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괜찮아. 언니 말대로 해. 그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잖아. 이참에 푹 쉬어. 앞으로는 쉬고 싶어도 못 쉴 테니까.”한소은이 농담조로 말했다.고집을 굽히지 않는 한소은의 모습에 오이연도 포기했는지 한층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그래도 혹시 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 알지?”“그래. 잘 갔다 와.”전화를 끊은 한소은은 그녀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김서진과 시선이 마주쳤다.“왜 그래요?”“오이연 씨가 이 사건에 휘말리는 게 싫어서 잠깐 떠나라고 한 거예요?”단박에 그녀의 속셈을 눈치챈 김서진이었다. 한소은은 흠칫하다 싱긋 미소 지었다.“뭐...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물을 한 모금 마시고 한소은은 말을 이어갔다.“이연이는 내 조수로 일했던 아이예요. 제가 이룬 모든 것들 이연이와 함께 이뤄낸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노형원 그 인간이 나한테 모든 걸 뒤집어 씌우려고 한 이상, 증거를 잡기 위해 이연이한테도 자료를 요구할 거예요. 만약 계속 서원 웨이브에 묶여있다면 이연이 입장이 더 난처해지겠죠. 그러니까... 일단 잠깐 피해 있는 게 이연이한테도 저한테도 더 좋은 선택이에요.”말을 마친 한소은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역시 비싼 요리라 그런지 정갈한 플레이팅부터 맛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이렇게 마음 편히 식사를 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워낙 배고팠던지라 김서진 앞임에도 이미지고 뭐고 허겁지겁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한편 김서진은 한소은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른 느낌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계획은 이미 다 세웠나 봐요?”방금 전까지 불안함이 조금 남아있었지만 방금 전 그녀의 설명을 들어보니 일시적인 충동이 아닌 아주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온 복수였음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놓였다.한참 수저를 움직이던 한소은이 김서진을 바라보았다.“아, 서진 씨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뭔데요?”김서진은 벌써 다 먹었는지 젓가락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다, 다 먹었어요.”한소은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그럼 일어나죠.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일찍 쉬어요. 일 생각은 내일 다시 하고요.”김서진은 한소은이 뭘 묻고 싶은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소은 씨가 말한 건 서한이한테 말해 둘게요. 걱정하지 말아요.”걱정하지 말라는 김서진의 말에 한소은의 마음이 편안해졌다.난처한 얘기를 먼저 꺼내기 전에 당신의 생각을 먼저 눈치채고 대신 전부 해결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느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하는 한소은을 향해 김서진이 물었다.“지금 살고 있는 그 집 월세죠?”“네.”“방 빼요. 그리고 나랑 같이 살아요.”김서진이 한소은의 손을 꼬옥 잡았다.갑작스러운 제안에 한소은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쿵쾅대는 심장소리가 김서진에게 들리진 않을까 불안해졌다.망설이는 그녀의 모습에 김서진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사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날이 너무 빨리 온 건 아닐까 싶어 한소은은 당황스러웠다.하지만... 법적으로 혼인신고도 마쳤겠다... 법적인 부부가 같은 집에서 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않는가?결단을 내린 한소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오늘 바로 이사할까요?”놀라운 김서진의 추진력에 한소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잠시 후, 김서진의 차량은 아파트 단지 아래에 멈춰 섰다. 한소은은 김서진더러 차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집으로 올라가 대충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어차피 챙길 건 옷가지들과 중요한 서류들뿐, 다른 건 전부 버리고 다시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방을 빼겠다고 집주인과 통화까지 마친 한소은은 방을 쭉 한 번 돌아보았다.노형원과 함께 창업하고 함께 노력하며 오늘날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 아니, 착각했었다.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이 집에서 그녀는 항상 혼자였는데 말이다.현관문을 나서려던 한소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작은 방을 바라보았다.“안녕, 구질ㅈ구질한 내 과거야.”김서진은 한소은이
