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안정적으로 정착한 주효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주효영도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프레드 앞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렇게 자신만만하지 않았다.R20은 진짜였고 사람의 마인드를 통제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성공률이 100퍼센트인 건 거짓말이었다.주효영은 R20의 효능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비록 이번에는 성공한 셈이었지만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실하지 않았다.시간은 촉박했지만 중요한 임무인 데다가 혼자서 틈틈이 연구를 했다. 주효영은 홀로 탐색하면서 끊임없이 실험을 반복했다.사실 주효영은 전에 진정기의 실험을 보고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이 약은 그것을 기반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이었다.주효영은 줄곧 인간의 뇌와 생각은 매우 신기하고 복잡한 것이라고 느꼈었다. 하지만 약이라고 왜 그걸 통제할 수 없겠는가.약은 인간을 잠시 마취시킬 수 있고 최면은 깊은 잠과 회상에 빠지게 할 수 있는데 왜 더 나아가서 인간의 생각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겠는가. 만약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인간의 생각은 모두 자기를 위해 사용할 수 있었다.최면과 약물을 결합하는 것이 R20의 궁극적인 비밀이었다.물론 주효영은 이 사실을 프레드에게 말하지 않았다. 항상 한 수 남겨두는 것이 주효영에게 유리했기 때문이었다.이미 이곳에 자리를 잡았으니 김서진와 진정기 등에게 다시 쫓길 염려가 없었고 아무리 쫓아온다고 해도 여기까지 쫓아오진 않을 것이었다.주효영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효영은 다행히 총명했기에 임상언에게서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Y국 왕실임을 알게 되었다.어쩐지 세력이 막강하고 신비롭더라니.주효영은 줄곧 모르고 있었다.그 연락 판에 대해서는 “사장님”께서 찾아낸 것이 맞았지만 주효영은 그 위의 도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말한 건 그저 얼렁뚱땅 넘어가기 위해서였다.어쨌든 이제 한 걸음 내디딘 것이었다. 주효영은 한소은을 찾아서 프레드에게 부탁해 한소은을 없애도록 하려 했다.그리고는 자신이 그 조
잘 지내고 있을 거야.김서진은 아이들에게 매우 세심했다. 김준이 어렸을 때 습진이 난 적이 있었는데 김서진이 한소은보다 먼저 발견한 덕분에 빠르게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김서진은 평소에는 바깥일에만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집안의 사소한 일도 한소은보다 잘했다.때로는 하인이 휴가를 낼 때면 김서진이 소매를 걷고 밥을 짓기도 했었다. 한소은은 김서진과 결혼한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한소은은 남편과 자식 생각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계속 웃다가 문득 자신이 거의 죽기라도 할 사람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회상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마치 인생의 막바지에 다 다른 것처럼 말이다.한소은은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아니야, 아니야!’이렇게 비관적인 생각을 하면 안 됐다.한 사람이 진짜 무너지게 된다면 그건 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 무너진 것이었다.신념이 무너져 버리면 그 누구든 상관없이 톡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것이었다.한소은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고 프레드가 들어왔다. 뒤에 두 사람을 데리고 말이다.“한소은, 너도 잘 알잖아. 이제 때가 됐다는 거.”프레드는 매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때? 네가 죽을 때?”한소은은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너!”프레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프레드는 어두워졌던 표정을 재빨리 바꾸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난 너같이 어린애처럼 굴지 않아. 네가 얼마나 더 억지를 부릴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데려가!”프레드는 뒤에 있던 사람들더러 앞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한소은에게 다가갔다가 도리어 손해를 본 이후로, 프레드는 한소은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 대신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쓰라고 했다.몇 사람이 가까이 오자 한소은이 몸을 일으켰다.“다가오지 마!”너무 갑작스러웠는지, 아니면 한소은의 카리스마가 너무 강했는지 이 한 번의 호통에 그들은 모두 굳어버렸다.