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네가 이 문건들을 만지고 있던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윤설아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설마 똑같은 걸 하나 만들어 내려고 하는 건 아니지?”그녀의 이 말은 다소 비아냥거리는 느낌이었고 어쨌든 노형원은 향수 업계에서 몇 년을 힘들게 일했어도 향을 만들 줄 몰랐고 그가 정말 그런 능력이 있다면 한소은을 속일 필요까지 없었을 것이다.“당연히 아니지.”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노형원은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근데 내가 못한다고 해서 남도 못하는 건 아니잖아? 이런 향초는 그냥 그런 작은 물건이 아냐, 안에 약간의 물건만 더한다면……”손가락으로 정말 작다는 표시를 했다.“딱 이렇게 적은 양만 있으면 사람을 사지로 내몰 수 있어.”그의 말을 듣고 그의 눈빛과 모습을 보니 윤설아는 약간 오싹해져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팔을 비볐다.“알겠으니까 말 빙빙 돌리지 마,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사람을 구해 한소은의 향초를 모방을 했고 그 안에다가 손을 써 뒀다는 거야? 근데 그 물건이 똑같을지는 어떻게 알아, 차성호가 이 물건이 필요할지는 또 어떻게 알고?”대충 무슨 뜻인지는 짐작이 갔지만 윤설아는 그가 무슨 근거로 계획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는지 궁금했다.“차성호가 이렇게 큰 바둑판을 만들어 놨으니 이제 곧 순조롭게 목적을 달성할 거야, 반드시 충분한 증거를 차 씨 집안사람들에게 보여줘서 완전히 승복시키겠지, 향초가 가장 직접적인 증거이지만 내가 알기로는 차 씨 집안에는 한소은을 제외하고는 조향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즉 어떻게 해야 향초 안에 자연스럽게 치명적인 독소를 첨가하고 튀어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는지는 차성호에게 어려운 문제지.”“그래서 그는 반드시 너의 ‘호의’를 받아들일 것이고 우리가 그를 도우면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한테 빚을 하나 지게 되는 거야.”윤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래도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고 모든 것이 그들의 통제하에 있는 것 같았다. 뜻밖에도 차 씨 집안에 이런
오랫동안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몸이 허약하다고 생각했었고, 그녀가 무술에 뛰어난 사람인 줄은 몰랐다, 당시 그가 데리고 간 것은 평범한 경호원에 불과했고, 무학의 기초가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그녀는 일찍이 차 씨 집안을 떠났었고, 몇 년 동안이나 돌아가지 않았었다. 그와 함께 있는 몇 년 동안 훈련하는 걸 본 적이 없어 발과 다리를 쓰는데에 서툴게 분명했고 서툴지 않다 쳐도 여자 혼자서 뭘 할수 있을까. 오늘날의 한소은은 뒤에 김서진이 있고 환아라는 거대한 나무가 있지만, 만약 그가 대윤을 장악하고 대윤의 풍부한 재력으로 환아와 맞설 수 있다면, 그때 가서 그는 한소은을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리고 통곡하며 후회하게 하는 것으로 설욕하려 했다.그는 넋을 잃고 자신의 생각에 잠겼고 윤설아도 자신의 생각에 빠졌다.노형원이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차 씨 집안이 비록 고대 무술 명가라고 하지만 그들 가문이 가장 번영했을 때는, 지금으로부터도 백여 년이 지났다.소문이란 여태껏 전해져 내려오는 말로 결국 진실이 되는 것이었다.그중 신빙성이 있는 게 얼마나 되는지 지금의 차 씨 집안이 얼마나 위엄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그녀는 지금 겉으로는 여전히 윤 씨 집안의 품격 있는 아가씨처럼 보이지만, 속으로 그녀는 근본적으로 내우외환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밖으로는 김서진이라는 그 복병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됐는데, 집에는 또….창문 쪽을 보니 블라인드 커튼이 쳐져 있어 밖은 보이지 않았지만, 문이 막혀 있다고 해도 그녀는 회사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 알고 있었다.윤 씨 집안의 가훈이 여태껏 아들을 중시하고 여자를 경시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큰아버지 윤백건의 아들이 이렇게 빈둥빈둥 놀고 있어도 여전히 큰 기대를 걸고 있고, 그녀의 아버지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사생아를 버젓이 집으로 데려오거나 심지어 회사에 직위도 줬다.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잘해도, 영원히 윤 씨의 나그
