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조용한 게 좋아서요. 일하는 아주머니는 이틀마다 오세요.”김서진이 넥타이를 풀며 말했다.“난 씻고 올 테니까 일단 쉬어요. 빈 옷장 있으니까 짐은 거기 풀고요.”말을 마친 김서진은 곧 방으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자 한소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낯선 공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1층, 2층 옥상 테라스까지 갖춘 빌라, 김서진의 성격답게 인테리어는 모던하고 깔끔한 스타일이었다.캐리어를 끌고 옷방으로 들어간 한소은은 그녀의 안방보다 더 큰 옷방에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옷장 한편에는 김서진의 옷들이 종류, 컬러 별대로 깔끔하게 걸려있었다. 한소은은 얼마 안 되는 옷가지들을 빈 옷장에 걸어둔 뒤 챙겨온 중요한 서류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졸업장, 주민등록증... 뭐 빠트린 건 없는지 확인하던 한소은의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혼인신고 서류는 김서진이 가지고 있다고 했지... 어디에 뒀는지 나중에 물어봐야겠다...커다란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때, 한소은의 휴대폰이 울렸다.노형원이었다. 사귈 때는 문자 한 번 없던 사람이 최근 며칠 동안은 틈만 나면 전화를 걸어온다. 한소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여보세요?”“한소은, 지금 어디야?”불쾌함이 담긴 노형원의 목소리에 한소은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아직도 내가 네 말 한 마디면 달려가는 바보 같은 한소은인 줄 아는 거야?“아무리 대표님이시라지만 직원 사생활까지 물으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한소은이 비꼬았다.“한소은, 너 말투가 왜 그래?”“내 말투가 뭐가 어때서? 시비 걸려고 전화한 거면 끊어. 나 바쁘니까!”이때 마침 샤워를 마친 김서진이 안방에서 나왔다.샤워가운으로 하체만을 가린 모습,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복부에 완벽하게 자리 잡은 식스팩을 적셨다.통화 중인 한소은을 힐끗 바라보던 김서진은 조용히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조각상처럼 완벽한 몸매를 가진 남자가 점점 다가오니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재잘대는 노형원의 목소리가
꿀꺽.구릿빛 피부와 탄탄한 근육... 한소은은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이성으로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눌렀지만 결국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한소은. 한소은. 듣고 있어?”한참을 떠들어대던 노형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한소은의 모습에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하지만 점점 다가오는 잘생긴 김서진의 얼굴을 바라보는 한소은은 노형원의 부름 따위에 대답할 여력 따위 남아있지 않았다.뭐야? 지금 키스라도 하려는 건가?한소은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던 김서진은 가까이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의 귓가에 뽀뽀를 해준 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옷방으로 들어갔다.쿠당탕!순간 손에 힘이 풀린 한소은은 휴대폰을 놓치고 말았다.카펫을 깔았으니 망정이지 그냥 바닥이었다면 액정이 박살 나고 말았을 것이다.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노형원이 짜증스레 소리쳤다.“한소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아?”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주운 한소은은 액정이 깨지진 않았는지 자세히 살펴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말 돌리지 말고 그냥 해.”“너...!”화를 내려던 노형원은 아직 입을 꾹 다물었다. 표절 사건을 해결하기 전까진 어떻게든 한소은의 기분을 달래줘야 했다.“기자회견 시간 오늘 저녁으로 잡았어. 그러니까 회사로 와. 얼굴을 봐야 말을 맞추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최대한 빨리 수습해야지. 정말 회사 이미지가 바닥까지 떨어지길 바라?”끝까지 이기적인 자식.“그럼 내 이미지는?”“...”한참을 망설이던 노형원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아, 이번 사건 때문에 회사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알아? 시원 웨이브는 우리 두 사람이 청춘을 바쳐 일궈낸 회사잖아. 정말 이대로 무너지길 바라? 이번 고비만 넘기면... 회사도 자리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럼... 그때 우리 결혼하자, 응?”결혼... 또 이 핑계다.창업에 성공하면 결혼하자,
