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 조직에서 보스, 그리고 맨 위에 있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서로의 신분과 배경을 알지 못한다. 임상언과 주효영도 마찬가지다.임상언은 지금 이런 태도로 한소은을 대하는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상대방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으로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이렇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좋은 일이 아니다 보니 임상언은 한 발 앞으로 나아가 말리려 했다.“한소은 씨는 당신에게 명령하려는 게 아니에요. 다만, 보스께서 이곳의 모든 건 한소은 씨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러니 한소은 씨가 내려놓으라면 그만 내려놓는 게 좋아요.”“내가 왜 그래야 하죠?”하지만 그 사람은 전혀 임상언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고, 목구멍에서 웃음소리까지 내며 말했다.“내가 가져가려는 것은 나의 실험 결과물이에요. 한소은 씨가 그렇게 대단하시다면 자기가 직접 실험해서 결과를 얻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자기가 왔으니 걱정할 거 없다고 하잖아요.”“물건은 이 실험실 안에 있던 것이니 가지고 나갈 수 없어요.”한소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놀리는 물었다.“왜요, 내가 이 실험이 실패되었다고 말할까 봐 두려운가요?”“그런 방법으로 날 위협하지 못해요.”그 사람은 뒤로 돌아 실험실을 나가려 했다.“난 당신과 여기서 말싸움할 시간이 없어요.”“당신 말대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 물건이 또 다른 실패 사례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건지 궁금하네요.”한소은은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옆에 있던 임상언이 멈칫했다.한소은의 이 한마디는 그 사람을 화나게 했다.그 사람은 갑자기 몸을 돌려 날카롭게 변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 이게 뭔지나 알고 실패 케이스라는 거에요?! 여기 서서 아무 말이나 하고, 몇 마디 한다고 자기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물론이죠!”한소은이 재빨리 말했다.“당신은 최고의 약재와 가장 비싼 향료를 썼죠. 서역 오두의 독성과 용연향
사무실 안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가운데에 한 사람이 서 있지 않았다면, 정말 여기 사람이 없는 줄 알았을 것이다.여자는 한쪽 손을 옆으로 늘어뜨리고 다른 한 손은 가슴에 움켜쥔 채 서 있었다.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 앞에 서 있는 사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가면을 뚫고 나와 그녀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마치 눈빛만으로 그녀를 벽에 박을 수 있을 것 같았다.“보스…….”여자는 입을 열자마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그녀 앞에서 박살 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그녀의 발등에 몇 조각이 튀었다. 다행히 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 조각에 베지 않았다.그녀는 거기에 서서 움직이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았다.그냥 그렇게 유한성이 화를 내도록 내버려두었다.“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고 너무 방자하게 내버려두었나 봐? 이제 내 말도 안 들으려고? 주효영!”마지막에 그녀의 이름을 내뱉을 때 유한성은 그야말로 이를 갈며 이 틈에서 이 세 글자를 짜냈다.주효영은 등을 곧게 펴고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있는 컵 조각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요.”“아니라고!?”또 다른 컵이 그녀의 이마로 날아가자, 순간 피가 그녀의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따뜻한 피가 그녀의 하얀 뺨을 따라 흘러내려 오자 빨강과 하얀색이 기괴한 색 차이를 이루었다. 언뜻 보기엔 요염한 빨간색 장미처럼 보였지만 이윽고 피비린내가 방안을 채웠다.“너는 네가 지금 ‘죽은 사람'인 걸 잊은 거야? 너는 이미 ‘죽었어'! ‘죽은 사람'이 이렇게 대범하게 실험실로 달려가고, 한소은과 임상언의 앞에서 알짱거려? 너는 그들이 너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그러는 거야? 왜? 네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가서 말하지 그래?!”유한성은 CCTV를 통해 이 모든 것을 보았을 때 거의 화가 나서 까무러칠 뻔했다.주효영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이 화가 났을 뿐만 아니라, 그
주효영은 손가락을 움켜쥐었다가 느릿느릿 풀더니 앞으로 두 걸음 걸어가 유한성에게 물건을 내밀었다.주효영의 손바닥 안에는 가만히 누워있는 반투명한 작은 병이 있었다. 유한성은 그 작은 병을 보면서 갑자기 내밀던 손을 멈추었고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았다.주효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손을 내밀고 그를 쳐다보았다.유한성은 허공에 멈칫했던 손을 거두고 두 팔로 팔짱을 꼈다. 그는 그곳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주효영에게 말했다.“열어!”그는 원래 키가 작았다. 지금은 두 팔을 교차하여 감싸 안고 있어 사람이 더욱 야위고 작아 보였다.하필이면 높은 곳에 서서 남을 능멸하는 모습을 보이려 하니 얼마나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지 말할 필요도 없다.주효영은 입술을 씩 치켜 올리고는 다른 말 없이 뚜껑을 비틀었다.“뽁” 하는 아주 가벼운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곧 그윽한 냄새가 방안에 흩어졌고 아주 섬세하고 달콤한 향기가 한 가닥 한 가닥 나부끼며 느릿느릿 공기 속으로 퍼졌다.유한성은 미간을 찌푸린 채 얼른 감싼 손을 풀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가렸다.“누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열라고 했어? 저리 치워.”그의 목소리는 우렁우렁 울렸고 눈빛에서는 약간의 긴장감이 흘렀다.“보스, 이 ‘향수’의 묘미는 반드시 피부에 닿아야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단지 냄새만 퍼졌을 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세요.”주효영은 자기의 말을 확인해 주려는 듯 병 입구에 가까이 가서 깊게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이윽고 그녀는 눈을 감고 마치 향기에 도취한 듯 말했다.“정말 향기롭지 않나요!”유한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여전히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긴장하지 않고 코를 움켜쥐며 물었다.“확실해? 이번에는 성공한 거야?”“보스, 한소은의 말을 그렇게 믿으세요?”주효영은 느릿느릿하게 병뚜껑을 닫았지만, 유한성은 여전히 코를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는 것을 보고 계속 말했다.“나는 정말 이해할