“내가 알아서 갈 거야.”한소은이 시큰둥한 표정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사실 한소은도 가슴이 쿵쾅거렸다.한소은은 프레드가 자신을 밖으로 나오게 한 목적이 무엇인지, 어쩌면 실험이 막바지에 이르러 마침내 여왕 폐하에게 기억을 이식할 때가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건가?정말 가망이 하나도 없는 건가? 정말 여기서 죽게 되는 건가?한소은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곳곳에 경비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두 감시 카메라와 각종 총기를 가지고 있었다. 혼자서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한소은은 의무실로 끌려가 아주 자세한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리고는 혼자 남겨진 채 방에 갇혔다.한소은은 의문이 들었고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설마 마지막으로 휴식할 시간을 주는 건가?한소은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방문이 다시 열렸는데 예상외의 사람이 걸어들어왔다....진정기가 주현철을 다시 만났을 때, 주현철의 모습은 이미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살이 많이 빠진 데다가 몸에는 멍이 좀 있었다. 주현철은 안에 있는 사람과 싸워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수염은 덥수룩했고 눈빛도 많이 흐리멍텅해졌다.진정기가 주현철을 불렀을 때, 주현철은 눈을 깜박거리면서 듣지 못한 듯하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현철아.”주현철의 이름을 부르는 진정기의 마음은 복잡했다.주현철은 아내의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진 부인은 임종 때 동생을 잘 보살펴 달라고 했었지만 진정기는 결국 아내의 부탁을 저버렸다.주현철이 이렇게 되기까지 진정기에게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고개를 떨군채 주현철은 그 자리에 앉아서 진정기를 상대하고 싶지 않은듯했다.“나야.”진정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어때? 요즘 괜찮아?”“괜찮냐고요?”주현철은 고개를 숙이고 바보같이 웃었다. 주현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정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괜찮냐고요? 여기에 있는 게 괜찮냐고요? 당신이 들어와 보시든가요, 대체 얼마나 좋은지!”주현철의 갑작스러운
자애로운 현모양처였던 자신의 아내를 생각하면 진정기는 동생이 왜 저런 성격을 가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진정기는 한숨을 내쉬며 정색했다.“네가 이 안에서 지내기가 힘들다는 건 나도 알아. 애초에 네가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백신 기지의 프로젝트를 뺏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전 규칙을 따랐어요, 규칙대로 했을 뿐이라고요!”주현철이 소리를 질렀다.“제가 한 모든 수속은 합법적이었어요! 그 프로젝트는 당신이 나에게 준 거잖아요! 다 잊었어요? 당신이 줬잖아, 드디어 양심이 생겨서 날 도와주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날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어!”“진정기, 양심은 개나 줘버린 놈, 나를 모함하다니, 나를 모함하다니!”주현철은 손을 내밀어 진정기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목을 졸라 진정기를 죽일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철창을 사이에 두고 있는 데다가 거리도 부족해서 손이 닿을 리 없었다. 모두 헛수고일 뿐이었다.그러나 손이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주현철은 계속 발버둥을 쳤다. 주현철이 진정기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내가 널 모함한 게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널 모함한 건 네 딸이야. 주효영이라고!”진정기가 또박또박 말했다.“주효영이 약물로 나를 조종해서 백신 기지의 프로젝트를 너에게 준 거라고! 아니면 왜 그렇게 순조로웠다고 생각해?”“합법적이고 규칙에 따랐다고 했지. 애초에 백신 기지의 프로젝트는 이미 김씨 그룹에서 낙찰했어. 자금, 실력, 세력, 배경, 어느 부분을 놓고 봐도 넌 김씨 그룹과 비교도 안 돼. 왜 이 프로젝트가 다시 회수됐는지, 또 왜 하필 네가 이 프로젝트를 가지게 됐는지 생각 좀 해봐. 정말 합법적이고 규칙에 부합한다고 생각해? 아직도 모르겠어?”진정기의 물음에 주현철은 말문이 막혔다.“나와의 관계 덕분에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아서는 다른 회사나 기업을 배척할 때는 언제고 자기가 위험에 빠지니까 이제 와서 합법적? 규칙대로? 그런 말도 안 되는 법이나 규칙이 어디있다고...”주현철은
