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원철수도 당연히 마음이 편안해지기를 발했다.이렇게 많은 날 동안 그는 줄곧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감옥에 있었을 때의 밤낮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돌아온 후에도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오랫동안 편안히 잠들지 못했다.“네, 할아버지 뜻대로 할게요!”원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어르신은 일어나서 맥을 짚고 잠시 중얼거리다가 몸을 돌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래층에 와서 손을 씻고 소독액을 좀 뿌린 후에야 뒷마당으로 돌아갔다.날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뒷마당은 환한 불빛으로 넓은 약초밭을 비추고 있어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였다.어르신은 따뜻한 꽃집에 오자마자 그의 보배로운 제자가 허리를 굽혀 그 약초들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았다. 배 때문에 쪼그려 앉기가 불편하여 그녀는 단지 허리를 약간 굽히고 손을 뻗어 필요한 약초를 따고 있었다.“부족한 거 있어?”어르신은 입을 열어 물었다. 그는 한소은을 놀라게 하는 것을 전혀 두렵지 않았다.한소은은 토끼처럼 예리해서 자신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벌써 발자국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역시나 한소은은 머리도 돌리지 않았다.“아마 거의 비슷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그렇게 쉽게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그건 꼭 그렇지는 않아! 뭐가 부족하면 말해. 이 늙은이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을 수 없는 약초가 별로 없어!”자신의 제자 앞에서 어떻게 체면을 구길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가 있는 곳은 백초원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바깥의 일반 약초 재배보다 품종이 훨씬 풍부했다. 만약 그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보배일 것이다.몇 그루를 따고 나서 줄곧 일어서자 한소은은 비로소 어르신을 바라보았다.“향료!”“향…….”어르신은 방금까지도 의욕이 넘쳤지만 순식간에 숨죽였다.“향료를 왜 나한테 말을 하는 것이야. 너는 내가 그런 것을 키우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을 잘 알면서. 그리고 그것을 왜 원하는 건데. 옛 사
“그럼…… 천천히 익숙하세요!”한소은이 웃었다.깊은 밤.방안은 조용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마치 깊이 잠든 듯 고른 숨소리를 냈다.갑자기 이불 한구석을 젖히자 남자는 일어나 앉았으나 서두르지 않고 뒤의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등을 돌리고 깊이 잠들어 그가 일어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을 보고 천천히 두 발을 내려 양손에 힘을 주고 가볍게 일어나더니 이어 방문을 열고 가볍게 걸어나갔다.그러나 그가 나가는 순간 침대 위의 여자는 두 눈을 뜨고 이미 닫힌 방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은 맑았지만 눈물이 고였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침대 옆에 있는 휠체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뒤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은 사라지고 가슴은 계속 가라앉았다.‘그는 역시 자신을 속이고 있었어!’‘분명히 그의 두 다리는 이미 걸을 수 있는데 왜 휠체어에 앉아 거동이 불편한 척을 하는 것일까?’숨을 깊이 들이쉬며 격한 마음을 가라앉힌 오이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를 손에 쥔 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나갔다.거실에 들어서자 방안이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 다시 입구 방향을 바라보니 남성용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분명히 사람은 이미 나갔다.‘이 한밤중에 그는 혼자 몰래 일어나서 그녀 몰래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오이연은 생각을 하고 신발을 갈아 신고 따라서 나갔다.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단지에서 나올 때 마침 자신의 차가 모퉁이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놀랐다.서한은 다리에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스스로 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이연은 전혀 몰랐다. 그녀는 또 서한의 몸이 큰 상처를 입고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한밤중에 서한은 운전을 하고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한소은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소은은 전화를 받았을 때 방금 어르신 댁에서 긁어온 진기한 풀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온몸이 매우 피
