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가연의 손동작에 따라 주현철도 한 번 뒤를 돌아보더니 느릿느릿 뒤돌아서 입술을 어루만졌다.“왜, 외삼촌이 만나면 안 되는 거야?”“안 될 건 없어요. 다만, 외삼촌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오셨는데, 도대체 우리 아빠를 만나러 오신 거예요? 아니면 협박하려고 오신 거예요? 내가 외삼촌을 오해하진 않겠지만, 우리 아빠가 어떻게 생각 하실지 모르겠네요.”진가연의 모습은 대수롭지 않아 보였고 너무 침착하고 태연하여 오히려 주현철이 헷갈리게 했다.주현철은 잠시 생각하고는 다시 위층 쪽을 바라보았다.그러다 앞으로 좀 가까이 다가와서 목소리를 낮추고, 진가연에게 말했다.“이 계집애야, 너 외삼촌한테 솔직하게 말해봐. 너희 아버지, 정말 집에 있는 거니?”“그럼요. 우리 아빠가 며칠 휴가를 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일하러 안 갔으니 당연히 집에 있죠.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 있겠어요?”진가연이 살짝 비웃는 소리로 자연스럽게 말했다.주현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힘껏 기침한 다음, 뒤돌아서 그 사람들에게 말했다.“당신들은 밖에서 기다리세요.”주현철의 명령을 받자, 그 사람들은 잇달아 물러났고, 집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사람이 가는 것을 보고 진가연의 마음도 약간 안도했다.다만,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한껏 태연한 얼굴로 주현철에게 말했다.“외삼촌, 정말 아빠를 만나길 고집하는 거예요? 그전에 내가 한마디만 말씀드릴게요. 요즘 아빠가 몸이 편찮으셔서 기분이 정말 안 좋으세요. 그리고 지금도 기분이 안 좋으셔서 이런 상황에서는 안 뵙는 것이 외삼촌에게는 좋을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위층의 사람이 들을까 봐 겁이 나는 듯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주현철은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눈썹을 찌푸리기도 하고 망설이기도 했다.눈을 빠르게 몇 번 돌리더니 마치 결심을 굳힌 듯했다.“너희 아버지가 화를 내시더라도 나는 오늘 꼭 그를 만나고 말겠어. 아무리 그래도 내 친 매형인데, 아프다고
“외삼촌, 왜 안 들어가세요? 아빠는 안에서 쉬고 계세요.”진가연은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내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녀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떠서, 주현철은 더 함정이라 생각되었다.그러나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서면 궁금증을 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찌질하고 철저해 보일 것이다.주현철은 진가연을 복잡한 눈빛으로 한번 바라보고 이를 악물며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다.“매형, 아프다 들어서 병문안 왔어요. 좀 괜찮으신…….”주현철은 웃으며 말했다.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가연이 뒤따라 들어왔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다.“매, 매형?”주현철은 조금 놀랐다.놀랍게도 진정기가 정말 안에 있었다.침대에 누워있는 진정기는 단순히 아픈 게 아닌 것 같았다.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매형?”주현철이 다시 한번 불렀지만, 침대 위의 사람은 그를 완전히 무시했고 심지어 눈도 뜨지 않았다.그런 진정기의 모습에 주현철은 고개를 돌려 진가연을 바라보았다.그녀가 문을 닫고 문짝을 막고 서있는 것을 보고 더욱 일이 이상하다고 느껴졌다.“가연아, 너희 아버지 이게…….”“아빠가 아프시다고 했잖아요. 외삼촌이 안 믿으신 거죠. 이제 직접 봤으니, 내가 외삼촌을 속이지 않았다는 걸 아시겠죠?”진가연은 이제 오히려 진정이 되었다.사실 진가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진정기가 이런 상태인 것을 숨기고 싶었다.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어떻게 자연스럽게 주현철을 거절하면서 빨리 그를 내쫓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그러다 아예 그가 직접 보게 하면 오히려 그가 마음을 접을 것 같았다.그래도 남이 아닌 외삼촌이 보게 되는 것이니 더 이상 진정기의 상태를 누구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된다.“무슨 병에 걸리신 거야?”주현철은 마음속의 당황함을 누그러뜨리고 앞으로 두 걸음 걷더니, 고개를 내밀고 진정기를 한 번 쳐다보았다.그가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에야 조금 숨을 돌렸다.그런데 이렇게 가까운