“똑똑똑.”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순간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얼굴이 굳어지며 서로를 보았다.이어서 유한성이 말했다.“넌 저기 뒤로 가있어!”유한성은 뒤의 방향을 가리키며 주효영보고 피하라고 눈짓했다.주효영은 빠른 걸음으로 뒤로 갔고 유한성의 곁을 지나갈 때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잠깐!”유한성이 부르자 주효영은 멈칫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물건은 두고 가!”이렇게 말하면서 유한성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쳤다.주효영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고분고분하게 물건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한번 그를 깊게 쳐다본 후 발걸음을 재촉하여 재빨리 떠났다.앞에 있는 이 남자는 괴팍하고 성격이 괴상하여 종잡을 수 없다.게다가 그의 몸매는 자신이 잡으려 하면 정말 쉬운 일이다. 그러나 주효영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임상언도 그러지 않았다.감히 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배후 세력과 조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유한성은 혼자가 아니었고 최종 보스도 아니다. 그의 뒤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그들은 감히 그 위험을 감당할 수 없었다.주효영에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뒤흔드는 절세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곧 그녀의 그림자가 남자의 뒤로 사라졌다.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사람이 이미 떠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유한성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들어와!”말을 마치고 유한성은 느릿하게 두 손으로 책상을 받치고 미끄러져 책상 위에 앉았다.자연스럽게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한가로이 흔들며 바로 손에 쥐어 주효영이 내려놓은 그 물건을 손에 쥐고 놀았다.임상언이 들어왔을 때 어리둥절했다.이 방은 마치 방금 큰 전쟁을 겪은 것 같았다. 바닥에는 온통 유리 조각들이다. 발을 디딜 때 밟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그리고 땅에는 약간의 핏자국이 어렴풋이 섞여 있는데 마치 누군가 다친 것 같았다.여기서 누군가가 다치거나 피를 흘리는 것은 결코 희한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이 발생한 장소가 좀 맞지 않았다. 유한성
임상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한성이 작은 병에 집중해서 쳐다보는 것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건…….”“응?”임상언이 머뭇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유한성은 마침내 시선을 그에게 돌리고 고개를 돌려 약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큼큼…….”임상언은 작게 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서 말했다.“한소은이 방금 그게 실패작이라고 했었거든요.”“나도 알아.”병이 유한성의 손가락 사이를 돌면서 액체가 흔들렸다.반투명인 병이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눈앞의 이 남자와 같이 매우 불안정하게 보였다.“그럼…….”임상언은 잠시 멈추고 계속 말하지 않았다.유한성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 소리는 마치 철로 벽을 긁는 것 같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다.“내가 왜 이 실패작을 고집하냐고 묻고 싶은 거야?”임상언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에게 화답한 셈이다.“왜냐하면, 나는 한소은을 전혀 믿지 않기 때문이야.”유한성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롭게 변하며 임상언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마치 모든 것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임상언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이 남자는 정말 너무 간교하다. 마치 암울한 산속에 사는 늙은 여우 같았다. 자신이 그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일하다 보니 그가 조금도 다른 사람의 생각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또한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찮은 것이었다.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고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다.이런 사람이야말로 끔찍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약점조차 찾을 수 없어 반격할 기회조차 없다.유한성은 그 것이 실패작이라는 한소은의 말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만약 한소은 씨를 믿지 못한다면 왜 굳이 그 여자를 데려오라고 고집한 거죠? 한소은이 무슨 짓을 할까 겁나지 않나요?”임상언은 잠시 말을 멈추고 건조한 입술을 살짝 핥았다.이어서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한소은 그 여자가 이 실험을 망쳐서 우리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게 하는 건 두렵지 않나요?”“두려울 게 뭐가 있지
