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요, 제가 용의자이긴 해도 조사받는 건 두렵지 않아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웃음을 보이며 차국동에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 집안에 있는 사람 모두 용의선상에서 배제해서는 안됩니다. 여기 집에 있는 이상 어느 누구도 살해할 수 있는 기회는 있었어요. 작은할아버지가 이제 가주가 되셨고 저희 할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으시다면 철저히 조사해 주세요. 잊지 마세요. 곧 사흘이라는 기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 제가 만족할 수 있을만한 답변을 가져와주셨으면 합니다.”차국동은 그녀의 태도에 충격을 받고 멍해졌다. 분명 혐의가 가장 확실한 사람은 그녀고 그녀를 조사 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녀가 당당하게 요구를 하고 있다.“한소은! 더 이상 변명하지 마라. 이 일을 더 크게 키우지 않는 이유는 차 씨 가문의 체면을 위해서다. 네가 지금 소식을 퍼뜨리는 바람에 이렇게 일이 커졌는데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것이냐?!” 그는 지팡이로 땅을 치며 말했다. 좋아, 내일 장로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내가 지금 말해줄게. 감정 보고서에 이미 향초에 독성이 들어있다고 쓰여 있다. 너도 생각이 있다면 인정해라. 이 일은 가문 내규에 따라 징계하도록 하겠다. 거부한다면 넌 바로 감옥에 가게 될 것이다!”이것은 죄를 그대로 그녀에게 뒤집어 씌운 꼴이다.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적어도 그럴듯한 증거를 만들어 올 줄 알았지만 단지 두세 마디의 말로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있다.한소은은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전 몰래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럼 법정에서 뵙죠, 제가 범인이라면 감옥 갈게요.”“다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경찰은 저희 가문처럼 다른 얘기는 하지 않을 거예요. 모든 증거를 위주로 조사할 것입니다. 마지막에 누가 감옥에 갈지는 모른다는 거죠.”“넌 네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차국동은 뭐가 생각났는지 옆에 있던 김서진을 바라보았다. “뒤에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서 내 말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김서진은 오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 말이 불편하게 한건가요?”“그럴 리가요.” 한소은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에게 안겨 말했다. “고마워요.”제 인생에 나타나줘서 고맙고 저를 아껴주고 저와 함께 걸어줘서 고마워요. 항상 망설이지 않고 제 뒤에서 지켜줘서 고맙고 항상 저와 함께 해줘서 고맙고...“바보!” 김서진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그녀를 껴안았다. “그분들은 경찰이 개입하면 일이 복잡해지고 통제하기도 어려워질 것 같아서 소식을 퍼뜨리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요.”“경찰이 개입한다면 아들이 아버지를 모함한다는 뉴스로 인해 차 씨 가문의 체면이 말이 아닐 거예요.” 한소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차 씨 가문이 경찰에 신고 안 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 같아요.”“그럼 당신은요?” 그는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속사정도 모르고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당신도 신고할 생각이 없는 건가요?”“이런 일은 후폭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차 씨 가문은 모두 외할아버지가 쌓아 올린 것이에요. 외할아버지의 노력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할아버지를 해친 사람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그럼 어떻게 하려고요?”“둘째 할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차 씨 가문에는 가문 내규가 있어요. 그러니 한번 기다려 보려고요. 차성호가 어떤 수를 가지고 있는지!” ——윤 씨 가문.회사에서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윤설아는 들어오자마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만났다.“아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오늘 일찍 오셨네?”그러나 윤중성은 평소처럼 온화한 미소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불편한 안색을 보이며 말했다. “설아야, 이리 와봐라!”윤설아는 어리둥절해하다 곧 무슨 일인지 짐작하고 웃으며 걸어갔다. “아빠,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 무슨 일 있어?”“내가 물어볼게, 오늘 동생이 찾아갔었지?” 그
윤백건은 저번달에 출장을 갔고 며칠 전에 돌아왔다. 그런데 며칠 만에 또 사라졌다고?그는 요즘 너무 자주 자리를 비워서 윤중성 또한 그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요즘 그의 마음이 모두 그의 아들에게 쏠려있고 그를 부양하는 데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집안에 여자도 들이고 싶었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그렇다니까!”윤설아는 매우 놀랐다. “설마 모르고 계셨어?”“나도 본 지 오래됐는데 내가 어떻게 아니.” 윤중성은 다시 물었다. “맞다, 요즘 회사에서 무슨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거야? 큰아버지는 왜 계속 출장 가있는 거야?”사실 윤중성이 사업에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권력을 잡으려는 욕심도 있었지만, 실력만으로 따진다면 그의 형에게 절대 뒤처지는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의 하나뿐인 아들 윤최웅이 사업에 관심이 없다. 그는 기회만 있다면 가문의 재산을 자신이 갖고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모르겠어. 큰아버지가 직접 뛰어야 할 큰 프로젝트도 없어. 비서한테도 물었었는데 모른다 더라구. 사실 내가 들은 바로는...”갑자기 소리를 낮추니 윤중성은 더욱 궁금해졌다. “뭘 들었어?”그녀는 주위를 둘러본 뒤 하인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하였다. “사실 내가 듣기로는 큰아버지가 출장 가신다고 해놓고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계신다고 들었어. 하지만 비밀로 하셔서 아무도 몰라.”“정말?!” 윤중성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당연히 이 소식은 그에게도 회의적이었다.그의 친형이 입원한다면 비밀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말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 최근 회사에는 큰아버지께서 직접 뛰실만한 큰 프로젝트가 없거든, 최근에 큰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 이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정도야. 