그녀는 멈추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 부드러운 소파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이연아, 왜 그래?”사실 한소은은 마음속으로 예감이 있었다. 그들한테서 떠난 후 한소은은 오이연이 반드시 스스로 그녀를 찾을 것이라고 느꼈다.오이연은 머리가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비록 서한을 매우 사랑하지만 오늘 대질한 후에 그녀는 분명히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전화에서 오이연의 목소리는 매우 다급하고 숨소리도 매우 가빴으며 또 긴장했다.[소은 언니, 서한이가…… 외출했어.]“외출? 그게 무슨 뜻이야?”한소은은 무의식중에 김서진을 힐끗 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우유를 데우고 있었고 마치 감지한 것처럼 그녀 쪽으로 쳐다보았다.[그는 내가 잠든 틈을 타서 일어났고 그리고 혼자 몰래 나갔어. 지금 운전하고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소은 언니 나…… 나 좀 무서워!]오이연의 목소리는 떨렸고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일, 서한이 그녀를 숨긴 것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이 두려운 것이었다.한소은은 눈썹을 찡그리며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 “혼자 운전을 하고 외출했다고? 잠깐만, 그는 다리를 다쳐서 휠체어를 타야 하지 않아?”이 얘기를 꺼내자 오이연도 민망해했다.[그의 다리는 괜찮아. 나도 이제 알았어. 도대체 나한테 얼마나 많은 일을 숨겼는지,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어. 소은 언니, 미안해…… 언니를 의심했었는데, 난…….]“됐어. 이런 말은 하지 말자. 지금 너무 당황하지 마. 내가 곧 다른 사람에게 그의 행방을 조사하게 할 테니, 너는 먼저 집에 돌아가서 안심하고 나의 소식을 기다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너는 아직 임신 중이어서 자신의 몸을 주의해야 해. 알았지?”한소은이 엄숙하게 말하자 반대쪽에서 오이연이 망설였지만 여전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알았어, 언니의 말을 들을게. 나는 집에 가서 소식을 기다릴게. 하지만…….]잠시 멈칮하다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소은
“나???”한소은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해졌다.“그한테 임신 중이니 자신의 몸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너는? 너도 자신이 같은 임산부라는 것을 잊었어?”김서진이 부드럽게 말하면서 한 손을 한소은의 불룩한 아랫배에 가볍게 얹었다.한소은이 이렇게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팠다. 김서진은 그녀를 위해 최대한 많이 나눌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한소은은 아연실색하여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려 하였으나 김서진의 관심 어린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너의 말을 들을게!”김서진은 그제야 안심하고 일어나 전화를 걸어 서한의 행방을 추적하도록 사람을 보냈다.이와 동시에 서한은 이미 운전을 하고 떳떳하게 대문으로 들어가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갔다.차에서 내린 서한은 시동이 꺼지지 않은 다른 검은색 지프를 향해 걸어갔고 이어서 차에 올라탔다. 차에는 이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시동을 걸고 떠났다.김서진은 한소은에게 좀 자라고 권했다. 결국 아무도 서한이 언제 집에 돌아갈지, 아니면 집에 돌아갈지 안 갈지를 모르기 때문이다.그의 행방을 찾으러 보낸 사람도 아직 회신이 없으니 계속 이렇게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한소은은 위층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누워만 있었을 뿐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이 너무 많아 뇌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해서 사람은 매우 피곤했다.자신도 모르게 약간 눈을 가늘게 뜨고 졸다가 다시 깨어났을 때 김서진이 아직 방에 돌아오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다.다시 시간을 보니 벌써 새벽 3시가 다 되어 갔다.시간은 이미 이렇게 늦었다.한소은은 일어나서 옷 한 벌을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서재의 등불은 아직 켜져 있었고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은 서재에 있는 것 같았다.살금살금 걸어갔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손으로 살짝 문을 열자 김서진이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 온몸은 뒤로 젖혀지고 눈을 감은 채 잠이 든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한 손은 책상에
