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설아는 잠시 멈칫하다 바로 부인했다.“아니야! 진짜 팬이야! 어떻게 내가 준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리고....”“아직도 연기하는 거야?”요영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내가 진짜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백화점에 들어왔을 때부터 저 여자가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봤어. 네가 눈치 주니까 달려온 거잖아.”“그리고 내 팬이라고 해도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사인을 하러 온다고?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일로 손님을 방해하면 어떤 결과인지 모를 것 같이? 너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저 직원은 완전 신입인거지나! 아직 교육을 덜 받은.”한참 후 그녀가 말했다.“근데, 사원증을 보니 신입은 아니야. 설아야, 너의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이러지 않아도 돼! 늙으면 늙은 대로 살면 되니까!”“진짜 미치겠네!”윤설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여사님의 눈을 속이지 못하겠어! 하지만, 이렇게 똑똑한데 왜 그렇게 고집불통이야. 아무 명분도 신분도 없는 여자는 무시하면 되잖아. 진짜 경쟁 대상이라고 생각해?”요영은 고개를 저었다. “경쟁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버지 마음속에 그들 모자가 제일 중요하니까. 너도 아빠가 예전부터 남자아이만 좋아했다는 걸 알잖아. 밖에서 아들을 낳아온 것도 그의 명이야. 언젠가 그는 우리 모녀를 버릴 거야.”“우리를 버리게 전에 우리가 먼저 버리면 되지.”윤설아가 말을 하며 그녀의 몸을 돌리자 그녀의 눈앞에 거울이 비쳤다.“엄마, 잘 봐. 엄마는 아직도 너무 예뻐! 엄마가 지금 다시 연기를 한다면 다시 대상을 손에 쥘 거야! 아무것도 없는 여자를 무서워하면 어떡해!”“엄마 기분 나쁘다고 했지? 내가 기분 좋게 만들어 줄게!”요영은 거울에 비친 윤설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을 보고 물었다.“설아야, 뭐 하려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재밌는 연극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윤설아가 웃으며 요영의 팔에 팔짱을 꼈다.“여기 진짜 예쁜 옷이 없네. 우리 저쪽으로 가보자”두 사람은 얼마
”엄마, 지금 화가 나서 사리분별이 안 되는 거야! 저 여자가 아빠 카드를 긁고 싶어도 엄마가 긁게 해야 긁을 수 있지! 엄마, 핸드폰 어디 있어?”윤설아는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고 요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핸드폰을 건넸다.“핸드폰은 왜?”핸드폰을 받은 윤설아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은행이죠? 전 윤중성 씨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네, 맞아요.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실수로 신용 카드 몇 장을 잃어버렸는데,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주워서 긁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서요. 그래서 말인데, 은행에서 잠시 제 남편 명의로 되어 있는 모든 카드를 정지시켜줄 수 있나요?”요영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윤설아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었다.화가 너무 나서 그런 건가, 그녀는 왜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지? 그럼 전에 내연녀를 상대하려고 했던 연기들과 수단들은 다 뭐였지?이내 기분이 좋아진 요영은 여유로운 얼굴로 유리창 쪽을 쳐다보았고 그 안에 있는 여자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모른 채 실실 웃으며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네, 주민 등록증 번호는… 핸드폰 번호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전화를 끊은 윤설아는 핸드폰을 엄마에게 돌려주며 말을 이어갔다.“엄마, 이제 좋은 구경만 남았어!”두 사람은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아 여유롭게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곁에 커다란 식물 몇 개가 놓여있었기에 그녀들은 맞은편을 볼 수 있지만 맞은편 각도에서는 식물에 막혀 두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물건을 잔뜩 고른 진고은은 손가락 두 개에 카드 한 장을 끼고 뽐내듯이 결제하려고 했다. 물론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지만 요영은 진고은이 남편 카드를 꺼내든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채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판매원이 공손하게 카드를 받아 뒤돌아서 결제를 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진고은에게 뭐라고 얘기를 전했고 진고은은 다른 카드를 꺼내 판매원에게 건넸다.예상했듯이 몇 번의 시도 끝에 판매원의 태도는