큰 오빠는 지금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어.”원래는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윤중성은 점점 그럴듯한 것 같았다.“만약 사실이라면 우린 잘 생각해야 한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웃으면서 탁자 위의 유리잔을 들고, 그 안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정말 차가웠다.“맞다, 아빠, 새 프로젝트 일 내가 생각해 봤는데 소겸이한테 맡겨도 별 문제 없을거 같아. 나중에 삼촌들 몇 분한테 얘기하면 될 거야. 하지만 그전에 담당자한테...”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중성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나도 알아, 그... 노형원 맞지? 요 며칠 동안 바빠서 물어볼 겨를이 없었는데 그 사람 평판 나쁜 거 알고 있니? 예전에 있던 회사가 파산했다고 하더구나.”“응, 알고 있어. 알면서 고용한거야. 이미 사업 경험도 있고 능력도 있어서 이 일에 익숙해. 이렇게 하는 거 어떨까? 그를 보조로 두고 소겸이를 도와주도록 하는 거지. 어찌 됐든 내가 항상 소겸이 옆에 있을 수는 없잖아. 어떻게 생각해?” 그녀는 생각한 뒤 계획을 말했다.윤중성도 이런 계획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들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비록 자신의 아들이 사업을 이어받기를 원하고 어렸을 때부터 잘 키웠다고는 하지만 회사에서의 경험이나 운영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옆에서 조언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다.단지...“그래도 네가 좀 더 신경을 써주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남에게 기대는 것은 좋지 않아. 그리고 노형원 그 사람도 주의 깊게 봐줘.”“알겠어.” 윤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들어가 볼게.”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잠시 멈추고 아래층 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윤소겸이 방에서 나와 기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달려갔다.“아빠, 전 아빠가 나서야 될 줄 알았어요!” 그는 기쁜 듯이 말했다. “회사에서 누나가 계속 핑계만 대고 동의하지 않더라고요.”윤설아는 차갑게 웃다가 윤중성이 하는 말을 들었다. “이제 만족했으니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마라.”“역시 아빠예요. 저도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누나가 일부러 괴롭히니까...”“너도 그렇게 말하지 마라.” 윤중성은 그의 말을 끊고서 말을 이었다. “네
“뭐라고, 내 자리에 앉히겠다고?!” 노형원은 돌아와서 의자에 앉기도 전에 이 소식을 들었다.“뭐가 급해서 그래, 프로젝트 매니저 자리가 신경 쓰이는 거야? 아니면 너의 목표가 딱 거기까지 인거야?” 윤설아는 그의 반응을 예상하고는 침착하게 말했다.“내가 이 자리에 앉은지 며칠이나 됐다고 자리를 양보하라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어. 프로젝트 매니저 자리도 내주고 심지어 도와주라고? 난 정말 너의 능력이 의심스럽다.” 그는 자신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그녀를 비꼬았다.윤설아는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아?”“무슨 뜻이야?” 노형원은 여전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왜 걔가 계속 프로젝트 매니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지 알아?”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그녀의 아버지가 승낙한 이유에 대해서 말했다. “이 새로운 프로젝트에서 성과를 낸다면 그게 바로 큰 성공이잖아. 걔는 우리 아버지가 후원하고 아버지는 회사의 원로들을 끌어 모은 뒤 성과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어. 회사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 마지막에 모든 것을 가져가려고 하는거야.”그녀는 겉으로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말을 할수록 눈에 한이 맺혀 있었다.비록 그녀는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생아를 위해서 정말 고심하고 힘을 써가며 계획하고 있다. 결국 사생아일 뿐인데 그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다.그리고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그녀는 훌륭한 능력을 가졌지만 아버지의 눈에 들지 못했다. “그러면 이 일에 승패가 가려진다는 말이야?” 노형원도 차츰 안정을 되찾고 그녀의 말 뜻을 알아차렸다.윤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약 이 프로젝트에서 성과를 낸다면 당연히 큰 성과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또 문제가 생긴다면? 그럼 책임을 지는 사람은 프로젝트 매니저가 될 거야.”“만약 네 프로젝트가 그렇게 된다면 내가 어떻게 너에
“전투력이 충분한 무술 가문 출신이면 충분해.”“차성호가 무술 가문으로 데려간 거야? 누구?”노형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자세히 알아보았는데 차 씨 가문 전체가 부풀려졌고 지금은 몇 명의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은 별로야. 이미 사업에 집중하느라 무술에는 소홀하게 된 것 같아. 다른 점으로는...”그는 피식 웃더니 말을 잇지 않았다.윤설아도 그가 누굴 말하려고 하는지 알고 웃었다. “왜 계속 말 안 해?”“말해야 할 거 다 말했어. 오늘은 푹 자고 내일 좋은 소식 기다리자.” 그는 하품을 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말해줘...”그녀의 말에 그는 끊지 않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약점이 있다며, 그럼 너는? 너의 약점은 뭐야?” “......”노형원은 잠시 침묵하다가 반문했다. “그럼 너의 약점은 뭐야?”그는 물은 뒤 전화를 끊었다. 사실 그녀의 대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단지...전화를 끊고 나니 이미 잠에서 깬 듯 눈을 크게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윤설아의 말 한마디가 귓가에 맴돌았다. “네 약점은 뭐야?”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작은 열등감, 내성적이었던 성격, 출세를 위해 달려가는 모습, 강시유, 한소은, 그 후 시원 웨이브 등...한때는 자신이 강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정상에 설 수 있다고 믿었던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회사, 사업, 연애, 여자...모든 것들이 그에게서 멀어졌고 빚 독촉, 욕설 등을 들으며 도망치다가 윤설아를 만났다.물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천사가 아니라 그녀 역시 더 깊은 곳으로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악마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실 같은 부류였지만 그는 기꺼이 싸우려고 한다.약점이 뭐냐고?눈앞의 장면들이 연기와 함께 걷히고, 얼굴 하나만이 남았다. 그 얼굴은 흐릿했지만 점차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 얼굴은...
