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성호가 손짓을 하자 주변에 잠복하고 있던 그의 부하들이 우르르 뛰쳐나와 차성재와 한소은을 포위했다.한소은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기습을 피한 뒤, 돌려차기로 측면에서 공격해 오는 자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고는 가볍게 주먹을 휘둘러 후방에 있는 적의 머리를 가격했다. 그녀의 주변에는 벌써 세네 명의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고개를 돌려 보니 차성재도 놈들과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더 많은 적들이 몰려오고 있었다.한소은에 비하면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 자들이었지만 차씨 가문 제자들과 비하면 꽤 수준 높은 실력자들이었다. 무공의 수련도가 높은 건 아니지만 모두가 두 사람을 죽일 각오로 덤벼들고 있었다.차씨 가문은 대대로 무술을 연마했지만 무인의 덕을 우선시했기에 권법과 수련의 근본은 방어와 반격이 위주였다. 하지만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은 하나하나가 잔인했으며 약점만 골라서 공격했다. 이런 살벌한 기세는 한소은도 처음이었다.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 옆에서 무공을 수련했지만 접촉한 사람이라고는 차씨 가문 제자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평화주의 사회에서 그녀가 진짜 무술 실력으로 누군가를 제압할 일은 거의 없었다.저번에 노형원의 기습이 그녀에게는 첫 번째 반격이었다.적 몇 명을 때려눕힌 그녀는 차성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역시 방어와 격퇴를 위주로 하다 보니 아직은 별 위험이 없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이대로는 가망이 없어!’만약 이들을 제대로 쓰러뜨리지 않으면 이 싸움은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체력적으로 불리해진다!결심을 굳힌 한소은은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손으로 받아냈다. 상대가 중심을 못잡고 비틀거리는 사이, 한소은은 기를 운용하여 상대의 팔목을 꺾어버렸다.우드득!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상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한소은은 봐주지 않고 그의 팔을 끝까지 비틀어 제압한 뒤, 발을 들어 그의 아킬레스건을 힘껏 걷어찼다. 또 한번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상대가
차성재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촌 동생이 조금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너….”차성호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무시무시한 실력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그는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빨리 저들을 때려눕혀!”한소은은 등 뒤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느껴졌다. 뾰족한 것이 그녀의 등쪽에서 날아오고 있었다.“소은아!”차성재가 비명을 지르자 그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살짝 옆으로 피하고 몸을 비틀어 상대에게 다리를 날렸다. 상대도 민첩하게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차성호 당신 도대체!”차성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누군가가 그의 등 뒤에서 다가왔다. 대화를 나눌 사이도 없이 또 한차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차성재와 한소은 두 사람 다 여유롭게 싸움에 응하고 있었지만 처음에 비해 많이 지쳐 있었다. 나중에 가입한 두 명의 적은 조금 전 보았던 상대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한소은은 정신을 집중해서 싸움에 응했다. 그녀의 상대는 상당히 흉폭하게 생긴 남자였다.얼굴에는 긴 수염이 자라고 있었고 체격은 건장했다. 한소은의 발차기를 정통으로 맞고도 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마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차성재의 상대는 하얀 피부에 연약해 보이는 놈이었는데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잔인하게 약점만 골라서 공격하고 있었다. 차성재마저 상대하기 버거운 놈이라는 것이 느껴졌다.아마 그들의 예상이 맞다면 이 두놈은 무술계에서도 유명한 “음양듀오”였다.현대사회에서 무술 가문은 얼핏 보기에 몰락한 것처럼 보였고 이런 가문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사실은 몰락한 게 아니라 사라진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술계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번성기를 누리고 있었다.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 차씨 가문은 제자를 받고 몸을 건강히 하려는 목적으로 무예를 수련하면서 상계에서 영향력을 넓혔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무예를 포기하고 몰락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단지 현실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상계로
그의 고함에 음양듀오의 동작이 더욱 빠르고 맹렬해졌다.예상치 못했던 두 사람의 출현에 차성재도 당황했지만 온 정신을 집중해서 싸움에 응했다. 하지만 아무리 싸워도 승부가 나지를 않았다. 차성호의 고함에 차성재가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진 사이, 상대의 발이 그의 얼굴 앞까지 날아왔다. 다급히 발을 피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윽….”차성재가 신음을 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그가 다친 것을 확인한 차성호는 그제야 표정을 풀고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죽이지는 말고 산 채로 제압해!”그가 돌아온 목적은 차씨 가문의 가주 자리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그래도 피를 나눈 가족이었고 그들 중 누구를 죽여도 그에게 득이 될 게 없었다. 차성호가 원하는 건 후대들이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었다.“성재야, 소은아, 끝까지 버텨봐야 너희한테 득이 될 게 없어. 그러니까 삼촌 말만 들으면 좋았잖아? 삼촌이 가주가 되어도 너희를 가문에서 내쫓지는 않을 거야. 성재 네가 다치면 나도 마음이 안 좋다고!”말을 마친 그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아서 싸움을 관람했다.처음에는 확신이 없었는데 차성재가 다쳐서 이제 이길 자신이 있었다.‘음양듀오를 데려오길 잘했어. 나머지 놈들로 백날 싸워봐야 저 둘을 못 이긴다니까!’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았다.“날도 늦었는데 빨리 결정해. 너희가 내가 가주가 되는 것을 반대만 하지 않고 앞으로 내 말에 따르겠다고 약속하면 이 싸움을 끝나게 해줄게.”차성재는 다친 몸으로도 굴복하지 않고 싸움을 이어갔다. 그는 차성호의 제안을 차갑게 거절했다.“꿈 깨시죠!”“쯧쯧… 어른 말을 이렇게 안 들어서야… 그럼 어쩔 수 없구나. 고생 좀 할 거야!”차성호는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쾅!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차성재와 미소년의 결투도
