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침묵하던 임상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나는 김서진에게 당신을 꼭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절대로 소은 씨를 여기서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임상언은 확신이 가득 찬 말투로 그와 김서진의 약속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비록 한소은은 그 약속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다 해도 말이다.한소은은 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사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전에 X 부서에 있던 휴게실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이었다. 침실과 화장실을 둘러보니 CCTV가 설치되지 않은 것 같았다. 다 확인하고 나서야 한소은은 잠시 숨을 돌렸다.만약 이 두 곳에도 CCTV가 있다면 프라이버시가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나온 지 오래되어 조금 힘에 부쳤던 한소은은 의자를 끌어당겨 그대로 앉았다.임상언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답답한 모습을 하고 있자 한소은이 입을 열었다.“걱정 그만 해요. 그 사람을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사실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그 사람은 날 없애려 할 거예요. 그러니 그 사람 비위를 맞춰주며 조심스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내가 필요할 때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을 거예요. 내가 필요 없을 때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 처럼요.”한소은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이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참, 방금 당신 아들에 대해 말했는데, 정말 아무런 단서도 없는 거예요?”무언가 생각이 난 듯한 한소은이 입을 열어 물었다.“당신이 여기 있는 시간도 짧지 않잖아요. 혹시…….”한소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상언은 갑자기 그녀의 말을 거칠게 끊었다.“아니요! 다 해봤는데 소용이 없어요. 지금은 그냥 조직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어요. 일이 성사되면 남이가 무사히 내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어요.”한소은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소은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않았다.
임상언이 떠난 후, 한소은은 온 집안을 자세히 살펴보고서야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 알았다.이 방에서는 도청 시스템이 통풍용 배관에 설치돼 있다. 방 전체, 심지어 건물 전체를 도청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도청되고 있을 것이다.도청뿐만 아니라 온갖 감시 카메라가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감옥에서 사는 것보다 더 끔찍했다.그러나 이런 것에 대해 한소은은 일찍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소은은 조금의 대처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고 가방에서 작은 카드 하나, 가느다란 실, 그리고 작은 라이터 같은 물건을 꺼내어 조립한 후 핸드폰에 꽂아 김서진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이 물건들은 김서진이 준 것이다. 김씨 가문 내부에서 연구한 하이테크 제품이다. 아직 테스트 단계일 뿐 대량으로 시장에 투입된 것은 아니다. 이를 장착하면 각종 앱 추적과 도청 장치를 단절할 수 있다. 핸드폰에 도청 프로그램이 설치돼도 쉽게 파괴할 수 있다.처음에 한소은은 반신반의했으나 김서진에게 한번 시도해 본 결과 일반 도청 장치로는 그녀의 핸드폰을 도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믿고 가져왔다.비록 핸드폰은 도청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한소은은 여기서 하는 말이 들릴 수도 있다 생각되어 전화는 하지 않고 메시지만 보냈다.김서진은 빠르게 답장을 주었다.-네, 꼭 조심해야 해요!문자는 짧지만, 김서진의 걱정이 가득 스며져 있었다.한소은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하고 긴장을 풀고는 누워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앞으로 한소은이 해야 할 일은 많았고 또 매우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한소은은 반드시 자기 몸과 배 속의 아이를 잘 지켜야 했다.자신이 잠이 잘 오는 체질인 것에 감사하며, 한소은은 금세 깊은 잠에 빠졌고, 설정한 알람에 잠이 깼을 때는 이미 두 시간 반이나 잤다.시간을 보니 임상언이 올 시간이었다. 한소은은
그러나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 한소은은 이 건물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첫째, 계단은 모두 특수 재질로 만들었고, 안에는 방음 패드를 많이 붙였을 뿐만 아니라, 보통의 건물보다 많은 통풍구를 설치했다.이곳의 채광은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걸어 들어가면 약간 어둡고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건물 전체의 방향을 보면 채광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직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 인위적으로 일부러 해빛을 가린 것이다.복도에는 불이 켜져 있지만 생각보다 밝지는 않았다. 약간 어둑어둑한 곳으로 들어가니,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았다. 갑자기 뒤에서 문이 “탁”하고 닫히니 정말 이 건물 속에 고립된 느낌이었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놀라 한소은은 흠칫 몸을 돌려 임상언을 쳐다보았다.그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했다. 아마도 이런 소리에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임상언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나중에 습관 될 거예요.”한소은은 조롱하듯 웃으며 말하지 않았다.아니, 그녀는 결코 이 소리에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더럽고 사악한 곳이라면, 그녀는 익숙해지지도, 또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복도의 가장 안쪽에 이르자 임상언은 우뚝 멈춰 서서 장갑을 벗고 검지로 눌러 지문을 인식했다. 그 다음 고개를 돌려 한쪽으로 향하고 눈을 크게 뜨고 홍채 인식을 진행했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끝내서야 앞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한소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자기를 들여보내 주지는 않을 거라 진작 예상했었다.문을 들어서자, 누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온 사람이 임상언 인 것을 보고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확인했다는 눈짓을 하며 그들에게 방호복 두 벌을 건넸다.“입으세요.”한소은에게 한 세트를 건네주고 임상언은 돌아서서 방호복을 덮어씌웠다.그의 동작은 능숙했다. 분명히 처음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그가 방호복을 다 입고 잘 조절한 후에, 몸을 돌렸을 때 한소은은 벌