아니나 다를까, 조금 뒤 요영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일지 짐작이 갔다. 요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맞은편 가게에서 발만 동동 구르면서 난처한 상황에 처해있는 진고은을 보며 한참 지나서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전화가 연결된 순간, 요영은 마치 딴사람이 된 듯이 다급하게 말했다.“여보! 제 카드가 없어졌어요! 어떡해요, 어떡해!”기승전결을 전부 알고 있는 윤설아조차도 엄마의 표정 변화를 본 순간, 속으로 엄마의 명연기에 감탄했으며 굳이 표정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어도 요영의 다급함과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기에 누가 봐도 이 일은 그녀와 상관없었다. “카드가 왜 없어져요, 천천히 얘기해 봐요, 어떤 카드가 없어졌는데요.”“모르겠어요, 그게 제 카드와 지갑이 다 없어졌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손에 들고 있었는데 왜 없어졌지!”요영은 요지부동의 자세로 자리에 앉아서 통화를 했지만 목소리는 급해서 미칠 지경인 듯했으며 심지어 울먹이기까지 했다. 따지고 화내려고 전화했던 윤중성은 그녀의 말에 태도가 180도로 바뀌었다.“급해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봐요. 평소에 덤벙대는 성격이 아니잖아요, 그걸 어떻게 잃어버릴 수가 있어요, 혹시 차에 두고 내린 거 아니예요? 당신 어디 다녀왔어요?”“차에 흘렸을 가능성은 없어요, 오늘 기사님에게 운전을 부탁하지 않았거든요,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화장실에 갔을 때 흘린 거 아닐까요? 아니면 물건 살 때 누가 훔쳐 갔나?”요영은 울먹이면서 말을 이어갔다.“그래도 다행인 건, 다른 사람이 혹시라도 카드를 주워서 긁을까 봐 당신 명의로 되어있는 카드를 일단 전부 정지해 놨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훔쳐 갔다고 해도 큰 손실은 없을 거예요, 다만 나중에 카드를 다시 만들려면 그게 좀 번거로울 뿐이지.”윤중성은 그녀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손실이 없어서 다행이죠, 조심 좀 하지 그랬어요! 나중에 다시 만들어야죠 뭐, 근데 당신이 잃어버린 카드만
기자 회견은 저녁 7시로 정해졌고 김서진과 한소은의 항공편은 오후 3시에 도착했기에 그들은 착륙하자마자 집에 갈 시간도 없이 서둘러 회사에 가서 자료와 사전 소통을 준비했다. 조현아와 오이연도 이 일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중대 사안으로 지금까지 환아 본부에서 해결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끼어들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속으로 묵묵히 걱정할 뿐이었다. 한소은을 본 순간, 그제야 안도감이 든 오이연은 한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부둥켜안았다.“드디어 돌아왔네! 간지 얼마 됐다고 그렇게 많은 일들을 겪은 거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잖아! 그 녹음은 언니가…”말을 꺼내려던 순간, 곁에 있던 조현아가 오이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사무실에 가서 얘기하자고 눈치를 줬다. 사무실에 들어선 뒤,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치고 나서 조현아가 물었다.“그 녹음은 어떻게 된 거예요, 또 누군가에게 당한 건가요?”그들 입장에서는 한소은을 절대적으로 믿었지만 목소리로만 들었을 땐 너무 비슷해서 구분할 수 없었다.설마 편집한 건가?“아니요, 내 목소리 맞아요! 걱정할 거 없어요,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잘 해결할 거예요.”한소은이 화끈하게 인정했다.“걱정하지 말라고?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이 일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몰라서 그래? 제성 시까지 소문이 자자하다고 하던데, 며칠 안에 조향 업계 협회에서 사람을 시켜 조사까지 한다고 해. 왜 그런 말 했어, 이유도 없이 향료에 독은 왜 탔어, 미쳤어?”흥분한 오이연은 한소은이 도대체 왜 그런 발언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끝까지 한소은이 한 말이 아니라고 확신했는데 이제 한소은 스스로도 인정한 마당에 오이연이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없었다.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저녁에 기자 회견이 있을 거야, 이 일에 대해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밝힐 거고. 그때 가면 알게 될 거야.”한소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으며 대답했지만 오이연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했다.“왜 그때 가서 얘기해야 해, 지금 하면 안돼?