주현철은 눈을 깜빡깜빡하며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만약 주효영이 어딘가에 숨는다면 그게 어디냐는 말이야.”진정기가 주현철을 쳐다보면서 다시 물었다.진정기는 문득 부모라면 주효영의 약점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현철은 주효영이 숨으려 한다면 어디에 숨을지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곳의 CCTV를 조사했지만 여전히 주효영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주효영이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어딘 가에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이렇게 생각해 이미 이틀 동안 사람을 보내 주씨 집안을 지키라고 했지만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래서 진정기는 주현철에게 물어 유용한 정보를 얻으려 했다.“효영이가 왜 숨어요?”주현철은 눈을 깜박거리면서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물었다.“효영이를 잡고 있는 거예요? 효영이...”“네 말이 맞아, 주효영은 법을 어겼어. 그래서 잡으려고 하는 거야. 주효영을 잡으면 이 사건도 조사를 끝낼 수 있을 거야. 주효영이 혼자서 저지른 일이니, 너랑 아무런 연관도 없게 돼. 넌 아무것도 모르니까 곧 여기에서 나올 수 있을 거야.”진정기가 진지하게 말했다.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이었다.주현철이 저지른 일이 아니었고 또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따라서 책임도 크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주효영을 잡으면 주현철의 벌을 줄일 수 있었다.“딸을 팔아먹으라는 건가요?”진정기의 말뜻을 알아듣고 주현철의 표정이 복잡해졌다.“팔아먹는 게 아니지. 지금 주효영은 법을 어긴 범죄자야, 영웅이 아니라고. 넌 지금 주효영을 돕고 있는 거야. 이대로라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칠지 몰라!”진정기가 정색하고 말했다.“아니요, 전 몰라요.”주현철은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더니 난간에 기대앉았다.주현철은 그대로 주저앉아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주현철은 진정기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었다.“현철아, 잘 생각해 봐. 주효영은 지금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고 있어. 이대로 내버려두면 정말 돌이킬 수
여기에서도 쓸만한 정보를 얻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막 돌아서려 할 때 주현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정기.”주현철은 형부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렀다.진정기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뒤로 돌아섰다. 주현철은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당신도 딸이 있고 누군가의 아버지잖아요. 당신 딸이 잘못을 저지르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정말 그렇게 차갑게 혈연관계를 무시할 수 있나요?”“그리고 우리 가족이 이 지경까지 오는데 형부라고 아무런 책임도 없는 줄 아세요?”천천히 돌아앉아 진정기를 바라보는 주현철의 눈빛은 희미했다.“당신이 애초 사업과 일에 매진하느라고 너무 바빠서 우리 누나 혼자 집에 있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힘들고 우울해서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이도 우리에게 맡겨서 저희가 봐줬잖아요! 그러니까 효영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해서 비뚤게 자란 거라고요!”“그런데 당신은요? 잘 지내고 있으면서 저를 도와주려 하지도 않고... 다들 저를 비웃는 거 아세요? 제 형부는 가짜 형부라고 말이에요.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별 노릇을 다 하면서 잘 보이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진정기, 당신이 효영이보다 더 냉혈한 인간이에요!”“...”“효영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상관없어요. 저랑 제 아내를 해친 적은 없으니까요. 효영이는 제 딸이에요. 전 말하지 않을 거예요. 이만 가세요.”주현철이 또박또박 말했다.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주현철은 고개를 들어 뿌연 천장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주현철은 바보같이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모르는 건 둘째 치고 안다고 해도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진정기는 믿을 사람이 못 됐다. 진정기가 자신을 구해줄 거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총으로 자신을 쏴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될 정도였다.하지만 주효영은 달랐다. 주효영에게 그렇게 좋은 능력이 있는 이상, 차라리 밖에서 소란을 피우는 게 하는 것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른다.