“난 조용한 게 좋아서요. 일하는 아주머니는 이틀마다 오세요.”김서진이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난 씻고 올 테니까 일단 쉬어요. 빈 옷장 있으니까 짐은 거기 풀고요.”말을 마친 김서진은 곧 방으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자 한소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낯선 공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1층, 2층 옥상 테라스까지 갖춘 빌라, 김서진의 성격답게 인테리어는 모던하고 깔끔한 스타일이었다.캐리어를 끌고 옷방으로 들어간 한소은은 그녀의 안방보다 더 큰 옷방에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옷장 한편에는 김서진의 옷들이 종류, 컬러 별대로 깔끔하게 걸려있었다. 한소은은 얼마 안 되는 옷가지들을 빈 옷장에 걸어둔 뒤 챙겨온 중요한 서류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졸업장, 주민등록증... 뭐 빠트린 건 없는지 확인하던 한소은의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혼인신고 서류는 김서진이 가지고 있다고 했지... 어디에 뒀는지 나중에 물어봐야겠다...커다란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때, 한소은의 휴대폰이 울렸다.노형원이었다. 사귈 때는 문자 한 번 없던 사람이 최근 며칠 동안은 틈만 나면 전화를 걸어온다. 한소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여보세요?”“한소은, 지금 어디야?”불쾌함이 담긴 노형원의 목소리에 한소은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아직도 내가 네 말 한 마디면 달려가는 바보 같은 한소은인 줄 아는 거야?“아무리 대표님이시라지만 직원 사생활까지 물으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한소은이 비꼬았다.“한소은, 너 말투가 왜 그래?”“내 말투가 뭐가 어때서? 시비 걸려고 전화한 거면 끊어. 나 바쁘니까!”이때 마침 샤워를 마친 김서진이 안방에서 나왔다.샤워가운으로 하체만을 가린 모습,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복부에 완벽하게 자리 잡은 식스팩을 적셨다.통화 중인 한소은을 힐끗 바라보던 김서진은 조용히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조각상처럼 완벽한 몸매를 가진 남자가 점점 다가오니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재잘대는 노형원의 목소리가
꿀꺽.구릿빛 피부와 탄탄한 근육... 한소은은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이성으로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눌렀지만 결국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한소은. 한소은. 듣고 있어?”한참을 떠들어대던 노형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한소은의 모습에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하지만 점점 다가오는 잘생긴 김서진의 얼굴을 바라보는 한소은은 노형원의 부름 따위에 대답할 여력 따위 남아있지 않았다.뭐야? 지금 키스라도 하려는 건가?한소은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던 김서진은 가까이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의 귓가에 뽀뽀를 해준 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옷방으로 들어갔다.쿠당탕!순간 손에 힘이 풀린 한소은은 휴대폰을 놓치고 말았다.카펫을 깔았으니 망정이지 그냥 바닥이었다면 액정이 박살 나고 말았을 것이다.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노형원이 짜증스레 소리쳤다.“한소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아?”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주운 한소은은 액정이 깨지진 않았는지 자세히 살펴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말 돌리지 말고 그냥 해.”“너...!”화를 내려던 노형원은 아직 입을 꾹 다물었다. 표절 사건을 해결하기 전까진 어떻게든 한소은의 기분을 달래줘야 했다.“기자회견 시간 오늘 저녁으로 잡았어. 그러니까 회사로 와. 얼굴을 봐야 말을 맞추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최대한 빨리 수습해야지. 정말 회사 이미지가 바닥까지 떨어지길 바라?”끝까지 이기적인 자식.“그럼 내 이미지는?”“...”한참을 망설이던 노형원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아, 이번 사건 때문에 회사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알아? 시원 웨이브는 우리 두 사람이 청춘을 바쳐 일궈낸 회사잖아. 정말 이대로 무너지길 바라? 이번 고비만 넘기면... 회사도 자리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럼... 그때 우리 결혼하자, 응?”결혼... 또 이 핑계다.창업에 성공하면 결혼하자,