저녁 6시 반.강성 5성급 호텔의 연회장에는 이미 사람이 꽉 차 있었고 기자들뿐만 아니라 조향 업계의 조향사, 심지어 업계의 신인까지, 모든 관계를 통해 초대장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전부 참석했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조향 업계를 뒤흔들었기에 다들 한소은이 공개 사과를 할지, 아니면 자신이 했던 말을 부인할지 너무도 궁금했다. 김서진의 차는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 향했고 경호원의 안내 하에 VIP 통로를 통해 휴게실에 들어섰다. 비서는 김서진보다 먼저 도착해 모든 걸 철저하게 준비했고 김 대표님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왔으며 품에는 연설문을 꼭 껴안은 채,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초조함이 보였다.“김 대표님.”문을 연 비서는 이리저리 살폈지만 당사자가 보이지 않았기에 놀란 얼굴로 물었다.“한소은 씨는… 안 오셨나요?”“볼일이 좀 있어서 조금 있다 올 거예요.”비행기에서 내린 두 사람은 각자 일 처리를 하러 갔고 한소은이 회사로 간 사이에 김서진은 본부로 향했다. 자리를 비운 동안, 회사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요, 조금 있으면 기자 회견을 시작해야 합니다. 밖에 기자들도 거의 다 왔습니다.”대표님과 한소은의 관계가 남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비서는 감히 대놓고 원망할 수는 없었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 일은 한소은이 저지른 잘못으로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해고했을 뿐만 아니라 책임까지 물었을 텐데, 김 대표님 때문에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회사 관리 부서에서는 그녀가 저지른 일을 처리하느라 애를 쓰고 있고 이번 기자 회견도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자리인데 지금 그녀는 뭐하고 있단 말인가?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다니.아직 얼굴을 본 적도 없지만 벌써 텃세를 부리는 한소은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도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대표님이 저 정도로 신경 쓰는 건지 궁금했다.소성 차 씨 집안 사람이라고 하던데 또 철없
마음이 급한 비서는 몇 분 더 기다리다가 미동조차도 없는 사장을 보며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말했다.“대표님, 제가 한소은 씨에게 전화를 걸어볼까요?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 볼까요?”회사 직원의 연락처를 알아내긴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기에 비서는 그 나쁜 사람 역할을 자신이 도맡을 생각이었지만 김서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아니요. 일단 밖에 상황을 좀 정리해 주세요. 조금 있으면 나타날 거예요.”대표가 이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비서가 아무리 급해도 소용없는 일이기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돌아서서 휴게실을 나섰다.그제야 김서진은 핸드폰을 꺼내 힐끔 보더니 얼굴이 어두워졌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 한소은은 증거를 준비해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지만 늦더라도 꼭 나타나서 기자들과 회사가 받아들일 만한 해명을 할 거라고 했었다.김서진은 한소은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으며 그녀가 아직 소식이 없는 건 준비가 채 안 됐다는 뜻이기에 재촉해도 소용없다. 시간이 일분일초 흘렸고 시계가 6시 55분을 가리키던 순간, 그의 핸드폰이 드디어 울렸다.“여보세요?”김서진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고 전화기 너머 한소은의 미안함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서진 씨, 저 지금 길이 너무 막혀요, 최대한 빨리 가고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요, 혹시 회사 사람들이 조금만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까요, 저… 죄송해요!”분명히 시간을 정확히 계산했고 그 시간에 맞춰서 준비를 했는데 저녁 퇴근 시간에 걸려서 차가 막힐 줄은 상상도 못했으며 7시가 코앞인데 아직 도착도 하지 못했다.“여긴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와요. 어디에서 막힌 거예요? 제가 데리러 갈까요?”김서진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묻자 한소은이 서둘러 대답했다.“괜찮아요. 여긴 지금 꽉 막혀서 서진 씨가 오는 길도 막힐 거예요. 그러다가 두 쪽에서 막힐 수도 있으니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 전 지금 이연이와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말에 김서진은 그제야 안도감