차 씨 가문의 로비, 오전 9시.기세가 드높고 분위기가 엄중했다.차 씨 가문의 장로들이 양쪽에 한 줄로 앉아 있고 중앙에는 차국동이 앉아 있다. 그는 가끔씩 기침을 했고, 그의 옆에는 박달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굳이 열지 않아도 그 안에 차 씨 가문의 인장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한소은은 특별히 검은색 옷을 입었고 안색은 다소 굳어 있었다.차국동은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두 번 정도 쳐다보았다. 그는 어젯밤 일어난 일에 대해 상당히 화가 났지만, 김서진이 자리에 없었기에 어제보다는 마음이 나아졌다.이 여자는 정말 다루기 쉽지 않다! 과연 여자가 크면 집에서 내쫓아야 한다.모든 사람이 다 온 것 같았다. 차성재와 차성호만 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장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어떤 사람은 화를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형님, 이미 30분이나 지났어요. 차성호와 차성재는 아직 오지도 않았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곧 올 것입니다.” 차국동은 담담하게 말했다.그가 이렇게 말한 이상 다른 사람들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그 누구도 그가 말한 ‘곧’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한소은은 급해 하지도 않았고 아랫사람으로서 가장 뒷자리에 앉아 천천히 차를 마셨다.오늘은 ‘누명’에 관한 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3일 동안 그들은 증거를 조작할 수도 있고 한소은도 충분히 반격할 시간이 있었다.30분 정도 지나자 해는 이미 떴고, 로비 또한 밝아졌다. 어느 자리는 눈이 좀 부셨고 덥게 느껴지는 곳도 있었다. 그때 차성호가 나타났다.한소은과 반대로 흰옷을 입고 가슴에는 흰 꽃이 꽂혀 있었다. 눈에는 기쁨이 드러나 있었다.“삼촌, 제가 좀 늦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그가 한소은의 곁을 지날 때 그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한소은은 고개를 들어 웃음으로 응대했다.그는 비록 정면으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미소를 보고 약간 멍해져서 입가에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졌다.잠깐 망설
한소은은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외부인’이 김서진이라는 것을.“오늘 말씀드리는 것은 차 씨 가문의 큰일에 관한 것입니다.” 차국동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차 씨 가문의 백년기업은 여기 소성에서 뿌리가 깊고 줄곧 근면한 자세로 키워왔으며 가문 내규 또한 엄격했습니다. 제 형이 갑자기 떠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가슴이 아프지만 더 가슴 아픈 사실은 사고가 아니라 의도적인 살인이라는 것입니다!”여기까지 말하고 난 뒤 그의 시선이 한소은에게로 향했다. 거의 그녀를 범인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그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얘기를 하자 한소은도 피하지 않고 아예 일어섰다. “할아버지 말씀은 틀렸어요.”“그래?” 차국동이 차갑게 웃었다. “내 말이 어디가 틀렸다는 거지?”“두 마디가 틀렸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들이 다 모였다고 했는데 다 모이지 않았습니다. 차성재는 외할아버지의 친손자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가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시작할 수 있나요?”그녀의 비난에 차국동은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차성재가 장손은 맞지만 결국은 손자일 뿐이다. 차성호는 네 외삼촌으로 네 할아버지의 장남인데 차성재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그게 바로 두 번째로 틀린 문장입니다.” 한소은은 이어서 말했다. “오늘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우리 차 씨 가문의 사람들이라고 하셨는데 외부인은 없으나 한 사람은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닙니다.”“응?”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차 씨 가문이 아닌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다.“이건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가문에 있으면서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누가 차 씨 가문의 사람이 아닌지 말해보렴.” 차국동이 차갑게 웃었다.한소은은 얕은 웃음을 보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 손을 내밀고 검지로 차성호를 가리켰다. “바로 저 사람이에요! 차성호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