수는 있는지, 만들려고 하면 어디가 좋을지, 예산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당신이 동의해 줄 수 있을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결과적으로 당신은 제가 생각한 대로 이미 다 해줬어요. 저 정말...”그녀의 감정 변화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녀는 가끔 김서진이 정말 자신의 운명의 귀인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만나 평생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는 항상 다시 한번 그녀를 놀라게 했다.“바보! 당신은 제 아내에요. 제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요!” 그는 웃으면서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빨리 먹어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디저트 아니에요? 다 먹고 돌아갑시다.”“돌아간다고요?”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시간을 봤다. 날은 이미 저물었다.“집에 안 가고 여기서 살려고요? 제가 아무리 작업실 마련해 줬다고 해도 아직 물건이 들어오진 않았어요. 오늘 여기서 잔다고 하면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제가 당신의 이불이 되어야겠네요!” 그는 두 팔을 벌려서 그녀를 껴안았다.한소은의 볼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손을 뻗어서 그를 살살
작업실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이미 마무리되었고, 다음은 인력을 뽑고 원자재를 준비하는 등의 사소한 일들이다.오이연은 당연히 그녀를 따라올 것이다. 조현아도 원래 데려오려고 했지만 그녀가 거절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이미 신생의 매니저급이고 승진의 기회도 많이 열려 있다고 했다. 환아에서는 두말할 필요 없이 더 많은 발전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라면 단지 한소은을 도와 간단할 일을 할 뿐이다.어차피 초기에는 잘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조현아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회사에서 착실하게 있는 게 낫다. 이후에 작업실이 성공을 한다면 그때 다시 와도 늦지 않다.그녀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조현아도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앞으로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원래 회사를 급하게 그만 둘 필요까진 없었지만 그녀는 사직서를 제출했다.그녀의 사직서를 받자 상부는 매우 놀랐다. 그녀의 사직서는 신생에서 환아로 환아에서 인사팀으로 보내졌다. 모두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퇴사를 쉽게 수락하지 않았다.“대표님.” 임서연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그녀는 사직서를 손에 쥔 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대표님, 이거...”그녀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가 사직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바로 옆에 섰다. 김서진이 이 사직서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한소은이 김서진에게 퇴사를 한다고 말했는지도 모르고, 환아에서 잘 지내고 있다가 왜 퇴사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기자회견 이후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지금 갑자기 퇴사하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김서진은 눈썹을 고른 뒤 사직서를 펼친 뒤 살짝 보았다.임서연은 그의 안색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한소은 님의 사직서입니다. 인사팀에서 대표님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그는 입술을 고르며 가볍게 웃었다. 인사팀에서 감히 결재하지 못하고 그에게 올렸다.
임서연은 매우 놀랐다.그녀는 김서진이 웃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그의 웃음은 애매한 건지 달콤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말은 정말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다른 계획이 있다고? 무슨 계획?사표를 인사팀에 보냈지만 담당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대표님이 결재하셨다고요?” 인사팀에서도 매우 놀랐다. “그럼 대표님도 알고 계셨나 보네요. 이미 상의를 했던 건가?”“하지만 소은 씨의 성장 속도가 너무 좋아서 회사에서 수석 조향사로 추천하려고까지 했는데 왜 이럴 때 나가는 거야, 무슨 뜻이지?”“수석 조향사가 대수야. 잊지 마, 소은 씨는 미래의 사모님이야!” 누군가 끼어들었다.“아, 맞아맞아! 그럼 소은 씨가 퇴사했다는건 대표님과 결혼한다는 뜻인가?”인사팀은 지금 바쁘지도 않고 대표님에 관한 소문이었기 때문에 다들 한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누군가 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소문을 들었는데 대표님과 소은 아가씨, 이미 혼인신고 올렸다는 얘기도 있어. 결혼식은 형식일 뿐이고 이미 임신했을 지도 몰라. 그래서 집에서 아이 키우려고 하는 거일 거야.”“정말로? 말도 안 돼!”임서연은 멍한 채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사실 비서로서, 특히 이런 소문에 대해 뒤에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호기심이 그녀를 움직일 수 없게 했고 그곳에 서서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토론을 듣고 있었다.“진짜인지는 몰라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해요. 회장 부인이 되면 얼마나 편할지 생각해 보세요. 소은 아가씨는 신생에 있을 때부터 사건이 끊이지 않았고 뉴스에도 계속 나오고, 이제 조향 협회에 조사도 받을 텐데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뭐 있겠어요. 차라리 그만두고 집에서 쉬는 게 나을 수도 있죠.”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 나 같아도 그만 둘 것 같아.”“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운명을 갖고 있지 않아요!”“서연 씨 왜 그러세요? 저희가 이런 말 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이게 임신한 배로 보여요?”“아가씨! 여기는 그렇게 두드리면 안 돼요!” 조현아는 재빨리 그녀의 손을 막았다. 그녀는 막는 김에 한소은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아직 평평하네요. 3개월도 안됐을 것 같아요.”한소은은 울지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녀의 손을 끌어내리며 말했다. “정말 아니에요!”“저 저번달에도 생리했어요. 어떻게 3개월이겠어요.”“그럼 저번달은 아니라 치고 이번 달은요?” 조현아는 반농담조로 말했다.“이번 달도...” 그녀는 문득 무엇인가 깨달은 듯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번 달에 정말 생리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최근에 계속 바쁘고 잡다한 일도 많았다. 그녀는 원래 이런 일에 둔감했기에 정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이번 일로 인해 깨닫게 되었는데 이번 달에 정말 생리를 하지 않았다.조현아는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대충 짐작한 듯 몸을 움츠렸다. “왜요? 정말 임신한 거예요?”“그럴 리가요!” 그녀는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웃음이 어딘가 어색했다. “아마 요즘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 걸 거예요. 그냥 며칠 늦춰졌나 봐요”“그래도 확실히 해야죠! 예전에 일정했는데 이번에 그렇지 않다면 의심해 봐아죠!”“아닐 거예요!” 한소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확신에 찬 듯 말했다. “정말 아니에요!”“왜 아니라고 생각해요. 같이 잘 거 아니에요!”이런 사적인 얘기를 하자 한소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얘기는 하지 마요!”“아니, 사생활을 캐묻는 게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있으면 확인하고 확실하게 하는 게 가장 좋아요. 향료, 천연원료 외에 화학성분이 있을 수도 있고 게다가 원료라고 하더라도 임산부가 장시간 맡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어요”조현아의 얼굴은 진지했다. “제가 아이를 낳아본 적은 없지만 저희 언니는 아이를 낳았어요. 언니가 저한테 이런 것들을 자주 접하면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얘기해 줬어요.”“...” 한소은은 말을 하지 않은 채 조금 긴장하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