임상언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도 잘 모른다고 표현했다.사실 한소은이 없었다면 임상언이 직접 이런 일에 관여하지는 않았다.여러 번 와봤지만 대부분 감독하러 왔을 뿐, 이 안의 자세한 절차나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아마도 그가 이런 것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유한성이 그를 많이 제한하지 않았을 것이다.게다가 그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안심할 수 있고 한소은 옆에 같은 나라 사람이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임상언의 손에는 연구 자금이 쥐어져 있었다. 그들은 임상언의 자금과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의 홍채와 지문을 입력하여 그가 이곳을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그러나 이 물건이 무엇이고 이것들은 무엇을 하는 것들이냐고 물어본다면, 임상언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자, 한소은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서 유리 덮개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식물, 정확히는 독을 가진 식물을 자세히 관찰했다.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조심하세요!”순간 임상언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소리를 질렀다.“이건 독이 있어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요!”임상언은 비록 이것이 무슨 독초인지는 모르지만, 독이 있는 물건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지금 하는 실험은 모두 이 물건 속에서 추출한 것이다.임상언에게 끌려 몇 걸음 뒤로 물러난 한소은은 안색이 침착했다.그녀의 눈빛은 앞에 있는 식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연히 이것이 독이라는 거 알아요. 게다가 엄청난 독이죠.”이건 뇌공등이지만 완전히 뇌공등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변이된 뇌공등이다.그들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식물에 무슨 짓을 해서 변이를 일으켰는지, 왜 이렇게 크고 이상하게 자랐는지 한소은은 무척이나 궁금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아마 독성이 더 강해졌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한소은은 왜 그들이 연구해 낸 온갖 기괴한 바이러스들이 그렇게 공략하기 어려운 것인지, 왜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바이러스들이
한소은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자료들을 보기 시작했다. 한장 한장 뒤지면서 전에 자기의 작업실에서 했던 실험들과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는걸 깨달았다.애초에 약 성분이 완전히 발현되게 하면 향료의 향은 자연히 가려지게 되고, 향료의 정상적인 향기를 끌어올리려면 약 성분이 억눌려 최상의 상태가 되지 못한다.이 둘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소은은 왜 굳이 이렇게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줄곧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세상의 불완전한 것은 일상이며 결점을 포용할 수 있는 불완전함이 진정한 완벽이라 생각했다.특히 전에 연구한 것은 모두 병을 치료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면 향료의 향이 좀 덜 하더라도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환자들은 모두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약 냄새에 집착하여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할 필요가 없다.한소은은 연구의 주된 방향이 약이 아니라 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이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고 자신도 모르게 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중독되게 만들고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생각해 보면 그들이 독을 먹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중요한 인물이었다.상대방을 독살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장악하여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것이다.이런 중요한 인물은 신변의 보호 조치가 모두 매우 치밀하기 마련인데, 직접 독을 투약하는 방식이 쉽지는 않으니, 바로 이런 향료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닐까? 다만, 한소은은 그들의 목표물이 누구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모든 자료를 훑어본 후에, 한소은은 고개를 저었다.옆에 서 있던 임상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떻습니까?”“이 자료는 완전한 자료가 아니에요.”한소은은 물건을 임상언의 손에 쥐여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내가 원하는 것은 모든 자료에요! 어떤 조금의 숨김도 없는 그런 자료 말이에요.”“이게 전부예요.”임상언이 어리둥절해 하며 대답했다.한소은이