“뭐라고? 그 누구랑 뭐가 달라?”한소은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어떤 남자들은 센스도 없고 재미없잖아. 기분 좋은 말 해줄 줄도 모르고!”오이연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렸다.하지만 이걸 그냥 넘어갈 한소은이 아니었다.“그래? 그래서 그 어떤 남자들은 누굴 말하는 건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잘생겼어? 몸매가 아주 좋지 않아? 설마 그 남자가 서씨야?”당황한 오이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한소은을 힘껏 쏘아보더니 말했다.“언니 미워! 언니랑 얘기 안 할 거야!”“이거 봐. 네가 나한테 농담하는 건 괜찮고 내가 농담 한마디 했다고 이러기야? 정말 너무하네.”한소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어쨌든 언니는 말하지 마. 그 인간 말도 꺼내지 말라고!”“그래서 그 인간이 누군데?”한소은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오이연은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한소은의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됐어!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오이연은 입을 쭉 내밀며 그녀의 손에 들린 박스를 바라보았다. 한 시간 전에 그들이 제작에 성공한 샘플이었다.사실상 모든 과정은 한소은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가 준 레시피와 지도가 다 했고 오이연은 그냥 보조만 했을 뿐이다.시간이 워낙 급박해서 자세히 연구하지도 않았다. 예전 레시피와 별다를 것 없이 보통의 향료가 들어가는 향수라고 생각했는데 전보다 제작 절차가 조금 추가되었고 전에는 안 쓰던 향료도 조금 들어갔다.그게 뭔지는 오이연도 정확히 몰랐다. 어차피 한소은이 가져온 것이고 그녀는 조수로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기자회견에 참석한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오후 내내 바쁘게 돌아친 것이 오늘의 기자회견을 위한 것이었다니. 과연 한소은은 어떤 해명을 내놓을까?“언니, 이거로 정말 결백을 증명할 수 있어?”그녀를 믿지만 어떻게 대중 앞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지 궁금했다. 그녀의 가까운 지인으로서 걱정되는 건
“이번 사건은 영향력이 꽤 커요. 환아뿐만 아니라 전체 조향 업계에 비상이라고요. 한소은 씨 한 명 때문에 향수 제조업이 다 죽어 나가게 생겼단 말입니다! 앞으로 누가 감히 향료와 향수를 구매하겠습니까? 그 안에 무슨 독이 들었을 줄 알고요? 한소은 씨 본인이 나와서 해명한다고 해도 모자랄 판에!”한소은과 환아를 향한 강한 비난이 이어졌다.담당자의 이마에도 식은땀이 돋았다. 그래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기자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다들 진정하세요. 오늘 이 기자회견을 소집한 것도 여러분께 납득할만한 해명과 결과를 내놓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생겨서 한소은 씨가 늦어지고 있어요. 저희에게 그리고 한소은 씨에게 시간을 조금만 주시겠습니까?”환아는 뷰티업계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담당자의 태도도 무척 공손했기에 기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일부 기자들도 있었다.“염치가 없어서 못 오는 거 아닙니까?”일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소은이 죄를 지은 게 확실하기에 자리를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맞습니다! 오늘 오후 세 시에 강성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여태 뭐하고 아직도 안 나타납니까? 식사를 하고 씻고 준비하고도 남을 시간 아닙니까?”“그러니까요!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세요! 저희도 바쁜 사람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맞아요! 정확한 시간을 주세요. 30분만 더 기다려서 그때도 안 오면 해명할 용기도 없으면서 기자들을 농락한 거로 치부하겠습니다!”몇몇 적대적인 기자들의 말에 환아 측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던 기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한편 김서진은 구석진 곳에서 몰래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 틈에서 눈에 띄게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몇몇 기자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짓을 했다.눈치 빠른 서한이 재빨리 그에게 다가왔다.“저 기자들 뒤 한번 캐봐. 그리고 교통정리는 어떻게 돼가고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