진정기는 주현철마저 이런 태도인데 주 부인은 더 말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주 부인이 주효영에 대한 애정은 진정기도 보아왔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주효영이 죽다가 살아난 후, 주 부인은 딸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다. 주효영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옳고 그름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모두 지지했다.때문에 주현철의 아내에게 물어보는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미움이 극치에 달할 것이었다.“아빠, 외숙모를 보고 싶지 않으신 거죠? 괜찮아요, 제가 가서 물어볼 수 있어요. 기껏해야 혼날 뿐이에요, 그러니까 괜찮아요.”진가연은 아버지가 자신이 욕을 먹을까 봐 걱정하는 줄 알았다.“아니야.”진정기는 웃으면서 말했다.“넌 이미 나를 위해 많은 일을 해 줬어. 아빠가 고마워.”“몇 마디 말을 전했을 뿐이에요, 많은 일을 한 것도 아니죠.”진가연은 요즘 아빠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저 말을 전하는 것뿐이라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이젠 부녀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예전보다 많아졌기에 함께 할 수 있는 1분 1초를 더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아빠, 혹시... 주효영이 그 실험 조직의 두목을 찾아간 건 아닐까요?”진가연은 이렇게 추측했다.“전부터 그 조직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으니까요.”“아닐 거야.”진정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도대체 어떤 조직인지, 조직의 배경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찾겠어?”주효영은 예전부터 임상언과 협력해서 조직이 정확히 어디인지, 연락하려면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했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조직을 찾으러 갔겠는가?진정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가연도 옆에서 주효영에게 숨을 곳이 어디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주효영은 집도 없는 데다가 공개수배 되었으니 안전한 피난처를 찾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먹고 자야 하는데 그럼 주효영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계속 생각하던 참에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의사도 프레드도 아닌 주효영이었다.주효영을 보았을 때, 한소은은 잠깐 의아해했지만 주효영도 의아해하는 걸 보니 그녀도 모르는듯했다.하지만 주효영은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하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야.”주효영이 웃으며 말했다.한소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왜, 넌 와도 되고 나는 오면 안 되냐?”주효영은 큰소리를 치며 걸어오더니 두 손을 짚고 병상 위에 앉았다.“여기서 아주 잘 지내나 보네?”이어서 한소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시선은 평평한 아랫배에서 멈췄다.“짐을 떼어냈네?”주효영의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한소은이 입을 열었다.“뭐 하려고?”“나? 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하지만 긴장할 필요 없어. 적어도 내가 실험해 주는 건 아니니까.”주효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주효영은 침대 끝에 앉아 다리를 공중에 띄우고 두 발을 흔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보아하니 건강검진을 한 것 같은데... 그럼 마지막 단계야? 축하해!”주효영은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한소은의 불행을 즐기는 듯 했다.“그래, 날 축하해 주는 건 마땅한 일이지. 나는 전 세계의 역사에 남을 아주 위대한 실험을 완성할 거거든.”한소은은 입꼬리가 휘어지게 웃으며 말했다.“아쉽네, 넌 그럴 기회가 없어서.”한소은의 반응은 주효영의 예상과 달랐다. 한소은이 기뻐하는 걸 본 주효영은 굳어진표정으로 한소은을 바라보았다.“안 무서워?”“무섭다고? 뭐가 무서워? 사람은 누구든지 결국 한 번 죽게 돼 있어. 하지만 나는 전 세계의 역사에 남을 위대한 일을 하고 죽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원해도 할 수 없는 일이잖아.”한소은은 오히려 이렇게 죽는 걸 바라고 있다며 말을 이어 나갔다.“하지만 넌 죽을 거야, 그때면 넌 의식도 없고 영혼도 없을 거라고. 몸뚱이는 살아 있어도 넌 이미 네가 아니라는 의미야!”곧 죽는 사람은 한소은이고 영혼을 잃게 되는 사람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