자신의 내공으로 공격을 막아내면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등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 아파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한편, 차성재는 다가가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한소은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가 끼어들어서 도움을 줄 필요가 전혀 없었다.언제 실력이 이렇게 일취월장한 건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바짝 긴장한 눈으로 싸움을 바라보는 차성호가 보였다. 그도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의기양양한 미소는 사라지고 의자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다.“고작 저런 어린 계집애 하나 못 잡아? 그 실력으로 어떻게 돌아가서 가주 얼굴을 보려고!”조급해진 차성호가 음양듀오를 닦달하기 시작했다.차성재는 숨을 가다듬고 차성호에게 손을 뻗었다.“성… 성재야!”차성호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뒤로 물러서다가 의자에 다리가 걸려 뒤로 몸이 쏠렸다.차성재는 쓰러지는 차성호의 팔을 잡아 힘껏 당겼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당장 멈추라고 하세요!”“네가 감히! 나 네 삼촌이야!”당황한 차성호가 소리를 빽 질렀다.“삼촌?”차성재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얼음장같이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한데 나한테 삼촌은 없어!”“성재 너….”“당장 저것들 보고 멈추라고 해. 모가지 부러뜨리기 전에!”말을 마친 차성재는 손에 힘을 주었다.차성호는 숨이 막혀서 허덕였다. 차성재는 그의 경부 동맥 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정말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계속 고집을 부리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차성호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멈춰!”하지만 그의 말에 따르는 자는 없었다. 미소년 백영의 동작은 더욱 빠르고 잔인해졌다. 다쳐서 바닥에 쓰러졌던 흑막까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투에 끼어들었다.한소은이 둘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멈추라고! 내 말 안 들려? 그만하라고!”조급해진 차성호가 고래고래
차성재도 이 상황을 의식했는지 손에 힘을 풀었다. 지금 차성호를 인질로 잡고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차성호의 목숨은 저들에게 위협이 아니었다. 차성호에게는 저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어… 어떻게 이럴 수가….”표창을 보고 놀란 차성호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망연자실했다.차성재가 손을 풀자 그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에 충격적인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조금 전 표창이 제대로 박혔으면 그는 진작 승천했을 것이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표창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목을 향해 날아들던 그 아찔한 광경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다.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소리를 낼 용기가 없어서 결투가 벌어지는 쪽으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다.세 사람은 여전히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소은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이 여유롭게 응대하고 있었다. 10분이 지나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음양듀오가 바닥에 쓰러졌다. 아까 이미 큰 부상을 입은 흑막은 바닥에 쓰러진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당신… 도대체 누구야?”백영이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가서 너희들 가주한테 전해. 욕심부리지 말고 처신 잘하라고!”한소은이 냉랭하게 말했다.둘은 차성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서로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녀를 힐끗 쏘아보고는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적이 사라지자 한소은은 느긋하게 차성호의 앞으로 다가갔다.“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너….”차성호는 그녀가 음양듀오를 때려눕히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항상 여리기만 하던 어린 계집애가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걸까?“너 괜찮아?”차성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어디 다치지도 않았고 불편한 느낌도 없었다. 몸에서 기가 들끓고 있었지만 아직 통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무시하기로 했다.차성재 역시 그녀의 실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아닌지 맞는지 대답만 하세요!”한소은은 손을 들어 그의 멱살을 잡고 그를 죽일 듯이 쏘아보며 다시 물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차성재는 그녀의 무지막지한 힘에 놀랐다. 그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 싸우면서 떨어진 그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다가가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이 조금 깨지기는 했지만 쓸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잠시 상대의 말을 듣고 있던 차성재가 복잡한 표정으로 한소은을 바라보았다.차성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참 오랜 시간을 공들여 세운 계획이었는데 어린 조카 손에 모든 일을 망칠 줄은 몰랐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너를….”