불쾌함이 가득 섞인 상대방의 목소리에 임상언은 멍해졌다.이 사람이 어디서 그렇게 괴팍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지 몰랐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상대방의 짜증은 느낄 수 있었다. 임상언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이 자료들이 다 인가요?”“방금 다 줬잖아요.”상대방은 여전히 짜증이 섞인 말투로 되물었다.임상언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한소은 씨가 방금 이 자료들은 데이터가 완벽하지 않다고 했어요. 혹시 빠진 게 있는지 찾아봐 주시겠어요?”임상언은 다시 말하며 이번에는 보스를 내세워 그 사람을 압박했다.“이 실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알고 있겠죠? 지금 한소은 씨가 와서 전면적으로 실험을 책임지게 되었어요. 그러니 반드시 모든 자료와 데이터를 다 정리해서 한소은 씨에게 줘야 해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임상언을 한번 쳐다보더니 곧바로 시선을 한소은에게로 향했다.“데이터는 그게 다예요. 한소은씨 께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한소은 씨 탓이겠죠.”이 말은 분명 한소은에게 한 말이다.이것은 한소은이 이 자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자료의 미비를 탓하고 있다는 뜻이다.“이봐, 당신!”임상언이 체면이 깎여 화를 내었다.‘감히 누구 앞에서 이렇게 고고한 척 하는거지?’그러나 한소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가볍게 손을 들었다.“모든 데이터가 이게 다라면 이 실험이 왜 계속 실패했는지 알 것 같네요. 가장 중요한 기록은 하나도 하지 않았으니 계속 실패하는 거죠. 지금까지 어떻게 실험하고 있었는지 정말 알 수가 없네요.”한소은은 조금도 그들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그들의 데이터가 잘 정리되지 않았다고 깎아내렸다. 그러자 실험하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한소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이 사람들은 모두 착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다들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었다. 실험에서 문제가 생기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모두 반복되는 실패에서 개선하고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시간은 급하고 임무가 막중하니 그렇게 빨리 성
다만, 이 조직에서 보스, 그리고 맨 위에 있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서로의 신분과 배경을 알지 못한다. 임상언과 주효영도 마찬가지다.임상언은 지금 이런 태도로 한소은을 대하는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상대방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으로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이렇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좋은 일이 아니다 보니 임상언은 한 발 앞으로 나아가 말리려 했다.“한소은 씨는 당신에게 명령하려는 게 아니에요. 다만, 보스께서 이곳의 모든 건 한소은 씨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러니 한소은 씨가 내려놓으라면 그만 내려놓는 게 좋아요.”“내가 왜 그래야 하죠?”하지만 그 사람은 전혀 임상언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고, 목구멍에서 웃음소리까지 내며 말했다.“내가 가져가려는 것은 나의 실험 결과물이에요. 한소은 씨가 그렇게 대단하시다면 자기가 직접 실험해서 결과를 얻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자기가 왔으니 걱정할 거 없다고 하잖아요.”“물건은 이 실험실 안에 있던 것이니 가지고 나갈 수 없어요.”한소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놀리는 물었다.“왜요, 내가 이 실험이 실패되었다고 말할까 봐 두려운가요?”“그런 방법으로 날 위협하지 못해요.”그 사람은 뒤로 돌아 실험실을 나가려 했다.“난 당신과 여기서 말싸움할 시간이 없어요.”“당신 말대로 시간을 낭비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 물건이 또 다른 실패 사례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건지 궁금하네요.”한소은은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옆에 있던 임상언이 멈칫했다.한소은의 이 한마디는 그 사람을 화나게 했다.그 사람은 갑자기 몸을 돌려 날카롭게 변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 이게 뭔지나 알고 실패 케이스라는 거에요?! 여기 서서 아무 말이나 하고, 몇 마디 한다고 자기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물론이죠!”한소은이 재빨리 말했다.“당신은 최고의 약재와 가장 비싼 향료를 썼죠. 서역 오두의 독성과 용연향
사무실 안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가운데에 한 사람이 서 있지 않았다면, 정말 여기 사람이 없는 줄 알았을 것이다.여자는 한쪽 손을 옆으로 늘어뜨리고 다른 한 손은 가슴에 움켜쥔 채 서 있었다.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 앞에 서 있는 사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가면을 뚫고 나와 그녀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마치 눈빛만으로 그녀를 벽에 박을 수 있을 것 같았다.“보스…….”여자는 입을 열자마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그녀 앞에서 박살 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그녀의 발등에 몇 조각이 튀었다. 다행히 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 조각에 베지 않았다.그녀는 거기에 서서 움직이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았다.그냥 그렇게 유한성이 화를 내도록 내버려두었다.“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고 너무 방자하게 내버려두었나 봐? 이제 내 말도 안 들으려고? 주효영!”마지막에 그녀의 이름을 내뱉을 때 유한성은 그야말로 이를 갈며 이 틈에서 이 세 글자를 짜냈다.주효영은 등을 곧게 펴고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있는 컵 조각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요.”“아니라고!?”또 다른 컵이 그녀의 이마로 날아가자, 순간 피가 그녀의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따뜻한 피가 그녀의 하얀 뺨을 따라 흘러내려 오자 빨강과 하얀색이 기괴한 색 차이를 이루었다. 언뜻 보기엔 요염한 빨간색 장미처럼 보였지만 이윽고 피비린내가 방안을 채웠다.“너는 네가 지금 ‘죽은 사람'인 걸 잊은 거야? 너는 이미 ‘죽었어'! ‘죽은 사람'이 이렇게 대범하게 실험실로 달려가고, 한소은과 임상언의 앞에서 알짱거려? 너는 그들이 너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그러는 거야? 왜? 네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가서 말하지 그래?!”유한성은 CCTV를 통해 이 모든 것을 보았을 때 거의 화가 나서 까무러칠 뻔했다.주효영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이 화가 났을 뿐만 아니라, 그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