그는 들어오자마자 바로 방 안의 소파에 앉더니 두 손을 호주머니에 꽂아 넣고는, 한쪽 다리를 리드미컬하게 떨며, 윤설아를 향해 곁눈질했고, 노형원은 봐도 못 봤다는 듯 말했다."누나, 할 말이 있어.""무슨 일이야?"윤설아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고 보기에 더없이 부드러워 보였다.그러나 윤소겸은 말을 계속하지 않고 시선을 흘기면서 한쪽에 있는 노형원을 바라보며 참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노형원은 탁자에 기대어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그가 쳐다보니 무고한 표정으로 멍하니 돌아보았다.두 사람은 이렇게 잠시 눈을 마주쳤고, 결국 젊은 쪽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우리 윗사람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보이지 않아? 아직도 안 나가고 뭐해!”“......”"누구? 나?"노형원은 그를 한번 가리키고 또 자신의 코를 한 번 가리키 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여긴 내 사무실인데.""네 거 내 거가 어딨어, 이 빌딩 전체가 다 우리 집 거야, 여기서 뭘 궁시렁거리고 있어, 더 이상 눈치 없이 굴면 당장 해고시킬 거야!"그의 얼굴은 거만했고, 말투는 마치 지금 자신이 윤 씨 산업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듯했다."저……윤 부사장님…."노형원은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려 윤설아를 바라보았는데 마치 억울한 부하가 억울한게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윤설아는 여전히 부드러운 웃음을 잃지 않았고 윤소겸의 이런 말에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는 오히려 노형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자, 방금 일이 조금 있어서 일보러 나가야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먼저 가세요. 당신 사무실 좀 빌려서 동생과 몇 마디 할게요."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노형원은 입을 삐죽거리며 달갑지 않아 했지만 당해낼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럼, 윤 부사장님, 저 먼저 갈게요, 일 보세요."말을 마치자 그는 그제야 일어나 옷을 여몄고, 또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 윤소겸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야 밖으로 나갔다.윤소겸
"왜, 안 돼?"그녀의 이 소리를 듣고 윤소겸은 기분이 언짢았다."나도 얼마 전에 회사에 들어온 거 알고, 또 아버지가 밖에서 낳은 사생아인 것도 알아. 동일시한다느니, 다 한 가족이라느니, 다 거짓말이잖아, 또 경험 한 번 해보라느니, 쳇…."그가 찻상 위에 놓인 휴지 한 봉지를 집어 들고는 중얼거리면서 손을 흔들자 휴지가 다 흩어졌다."다 말로만 하고, 다 위선이잖아! 에휴…."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지만, 몇 마디 말을 하고 나면 윤설아의 두 눈을 봤고, 말고리는 길게 끌었다."겸아, 그런 말 하지 마!"윤설아는 일어나서 그의 앞으로 다가가 한 손을 가볍게 그의 어깨에 얹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안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근데 어떻게 이 새로운 프로젝트 부서에 올 생각을 했어?"그녀가 거절하지 않자 윤소겸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누나 내가 맡길 원하는 거야?”"아니, 네가 먼저 이유를 대야지." 그녀가 조용히 대답했다."담당자, 특히 새로운 프로젝트 부서 같은 것은 한두 마디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일단은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봐야 해."윤소겸은 긍정적인 답변을 받지 못해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어 그저 성을 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새로운 프로젝트 부서는 도전적이어야 돼! 회사의 그 오래된 프로젝트들은 이미 다 완성됐고, 나도 잘 몰라, 내가 아빠한테 성과를 좀 보여 주고 싶다면, 새로운 프로젝트야말로 가장 좋은 선택지잖아!""그리고 새로운 아이템은 향수 화장품이라 듣기만 해도 재밌고 훨씬 쉬워 보이니까 나 아마 잘 할 수 있을 거야!""쉽다고?”. 윤설아가 웃기 시작했다."간단하다고 생각해?""여자가 쓰는 물건이잖아. 내가 다 알아봤는데, 사람을 불러서 신제품을 만들고, 스타 모델 몇 명을 데려와서 광고하고, 포장하고, 홍보하면 무조건 대박이야!"그는 말을 할수록 신이 나서 마치 자신이 이 프로젝트를 맡은 것처럼 말을 계속했다."에이, 누나