차가운 성격,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남자.김서진을 알기 전에 한소은이 생각했던 그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자상한 남자였다니.김서진의 말대로 욕조에 몸을 담근 한소은은 하루 동안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샤워를 마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한소은은 몸과 마음 모두 한층 가벼워진 기분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이럴 때일수록 더 잘 먹고 잘 쉬어야지.김서진의 품에 안긴 한소은은 그의 스킨 냄새를 느끼며 편안히 두 눈을 감았다. 별다른 스킨십 없이 그냥 안고만 있는데도 왠지 모를 안정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한 시간 정도 잤을까? 휴대폰 벨 소리에 한소은은 부스스 눈을 떴다.부재중 전화 12통.정말 웬만큼 급한가 보네. 은근 단순하단 말이야.한소은은 천천히 일어나 화이트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심플한 드레스였지만 청초한 그녀의 이미지와 여리여리한 그녀의 몸매와 찰떡이었다.“소은 씨.”그가 현관을 나서려는 한소은을 불러 세웠다.“진짜 보내기 싫다.”한소은을 품에 안은 김서진의 입술이 그녀의 목을 스쳤다.“어차피 곧 돌아올 텐데요 뭐. 기다리고 있어요.”그의 품에서 벗어나려던 순간, 김서진은 그녀를 확 끌어안더니 기습 키스를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에야 그녀를 놓아준 김서진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서 비서가 에스코트해 줄 거예요. 잘하고 와요.”“네.”한소은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자 회견장, 진작 현장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노형원이 부랴부랴 달려오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뭐야? 전화는 왜 안 받아? 또 신생 쪽 사람 만난 거야?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그렇게 간단한...”차가운 한소은의 눈동자에 흠칫 놀란 노형원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뭐지? 이 눈빛은? 소은이가 날 이렇게 봤던 적이 있었나?...회의장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에도 노형원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내가 한 말들 다 이해하지? 오늘 이 고비만 넘기면 시원
한소은은 마음을 다잡고 우아하게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착석했다.이미 회견장에 도착해 있었던 강시유는 고개를 끄덕이는 노형원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기자회견이 시작되고 별다른 인사말 없이 노형원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어젯밤 향수 신제품 대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자리해 주신 기자분들 모두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대중들이 저희 시원 웨이브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아 오늘 특별히 기자분들과 만남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출품작인 ‘첫사랑’은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지 못한 표절 문제로 논란에 휩싸이고 말았죠. 해당 사태의 담당자들 모두 오늘 기자 회견장에 도착했으니 궁금하신 부분 전부 여쭤보시기 바랍니다.”말을 마친 노형원은 마이크를 강시유에게 건넸다.블랙톤의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강시유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한소은과 묘한 대비를 이루는 모습이었다.강시유는 담담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시원 웨이브의 수석 조향사 강시유라고 합니다.”수석 조향사? 누구 마음대로? 한소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조향사로 일하기 시작한 뒤로 지금까지 제가 느낀 건 재능보다 노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훌륭한 향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수없이 많은 실패를 묵묵히 견뎌내야 하죠. 한순간의 욕심으로 얻어낸 성과는 결국 부메랑처럼 화가 되어 돌아온다는 걸 한소은 씨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말을 마친 강시유는 바로 마이크를 한소은에게 건넸다.마이크를 든 한소은은 잠깐 망설였다. 수없이 많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시유의 말에 따르면 피해자는 강시유고 제품을 베낀 쪽은 한소은인 것 같은데... 그녀가 무슨 변명을 할지 궁금하다는 눈빛이었다.한소은은 담담한 눈빛으로 기자 회견장을 채운 기자들의 얼굴을 일일이 훑어보았다.괜히 뜸을 들이는 한소은의 모습에 노형원이 눈치를 추려던 그때,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네. 강시유 씨의 말에는 저도