주현철의 의문에 진가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그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진가연이 한마디 덧붙였다.“우리 아빠가 독에 중독된 것에 대해서는 확신해요. 더군다나 외삼촌은 아빠가 중독된 것을 모르셨던 거예요?”진가연이 떠보듯 묻자, 주현철은 오히려 입을 벌려 떠들어댔다.“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내가 네 아버지에게 독을 먹인 것도 아니고!!”주현철은 이 말을 하면서 매우 화가 나 보였지만 허둥지둥 진가연의 눈빛을 피하지는 않았다.진가연은 주효영의 사람 됨됨이와 일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았다.당시 주효영의 나이가 많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 장기적으로 만성적인 독을 먹일 수 있었다.그러나 외삼촌과 외숙모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번에 진정기의 일은 아마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요즘 진가연은 왜 자기의 아빠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지, 왜 주효영이 악독하고 믿음직스럽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막지 못해서 아빠까지 그녀의 손에 놀아나게 했는지 줄곧 자신을 탓했다.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주효영도 죽었으니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지금은 오직 한소은이 하루라도 빨리 해독제를 연구해 내 아빠를 빨리 치료하길 바랄 뿐이다.여기까지 생각한 진가연은 그제야 주현철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외삼촌, 화내지 마세요.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요. 요즘 외삼촌과 아빠가 비교적 가깝게 지냈다고 생각해서 그랬어요. 함께 지낸 시간이 많으니 어쩌면 아빠가 어떻게 중독되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를 거로 생각했어요.”“내가 알았더라면 너한테 물어봤을까? 게다가…….”주현철은 자신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 소란을 피웠다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걸 직감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마른기침을 두 번 하며 말을 이어갔다.“됐어,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네 아버지가 계속 이렇게 누워있는 것도 일이니까, 서둘러 병원에 데리고 가자고!”“내가 연락할게!”주현철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 했다.
주현철은 진정기가 지금도 말을 잘 들을지, 계속 그가 기댈 수 있는 산이 될지 떠보려그런데 뜻밖에도 지금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이렇다.진가연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핸드폰을 잡고 있던 주현철의 손은 천천히 내려갔고 그는 주저했다.“그럼…….”“외삼촌, 내가 이 일을 지금까지 숨기며 감히 말하지 못한 건 그게 걱정되어서예요. 지금 효영 언니가 갑자기 죽었잖아요. 나도 이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겼는지, 지금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고 있는지 잘 몰라요.”그녀는 말하면서 한 손으로 주현철의 손등을 누르며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외삼촌.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요. 외삼촌이 나를 도와 이 일을 숨겨줘야 해요.”진가연이 갑자기 자기의 손을 누르며 이런 말을 하자 주현철은 조금 당황했다. 사실은 약간 혼란스러웠다.“하지만, 언제까지 속여야 해? 조만간 밝혀질 거잖아!”주현철은 조금 망설였지만, 적어도 말투는 방금처럼 딱딱하지는 않았다.“속일 수 있을 때까지 속이려고요.”그의 말을 따라 진가연은 말했다.“지금 아빠에게 해독제를 구해 드릴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요. 아빠가 깨어나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그리고 아빠에게 이 시간 동안 외삼촌이 나를 도와주었고, 우리 가족이 이 가장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꼭 말할 거예요.”이 말을 들으니, 주현철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이전의 일은 그렇다 쳐도 이번에 자신이 진가연을 도와준다면, 진정기도 견뎌냈다면, 이건 생명을 구한 큰 은혜와 같을 것이다.그렇게 되면 진정기는 이런 은혜를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다.원래 주효영이 갑작스럽게 죽어 그는 조금은 자신이 없었다.앞으로 이번처럼 진정기에게서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 심지어는 다음에 진정기가 다시 이전처럼 자신에게 냉담하게 대할지에 대해 그는 모두 확신하지 못했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이번에 도움을 준다면, 진정기는 절대 차가운 얼굴로 자기를 마주할 수 없을 거다.게다가 만약 진정기가 이 은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번 일로 그의 손에 진