윤소겸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노형원은 그제야 여유롭게 다시 천천히 걸어 들어와 윤설아를 흘겨보고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간 거야? 별로 만족한 것 같지 않은데.” “쟤가 만족하면, 네가 만족하지 못해, 어렵지."그녀는 공교롭다는 듯 탄식하면서도 근심 없는 얼굴로 흐뭇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됐어, 연기하지 마. 저 잡놈, 네 앞에서는 아직 너무 어리네!"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노형원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진지한 얘기나 하자, 나 곧 출장 가, 여긴 네가 잘 감시해야 돼.”"소성으로?" 윤설아가 눈썹을 치켜 세우며 물었다."물론이지, 이 연극에서 어떻게 우리를 빼놓을 수 있겠어."얼굴의 웃음을 거두고, 향초들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런 걸로 정말 자신 있는 거야?""내가 하는일에 대해 걱정하지마!" 노형원이 가슴을 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일은 먼저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아, 나랑 한소은의 원한을 근거로 차성호도 나를 무조건 믿고 협력할 거고 그가 자리에 오르고 나면 또 우리의 손에 약점이 잡히게 될 거야, 그때 가서 차 씨 집안의 세력의 도움을 빌리면, 원한는 모든걸 우리가 장악할 수 있어.”그가 말한 것은 바로 윤설아도 생각한 것이었고 그녀는 흔쾌히 대답했다."그럼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게!"——이미 하루가 지났지만 차 씨 집안은 여느 때와 같이 너무나도 조용해서 비바람이 몰아칠 것 같은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첫날에 한소은은 차성호가 와서 트집을 잡을까 봐 경계했는데, 하루가 지나서야 그녀는 하루 종일 그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둘째 외할아버지 차국동은 이곳에 살았는데, 나이만 드셨을 뿐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아 서진 씨, 소성에 많이 안 와봤죠?"한소은이 창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매고 있던 김서진이 대답했다."네! 비록 소성에도 환아 지부가 있지만, 이쪽의 실적은 줄곧 안정적이고 관리도 잘 되고 있어요. 저도
그녀가 여유롭게 말했다.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건 상관없어요. 근데 당신한테 명령을 내린 그 사람이 직접 와서 말하라고 하세요!"말을 하고는 돌아서서 차에 타려고 했다."아가씨, 아가씨......" 그 사람이 다가가서 막으려 하자, 한소은이 갑자기 몸을 돌려 호통을 쳤다. "비켜! 당신들은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그녀의 기세에 눌렸을 수도 있고, 혹은 감히 그녀를 막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결국 길을 비켜줬다.차에 타자마자 서한은 즉시 시동을 걸고 앞으로 나아갔고 전방을 집중적으로 바라보았다.김서진은 성이나 뾰로통한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손을 들어 사탕을 입에 넣었다.“말 다 했으니 날 데리고 가서 구경시켜줘요, 화내는 건 별로 가치가 없어요.”“사람을 너무 업신여기잖아요.” 그녀가 화를 내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요!”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차의 백미러를 한번 보았는데 방금 그녀를 막은 사람은 이미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분명히 소식을 전하러 갔을거다.차성호의 야심을 그녀는 잘 알 수 있었지만, 둘째 외할아버지가 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몰랐다, 차성호와 같은 배에 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각자 사심이 있어서 잠시 동맹을 맺은 것인지.차는 더 이상 막힘없이 순조롭게 차 씨 집안의 집을 떠났고, 그 장원을 떠나 나왔을 때 그녀는 마음의 압박감이 많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차 씨 집안의 2층 객실.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둘째 어르신, 큰 아가씨를 막을 수 없었어요, 아가씨는….""알았어, 물러나라!"목소리에는 참을 수 없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행히 화를 내지 않자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얼른 명령을 듣고 물러났다.하지만 방 안의 사람들은 기분이 그리 좋지 못했다."둘째 삼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저한테서 뺏어 가시려는 거예요?" 몸 뒤에 있는 긴 테이블에 기대고 있는 차성호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노인은 넓은 등나무 의자에 앉아 아침 햇