차가운 성격,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남자.김서진을 알기 전에 한소은이 생각했던 그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자상한 남자였다니.김서진의 말대로 욕조에 몸을 담근 한소은은 하루 동안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샤워를 마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한소은은 몸과 마음 모두 한층 가벼워진 기분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이럴 때일수록 더 잘 먹고 잘 쉬어야지.김서진의 품에 안긴 한소은은 그의 스킨 냄새를 느끼며 편안히 두 눈을 감았다. 별다른 스킨십 없이 그냥 안고만 있는데도 왠지 모를 안정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한 시간 정도 잤을까? 휴대폰 벨 소리에 한소은은 부스스 눈을 떴다.부재중 전화 12통.정말 웬만큼 급한가 보네. 은근 단순하단 말이야.한소은은 천천히 일어나 화이트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심플한 드레스였지만 청초한 그녀의 이미지와 여리여리한 그녀의 몸매와 찰떡이었다.“소은 씨.”그가 현관을 나서려는 한소은을 불러 세웠다.“진짜 보내기 싫다.”한소은을 품에 안은 김서진의 입술이 그녀의 목을 스쳤다.“어차피 곧 돌아올 텐데요 뭐. 기다리고 있어요.”그의 품에서 벗어나려던 순간, 김서진은 그녀를 확 끌어안더니 기습 키스를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에야 그녀를 놓아준 김서진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서 비서가 에스코트해 줄 거예요. 잘하고 와요.”“네.”한소은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자 회견장, 진작 현장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노형원이 부랴부랴 달려오더니 미간을 찌푸렸다.“뭐야? 전화는 왜 안 받아? 또 신생 쪽 사람 만난 거야?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그렇게 간단한...”차가운 한소은의 눈동자에 흠칫 놀란 노형원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뭐지? 이 눈빛은? 소은이가 날 이렇게 봤던 적이 있었나?...회의장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에도 노형원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내가 한 말들 다 이해하지? 오늘 이 고비만 넘기면 시원
한소은은 마음을 다잡고 우아하게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착석했다.이미 회견장에 도착해 있었던 강시유는 고개를 끄덕이는 노형원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기자회견이 시작되고 별다른 인사말 없이 노형원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어젯밤 향수 신제품 대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자리해 주신 기자분들 모두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대중들이 저희 시원 웨이브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아 오늘 특별히 기자분들과 만남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출품작인 ‘첫사랑’은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지 못한 표절 문제로 논란에 휩싸이고 말았죠. 해당 사태의 담당자들 모두 오늘 기자 회견장에 도착했으니 궁금하신 부분 전부 여쭤보시기 바랍니다.”말을 마친 노형원은 마이크를 강시유에게 건넸다.블랙톤의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강시유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한소은과 묘한 대비를 이루는 모습이었다.강시유는 담담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시원 웨이브의 수석 조향사 강시유라고 합니다.”수석 조향사? 누구 마음대로? 한소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조향사로 일하기 시작한 뒤로 지금까지 제가 느낀 건 재능보다 노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훌륭한 향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수없이 많은 실패를 묵묵히 견뎌내야 하죠. 한순간의 욕심으로 얻어낸 성과는 결국 부메랑처럼 화가 되어 돌아온다는 걸 한소은 씨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말을 마친 강시유는 바로 마이크를 한소은에게 건넸다.마이크를 든 한소은은 잠깐 망설였다. 수없이 많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시유의 말에 따르면 피해자는 강시유고 제품을 베낀 쪽은 한소은인 것 같은데... 그녀가 무슨 변명을 할지 궁금하다는 눈빛이었다.한소은은 담담한 눈빛으로 기자 회견장을 채운 기자들의 얼굴을 일일이 훑어보았다.괜히 뜸을 들이는 한소은의 모습에 노형원이 눈치를 추려던 그때,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네. 강시유 씨의 말에는 저도