진가연은 한숨을 쉬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마도 이런 게 철 들었다는 거겠죠.”“철이 들었다고?”주현철은 잠시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맞아요. 예전에는 아빠가 항상 내 옆에 계셨고, 외삼촌과 외숙모의 사랑이 있어 아무 걱정 없이 지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빠가 이런 모습으로 계시고 집에 너무 많은 일이 생겼어요. 예전처럼 지낼 수 없어요. 빨리 철 들어야죠.”진가연은 주현철을 바라보며 눈빛이 간절해졌다.“외삼촌, 효영 언니가 갑자기 그렇게 돼서 외삼촌과 외숙모 모두 매우 슬픈 거 알아요. 하지만 외삼촌이 무너져서는 안 돼요. 아직 회사와 사업이 있고, 또 많은 일이 외삼촌을 기다리고 있잖아요.”“외숙모도 외삼촌의 보살핌이 필요하니 우리 둘을 위해 강해져야 해요!”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며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주현철은 오히려 그녀의 말에 약간 감명받아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맞다. 우리는 무너져선 안 돼. 모두 굳세어져야 해! 가연아, 네가 잘하고 있어. 네 아버지의 일은 확실히 지금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거 같구나. 걱정하지 마. 외삼촌이 반드시 너를 도와 이 비밀을 잘 지킬게!”“외삼촌, 감사합니다.”진가연은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 조용히 누워있는 진정기를 힐끗 쳐다보았다.“나중에 아빠가 아시게 되면 분명 외삼촌이 오늘 내린 결정을 감사해할 거예요!”이 말을 듣자, 주현철은 더욱 마음이 움직였다.주현철과 그가 데려온 사람들을 보낸 후, 진가연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방금까지 의연했던 마음속의 그 힘은 갑자기 사라져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사실 진가연은 지금까지 이런 일을 처리한 적이 없다.얼굴 한번 안 붉히고 거짓말을 하고, 허망한 말을 지어내는 것은 음식을 조절하는 것보다 백대 더 힘들고 어려웠다.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적응하고 배우도록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주현철에게 그렇게 많이 말했지만, 그중 한마디는 거짓말이 아니다.진가연은 반드시 배우고 자
“이틀은 안 돼요. 너무 길어요! 더 기다릴 수 없단말이에요!”임상언은 한소은의 말을 거절했다.“내일 당장 오면 안 되나요?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게요!”“안 돼요!”한소은은 더 단호했다. 그녀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임상언의 말을 거절했다.“임상언 씨,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지난 시간의 친분과 남이의 체면을 봐서에요. 더 이상 재촉하지 말아요.”한소은의 꾸지람을 듣고도 임상언은 화를 내지 않고 초조한 말투로 말했다.“한소은 씨, 내가 재촉하는 게 아니라 정말 시간이 촉박해서 그래요. 시간을 주기로 다들 약속했는데 이렇게 끝없이 미룰 수는 없잖아요. 내일…….”“내일 오전에 당신을 데리러 갈 거야!”전화기 너머에서 느닷없이 허스키하고 기괴하며 날카롭고 비뚤어진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한소은은 어리둥절했다.거의 한순간에 등줄기에 한기가 솟아올랐고, 핸드폰이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당신은 누구세요?!”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물었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똑바로 펴고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흐흐흐흐…….”듣기 거북하고 매우 교활한 웃음소리는 듣는 이가 소름을 돋게 했고 온몸이 불편하게 만들었다.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계속 웃고 있었다.한소은이 멈추라고 말하려고 할 때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웃음이 너무 갑작스럽게 멈춰서 더 불편해졌다.“내가 누군지는 당신이 여기로 오면 알 수 있을 거야.”남자는 껄껄 웃으며 장난을 쳤지만, 그 목소리는 오히려 간교함 속에 다소 매서운 감정이 배어 있었다.“한소은 씨! 내가 충고하건대 좋은 말로 할 때 여기로 와! 우리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어. 지금까지 당신이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너나 김씨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게 아니라 우리가 너를 아직 필요하니 목숨을 남겨둔 거뿐이야.”“하지만 계속 이렇게 눈치 없이 거절한다면, 당신과 당신 가족, 당심이 가장 가까이하고 가장 아끼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곧 알게 될 거야!”마지막 이 말은 상대방이 이를 악물고 말하고 있다는 걸 한