“네가 오해한 거야. 널 배신해서 나한테 좋을 일이 뭐가 있어? 예전에 이미 얘기가 다 됐었잖아.”차성호의 매서운 추궁에도 차국동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조급한 네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기다린 세월이 있는데 며칠을 더 못 기다려? 내가 이 나이에 슬하에 자식도 없는데 어차피 내가 가진 건 전부 네가 물려받을 거잖아.”차성호는 음침한 눈빛으로 차국동을 노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걸 아시면 됐어요. 둘째 삼촌, 제가 감히 충고 한 말씀 드리자면 이상한 생각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비록 영감한테 내쳐져서 폐인이 된 신세지만 제가 데려온 사람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차씨 가문은 조용한 걸 좋아하잖아요? 정말 의견이 맞지 않아 서로 대립하게 된다면 저도 가족을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고요.”차국동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래도 가족인데 왜 싸울 생각부터 해.”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했다.“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곧 다가오니 사람들을 설득할 만한 증거를 내놓아야 하지 않겠니. 어르신들이야 집안일에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만 어쨌든 형식적인 절차라도 필요하잖아.”“그건 둘째 삼촌께서 대답한 일이니까 둘째 삼촌이 해결하셔야죠.”차성호는 차국동을 도울 마음이 전혀 없다는 듯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한 가문의 수장 노릇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요?”말을 마친 그는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휴….”차국동은 뭔가 더 할 얘기가 있는 듯했지만 차성호는 이미 방을 나선 뒤였다.그는 씁쓸한 눈빛으로 텅 빈 문가를 바라보았다.차국동의 저택을 나온 차성호는 바로 차를 운전해 어딘가로 향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물론 차국동 몰래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밖에서 방랑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히든카드를 무조건 쥐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차국동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도 않았다.차는 황폐한 길을 질주했다. 이곳은
노형원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상대가 텃세를 부릴 거라 이미 예상했기 때문이었다.그를 힐끗 바라본 차성호는 노형원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담배 연기를 정통으로 맞은 노형원은 기침을 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귓가에 오만하고 여유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이었어?”연신 기침을 한 노형원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네, 접니다! 차 선생님은 제가 온 게 별로 마음에 안 드시나 보죠? 그렇다면 제가 가진 것도 흥미가 없겠네요. 실례 많았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노형원이 뒤돌아서려는 순간.“거기 서!”차성호의 불쾌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차성호는 상대가 일부러 밀당을 한다고 생각해서 불쾌했지만 노형원이 미련 없이 돌아서서 차에 시동을 걸자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그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노형원의 차를 가로막고 소리쳤다.“멈춰!”끼익!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춰서자 차를 가로막고 있던 차성호가 살짝 비틀거렸다.차성호는 잔뜩 똥 씹은 표정으로 운전석의 노형원을 쏘아보았다.노형원이 냉소를 머금고 물었다.“다른 볼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나랑 거래를 하러 왔으면 허세 그만 부리고 내려서 이야기하지!”차성호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그러자 노형원이 대수롭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먼저 성의를 보였는데 차 선생님께서 제 성의를 거절하셨잖아요. 서로 볼 일도 없는 것 같아서 가보려고 했습니다만. 지금 어떻게든 확실한 증거를 잡아서 가문의 대권을 차지하려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차 선생님이잖습니까?”차성호는 노형원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차갑게 물었다.“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협박까지는 아니고 그냥 충고 한 말씀 드리자면 어차피 거래를 하러 나온 이상 우리는 평등한 관계라는 겁니다. 하지만 차 선생님은 오히려 저한테 허세를 부린다고 모함하셨죠. 저는 차 선생님한테 그에 맞는 예의를 취했으니 차 선생님께서도 저한테 최소한의 존중은 보여야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