그는 말끝을 흐리며 격렬하게 기침했다.그리고 그때, 통화를 마친 차성재가 한소은에게 다가왔다.“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 부검 결과가 나왔대.”한소은은 숨을 죽이고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심정을 알기에, 차성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최종 부검 결과는 할아버지가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나왔어. 자연사래. 타살이 아니라.”한소은은 물론이고 차성호마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자연사였어? 자연사? 하….”차성호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쓰러졌다.충격에 빠진 한소은은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어…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나도 믿기 힘들지만 이게 사실이야. 부검 결과서는 언제든 가서 확인해도 좋대. 너….”차성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차성호가 한소은이 어르신을 독살했다고 몰아가고 부검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그들은 이것이 누군가가 짠 치밀한 음해라고 단정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믿기 힘들고 수상했지만 그들은 모두 범인을 속으로 단정 짓고 최종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타살이 아니라니. 독에 당한 게 아니라 자연사였다니! 그럼 이제껏 했던 일은 뭐가 되는 걸까? 헛웃음이 나왔다.“하하하… 자연사… 하….”차성호는 바닥을 뒹굴며 미친
한소은은 호텔로 돌아갔다.최근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저택에서 잠을 자기 불편했다. 저택 곳곳에 그녀의 어린 시절 흔적들과 외할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힘들었다.한때 그녀는 자신과 외할아버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가신 뒤에야 자신이 그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게 되었다.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라면서 그녀는 항상 그의 엄격함에 불만을 가졌었다. 성인이 된 뒤에야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만약 무공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수없이 많이 다치고 아팠을 것이다.그런데 이제 외할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그래서 외할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누구보다 진심으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런데 그게 전부 헛수고였고 결국 자연사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복수의 기회마저 사라진 것이다.“아직도 안 자요?”샤워를 마치고 나온 김서진이 침대에서 멍때리고 있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물었다.그녀는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턱을 무릎에 괴고 멍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김서진은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녀를 알고 지금까지 이토록 힘없는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었다.노형원과 사이가 깨지고 오갈 데 없이 그에게 거래를 제안하러 왔을 때도 이처럼 망연자실한 표정이 아니었다.김서진은 타올로 머리를 대충 말리고 침대에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사실 소은 씨에게도 차씨 가문에도 가장 좋은 결과잖아요.”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그도 무척 당황스러웠다.오랜 시간 조사하면서 범인을 비난하고 미워했는데 이런 결과일 줄이야.지금 생각해 보면 차성호는 그냥 어르신의 죽음을 이용해서 권력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들이 부친을 살해한 사건이 아니라서 차씨 어르신에게도 잔인한 결과는 아니었다.한소은도 당연히 이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슬픈 건 어쩔 수 없었다.감정이라는 건 머리처럼 마음대로 통제할
한소은은 자신의 하얗고 가는 팔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중요한 순간에 체내에서 퍼지던 에너지 때문에 그녀도 순간 당황했었다.상황이 하도 긴박해서 다른 사람들은 뭔가 이상한 점을 감지하지 못했지만 그녀 자신은 경과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흑막과 대치할 때 그녀는 별로 우세를 차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흑막이 더 강했다.어릴 때부터 무예를 수련했지만 그건 그냥 호신용이었고 외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배운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녀도 잘 알지 못했다.성인이 될 때까지 그녀는 사형제들과 차성재하고만 가끔 대결을 했다. 하지만 거의 적당히 서로 주고받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한소은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대학에 입학한 뒤로는 별로 수련하지도 않았다.최근에 주먹을 들었을 때는 프랑스에서 납치당했을 때였다. 그때도 조금 놀랐는데 아마 위급한 상황에 신체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잠재적인 재능이 또다시 업그레이드된 걸까?“무슨 생각해요?”약을 다 바른 김서진이 멍하니 있는 그녀를 보고 물었다.“성재 오빠가 차성호를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혈연관계만 따지면 차성호는 그녀의 외삼촌이자 차성재의 삼촌이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그는 가문에서 내쫓겼고 이렇게 큰 사건을 일으켰으니 쉽게 용서할 수도 없었다.외할아버지도 중독으로 사망한 게 아니니 형사사건으로 처리할 수도 없고 차성호도 법의 심판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 이는 차씨 가문의 집안일이 되어버렸다. 외부인을 데리고 차씨 가문에 쳐들어와서 가주의 자리를 강탈하려 한 것이니 집안일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지금 차성재가 그를 잠시 가두었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할까?“차성재 씨라면 아마 차성호를 다시 외국에 내보낼 것 같네요.”잠시 생각하던 김서진이 말했다.“그냥 외국에 쫓아 보낸다고요?”“그것 외에는 딱히 벌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죽일 수도 없고.”김서진이 웃으며 고개를 흔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