노형원은 마스크를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한 뒤 기선을 제압했다. "물론 도둑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한소은 씨는 저희 회사 사람이며 오랫동안 강시유 씨의 조수로 일했고, 어느 정도 조향에 참여했습니다. 이번 일은 도둑질이나 표절처럼 듣기 싫은 말로 정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분간은 이겨내기 힘들겠지만 저희는 한소은 씨에게 기회를 주고 싶고, 앞으로도 여러분들에게 시원 웨이브의 더 많고 좋은 작품들로 찾아뵙고 싶습니다.”노형원은 최근 몇 년 동안 소셜 미디어와 매체에서 많은 경험을 했기에 대처능력이 좋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비굴하거나 거만하지도 않고, 매우 고상하고 마치 양심적인 좋은 회사같이 말을 하며 자신의 회사를 배신한 직원을 옹호하고 용서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기자들은 모두 감동했고 동시에 한소은에게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지금의 사태는 매우 명백해졌다, 한소은은 조수로 일하는 것이 달갑지 않아 회사의 성과를 훔쳐서 다른 회사에 되팔고 의탁하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일을 망친 상황인 것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는데도 시원 웨이브는 이런 사람을 계속 곁에 두려 하다니. 하지만 여전히 허점이 있었고, 그 허점을 파고들며 질문했다."하지만 한소은 씨는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아 시원 웨이브의 직원이 아닌 걸로 아는데요.”이 문제는 노형원이 전부터 생각해둔 것이었고, 전혀 동요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네, 이 부분은 저희 회사의 잘못이라고 인정합니다.”"물론, 저희가 일부러 계약을 맺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다들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저와 한소은 씨는 대학 동창이고, 모두 친구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급여 부분을 정확하게 생각하지 못했고 급여는 제가 직접 이체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제 개인적인 잘못임을 인정하며,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계약서를 다시 준비했으니 이번 오해를 통해서 저희 시원 웨이브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현장에는 박수가 터져 나왔고, 노형원은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흡족한 미소를
기자들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원래는 노원형의 말을 들어도 한소은은 그저온화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사건이 이렇게 끝이 나며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런 반전이 생기다니. 한소은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형원의 얼굴을 때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모든 카메라의 초점이 노형원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맞춰져 있었고, 한소은의 평온한 얼굴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한소은 씨, 그 말은 당신이 강시유 씨 작품을 표절한 게 아니라, 강시유씨가 당신 작품을 표절했다는 건가요?”한 기자가 바로 그녀에게 물었고, 한소은은 웃으며 대답했다."기자님의 용어를 바로잡아야겠네요. 표절이라는 단어는 과도한 모방 행위라고 할수 있습니다. 표절은 나쁘지만 적어도 재가공의 과정은 있죠. 표절이라는 단어 외에도 그대로 가져오다 라는 행위가 있어요, 그대로 가져와서 자신의 것이라고 한 거죠.”"그렇다면 그건 훔치는 행위가 아닙니까!”기자가 말했다. 한소은은 웃기만 할 뿐, 반응하지 않았다."한소은, 이게 무슨 짓이야?!”고개를 돌리자 노형원이 팔로 그의 얼굴을 반쯤 가린 채 한소은에게 말을 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지고 이를 갈며 그녀를 물어줄 수도 없다는 생각에 화가 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작을 일으키거나 소리를 내서는 안 됐다.그러나 한소은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침착하게 앞에 있는 수많은 매체들을 바라보며 마치 전쟁터의 장군처럼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한소은 씨, 당신이 말한 것처럼 당신은 시원 웨이브에서 근로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습니다. 즉 시원 웨이브 직원들도 모두 확실하지 않다는 건데 무슨 근거로 시원 웨이브의 작품이 모두 당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힐 수 있죠? 증거를 가지고 계시나요?”기자들은 만만하지 않았고, 항상 핵심적인 문제를 찾을 수 있었다.그들은 사실 누구의 편도 아니었으며,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닌 많은 자료들을 발굴해내 굵직한 기사를 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기자의 질문에