김서진은 한소은을 한 번 보았다.“백신 연구 개발 기지.”“백…….”하지만 그곳이라면 말이 통했다. 어쨌든 그곳은 경비가 삼엄해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서한의 차가 순조롭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안에 있는 사람은 그를 알고 있거나 혹은 그가 자유롭게 그곳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줬다는 것이다.백신 연구 개발 기지가 어디인가. 그 프로젝트는 주현철이 김씨 그룹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고 진정기가 남에게 찔리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두 번 반복해서 진행한 프로젝트였다.이렇게 연달아 서한, 진정기, 주현철, 주효영까지??심지어 이전 실험 기지의 미확인 조직들도 서로 연결될 수 있었다.“그래서 서한도 중독됐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통제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생각에 잠긴 듯 분석하면서 한소은은 이전의 그 엉망으로 뒤엉킨 일이 점차 정리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느꼈다.안개가 점차 걷히자 그녀는 그들이 진실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김서진의 애매모호한 대답은 한소은을 궁금하게 했다.“무슨 뜻이야?”한소은을 한 번 깊이 보고 김서진은 웃으며 돌아서서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담요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밤이 깊으니 감기에 걸리지 말고.”몸에 따뜻한 기운이 밀려와 그녀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기면서도 자신의 질문을 잊지 않았다. “너는 아직 말하지 않았어. 도대체 무슨 뜻이야. 수수께끼를 내지 말고!”한소은을 꼭 껴안고 가볍게 그녀의 볼가에 붙이자 김서진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나는 단지 대략적인 추측이 있을 뿐이야. 어쩌면 서한은…… 다른 사람에게 통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가 기꺼이 원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나 이것은 단지 추측일 뿐, 아직 확신하지가 않아.”“응???”김서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한소은의 호기심을 성공적으로 끌었다.한소은은 몸을 옆으로 돌려 김서진을 쳐다보면서 눈
“네 말이 맞아!”김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미행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역시나 다른 차가 드나들었다.이미 늦은 밤이지만 진도를 맞추기 위해 백신 연구 개발 기지가 계속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늦어도 드나드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사람을 철수해!”한소은이 말했다.“지금 그곳을 지키는 것은 이미 의미가 없어.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기지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니 모든 것이 헛수고일 것이야.”김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왜?”김서진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한소은이 물었다.“사실 꼭 못 들어가는 것도 아니야.”김서진은 눈썹을 치켜세웠다“?”한소은은 곧 뜻을 알아차렸다.“네 말은…… 진 부장님?”“하지만 그는 아직 혼수상태이고 외부인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어.”잠시 멈추자 한소은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다.“지금 가연이가 있어서 잠시 외부인을 막을 수 있지만…… 만약 주씨 집안의 사람이 간다면 가연이가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네 말이 맞아,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다 한 걸음 더 빨리 가야 해.”말하는 사이에 김서진은 이미 전화를 걸어 이 모든 것을 배치하기 시작했다.김서진의 다리에서 일어서자 한소은은 한쪽으로 걸어가 그의 분주함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때 한소은의 주머니에서도 진동이 뚜렷이 느껴졌다.잠을 잘 때 핸드폰은 항상 무음으로 설정하였다. 한소은은 핸드폰을 꺼내 한 번 보았는데 오이연에게서 온 카톡이었다.[찾았어?]한소은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오이연은 그녀가 쉬는 것을 방해할까 봐 전화를 하지 않고 메시지만 보낸 것을 알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찾았는데 또 놓쳤다는 것을 한소은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고개를 들어 김서진을 한 번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바빴다. 한소은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서재를 나서서 낮은 목소리로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찾았는데 지금 또 놓쳤어. 너는 너무 걱정하지 마. 그는 괜찮을