노형원은 마스크를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한 뒤 기선을 제압했다. "물론 도둑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한소은 씨는 저희 회사 사람이며 오랫동안 강시유 씨의 조수로 일했고, 어느 정도 조향에 참여했습니다. 이번 일은 도둑질이나 표절처럼 듣기 싫은 말로 정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분간은 이겨내기 힘들겠지만 저희는 한소은 씨에게 기회를 주고 싶고, 앞으로도 여러분들에게 시원 웨이브의 더 많고 좋은 작품들로 찾아뵙고 싶습니다.”노형원은 최근 몇 년 동안 소셜 미디어와 매체에서 많은 경험을 했기에 대처능력이 좋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비굴하거나 거만하지도 않고, 매우 고상하고 마치 양심적인 좋은 회사같이 말을 하며 자신의 회사를 배신한 직원을 옹호하고 용서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기자들은 모두 감동했고 동시에 한소은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지금의 사태는 매우 명백해졌다, 한소은은 조수로 일하는 것이 달갑지 않아 회사의 성과를 훔쳐서 다른 회사에 되팔고 의탁하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일을 망친 상황인 것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는데도 시원 웨이브는 이런 사람을 계속 곁에 두려 하다니. 하지만 여전히 허점이 있었고, 그 허점을 파고들며 질문했다."하지만 한소은 씨는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아 시원 웨이브의 직원이 아닌 걸로 아는데요.”이 문제는 노형원이 전부터 생각해둔 것이었고, 전혀 동요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네, 이 부분은 저희 회사의 잘못이라고 인정합니다.”"물론, 저희가 일부러 계약을 맺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다들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저와 한소은 씨는 대학 동창이고, 모두 친구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급여 부분을 정확하게 생각하지 못했고 급여는 제가 직접 이체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제 개인적인 잘못임을 인정하며,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계약서를 다시 준비했으니 이번 오해를 통해서 저희 시원 웨이브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현장에는 박수가 터져 나왔고, 노형원은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흡족한 미소를
기자들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원래는 노원형의 말을 들어도 한소은은 그저온화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사건이 이렇게 끝이 나며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런 반전이 생기다니. 한소은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형원의 얼굴을 때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모든 카메라의 초점이 노형원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맞춰져 있었고, 한소은의 평온한 얼굴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한소은 씨, 그 말은 당신이 강시유 씨 작품을 표절한 게 아니라, 강시유씨가 당신 작품을 표절했다는 건가요?”한 기자가 바로 그녀에게 물었고, 한소은은 웃으며 대답했다."기자님의 용어를 바로잡아야겠네요. 표절이라는 단어는 과도한 모방 행위라고 할수 있습니다. 표절은 나쁘지만 적어도 재가공의 과정은 있죠. 표절이라는 단어 외에도 그대로 가져오다 라는 행위가 있어요, 그대로 가져와서 자신의 것이라고 한 거죠.”"그렇다면 그건 훔치는 행위가 아닙니까!”기자가 말했다. 한소은은 웃기만 할 뿐, 반응하지 않았다."한소은, 이게 무슨 짓이야?!”고개를 돌리자 노형원이 팔로 그의 얼굴을 반쯤 가린 채 한소은에게 말을 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지고 이를 갈며 그녀를 물어줄 수도 없다는 생각에 화가 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작을 일으키거나 소리를 내서는 안 됐다.그러나 한소은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침착하게 앞에 있는 수많은 매체들을 바라보며 마치 전쟁터의 장군처럼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한소은 씨, 당신이 말한 것처럼 당신은 시원 웨이브에서 근로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습니다. 즉 시원 웨이브 직원들도 모두 확실하지 않다는 건데 무슨 근거로 시원 웨이브의 작품이 모두 당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힐 수 있죠? 증거를 가지고 계시나요?”기자들은 만만하지 않았고, 항상 핵심적인 문제를 찾을 수 있었다.그들은 사실 누구의 편도 아니었으며,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닌 많은 자료들을 발굴해내 굵직한 기사를 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기자의 질문에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