한소은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내가 정말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하기를 바라는 건가요?”매우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강시유는 당황했다.한소은은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하지만 지금 상황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고, 자신이 움츠러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강시유는 이를 악물고 빳빳하게 머리를 들며 말했다. "허황된 말은 하지 마시죠, 저는 항상 행실을 바르게 해 왔습니다. 이 업계에서는 제가 재능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저는 확실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회사에서 제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모두가 보았어요, 당신처럼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시유야......"옆에 있던 노형원은 그녀의 팔뚝을 살짝 건드렸고, 다시 고개를 돌려 한소은을 바라보며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오늘 기자회견은 주로 신예 대회 조직 위원회와 저희를 걱정하는 각계각층의 친구들과 소비자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자리이고 싶었지만, 아마 저희가 충분히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았고, 또 한소은 씨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희는......”"증거가 필요한 거죠?”노형원을 말을 끊고 한소은이 내밷은 말은 곧 모든 주의력을 그녀에게로 끌어당겼다.한소은은 침착하게 옆에 놓인 자신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여러분들께서 모두 증거를 논하시니, 이게 가장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증거를 내보이겠습니다.”"한소은 씨, 당신이 말한 증거는 어떤 겁니까?"곧이어 기자가 질문을 해왔다.상황이 매우 흥미진진했고,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모습에 지금 기자들은 어느 쪽이 진짜인지, 어느 쪽이 가짜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어느 쪽이든 모두 연기를 잘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증거는…....”한소은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강시유가 참지 못하고 일어나 말했다."증거는 시원 웨이브의 모든 직원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누가 시원 웨이브의 조향사
"한소은 씨, 정말 증거가 있습니까, 아니면 거짓말을 한 겁니까? 만약 이 일을 실제로 법원에서 다투게 된다면 그 결과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지자, 한소은은 차분하게 현장을 한 번 둘러보았고 그녀의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에 현장은 곧 조용해졌다. 그녀는 붉은 입술이 살짝 열리며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한 번 고소해 보세요!” 한소은은 자리를 뜨는 게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노형원이 작은 통로에서 그녀를 막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는 강시유를 쫓아간 게 아니었나? 가지 않은 건가? 노형원은 어두운 얼굴로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있어 더욱 음침해 보였다.한소은은 발걸음을 멈추며 그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돌아서서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누군가가 뒷길을 가로막았다.어쩐지 그가 떠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몇 마디 귓속말을 하더라니, 알고 보니 이 일을 시킨 것이었구나?이거 정말, 그녀에게 한 방 먹인 셈이군. 앞뒤가 다 막혀있자 한소은은 아예 그를 향해 걸어갔다. "노형원 대표님, 이건 협박인가요 아니면 납치인가요?”노형원은 몸을 일으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그는 겉으로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온몸에는 이미 분노가 솟구쳤고, 구두는 바닥에서 낭랑한 소리를 내며 가슴을 두드리는 듯했다.무의식적으로 재빨리 주변을 훑어보자 이곳은 CCTV도 없었고, 그가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놨으니 밖에 있는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는 장소를 정말 잘 골랐다. “한소은.”노형원은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고, 목소리는 매우 무거웠다.“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내가 뭘 하려는지 노 대표는 모르는 거야?"그녀는 쌀쌀맞게 말했다."이전에 말을 다 끝낸 거 아니야?"어쩌면 그가 참을성 있게 그녀를 설득하려는 마지막 시도였을 지도 모르는 말을 했다. "방금 그런 말을 한 게 무슨 의미지? 꼭 나랑, 회사랑 정면 승부라도 하겠다는 거야?”"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