“이연아, 일단 내 말 들어!”한소은은 오이연의 감정이 심하게 기복 되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나는 네가 지금 서한 씨를 걱정하고 있다는 거 잘 알아. 우리도 그래! 하지만 지금 아무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이렇게 된 건지 몰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기 전에는 함부로 움직이지 마.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서한 씨를 믿어야 하잖아. 그렇지?”한소은은 오이연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이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알았어!”“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너와 네 배 속의 아이야. 절대로 감정 기복이 심해서는 안 돼. 알았지?”몇 마디 더 당부하고 한소은은 전화를 끊을 준비를 했다.그녀가 끊으려고 할 때, 오이연은 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한소은을 막아 나섰다.“잠깐만! 요즘 언니가 많이 바쁜 거 같아서 내가 언니 대신 메일을 처리했어. 메일이 좀 많아. 내가 간단한 것만 먼저 처리했지만, 암호가 걸린 메일이 몇 개 더 남았어. 언니가 시간 날 때 틈틈이 확인해.”“알았어!”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이연에게 말했다.“수고했어. 고마워!”한소은은 그제야 전화를 끊었다.그러나 한소은은 이메일을 볼 틈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서재를 들여다보았다. 김서진도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컴퓨터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고 손가락은 빠르게 키보드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한소은은 그윽하게 한숨을 쉬고 메일함을 눌러서 막 살펴보려고 할 때 전화가 또 울리기 시작했다.핸드폰에 찍힌 이름을 보고 한소은은 멈칫하다 전화를 받았다.“쉬는 거 방해한 거 아니죠?”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매우 맑았고 약간의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이 시간에 한소은에게 전화가 온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일이 있을 것이다.“결과가 나왔나요?”한소은은 쓸데없는 말도 농담도 하지 않고, 직접 그에게 물었다.“쯧, 당신 자는 걸 방해해서 욕먹을 줄 알았는데 성격이 확실히 많
윤설웅은 말끝을 흐리며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그 식물들은 모두 독성이 있는 식물이잖아요. 데이터는 못 알아보겠지만, 대충 실험을 한 실험 데이터라는 건 알겠어요. 당신 혹시 독초로 향수를 연구하는 거예요?”한소은은 어이가 없었다.윤설웅이 그럴듯하게 한참 동안 분석하더니 결국 이런 결론을 얻어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만약 윤설웅이 지금 한소은의 눈앞에 있다면 한소은은 분명 그의 얼굴에 대고 욕을 했을 것이다.“아니에요. 어떤 데이터인지는 묻지 말아요. 많이 알아서 좋을 거 없어요. 그 데이터들이나 내게 보내줘요.”한소은이 윤설웅에게 말했다.“당연히 보내줘야죠!”윤설웅은 흔쾌히 그렇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뭔가 떠올랐는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아니지, 얼마 전에 당신 메일로 보냈었는지 받지 못했나요?”“그게…….”한소은은 미안한 듯 대답했다.“요즘 많이 바빴어요.”윤설웅은 그녀를 나무란 게 아니다. 그저 궁금함에 물어봤던 거다.“하긴, 당신이 바쁜 거 같았어요. 요즘 당신 집에 전화를 여러 번 했었는데 가사 도우미가 집에 없다고 말했었거든요. 김서진 씨도 회사에 없고. 얼마 전에는 김서진 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니까요! 혹시…….”“서진 씨 괜찮아요.”그가 머뭇거리는 걸 느낀 한소은이 그가 묻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알아차리고 대답했다.“그냥 소문일 뿐이에요. 일단, 이번 일은 고마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시 할게요.”한소은은 한시라도 빨리 연구 데이터에 숨겨진 비밀을 알고 싶어 메일함을 열었다.그녀가 전화를 끊으려 하는 걸 눈치챈 윤설웅이 급히 말했다.“잠깐! 괜히 참견하는 게 아니라 그 데이터 안에 있던 약초들은 모두 독성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요. 전에 그 약초들을 접한 적이 있었는데 독성이 매우 강했어요. 현지인들도 피해를 보았을 정도예요. 그러니 꼭 조심하세요!”윤설웅의 말에 한참 침묵하던 한소은이 작게 대답했다.“고마워요!”“고맙긴요! 우리 사이에…….”그가 말을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