김서진이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한소은의 목소리를 들었다.비록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두 듣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분노하고 있다는 거 들렸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자, 그녀가 핸드폰을 쥐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얼굴에는 아직 노여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왜 그래요?”김서진은 고개를 돌려 작업대의 물건들을 한 번 보았다.모두 아직 진행 중이었고, 경보 소리도, 특별한 상황도 없었다.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한소은에게 다가갔다.김서진은 먼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체온은 정상이었고, 그녀가 감정 기복이 심해 심호흡을 하고 있는 걸 보았다.한소은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지만, 한소은은 핸드폰을 꼭 잡았다.“괜찮아요.”“누구에게서 걸려 온 전화예요?”김서진은 이 상황을 보자마자 바로 이 전화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누가 걸려 온 전화인지는 듣지 못했다.“임상언이 건 전화예요.”그를 한 번 본 한소은은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천천히 앉았다.그녀는 쿠션을 잡아당겨 허리에 받친 후 좀 더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아니, 그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에요.”“배후의 사람이 나타났다고요?”김서진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배후의 사람은 줄곧 뒤에 숨어 있다가 자발적으로 나타났다.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그 사람이 뭐라고 했어요?”잠시 생각한 후에 김서진은 다시 물었다.한소은은 입술을 오므리고 보기 흉한 얼굴로 대답했다.“그가 나를 협박했어요.”“협박?”눈썹을 높이 쳐들고 김서진은 계속 물었다.“협박이라뇨? 그들과 손을 잡기로 약속했잖아요!”“이틀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허락하지 않았어요.”한소은은 한숨을 쉬며 한마디 덧붙였다.“내일 아침에 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아마 반드시 가야겠죠.”“시간이 문제라는 거죠?”김서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너무 화낼 필요 없어요. 그들이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그
“그런 말 하지 마요!”한소은은 손을 들어 김서진의 입술을 가리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당신이 목숨을 바치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그들은 돈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내가 아이들과 어떻게 살라고요?”한소은이 조금 애교스럽고 진지한 모습을 보이자, 김서진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그는 한소은의 손을 끌어내리고 키스를 한 후 에야 말을 이어갔다.“농담하는 걸 보니 그래도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나 보네요.”“별로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지도 않아요. 몇 개월째 두서조차 없어요. 이번에는 정말 복잡한 것 같아요. 계속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것 같아요.”한소은은 입술을 내밀며 약간 주눅이 들었다.그전에는 항상 자신만만했지만, 지금은 조금 맥이 빠졌다.“왜요?”김서진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마치 털을 세운 고양이를 달래는 것 같았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을 가졌다.김서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한소은은 머리를 치우쳐 곰곰이 생각한 후 에야 말했다.“사실 최근 몇 개월간의 일을 잘 생각해 보면 모두 인과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김서진도 그녀의 모습을 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어떤 인과관계요?”“사실 이 실험은 가장 먼저 실험기지에서 시작했어요. 내 생각에 이 교수님도 그들에게 이용당했던 거 같아요. 애초에 실험은 모두 허울이었어요. 그들은 실험기지, 인원, 그리고 초보적인 구상을 빌려서 그들이 하고 싶은 실험을 하려고 했던 거예요. 다만 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에요.”“음.”김서진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분석에 귀를 기울이며 끼어들지 않았다.한소은은 계속해서 말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아시아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어요. 보기에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들이 개발한 바이러스와 인과관계가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서한 씨 일도 그래요. 서한 씨의 일이 그들과 정확히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직감으로는 그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