“아니요.”임상언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의 눈빛을 피하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그의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유한성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임상언, 난 전혀 신경 안 써. 나 같은 사람은 죽는 게 두려울 줄 알아? 너는 나를 죽이지 않을 거야. 네 아들이 아직 내 손에 있기 때문이지. 단 하루라도 그가 네 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너는 감히 나를 죽이지 않을 거야.”몸쪽으로 늘어뜨린 주먹이 점점 더 꽉 쥐어지며 임상언은 애써 자제를 했다.하지만 아들 얘기가 나오자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마지막으로 아들과 영상 통화를 했을 때는 일주일 전.임상언은 진작 몰래 사람을 보내 계속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혀 단서가 없었다. 심지어는 아이가 이미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닌지, 진작에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닌지 나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자신이 보는 모든 것들은 모두 AI를 통해서, 혹은 미리 녹화해둔 녹화본으로 그를 속이며 그를 통제하기 위한 짓인지 의심할 때도 있었다.그러나 아들에게 매번 특정한 행동을 하게 하거나, 또는 일부러 과거의 사적인 일, 보잘것없는 사소한 일들을 언급할 때면 아들은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다 맞췄다. 임상언은 또 참지 못하고 희망을 품었다.일찍이 아들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만약 아들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아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임상언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의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나는 보스에게 목숨을 받칠 수 있어요. 그러니 이제 그만 내 아들을 풀어줄 수 없나요?”임상언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유한성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우리 거래를 합시다.”“거래?”유한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흥미롭게 그를 바라보았다.임상언은 고개를 끄덕였다.“실험실에 있는 약으로 나를 통제하세요. 당신이 원철수와 다른 사람들을 통제했던 것처럼 모든 약은 다 받아 들일게요. 아들이 나에게 돌아올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요.”“보스가 내 아들을 잡아
“내가 너에게 약을 쓰지 않은 이유는 내가 이 약의 부작용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야. 약으로 통제된 사람은 그 사람의 효력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 너에게 약을 쓰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왜냐하면 넌 아직 나에게 이용 가치가 있다는 뜻이지. 그렇지 않으면…….”유한성은 말을 잠시 멈추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임상언은 어리둥절했다. 뇌는 아직 그의 말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다.“내가 약을 쓰면 자의식이 없어져서 보스의 일을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인가요?”자의식을 잃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임상언은 유한성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말 속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한번 더 물어보려고 할 때 남자는 오히려 그의 말을 끊었다.“그만, 나를 떠보려고 하지 마. 나의 인내심은 한계가 있어.”“아들이 곁으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진작에 알려 줬었잖아. 순순히 내 말을 듣고 협조하는 거야! 실험만 성공하고 계획이 달성되면 네 아들은 곧 네 곁으로 돌아갈 거야.”유한성은 한 손을 받치고 다시 책상 위에 섰다. 천천히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임상언을 바라보았다.“임상언, 너는 이 계획이 성공하기를 기도해야 할 거야. 왜냐하면…….”“계획이 이루어져야 네 아들이 사니까. 계획이 실패한다면, 크크크.”유한성은 침울한 얼굴로 임상언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아들은 이 위대한 계획의 첫 번째 부장품이 될 거야!”부장품 세 글자가 임상언의 가슴을 두들겨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어금니를 꽉 물고 그는 억지로 말했다.“알았어요.”“한소은과 어떤 말을 했든, 너희들이 무엇을 계획하든 간에, 그 여자를 잘 지켜봐. 내가 마지막으로 너에게 경고하는데, 내 눈 밑에서 작은 행동을 하려고 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잘 알겠지!”책상 위에 서 있어도 키가 얼마 안 되는 남자를 보면서 임상언은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이 악마라고 생각했다.그는 한기가 들더니 갑자기 의기소침해졌다.임상언은 고개를 숙이
뜨거운 태양이 하늘에 떠 있었지만, 진가연의 마음은 오히려 아주 무거웠다. 진가연은 초조하게 방안을 왔다갔다하고 때때로 손을 비비며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했다.비록 진가연은 한소은에 대해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오가 다 되어 가는데도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아서 정말 자신이 없었다.그리고 한소은은 지금까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진가연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 더욱이 아버지가 정말 예정대로 깨어날 수 있는지도 몰랐다.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진가연은 긴장해서 하마터면 뛰어오를 뻔하여 조건반사적으로 물었다.“누구세요?!”“아가씨.”하인의 목소리였다. 진가연은 한숨을 돌리고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잠든’ 아버지를 쳐다보고 돌아서서 방문을 열고 하인을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아가씨, 아래층 전화가 놓자마자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받으러…… 가실래요?”하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진가연은 매일 밤 10시부터 아침 8시까지 집안의 전화선을 모두 끊어버리고 자신의 핸드폰 번호만 남겼다. 아주 가까운 사람만이 진가연의 핸드폰으로 통화를 걸 수 있었고 다른 외부 전화는 일절 들어오지 않았다.진가연은 정말 대처하느라 지쳤다. 요 며칠 동안의 대응은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했다. 하여 진가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말했다.“우선 상관하지 마!”그냥 울리게 놔두었다. 받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소식을 알아내고 상황을 타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아버지는 이렇게 며칠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줄곧 병을 구실로 삼았다. 하지만 병이 나더라도 예전에는 전화도 받고 공무도 처리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확실히 너무 이상했다.물론 진가연도 알고 있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진가연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 공무를 처리할 수도 없었다.다행히도 일부 간단한 일은 아버지의 심복 비서가 직접 처리했지만 그도 몇 번 찾아왔었다. 아무래도 심복 비서도 점차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